북한 3·1운동 사적지 남북 공동 학술조사를 위한 학술포럼 ■ 일 시 2019년 2월 13일(수) 14:00~18:00 ■ 장 소 서울 프레지던트호텔 아이비홀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주최┃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 발표논문 <제1주제> 평안도 지역 조사성과 7 발표 : 김건실 _ 독립기념관 연구원 <제2주제> 함경도 지역 조사성과 31 발표 : 김상기 _ 충남대 교수 <제3주제> 황해도 지역 조사성과 55 발표 : 이용철 _ 충북대 연구원 <제4주제> 경기·강원 북한 편입지역 조사성과 69 발표 : 강진갑 _ 경기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 <제5주제>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활용 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89 발표 : 박걸순 _ 충북대 교수 <부록>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01 차 례
제1주제 평안도 지역 조사성과 김 건 실 _ 독립기념관 연구원
평안도 지역 조사성과❙ 7 평안도 지역 조사성과 김 건 실 | 독립기념관 연구원 Ⅰ. 머리말 1919년 3월 1일 일제의 폭압적 식민통치에 항거하는 독립 선언과 만세시위운동이 동시다발 적으로 일어났다. 서울과 함께 3월 1일 만세운동이 시작된 지역은 평남 평양, 진남포, 평북 의주, 선천, 안주, 경기 고양, 강원 원산, 황해 해주 등 5개도역 8개 도시로 중부와 북부 지역 에서 집중적으로 일어났다.1) 이를 기점으로 국내는 물론 중국·러시아·미국·일본 등 한민 족이 숨쉬는 지역이면 독립과 자유의 열망, 일제식민통치를 향한 분노의 함성이 민중의 혈류 를 타고 강토의 끝마을까지 도미노처럼 퍼져나갔다. 수많은 대한국인들이 들고 일어나 일제 의 식민지배체제를 위협했던 만큼 3·1운동의 여파는 컸다. 이를 계기로 일제는 기존의 무단 통치를 소위 ‘문화통치’로 변경하고 헌병경찰제를 폐지했으며 언론과 집회를 제한적이나마 허 용했다. 3·1운동의 한계를 교훈삼아 전국에서 조직적인 청년단체가 출현했으며, 농민운동· 노동운동이 사회운동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한국인의 독립과 항거의지를 세계에 떨치는 계기가 되어 일제 외교정책에 큰 부담을 주었다. 참가자나 규모, 전개과정 등을 볼 때 3·1운동은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의 여파로 인한 국내외 상황 전환, 민족적 역량의 자신감 등이 독립운동가들을 고무시켰으며, 그 결과 대한민 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이하. 독립기념관)에서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기념을 위해 2016년부터 북한지역 사적지 기초조사사업을 기획·진행해왔다. 이 사업의 첫단계로 진 행된 것이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기초조사이며, 평안도 지역이 첫 조사지역으로 선정되었 1) 「獨立運動에 관한 건(제3보)」(高 第5439號, 1919-03-02), 朝鮮總督府 警務總監部 高等警察課, 「大正8年乃至同10 年 朝鮮騷擾事件關係書類 共7冊 其7」.
8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다. 평안도 지역 3·1운동 사적지 기초조사는 3·1운동 분야는 물론, 북한지역을 대상으로 실시 된 첫 번째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인 셈이다. 이 글은 당시의 기초조사 결과보고서 내용을 토대로 평안도 지역 3·1운동의 간략한 전개와 특징, 관련 사적지 등에 대해 검토하고자 한다. Ⅱ. 평안도 지역 3·1운동의 전개와 특징 1919년 3월~4월 동안 전국에서 일어난 3·1운동 시위 회수를 주간단위의 표로 살펴보면 다 음과 같다.2) 지역별 1기:3·1-14 2기:3·15-28 3기:3.29-4.11 4기:4.12-30 계 중부 서울 11 52 0 1 64 경기 13 97 107 1 218 충남 11 15 53 1 80 충북 0 7 40 4 51 강원 7 6 52 7 72 북부 평남 71 3 10 1 85 평북 45 12 58 0 115 황해 28 22 68 6 124 함남 41 30 2 0 73 함북 12 15 14 2 43 남부 경남 10 44 54 10 118 경북 9 31 18 3 61 전남 10 12 16 3 41 전북 8 14 12 1 35 합 계 276 360 504 40 1,180 <표 1> 지역별 시위운동 전개양상 <표 1>을 기준으로 3월~4월 8주동안 전국에서 총 1,180회의 만세시위가 발생했다. 4기로 구 분해서 살펴보면, 1기(3·1~14) 276건, 2기(3·15~28) 360건, 3기(3.29~4.11) 504건, 4기(4.12~30) 2) 「평안남도 3·1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결과보고서」(이하 「평남 조사보고서」)의 통계표 참조. 이는 이정은의 논문(이정은, 「3·1운동의 지방시위에 관한 연구」, 서울대 국사학과 박사논문, 2006, 108쪽)에 제시된 ‘<표 3-2>으로 한국독립운동사2(국사편찬위원회, 1968 각 도의 운동일람 257~401쪽)를 토대로 하고 있다. 「忠南 地方 3·1運動 硏究」(김진호, 충남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2)에서는 충남의 만세시위 회수를 339회라고 했으 며, 평안북도 기초 조사결과에서도 3월~4월의 만세시위 회수를 149회로 조사된 것으로 볼 때 표의 수치에 관한 논의는 좀 더 필요하다. 이글에서는 만세시위의 지역적, 전국적 추세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하고 자 하나, 평안남도의 경우 이 수치를 기준으로 삼았다(현재 대략적으로 자료에서 파악한 3월~4월 평안남도의 만세시위는 최소 100~120건을 상회하는 것으로 보인다).
평안도 지역 조사성과❙ 9 40건으로 2기와 3기에 해당하는 3월 15일부터 4월 11일에 만세시위 회수가 가장 많다. 그중 3기인 3월 29일~4월 11일의 보름 동안 전국에서 발생한 만세시위는 504건으로 4월초가 3·1운 동의 절정기로 보인다. 지역별로 보면, 경기도가 218건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황해도 124 건, 경상남도 118건, 평안북도 115건, 평안남도 85건순이며, 전북과 전남은 각각 35건, 41건으 로 만세시위가 가장 적게 일어났다. 만세시위가 가장 먼저 발생한 곳은 서울과 평안도 지역이며, 가장 늦게 시작된 지역은 전라 도와 경상도이다. 평안도나 황해도는 서울과 밀접하게 연계된 가운데 기독교와 천도교와 같 은 종교조직을 기반으로 조직적이고 공세적인 시위를 펼쳐나가다가 4월 중순 무렵 시위가 종 료되었다. 종교세력과 함께 지역의 문중, 유력자 등등의 지도 하에 시위를 전개해나갔던 중남 부 지역은 4월 말까지 시위가 지속되었다. 다만 같은 평안도 내에서도 평안남도가 1기의 기간 에 격렬하게 만세시위가 일어났다가 급속히 퇴조현상을 보이는 반면, 평안북도는 3기에 해당 하는 3월말~4월초에 다시 시위가 반등하며 격렬하게 일어났다가 4월 중순에 소강상태에 들어 가는 등 다소간의 차이가 있다. 3·1운동은 일제강점기 한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으로 불리는 만큼 참여인원도 많으나 사료에 따른 인원 편차가 심해 정확한 참가자 수를 가늠하기 힘들다. 박은식의 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 따르면 경기도가 665,900명으로 가장 많고, 다음은 평안도로 511,770명, 전라도는 294,800명 순으 로 전국에서 총 2,046,488명이 시위에 참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일제 보고자료인 「朝鮮 騷擾事件報告」의 통계에 따르면 만세시위에 참가한 전국인원을 463,086명으로 집계하고 있으 며, 지역별로는 경기도 129,528명, 경상남도 70,370명, 평안북도 59,650명, 충청남도 40,000명, 평 안남도 29,267명 등의 순으로 집계하고 있어 박은식 자료의 통계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3) 3·1운동이 최대의 항일 민족혁명인만큼 관련 통계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정리가 시급하다. 1) 평안남도4) 평남지역은 근대이전까지 오랜 정치적 고립으로 인해 근대 종교와 근대교육에 대한 열의가 대단했으며, 당시 종교와 교육을 바탕으로 인적 조직이 광대하고 뿌리깊게 형성되어 있는 곳 이었다. 평양을 중심으로한 서북지역은 출신인물인 안창호의 교육운동과 기독교적 개혁운동 3) 朝鮮總督府, 「朝鮮騷擾事件報告」, 1919. 2016년 당시 기초조사의 참고 문헌에서도 참가 인원 통계는 대부분의 자료에서 불명이나 다수로 처리된 건수가 많아 정확한 집계 산정이 불가능했다. 4) 「평남 조사보고서」에 서술된 ‘평안도 각지의 시위상황’을 요약 정리했다.
10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으로 민족주의 진영으로 자리잡은 곳이다. 신민회운동의 중심지역이기도 한 평남에서 서울과 함께 가장 먼저 3·1운동이 시작되고 만세운동을 주도해 나간 것은 역사적 당위라고 할 수 있다. 평남의 3·1운동은 서울과 같은 시각인 3월 1일 오후 2시에 시작되었다. 서울에서의 독 립선언에는 길선주(장로교·안주), 김창준(감리교·강서), 임예환(천도교·평양), 홍기조(천도 교·진남포), 나인협(천도교·성천), 나용환(천도교·성천)등 6명의 평남인이 민족대표로 참여 했는데, 이는 평남의 3·1운동이 서울과의 긴밀한 공조 속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의 미한다. 평남에서 일어난 3·1운동 시위 회수를 각 군별로 살펴보면 <표 2>과 같다.5) 월일 계 평양 진남포 강동 강서 개천 대동 덕천 맹산 성천 순천 안주 양덕 영원 용강 중화 평원 계 85 5 5 5 12 0 11 3 3 7 8 5 3 2 6 6 4 3월 1 3 1 1 1 2 6 1 1 1 1 1 1 3 9 1 1 2 2 1 2 4 5 1 1 1 2 5 8 1 1 1 1 1 2 1 6 21 1 3 9 1 1 1 1 2 2 7 9 2 1 1 1 1 1 1 1 8 3 1 1 1 9 4 1 1 1 1 10 2 1 1 11 1 1 12~15 0 16 1 1 17~22 0 23 1 1 24~27 0 28 1 1 29 1 1 30 1 1 31 2 1 1 4월 1 2 1 1 2 1 1 3 1 1 4 0 5 1 1 6~7 0 8 1 1 9~15 0 16 1 1 <표 2> 평안남도 각 군별 일자별 만세운동 현황 5)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2, 1983, 257~401쪽 정리. <표1>의 시위회수를 일자별, 지역별로 세분한 것 이다. 본문의 전개과정 서술부분과는 일자, 회수 등이 맞지 않다.
평안도 지역 조사성과❙ 11 3월 1일에 만세시위가 전개된 지역은 평양과 진남포, 안주 3곳이다. 평양의 만세시위는 기 독교(장로교·감리교)와 천도교에서 각각 추진되었다. 2월 12일 이승훈은 평양 기독교서원에 서 평양시위를 위한 준비모임을 했으며, 평양 기홀병원에 입원해 기독교 지도자들과 만세시 위를 준비했다. 3월 1일, 장로교에서는 장대현교회(목사:길선주) 앞 마당인 숭덕학교 교정에 서, 감리교에서는 남산현교회(목사:신홍식), 천도교에서는 시내 설암리 천도교구당에서 각각 광무황제 봉도식 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내로 진출해 합류했다. 천도교에서는 서울 천 도교 총부에서 전달받은 독립선언서 중 7,500장을 기독교 측에 보내고 나머지는 각 지역의 만 세시위를 독려하기 위해 지역 교구로 밀송했다. 3개 종교단체의 주도로 시작된 만세 시위는 평양 대로를 행진하고 평양경찰서 앞에서 혈성 가와 독립만세를 외치며 대치했다. 일경은 군중 해산을 위해 소방대를 동원했고, 성난 군중의 투석으로 경찰서 유리창이 깨졌다. 이를 빌미로한 일경의 발포와 피체 과정에 더욱 분격한 군중들과의 난투극이 벌어지자 일경은 쇠갈고리로 시위대를 구타해 무수한 부상자가 발생했 으며 수백 명이 피체되었다. 평남의 3·1운동은 평화롭게 진행될 수 없었다. 학생들의 연합시 위 등 매일 만세시위가 발생하자 대부분의 기독학교 교원 등 피체자의 수가 400여 명에 이르 렀다. 강력한 검속으로 평양의 만세운동은 3월 초순 이후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가 3월말~4 월 초가 잠시 재개되었다. 진남포에서는 신흥동 감리교회에서 이승훈의 지도로 미리 만세시위를 준비해 3월 1일 교회 광장에서부터 만세행진을 전개했다. 일경의 발포가 이어졌고, 다음날에는 기독교·천도교가 연합해 전날 발포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전개하는 등 9일까지 거의 매일 만세시위가 이 어졌다. 안주군에서도 3월 1일 읍내 서문에서 기독교 측의 주도로 독립선포식이 거행되었고, 3일에는 천도교·기독교 연합으로 율산공원에서 피체자 석방을 요구하며 대규모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때도 일경의 발포로 많은 사상자와 피체자가 발생했다. 안주군수 김희선은 일제의 유혈진압에 통분해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도 했다. 대동군 대보면에서는 3월 2일 평양 숭실학교 학생과 취명학교 교사·학생들의 주도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3일과 4일에도 시위대가 면사무소로 몰려가 독립만세를 고창했으며, 고평면 장 조익준은 수천의 시위대를 이끌고 평양 시내까지 진격해 만세행진을 전개했다. 대동군의 여러 면에서 만세시위가 잇달았는데, 장수원에서는 시위대가 경찰관서를 습격하기도 했다.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강서군 반석면 사천시위(모락장만세운 동)로 이어진 만세시위로 평남 3·1운동 가운데 가장 투쟁적이고 특징적인 만세시위로 평가
12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된다. 반석교회 장로 조진탁의 주도로 일어난 원장~사천간 만세시위는 일군경과 군중들의 유 혈투쟁으로 현장 사망자만 해도 19명, 부상자도 40여명에 달했다. 시위대는 검속된 동지들을 구하기 위해 헌병대의 제지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무차별 발포로 사망자가 속출하자 격분한 시위대가 총격자들을 색출해 처단했다. 일제의 본격적인 시위 가담자 색출 과정에서 78명이 체포되었고 이들은 조사과정에서 끔찍한 악형을 당했다. 이 만세시위로 조진탁, 송현근, 차정 신, 최능현 등 4명이 사형선고를 받았고 5명이 무기징역, 11명이 징역 15년의 중형을 받았 다.6) 조진탁은 사형이 언도되어 평양감옥에서 순국했으며, 현장 순국자 이외에도 최승탁, 이 혜준 등 12명이 고문으로 옥사하거나 고문여독으로 출옥 후 바로 순국했다.7) 이외에도 강서 군에서는 3월 3일 기독교·천도교 연합 만세시위에서 일군경의 발포로 사망자 9명과 부상자 4명이 발생했으며, 4일 증산면 구읍에서는 시위대가 헌병주재소를 공격해 헌병과 보조원 4명 을 처단하는 등 격렬한 유혈투쟁이 곳곳에서 전개되었다. 용강군 광량만에서는 3월 6일 천여 명의 군중들이 주재소를 공격했으며, 밤에는 재차 주재 소에 집결해 횃불투쟁을 전개했다. 온정리에서도 주야로 주재소를 공격하고 불을 지르는 등 공격적인 만세운동이 전개되었고 각 지역마다 일경의 발포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화군 상 원 신읍에서는 2일 천도교인들이 주축이 된 시위대가 경찰관 주재소의 철거를 요구하며 총기 와 탄약을 탈취하고 중화경찰서장을 포박하며 대치하고, 오후에는 기독교·천도교, 주민 수 천 명이 구금된 사람들을 탈환하기 위한 격렬한 시위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에 평양 경무 부와 중화경찰서에서는 매일 각 동네를 수색하며 주동인물을 검거하고 종교인들의 가택을 수 색했다. 강동군 삼등면의 경우 독립선언서 입수가 늦어져 11일에야 독립선언식을 개최했는 데, 이들 역시 헌병대와 면사무소 등을 공격하고 헌병보조원을 잡아다 시위대 앞에 세우는 등 맹렬한 양상을 띠었다. 천도교의 교세가 강한 성천군은 성천 교구장 이돈하의 주도로 3월 4일 만세시위가 시작되 었다. 시위대가 헌병대로 진격하자 헌병의 무차별 발포가 이어졌고, 이로 인해 28명이 사망하 고 70여 명이 부상당했다. 격분한 군중들도 도끼와 괭이로 헌병대를 공격해 헌병주재소 소장 도 중상을 입었다. 이날 유혈시위로 피체된 인원은 500여 명이다. 7일에도 시위대는 덕흥리 6) 「임원걸 등 14인 판결문」(1919.12.6., 고등법원), 「조진탁 판결문」(1922.9.28., 고등법원), 「차정신 공훈록」, 「송 현근 공훈록」, 「최능현 공훈록」. 차정신, 송현근, 최능현은 미리 검속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으며 궐석재판 으로 사형 언도를 받았다. 7) 공훈전자사료관 평남 3·1운동 독립유공자 공훈록 참조.
평안도 지역 조사성과❙ 13 성천헌병분대를 습격했다. 순천군 은산면과 자산면에서는 헌병대에서 종교단체에 시위금지 경고를 했음에도 6일 기 독교·천도교 연합의 대규모 독립선언식과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신창면에서 기도교·천도 교·일신여학교·면장·청년 등 각계 주민들이 함께 공개적인 만세운동을 논의하고 면사무소 에 ‘대한독립운동준비사무소’라는 간판을 달고 태극기를 게양했다. 독립선언서 등을 인쇄해 일제에 통고하고 각 면에 사람을 파견해 독립선포식 참가와 집집마다 태극기를 내걸도록 했 다. 면장 김삼봉은 신창면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피체되었다. 맹산군에서는 일제의 야만성이 민낯으로 드러난 집단학살이 일어났다. 맹산군에서의 만세 시위는 3월 6일과 10일에 걸쳐 비교적 큰 충돌없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헌병분견소에서 기독 교계 교사를 피체·고문하자 격분한 군중들이 몰려가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헌병 분견소장이 평화로운 해결을 제의하며 주민 56명을 분견소 내로 불러들이고는 무차별 난사를 자행해 50여 명이 그 자리에서 학살당했다. 3·1운동 역사상 단일 장소에서 최단시간 최다의 피살자가 발생한 사건이다. 영원군에서도 3월 9일 피체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대가 헌 병분견대로 돌진했다. 피검자들이 문을 부수고 나와 시위대에 가세해서 일경과 충돌해 현장 순국자 15명, 부상자 34명이 발생했다. 양덕군 역시 천도교·기독교 연합으로 3월 4일부터 격 렬한 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20여명의 순국자와 3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평원군도 3 월 6일 첫 만세시위 때 경찰관서를 공격하다 17명이 피체되기도 했다. 이와같이 대부분의 평 남 지역은 기독교와 천도교의 종교조직을 이용해 3월초에 만세시위가 빠르게 확산되었으며, 두 종교단체가 서로 연합해 대규모 만세시위대를 조직했다. 또한 종교단체가 주도한 만세시 위임에도 시위의 대부분이 일제의 발포에 격렬하게 대항해 사망자와 부상자가 적지 않게 발 생했다는 것도 평남 3·1운동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2) 평안북도8) 평북의 3·1운동도 서울과 함께 3월 1일 시작되었다. 처음 시작된 지역은 의주와 선천으로 유여대와 이승훈이 서울 지도부와 연계해 이 지역의 만세시위를 계획·실행했다. 평북에서는 48일동안 만세운동이 지속되었으며, 4월 17일 위원을 끝으로 종료되었다.9) 평북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각 군별, 일자별 분류하면 <표 3>과 같다.10) 8) 「평북 조사보고서」의 평안북도 3·1운동의 발생과 전개 부분 참고. 9) 1920년에 일어난 1주년기념 만세운동은 제외했다.
14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표 3> 평안북도 각 군별 일자별 만세운동 현황 월일 건수 신의 주 강 계 곽 산 구 성 벽 동 삭 주 선 천 영 변 용 천 운 산 위 원 의 주 자 성 정 주 창 성 철 산 초 산 태 천 후 창 1919년 계 149 3 6 2 10 4 9 17 2 11 2 6 40 4 11 8 5 6 4 1 3월 1 2 1 1 2 2 1 1 3 6 1 1 1 2 1 4 6 1 1 1 3 5 14 1 1 1 5 1 2 1 1 1 6 8 1 2 1 1 2 1 7 8 2 2 3 1 8 5 1 2 1 1 9 5 1 2 1 1 10 5 1 1 1 1 1 11 2 1 1 12~13 0 14 2 1 1 15 5 3 1 1 16 2 1 1 17 2 1 1 18 1 1 19 1 1 20~22 0 23 1 1 24 0 25 1 1 26 1 1 27 1 1 28 2 2 29 0 30 4 1 1 1 1 31 16 2 1 2 1 1 3 3 1 1 1 未 1 1 4월 1 17 3 1 1 3 6 2 1 2 7 3 1 1 2 3 0 4 6 1 3 1 1 5 5 1 2 2 6 4 1 2 1 7 1 1 8 1 1 9 0 10 1 1 11 2 2 12~15 0 16 1 1 17 1 1 1920년 2 1 1 1919~1920 151 3 6 2 10 4 9 18 2 11 2 6 40 4 11 8 5 6 5 1 10) 「평북 조사보고서」 15~16쪽의 군별, 일자별 3·1운동 발생건수 참고.
평안도 지역 조사성과❙ 15 <표 3>에서와 같이 평북의 19개 지역 중 절반 이상인 11개 지역에서 1일~5일 사이에 만세시 위가 시작되었으며, 14일까지는 3개 지역을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북 진면의 경우 3월 13일 장날을 이용한 천도교인들의 만세운동이 계획되어 있었으나 사전에 발 각되어 실행되지 못했다.11) 3·1운동이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는 3월 5일과 31일, 4월 1 일이다. 각각 14건, 16건, 17건의 시위가 도내 전역에서 발생했다. 발생지역도 9개군, 10개군, 7개군으로 동시적으로 일어났다. 시위 횟수가 가장 많은 지역은 의주(40, 29.5%)이며, 다음은 선천(17), 정주·용천(11), 구성(10) 순이다.12) 선천은 3월 1~9일까지 매일 격렬하게 진행되다 가 비교적 일찍 소강기에 접어들었다. 3월 초순에 일제히 시작되었다가 소강된 평북의 만세 시위는 선천·영변·곽산·후창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3월 말에 다시 만세시위가 재개 되어 4월까지 이어지고 있다. 평남 지역이 3월 6일 21건으로 정점을 이루고 급격히 퇴조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된다. 3월 1일 의주의 만세시위는 유여대 등이 주도해 의주서부교회에서 진행되었으며, 선천에서 는 이승훈의 지도에 따라 신성중학교에서 시작되었다. 신성학교와 보성학교 학생을 포함한 1천여 명의 시위대가 선천수비대와 충돌해 부상자가 발생하고 1백여 명이 피체되었다. 정주 군에서는 3월 3일 천도교·기독교가 연합한 만세시위가 일어나 시위대 천여 명 중 100여 명이 피체되었는데 이일을 계기로 정주에서는 최대 규모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3월 4일에는 용 천과 선천에서 대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선천 읍내에서는 장날을 기해 1만명의 시위대가 일경과 충돌해 6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3월 5일에는 평북 전역으로 만세운동이 확산되면서 이날 하루만해도 9개군에서 총 14건의 만세시위가 발생했다. 선천에서는 4개면 5개 지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는데 신미도(身彌 島)에서는 불과 30명의 시위대가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를 20일간 점거하고 자치적인 행정사 무를 집행하기도 했다.13) 철산 차련관에서는 만세시위대에 일 헌병들이 발포와 총검을 휘둘 러 소학교 학생인 김효운이 참사(斬死)당했다. 삭주에서는 청사까지 가두행진하던 시위대와 헌병대의 충돌로 4명이 현장순국하고 20여 명이 피체되었다. 3월 6일에도 6개군에서 8회의 만세시위가 발생했으며, 7일 이후 시위의 규모는 점점 축소되 11) 「騷擾ニ關スル件」, 朝鮮總督府 內秘補 272;平北地第356號(1919.3.25.), 藤川利三郎, 大正八年 騷擾事件ニ關 スル道長官報告綴 七冊ノ內二. 12) 후창은 3월 10일자 1회 발생으로 독립운동사에서만 확인된다(독립운동사2, 501쪽). 13) 「평안북도 3·1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보고서」, 82~87쪽. 남면(南面)의 삼봉리와 신미도에서 각각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16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었다. 이후 3월 초순과 같은 수천~1만의 대규모 시위대가 조직되지는 못했으나 백 명 규모의 만세시위는 꾸준히 전개되었다. 일시적으로 침체되었던 만세시위는 3월 27일 의주군 시위에 3천여 명이 가담하면서부터 크게 일어났다. 30일 의주 고령삭면 영산시장에서는 3천여 명의 시위대가 헌병주재소 숙사가 파괴하기도 했다. 다음날에도 영산시장에서는 3천여 명의 대규 모 시위가 있었다. 3월 31일 정주 천도교구에서도 장날을 이용해 정주읍내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각 지역 에서 몰려든 시위대가 정주우편국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는데 일제 헌병들의 무차별 발포 로 이날 희생된 사람만 92명에 달하고 72명이 피체된 것으로 파악된다. 용천군에서도 3차례 에 걸쳐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고창하며 헌병주재소를 포위하는 등 격렬하게 시위하다가 7명 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다른 군에서도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나 도내 전 지역이 대한독립만세 의 함성으로 가득찼다. 4월 1일에도 도내 전역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창성읍은 기독교·천도교 연합 대규모 시위를 주도했으며 이날도 수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삭주읍에서는 2천여 명의 대규모 시위 대가 헌병분견소를 공격했다. 4월 2일 옥상면 삼하동에서는 시위대가 면사무소를 점거하고 자치민단을 조직해 10여일에 걸쳐 사무를 집행하기도 했다. 삭주군 외남·대관면에서는 4월 6일 6천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으며, 2백여 명의 결사대를 선별해 일본 군의 탄압에 맞서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6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40명이 피체되었다. 이후 4월 16일 강계군 어뢰면 만세시위를 제외하면 평북의 만세시위는 급격히 위축되어 소규모의 산발적인 시위만 간간히 일어났다. 평안도 3·1운동의 특징은 기독교·천도교로 대변되는 종교집단과의 밀접한 관련성이다. 평안도의 3·1운동이 종교조직에 근거해 주도되었던 것은 기독교와 천도교의 전파와 확산에 기인한다. 천도교도 역시 1905년 동학에서 개창한 뒤 문명개화론을 앞세워 교세를 확장했으 며, 1911년 초에는 활발하게 활동하는 46개 교구 중 31개가 서북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다.14) 이렇게 경쟁적으로 교세를 확장하던 기독교와 천도교가 3·1만세시위에서 연합시위를 전개 해나갔다. 교사와 학생들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도 평안도 지역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이것은 평안도가 근대교육의 중심지라는 자긍심과 지역 민족교육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평안도의 3·1운동은 타 지역에 비해서 빨리 종결된 것은 일제의 극심한 탄압 때 14) 白大鎭, <天道, 侍天 兩敎의 內部를 解剖하여 公平을 足함(二)>, ≪半島時論≫, 1918, 54쪽.
평안도 지역 조사성과❙ 17 조사지역 조사기관 (책임자) 평안남도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이정은) 평안북도 충북대학교 (박걸순) 문으로 보인다. 비교적 늦게 시작된 중남부지역의 경우, 4월 말까지 시위가 전개된 곳이 적지 않다. 조직적이고 공세적인 시위를 벌여나갔던 평안도에서 일찍 소강상태에 들어간 것은 일 제의 감시와 탄압이 그만큼 극심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평안도 3·1운동 참여자들은 타 지역 에 비해 일찍 큰 피해를 입었고 만세시위도 조기에 종료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안도의 3·1운동은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우리 민족의 울분과 자주독립을 위한 열망을 그 어떤 지 역보다 잘 대변해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Ⅲ. 사적지 조사 개요 및 사적지 현황 1. 조사기관 2. 기초조사 기간 조사기간 : 2016년 7월 27일~11월 23일 3. 조사 방법 및 대상 선정 방식 사적지 지정 작업에서는 다음과 같은 조사 선정 방식을 기준으로 했다. 일단 북한지역은 현지답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문헌자료 중심으로 사적지를 비정했다. 문 헌상 나타난 3·1운동 관련 사적지(계획, 만세지, 탄압지, 전투지, 일제 통치 기구 및 탄압기 구), 지역출신 독립운동가, 3·1운동 참가 유공자의 생몰 유적지( 탄생지, 거주지, 집터, 순절 지, 주요 활동지) 등을 조사하고 현재의 주소지로 대비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 선행 문헌조 사를 통해 비정 가능한 사적지 가운데 역사적 비중·지역 특징·교육적 가치 등을 고려해서 사적지를 정했다. 또한 문헌상 유사한 지역이라도 완전히 동일한 지역으로 비정할 수 없는
18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경우에는 정확한 현장답사의 여지를 위해 별도의 사적지로 했다. 북한의 문헌자료나 구술자료, 현장 검증을 통해 추후 다시 선별할 필요가 있으므로, 추론의 의한 사적지 통합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진행하고자 노력했다. 4. 평안도 지역 3·1운동 관련 문헌자료 1) 평안남도 평안남도의 3·1운동 관련 자료는 물론, 3·1운동에 관련한 전반적인 연구서와 연구논문은 대부분 참고했다. 해방 이후 3·1운동에 관한 다양한 연구성과 또는 1차 사료를 재가공한 자 료집, 3·1운동의 내용이 수록된 회고록류들이 다수 출간되었다.15) 독립운동사자료집4~6권 에 수록된 3·1운동 관련 재판기록 등을 참고해 인물의 신원정보, 3·1운동에서의 역할, 3·1 운동의 전개과정 등을 정리했다. 보다 철저하게 3·1운동의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기 위해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등 3·1운동 현황을 파악할 수 있는 당대 단행본 및 당시 상황이 보도 된 매일신보, 동아일보 등 국내 신문과 일본 신문자료를 분석했다.16) 특히 기독교 등 종교단체가 서북지역 3·1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을 고려해 선교사 및 교회 관련 1차사료 또는 2·3차사료를 최대한 수집하고 분석했다.17) 일제 식민지 통치의 현황 파악을 위해 조선총독부의 시정관련 자료도 참고했다.18) 사적지의 정확한 위치 비정을 위해 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一覽과 각종 지도자료를 참고해 주요 사적지의 경우 지도를 첨부하고 건물 사적지의 경우 건축사적인 가치정보 등 사적지에 관련한 총체적이고 다양한 정보를 최대한 수집 조사했다.19) 이러한 기본정보를 분석해 3·1운동에 관련한 각 사 15) 독립운동사자료집, 한국민족독립운동사료,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韓國獨立運動史資料集, 三· 一運動編(一~二) 극비한국독립운동사료총서 –3·1운동편-, 現代史資料(강덕상), 朝鮮獨立運動(김정 명), 萬歲騷擾事件,獨立有功者功勳錄, 韓國獨立運動史, 3·1運動實錄(李龍洛) 등. 16) 大阪朝日新聞, 東京朝日新聞, 大阪每日新聞, 時事新報 등. 17) 미감리회 조선연회록(1919);The Journal of Wilcox Mattie Noble 1892-1934;한국컴퓨터 선교회 홈페이지, Boston University School of Theology 홈페이지, 재한선교사 보고문건(독립기념관); 닥터 홀의 조선회상, 독 립운동의 요람 남산재 사람들 등. 18) 朝鮮總督府統計年報(1910-1945), 朝鮮の保護及倂合(1918), 朝鮮の小作慣行(1932), 施政二十五年史, 施 政三十年史, 朝鮮總督府官報 등. 19) 평안남도지역조선총독부지도(1918), 진남포지도(1946), 평양지도(1946), 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一覽 (1917) 등.
평안도 지역 조사성과❙ 19 적지의 역사성, 교육적 가치, 스토리 등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사적지 등급을 매겨 추후 실태 조사에 현실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조사보고서를 지향했다. 2) 평안북도 평안북도 3·1운동의 전개과정을 분석하기 위해 조선독립운동, 독립운동사, 3·1운동, 평안북도지와 각 지역 군지20), 매일신보, 독립신문에 기록된 평안북도 3·1운동 관련 기 사를 분석해 지역별·일자별로 3·1운동의 전개과정을 분석했다. 이를 바탕으로 1차사료인 판 결문 중 평북출신 인물을 추출해 판결문에 전개된 내용과 「조선소요관계서류」, 「도장관보고」 등 3·1운동 관련 일제문서를 비교하고 판결문의 인물과 지역을 대비시키는 작업을 진행했 다.21) 사적지 기초조사 작업은 다음과 같이 단계적으로 진행되었다. ○ 1단계 : 가장 중점을 두고 조사한 것은 일제가 그날그날의 만세시위 상황을 보고한 「일 차보고」 자료를 수록한 朝鮮獨立運動Ⅰ과 現代史資料25-28이다. 일제의 보고 내용 을 토대로 일자별로 만세시위 일지를 정리하고, 다시 지역별로 분류함으로써 일목요연 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 2단계 : 일차 조사된 자료는 각 지역의 만세시위 상황의 구술까지 참고·정리한 독립운 동사 2(3·1운동사)과 대조·일치시키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행정구역과 지 명 변화 여부를 조사하고 대조하여 신구 일치화 작업을 진행했다.22) ○ 3단계 : 자료 활용도를 높이기 위해 주요 참고문헌을 주석한 「독립운동사적지 조사표」를 작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평북지역의 「3·1운동 총괄표」, 「3·1운동 현황」(일자별,지역별) 을 도표화 했다. 인물관련 자료로는 전체 독립유공자, 3·1운동 참여 유공자 현황표 등을 도표화 하여 관련인물의 신원정보, 관련시위지, 판결문 현황 등이 유기적으로 파악되도 록 했다.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평안도 지역 판결문은 고등법원에 상고된 것들만 남아있기 때문에 20) 江界誌, 雲山郡誌, 龍川郡誌, 鐵山郡誌 등. 21) 판결문에 관해서는 독립운동판결문사이트,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자료집(3·1운동편), 獨立運動史資料集 4-6, 朝鮮獨立運動Ⅰ-분권 등을 참고했으며, 인물관련 정보는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공훈전자사료관의 공적조서와 공훈록을, 3·1운동 전개과정은 朝鮮獨立運動Ⅰ,現代史資料25-28, 韓日關係史料集, 韓國 獨立運動之血史, 韓國獨立運動史略上, 한국민족운동사료(3·1운동편 1-3), 日本新聞 韓國獨立運動關 聯記事集(Ⅰ-Ⅲ)-3·1운동편 大阪朝日新聞, 저팬어드버타이즈 3·1운동 기사집, 中國新聞 韓國獨立運動 關聯記事集(Ⅰ-Ⅲ)-3·1運動編- 등을 참고했다. 22) 신북한지리지(배기찬, 1994) 및 북한지역정보넷·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이트 등.
20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3·1운동 당시 상황과 인물들의 활동 내역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 그렇더라도 1차사료로 그 어떤 자료보다 가치가 지대하다. 평북 기초조사에서는 2016년까지의 3·1운동계열 포상자 를 위주로 판결문을 정리해 인물을 통한 확인작업이 가능하도록 했다. 5. 사적지 형태와 유형 1) 평안남도 평남 3·1운동 관련 사적지로 선정된 곳은 총 64개소로 가옥 20, 거리 5, 건물 37, 산야 2처 이며, 건물과 가옥 등 유형사적지가 가장 많다. ① 가옥 사적지로 선정한 가옥은 20개소이다. 대부분 평남의 대표적인 3·1운동을 주도했거나 주요 한 역할을 수행한 인물들의 주소지(또는 본적지) 또는 만세운동과 관련된 가옥이다. 길선주· 신홍식·임예환·나인협·김창주는 평남의 3·1운동을 견인했을 뿐아니라 민족대표로 참여 한 인물이다. 길선주 목사집은 평양 3·1만세운동을 논의했던 준비지이기도 하다. 평양 3·1 운동 주도한 윤원삼·강규찬·김선두·안세환의 주소지, 2·8독립선언과 평양 3·1운동에 참 가했던 황에스터의 본적지, 일제의 탄압만행을 국제여론화했던 모펫 선교사와 시위대를 숨겨 주고 재판을 받았던 모우리 선교사 주소지, 진남포 만세운동을 이끈 홍기황과 진남포 만세시 위를 논의한 노윤길 집 주소지도 사적지로 포함시켰다.23) 평남 최대의 유혈만세운동이었던 사천만세시위를 주도한 조진탁의 본적지(출생지)와 임이걸의 주소지, 강서군 함종면의 만세 운동을 주도한 강기팔의 집이 포함되었다. 선정된 사적지 이외에도 안주만세시위(3·1)에서 주도자 10여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인쇄하는 등 준비했던 김화식(金化湜)의 집 주소지와 사 천만세시위에서 친족들이 같이 순국한 경우, 윤상열과 같이 주소지가 비교적 명확한 경우 인 물을 골라 그의 주소지를 사적지로 고려해 볼 것을 추천한다.24) ② 거리(시장) 시장은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던 주요 시발지이자 시위지에 해당한다. 교회당, 학교운 동장, 마을공터는 주로 만세운동의 시발지가 많고, 대규모 만세시위의 집결지나 시위지는 대 23) 홍기황의 경우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지 못한 인물이다. 24) 「김화식 등 판결문」(1919.6.5., 고등법원), 윤상열 등의 인물에 관해서는 <표 8> 참조.
평안도 지역 조사성과❙ 21 부분 장터에서 일어났다. 대규모 가두시위가 일어난 장소이기 때문에 현장순국자들도 주로 거리나 시장에서 발생했다. 평남지역에서 거리 형태로 지정된 사적지는 총 5개처로 강서시장, 개천장터, 모락장, 안주군 입석장터, 중화 읍내장터 등이 이에 해당한다. ③ 건물 건물 사적지는 총 37개소로 만세시위의 준비지·시발지, 주요인물과 관련된 건물, 탄압지 또는 주요 투쟁지에 해당한다. 건물의 기존 성격이나 용도에 따라 종교(천도교/기독교)·식민 통치기관·학교, 그외 기타건물로 세분할 수 있다. 천도교 관련 건물로 강서·맹산·양덕·영 원지역 천도교회, 은산 천도교구실, 삼등·안주 교구, 성천·평양 천도교구당의 9개소이다. 기독교 관련 건물로는 강서교회, 남산현교회, 반석교회, 신창교회, 원장교회, 장대현 교회, 신 흥동 감리교회당, 안주읍 장로교 동예배당, 예수교서원의 9개소이다. 식민통치기관에 해당하 는 건물은 모두 10개소로 이들 건물은 대부분 시위대의 활동지이거나 탄압지이다. 또한 평남 의 만세시위가 격렬하게 진행된 곳이 많았기 때문에 다수가 순국지이기도 하다. 만세시위의 중심 장소가 되었던 곳은 주로 군청·면사무소·주재소였다. 강동군청, 강동군 삼등면사무소 와 순천군 신창면사무소, 상원(신읍)·온정리·증산 주재소를 사적지에 포함시켰으며, 맹산헌 병분견대·성천 헌병대·일본군 제20사단 제77연대 본부, 평양경찰서 등 일제의 야만적 탄압 기관도 기억해야할 사적지에 포함시켰다. 이밖에도 식민통치기관에는 조진탁이 교수형으로 순국한 평양 감옥을 비롯, 평양법원 진남포지청·평양고소원·진남포분감 등 피체자들이 송 치·수감·판결을 받았던 일제의 사법기관과 행형기관을 사적지에 추가할 필요가 있다. 학교 건물에는 숭덕학교·숭현여학교·숭실대학·취명학교·함종공립보통학교의 5개교를 선정했다. 다만 숭실중학교와 숭의여학교, 관립고등학교도 평양 3·1독립선포식과 3.4학생· 평양부민 연합만세시위에 참가했던 학교들이므로 사적지로 같이 고려할 필요가 있다. 그 외 평남 3·1운동과 관련된 주요 사적지로는 이승훈이 입원해 기독교계 인사들과 만세 운동을 논의했던 기홀병원, 이승훈이 진남포에 내려와 진남포 만세시위를 협의했던 덕원루 요리점, 진남포만세시위 주도자인 임치정이 경영했던 서선광무사업소 등이 있다. 2) 평안북도 평안북도 사적지로 선정한 곳은 총 151개소로 가옥 1, 거리 116, 건물33, 기타 1처로 이 가운 데 거리가 76.8%로 가장 많다.
22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① 가옥(터) 가옥 관련 사적지는 1개소로 의주군 수구진 만세운동 당시 시위대가 소각한 친일파 주계주 의 가옥· 도수장(屠獸場) 터이다. 그러나 이밖에도 민족대표로 참가했던 양전백(본적지)·이 승훈(본적지, 익성리만세시위지)·유여대(본적지)·김도태(본적지)·이명룡(본적지)의 집과 정주읍 만세시위(3.31) 때 가족이 집단 현장순국한 모신영·모원규·모원봉의 집(본적/주소 지)와 시위의 준비지였던 서주동 박형석의 집, 강계만세시위(4.8)의 준비지이자 시위지였던 이준겸의 집 등도 사적지로 고려할 것을 추천한다. ② 거리 거리 사적지는 모두 116처이다. 3·1만세시위가 대부분 거리에서 일어났고, 거리에서 탄압 을 받았기 때문에 거리가 가장 많은 것은 당연하다. 또한 문헌에서 만세시위지의 위치(주소) 를 정확히 비정할 수 없을 경우 광위의 주소를 사적지에 포함했다. 문헌상 동일 지역의 만세 시위이더라도 세부적인 주소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만세시위 일자가 다른 경우 추후 면밀한 실태조사를 위해 각각의 사적지로 포함시켰다. 거리는 만세시위가 일어났던 시발지이자 시위 지이며 일제의 학살장소로 시장과 시가지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 중 시장지역은 의주읍장터 (3.27)·피현장터(3.4)·영산시장(3.6, 3.30~31)·체장장터(3.7) 용천군 남시시장(3.6), 선천읍장 터(3.4), 구성군 남시장터(3·11), 사기면 신시장터(3·18), 구성군 지경장터(4.4), 대유동 지경시 장(4.2, 4.4, 4.5) 등이다. 이는 문헌에서 시장(장터)명이나 시장에서 시위가 전개된 것이 명확히 기술된 경우이다. 대부분의 사적지는 시가지로 가두 만세시위의 현장을 사적지로 선정했다. 대표적인 곳은 신의주읍(3.4), 신의주 노송동(3.30), 의주군 남대문 만세시위지(3.2), 의주군 대 산동(3·17), 용천군 양시면(3.4, 3.5), 용천군 남시면(4.1), 철산읍(3·10), 정주면(3.5), 태천읍 (3.31), 영변읍(3.9), 구성읍(3.30, 4.1), 운산읍(4.5), 삭주읍(3·14·4.1), 창성읍(4.1), 벽동읍 (3.31), 초산읍(3.31), 강계읍(3.5·4.8), 중강진(3.23) 등으로 대부분 각 군의 중심지에 위치한다. 거리 사적지로는 선정된 곳 이외에 선천읍 만세시위(3·1)에서 시위대들이 행진했던 남천동시 장도 사적지로 고려할 필요가 있으며, 용천군 용암포(3.25), 의주읍(4.1), 구성군 사기면(4.5), 삭 주군 외남면(4.6), 창성군 학송리(4.5)·청룡리(4.6), 양광면(4.6), 벽동읍(4.1), 강계군 풍용리 (4.16) 등의 만세시위지는 현장순국자가 발생한 곳이므로 면밀한 조사가 필요한 지역이다. 다만, 거리 사적지의 경우 광위의 사적지 개념으로 선정했기 때문에 인근 건물군 또는, 가두 만세시위에 관련된 건물군을 포함한다. 예를 들면 고읍역 3·1운동 만세시위지의 경우 이 시위 와 관련되고 일어난 지역인 익성리 이승훈 거주지, 고읍역, 오산학교, 용동학교가 포함된다.
평안도 지역 조사성과❙ 23 ③ 건물 건물 사적지는 33개소로, 주로 만세운동의 시발지·탄압지·주요 투쟁지에 해당한다. 기독 교 관련 건물로는 숭정면의 한장교회와 창선군 대유동교회, 철산읍기독교회, 의주서부교회 등이 있으며, 학교 건물로는 의주공립농업학교, 의주 양실중학교, 영창학교, 명흥학교, 태천공 립보통학교 등이 있다. 식민통치기관 건물로는 선천군청, 수진면·옥상면·양광면·백양면· 물남리·아이포면사무소, 남시·가물남리·피현(枇峴)의 경찰관주재소, 삭주헌병분견소와 광 평면 광무과출장소, 정주우편국 등이 있으며, 차련관 3·1운동 장소인 영성상회도 건물 사적 지에 포함시켰다. 광위의 거리 사적지와 건물 사적지에 포함되지 않은 의주읍3·1운동(3·1) 주도지인 동교 회·선천교회, 창성읍 시위(4.1)를 주도한 강제희가 목사로 재직했던 창성 읍내교회, 강계읍 만세시위(4.8)의 시작을 알렸던 남장대 예배당 종각, 선천읍 만세시위(3.3)에서 기독교측 시발 지였던 북교회당과 교회목사관, 철산 차련관 만세시위(3.4)의 준비지이자 주도지인 차련관교 회, 벽동읍 만세시위(3·10)를 주도한 벽동읍 기독교회당, 선천읍 3·1운동 1주년 기념만세시 위가 시작된 선천읍 남교회예배당·신성학교(사무실 및 캐롤린홀), 철산 만세시위(3.7)에서 발생한 수십 명의 부상자를 치료했던 철산의원, 대유동 만세시위(4.1) 때 시위대가 습격했던 헌병주재소, 피체자들이 수감·구형되었던 평양지법신의주지청, 신의주분감 등의 사법기관과 수형기관도 사적지로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25) ④ 기타/산야 태천 장림면 산상 만세시위지(4.2)가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거리 사적지의 광위 범주에 포 함된 의주 광성면 산상횃불시위지(4.4), 초산읍 산상횃불만세시위지(4.2) 등도 같은 사적지 형 태로 논의될 필요가 있다. 사적지 선정에는 빠졌으나 강계 입관면 만세시위(3.3)에서의 산상 봉화지도 추가 사적지로 고려할 만하다. 25) 「평북 조사보고서」, 141쪽.
24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6. 사적지 분포상의 특징과 특기할 만한 사적지 1) 평안남도 ① 사적지 분포상의 특징 평남 3·1운동 사적지의 군별 분포현황은 아래와 같다. 군별 계 평 양 부 진 남 포 부 강 동 군 강 서 군 개 천 군 대 동 군 덕 천 군 맹 산 군 성 천 군 순 천 군 안 주 군 양 덕 군 영 원 군 용 강 군 중 화 군 평 원 군 계 64 21 5 3 9 1 4 0 2 3 2 4 1 1 2 5 1 거리 5 2 1 1 1 건물 37 10 3 3 5 2 2 3 2 2 1 1 1 2 가옥 20 11 2 2 1 1 2 1 산야 2 1 1 기타 <표 4> 평안남도 군별 사적지 분포 현황 평남의 경우 총 64개소의 사적지 중 평양부에 21개소가 밀집되어 전체 사적지의 32%를 차 지한다. 다음은 강성(9), 진남포(5), 중화(5), 대동·안주(4)의 순이다. ② 특기할 만한 사적지 사적지 등급이 가장 높게 책정된 곳은 남산현교회, 장대현교회, 평양천도교구당, 기홀병원, 길선주목사와 홍기황의 집, 맹산천도교회, 맹산 헌병분견대, 양덕천도교회, 평양경찰서, 숭실 대학의 11개소이다.26) 남산현교회, 장대현교회, 평양천도교구당은 감리교·장로교·천도교가 각각 주도한 평양 3·1운동의 시발지이자 만세시위장소이다. 기홀병원은 서북지방 3·1운동 의 준비지이자, 근대 의료사에서 중요한 장소이며, 3대에 걸쳐 한국에서 봉사한 홀가문의 공 헌도를 보아서도 그 중요도가 매우 높다. 길선주 목사는 33인 민족대표 중 장로교측의 대표자 격으로 3·1운동에 참여한 중요한 인사이며 길선주 집은 3·1운동사와 기독교사에서 모두 중 요한 곳이다. 홍기황은 가장 공세적인 만세시위로 손꼽히는 진남포 만세시위의 주요 지도자 로 홍기황의 집은 특별히 기념공간을 조성하는 등의 조치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27) 맹산천 도교회와 맹산 헌병분견대는 각각 주도지와 학살지로 50여 명의 학살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26) 「평남 조사보고서」의 사적지목록 참조, 254~260쪽. 세부 사적지 조사표에 기입된 등급과 목록 등급이 다른 경우 목록등급을 참조함. 27) 「평남 조사보고서」에는 홍기황이 3·1운동 참여자로 유일하게 사형을 언도받아 집행되었다고 조사의견을 제시하고 있으나, 보고서의 관련 사실에는 출옥후 평양 광성학교 교사로 재직했다는 내용이 있어 상치된다 (106쪽). 현재 홍기황은 독립유공자로 포상받지 않은 인물로 사적지 등급의 추가적인 검토가 요구된다.
평안도 지역 조사성과❙ 25 위한 기념시설 조성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맹산 천도교인들의 용맹성과 일제의 야만성을 알 릴 필요가 있다. 양덕천도교회 양덕읍 만세시위를 주도한 곳으로 다수의 순국자가 발생한 만 큼 양덕군민들의 치열한 독립의식과 일제의 야만성드러낼 수 있는 장소이다. 평양경찰서는 평양만세시위의 탄압기관으로 서북지방 독립운동가들의 원한이 서린 독립운동 탄압의 본산 이다. 평양 제77연대 무장병력과 더불어 무자비한 탄압의 주체로서 기억해야 곳이다. 숭실대 학은 평양만세시위 학생 측의 대표기관으로 장소가 직접적인 시위 현장은 아니나 숭실출신 학생들이 민족의식과 자유에 대한 신념을 갖고 평양 지역사회와 종교계의 일원으로서 3·1운 동에 적극 참여했음을 사적지 지정을 통해 기념할 필요가 있다. 2) 평안북도 ① 사적지 분포상의 특징 평북 3·1운동 사적지의 군별 분포 현황은 아래 표와 같다. 군별 계 신 의 주 부 의 주 군 용 천 군 철 산 군 선 천 군 정 주 군 곽 산 군 태 천 군 영 변 군 구 성 군 운 산 군 삭 주 군 창 성 군 벽 동 군 초 산 군 위 원 군 강 계 군 자 성 군 후 창 군 계 151 3 36 11 5 18 11 2 5 2 10 2 13 8 4 6 4 6 4 1 거리 116 3 29 9 2 6 8 1 3 2 10 2 10 7 4 6 3 6 4 1 건물 33 6 2 3 12 3 1 1 3 1 1 가옥 1 1 산야 - 기타 1 1 <표 5> 평안북도 군별 사적지 분포 현황 평북의 경우 총 151개소의 사적지 중 의주가 36개소(23.8%)로 가장 많고, 다음이 선천(18), 삭주(13), 정주·용천(11), 구성(10), 창성(8) 등의 순이다. 의주의 경우 시위대가 전소시킨 친 일파 가옥·도수장터와 만세시위가 일어났던 거리 27개소, 건물 11개소, 산상횃불시위가 일어 났던 광성면이 포함되어 있다. ② 특기할 만한 사적지 현장 순국자가 발생한 지역은 주요 사적지로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강계의 강계읍 (4.8)· 풍용리(4.16), 구성의 남시 헌병주재소(3.30)·지경장터(4.5), 벽동의 벽동읍(3.31~4.1), 삭주의 삭주군청(3.5)·외남면 결사대항전순국지(4.6), 용천의 용암포(3.25)·남시면 헌병분주
26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소(3.31)·양광면(4.6), 의주의 읍내(4.1)·고령삭면 영산시장과 헌병주재소 숙사자리 (3.6,30~31)·수진면사무소(4.2)·광성면(4.4), 정주의 동주면사무소와 동문 장자현 일대 (3.31)·정주우편국 일대(3.31), 창성의 창성읍(4.1)·대유동 지경장터(4.2)·학송리(4.5)·청룡 리(4.6), 철산의 차련관 영성상회(3.5)·명흥학교와 쪽다리 일대(3.7), 초산의 초산읍 산상봉화 만세운동지(3.6) 등은 현장 순국자가 발생할 정도로 격렬한 투쟁과 일제의 야만적인 폭압이 행해진 곳이므로 비중있는 실태조사가 이루어져야 한다. 강계 만세시위지(4.8)의 경우, 강계 읍교회·영실중학교(연판장 작성), 김성하의 집(태극기 제작), 독립선언서를 등사했던 계례지 병원(독립선언서 등사), 남장대 예배당 종각(시위대 출발신호), 이준겸 집 앞의 광장(자래바우 든덕 인근, 시위대 집결지 겸 시발지), 헌병분견소(4인의 순국자 발생지) 등 만세시위에 관련 된 역사적 장소가 문헌에 잘 묘사되어 있어 복원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만세시위 행렬의 도로를 따라 역사적인 3·1운동 둘레길로 조성하고 추념할 필요가 있다. 벽동읍 만세시위지(3.31~4.1)에서는 천도교정주교구장 최석일 순국지와 12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지역이 포함된 읍성과 성문터 등 일대를 주요 사적지로 지정해 추념시설을 조성할 필 요가 있다. 삭주 외남면 결사대 항전순국지와 3차례에 걸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던 영산시 장과 남시면 헌병분주소 일대의 만세시위 및 순국지 조사도 필요하다. 특히, 정주우편국 일대 는 평안북도에서 가장 많은 순국자가 발생한 곳으로 일제의 발포와 검에 모씨 3가족을 비롯, 수많은 시위대가 희생되었다. 현재까지 정주의 학살현장 순국자로 포상받은 인원은 13명이 다. 9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문헌의 기록이 있는 만큼 면밀한 조사가 필요하다.28) 그외 의주 3·1운동의 준비지와 시위지인 의주읍 일대(3·1 의주 서부교회, 동교회, 선천교 회, 양실학교), 선천 3·1운동 준비지와 시위지인 선천읍 일대(신성학교 및 기숙사 캐롤린홀, 교직원 사택, 남교회, 북교회 및 목사관, 천도교교구실, 천남동시장), 도민들이 면사무소를 점 거 인수해 자치행정사무를 집행했던 신미도 면사무소(3.5 선천), 정주 오산학교 터 일대(3.31 용동교회·이승훈거주지), 조선독립회 개최지(3.31 초산) 등도 주요 사적지로 꼽을 수 있다. Ⅳ. 맺음말 평안도 지역 3·1운동에 관한 연구가 심도있게 진행되지 못한 것은 분단으로 인해 현장조 28) 「평북 조사보고서」, 108쪽.
평안도 지역 조사성과❙ 27 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29) 이런 의미에서 2016년 실시된 평안남도와 평안북도의 3·1운동 관련 사적지 기초조사는 북 한지역 독립운동 사적지 실태조사의 실험적 첫걸음으로서 큰 의의가 있다. 평안남도의 기초 조사는 유형의 사적지가 많고, 사적지 정보가 구체적이다. 반면 평안북도 사적지는 실제 만세 시위가 일어난 장소를 사적지 대상지로 두고 사적지 조사를 위한 기반 자료를 충실하게 제공 하고 있다. 첫단계로 진행된 평안도 지역 3·1운동 사적지 기초조사가 상보적인 조사방법이 진행됨으로써 이후 사적지 기초조사에 상당히 긍정적인 프레임을 제시했다고 생각한다. 평안남도의 경우 사적지에 관련된 정보는 충실하나 사적지 선정의 기초조사 자료가 제시되 지 않아 선정지 이외의 유적지 관련 정보를 알기 어렵다. 사적지 기초조사인만큼 좀 더 다양 한 사적지와 관련 정보가 제시되어 연구될 필요가 있다. 사적지의 1/3이 평양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당시 평양의 지역적 특징과 관련이 있기 때 문에 이해되는 부분이나, 한 지역에 집중되는 경우 역사적 스토리도 중첩될 수밖에 없다. 각 지역인물이나 만세시위의 전개과정에서 나타나는 특징을 분석해 기타 지역의 사적지를 보완 할 필요가 있다. 평안남도는 유형사적지가 많다. 유형사적지의 경우, 특히 종교관련 사적지는 현재 북한지 역에서 형태가 보존될 가능성이 희박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경우의 위치비정 및 복원 방법 의 대안을 미리 고민해야할 필요가 있다. 인물관련 사적지의 경우 형평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제언사항에 포상 위주가 아닌 역 사적 스토리를 먼저 고려해야한다고 했으나 현실적으로 포상과 사적지가 별개로 진행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또한 평남지역 내 본적지와 주소지가 다 있는 인물의 경우, 어느 주소를 먼저 기념할 것인지도 고민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평안북도의 경우 문헌을 통해 3·1운동이 일어난 지역의 기초조사가 충실하다. 이러한 조 사 결과는 이후 추가적인 조사 작업에 상당한 기여가 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만세운동이 일 어난 151건을 모두 사적지로 선정하고 있기 때문에 중복된 사적지가 적지 않다. 이것은 현지 조사를 통한 검증작업 이후에 사적지 합산 및 분류 작업이 되어야한다. 그러나 문헌상 판단 29) 평안도 지역 3·1운동의 연구성과는 다음과 같다. 金亨錫, 「西北地方의 三·一運動」, 檀國大學校大學院 史學科 碩士學位論文, 1982; 金鎭鳳, 「關西地方의 三·一運動」, 崔永禧先生華甲紀念論叢: 韓國史學論叢, 崔永禧先生華 甲紀念論叢刊行委員會, 1987;申福龍, 「북부지방의 3·1운동」, 韓民族獨立運動史 3, 國史編纂委員會, 1988;이 윤상, 「평안도 지방의 3·1운동」, 3·1민족해방운동연구, 청년사, 1989;김정인․이정은, 국내 3·1운동 Ⅰ(한 국독립운동의 역사 19),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등.
28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으로도 같은 위치로 비정이 가능한 곳은 하나로 단일화 작업을 해줄 필요가 있다. 중요 사적지에 대한 평가가 막연하다. 이것 역시 현장조사를 통해 사적지의 실태가 파악돼 야 가능하나 전문가적 판단이 가능한 가이드라인은 제시해 줄 필요가 있다. 발제문에서 주요 사적지를 간단하게 선별했으나 중요도에 대한 심도있는 평가가 필요하다. 인물관련 사적지가 선정되지 않았다. 3·1운동이 실제로 일어난 장소 위주의 작업이 진행 된 결과로 보인다. 인물관련 다양한 데이터를 분석 제공했던만큼 그를 토대로한 인물 관련 사적지 추가 보완 작업이 진행돼야 한다. 만세시위 현장은 아니나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식 민통치기관(사법기관, 행형기관 등)도 관련 사적지에 추가할 필요가 있다. 사적지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사적지의 명명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확정적인 사적지 명이 아닌 가칭이라도 개별 사적지의 특징이 드러나는 명명법으로 통일할 필요가 있다.
제2주제 함경도 지역 조사성과 김 상 기 _ 충남대 교수
함경도 지역 조사성과❙ 31 함경도 지역 조사성과 김 상 기 | 충남대 교수 1. 머리말 3·1운동은 일제하 한민족의 독립을 위한 최대의 항일민족운동이었다. 이 운동에는 국내는 물론 중국 지역의 서북간도와 북만주 지역을 비롯한 중국령 일대와 러시아, 미주, 일본 등지 에서 거주하는 한인들도 참여하였다. 또한 기독교, 천도교, 불교, 유교 등 각 종교인들과 남녀 노소가 함께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외쳤다. 이와같은 거족적인 3·1운동은 큰 호수가 되어 모 든 민족운동을 흡수하였고, 이후 전개된 민족운동의 원류가 되었다. 그동안 3·1운동에 대한 연구는 많은 진척이 있었지만 남한 지역에 치중된 측면이 있다.1)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한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는 2017년도 북한지역 3·1운 동 사적지에 대한 기초조사를 실시하였다. 이 조사는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 환으로 실시된 것으로, 남·북한 학술 교류에 대비하여 현지 답사를 위한 기초 자료의 축적과 독립운동사 연구를 통한 민족 교류 증진에 목적이 있었다. 이 글은 이러한 기초조사를 토대 로 북한지역 중에서 함경도 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운동과 사적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2) 1) 북한지역 3·1운동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이 참고된다. 이정은 김정인, 국내 3·1운동1-중부 북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신복룡, 「북부지방 3·1운동」, 한민족독립운동사3, 국사편찬위원회, 1988. 조규태, 「황해도 수안지역 천도교인의 3·1운동」, 《숭실사학》 23, 숭실사학회, 2009. 이용철, 「평안도 의주지방의 3·1운동」, 《한국독립운동사연구》61, 2018. 이용철, 「평안도 정주지방의 3·1운동」, 《역사와 담론》86, 2018. 김진호, 「함경남도의 3·1운동」, 《충청문화연구》20, 충남대 충청문화연구소, 2018. 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학술용역 보고서 「2017년도 북한지역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학술용역 최종보고서-함경남도 3·1운동 사적지 기초 조사(이하 「함남지역 최종보고서」)」(2017년 12월, 김상기, 김진호, 이양희). 「2017년도 북한지역 독립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학술용역 최종보고서-함경북도 3·1운동 사적지 기 초 조사(이하 「함북지역 최종보고서」)」(2017년 12월, 조성운, 성주현, 이승원, 송미경).
32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이를 위하여 우선 함경도 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의 전개상황을 살피기로 한다. 다음에는 봉기한 지역의 분포상황과 특기할 사적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밝히기 위해 이용 한 관련 자료를 제시하고자 한다. 2. 함경도 지역에서의 3·1운동 전개 1) 함남지역에서의 3·1운동 함경남도의 원산 등 일부 지역은 3월 1일 이전에 서울 측의 주도자들과 연결되어 3·1운동 을 사전에 준비하였다. 원산에서는 3월 1일에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는 전국적으로도 아 주 빨랐다.3) 이에 따라 함남지역에서는 3월 초, 중순에 치열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운동의 중 심인물은 천도교도와 기독교도가 많은 편이었다. 특히 천도교도가 주도한 시위가 많았는데 이는 함경도 지역의 천도교인의 급격한 증가와 관련이 있다.4) 함경도 지역 3·1운동은 보성 사 사장 이종일이 파견한 안상덕이 독립선언서 1,300매를 가지고 2월 28일 영흥에 도착하면서 준비되었다. 천도교도가 주도한 지역으로는 영흥을 비롯하여 갑산, 고원, 단천, 북청 등이 확 인된다. 기독교도가 주도한 지역은 원산부가 대표적인 곳인데, 원산 남촌동감리교회 정춘수 목사의 역할이 컸다. 함남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은 3월 1일 원산에서 일어난 이후에 4월초까지 연이어 일어났다. 지금까지 조사한 바로는 함남의 1개 부와 15개 군의 16개 지역에서 총 110회 일어났음이 확인 된다. 함남지역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의 현황을 살피면 다음 표와 같다.5) 3)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은 서울 이외에 평안도의 평양, 진남포, 안주, 선천, 의주와 함경도의 원산 등 7곳으로 알려진다. 4) 1916년 현재 함경도의 천도교인 수는 함남이 118,149명 함북이 29,358명, 모두 147,507명으로 전국 1,073,408명 의 13.7%를 차지한다. 평안도는 특히 많아 모두 556,590명으로 51.8%에 달한다.(김정인, 국내3·1운동-중부 북부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173쪽). 5) 「함남지역 최종보고서」 76쪽(김진호 박사 작성).
함경도 지역 조사성과❙ 33 표1 함남지역 3·1운동 현황 일자 갑산 고원 단천 덕원 북청 삼수 신흥 안변 영흥 원산 이원 장진 정평 풍산 함흥 흥원 계 3·1 1 1 3.3 3 3 3.4 1 1 3.5 1 1 3.6 1 5 6 3.7 1 5 3 9 3.8 1 3 4 3.9 2 1 3 3.10 1 1 2 1 1 6 3.11 3 1 4 1 9 3.12 1 3 2 6 3.13 1 1 4 6 3.14 1 2 1 1 1 1 1 8 3.15 1 2 1 4 3.16 1 1 1 1 1 5 3.17 1 5 1 1 1 5 1 15 3.18 1 2 3 3.19 1 1 2 4 3.20 1 1 1 1 4 3.21 1 1 2 3.22 1 1 2 3.23 1 1 3.24 1 1 3.31 1 1 4.8 1 1 2 4.9 1 1 미상 1 1 2 계 2 2 3 1 16 0 16 0 7 2 9 2 24 2 20 4 110 위 표를 살펴보면, 원산지역에서 3월 1일 일어난 이후 3월초, 중순인 3월 3일부터 3월 24일 까지는 매일 일어났으나, 그 이후에는 약화된 특징이 보인다. 3월 3일과 4일은 함흥, 5일은 영흥, 6일은 고원, 7일은 정평, 8일은 북청, 9일은 신흥, 10일은 단천, 이원, 11일은 풍산, 14일
34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은 갑산, 장진, 15일은 홍원, 24일은 덕원 등지에서 일어났다. 지역 중에서는 정평이 24회로 가장 많고, 그 다음에는 함흥이 20회, 북청과 신흥이 각기 16회로 이상의 4개 지역이 특히 자 주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삼수와 안변 지역에서의 만세운동은 사전에 일경에 탐지되어 주 도자들이 체포됨에 실행에 옮겨지지는 못했다. 이 중에 원산지역과 활동이 많았던 정평, 함 흥, 북청, 신흥 지역의 운동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원산 3·1운동은 이가순과 이순영 등이 주도하였다. 李可順은 2월 21일경 원산부 남촌동 남 감리교회 목사 정춘수로부터 서울에서의 만세운동에 대한 계획을 듣고 원산에서의 3월 1일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는 전도사인 李順榮과 함께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그는 서울의 독립 선언서가 수량이 부족할 것을 대비하여 2월 26일경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는 선언서를 별도로 작성하였다. 이순영은 이가순이 작성한 원산 독립선언서를 2월 28일 밤에 차광은 집에서 약 2,000매를 인쇄하였다. 한편 서울서 작성한 독립선언서도 郭明理를 통하여 100매 정도 도착하 였다. 이가순은 3월 1일 오후 2시경 원산리 시장에서 군중들에게 독립에 관한 연설을 하고 참 여를 권유하였다. 이어 수천명의 군중과 함께 원산 시가지를 행진하면서 만세 행진을 전개하 였다. 주도 인물을 포함하여 50여명이 체포되었다. 3월 18일에도 1천여 명의 군중이 만세운동 을 전개하였으며, 기독교도와 천도교도 40여명이 검거되었으며, 천도교 원산교구당이 폐쇄되 었다. 정평군에서는 3월 7일부터 20일까지 부내면, 주이면, 춘류면, 선덕면, 고산면, 장원면 등에 서 24차례에 걸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고산면에서는 3월 16일부터 20일까지 5일간 풍송리·구창리, 흥봉리, 신경리 등에서 11차례에 걸친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만세운동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군 소재지에서 멀리 떨어진 한동리에서는 독립만세에 참가한 인원이 무력 5,000명에 이르렀다 한다.6) 함흥군에서는 3월 3일부터 시작하여 4월 8일까지 함흥면 등 12개면에서 20회에 걸쳐 독립 만세를 외쳤고 이외 독립만세운동의 권유 활동, 학생들의 동맹 휴업, 유인물 배포, 방화 등 다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함흥 읍내에서는 3차례에 걸친 철시운동이 있었다. 일 제는 함흥에서 만세운동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야간 통행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3월 2일 이래 함흥 시내 각처에서 십여 차례 독립만세운동으로 체포된 인사들이 검사국으로 이송 되어 3월 31일까지 수감된 인사들이 150~160명에 이르렀다. 이 중에 41명이 기소되었다.7) 6) 「함남지역 최종보고서」 41-47쪽 참조. 7) 「함남지역 최종보고서」 58쪽.
함경도 지역 조사성과❙ 35 북청군에서는 천도교를 중심으로 3월 8일부터 4월 9일까지 노덕면·신창면·양천면·양화 면·상거서면·거산면·속후면 등에서 16차례의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외에 유인물 제 작과 배포, 2개 면사무소에 방화 활동, 학생들의 동맹 휴업 시도가 있었다. 또한 일제의 사전 탐지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 것이 3차례가 확인된다. 북청군에서 3월 중순까지 만세운동으 로 헌병들에게 체포된 이들은 3월 25일 60명, 3월 31일 36명이 함흥지방법원 검사국으로 이송 되어 함흥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8) 신흥군에서는 3월 9일부터 17일까지, 그리고 3월 31일에 동고천면, 가평면, 원평면, 영고면, 동상면, 상원천면 등에서 16회에 걸쳐 만세운동이 전개되었다. 3월 10일에 있었던 만세운동은 신흥보통학교 4학년 학생(유춘갑)이 주도한 점에서 특기할 만하다. 그는 3월 10일 학교 구내 에서 170여 명 학생들에게 만세운동을 권유하고 선두에 서서 구한국국기를 흔들며 조선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학생들을 이끌고 흥경리 일대에서 행진하였다. 그는 체포되어 징역 8월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19) 함남지역 3·1운동은 3월 1일부터 시작하여 3월 중순까지 집중적으로 전개되었으나 3월 하 순이후 급격히 퇴조한 면이 보인다. 종교계, 특히 천도교계에서 주도한 지역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천도교계와 기독교계가 연합하여 운동을 전개한 지역도 있다. 학생들도 주도하였으니, 신흥, 북청, 이원, 함흥 등지에서 확인된다. 이곳의 시위는 헌병주재소나 관청을 습격하는 등 격렬한 투쟁성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일제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일제는 경찰대는 물론, 헌병분대와 제74연대 보병들을 출동시켜 만세운동을 무력으로 탄압하였고 소방대나 재향군 인 조직까지 동원하였다. 그 결과 체포자가 1,140명, 부상을 당한 인사가 69명, 순국한 인사가 61명에 달한다. 2) 함북지역에서의 3·1운동 함경북도에서의 3·1운동은 1919년 3월 9일 길주와 회령에서 시작된 이후 5월까지 총 84회 에 걸쳐 전개되었다. 일자별 군별 만세운동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다. 8) 「함남지역 최종보고서」 24쪽. 9) 판결문(대정8년 형공제344호, 경성복심법원, 1919.5.28.)(「함남지역 최종보고서」 25-26쪽).
36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표2 함북지역 일자별 지역별 만세운동 현황표10) 일자 경성 경흥 길주 명천 무산 부령 성진 온성 종성 청진 회령 계 3.9 1 1 2 3.10 5 1 6 3.11 1 6 7 3.12 2 2 4 3.13 5 1 6 3.14 1 2 1 4 3.15 2 3 3 1 9 3.16 3 1 4 3.17 2 2 3.18 1 1 3.20 1 1 2 3.22 1 1 3.25 3 3 3.26 1 1 2 3.27 1 1 3.28 3 3 3.29 1 1 3.30 1 1 2 3.31 2 2 3월 1 1 4.1 1 1 2 4 4.4 1 1 4.6 1 1 4.7 1 1 4.8 1 2 3 4.9 1 1 4.14 2 2 4.15 1 1 2 4.18 2 2 4.19 2 2 4월 1 1 5.20 2 2 계 5 3 15 17 3 1 15 4 2 8 11 84 위 표에서 볼 수 있듯이, 함북에서의 3·1운동은 3월 9일 처음 시작되어 4월 중순까지 지속 적으로 전개된 특징이 보인다. 지역별로는 명천이 17회로 가장 많고 길주와 성진이 15회, 회 10) 「함북지역 최종보고서」 별표1 「지역별 3·1운동 사적지 현황(함북)」, 별표2 「날짜별 3·1운동 발생 현황」 참 조.
함경도 지역 조사성과❙ 37 령이 11회로 그 뒤를 잇는다. 부령은 1회로 가장 적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부령을 비롯하여 경흥과 종성, 무산 등지는 4월에 가서야 일어남을 알 수 있다. 그 중에서 만세운동이 많이 일 어난 지역인 길주와 명천, 성진에서의 시위 현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길주군은 함북의 남단에 위치한 관계로 비교적 일찍 3·1운동이 일어났다. 천도교 議事員 인 이태인은 교주 손병희 등이 3월 1일 발표한 조선독립선언의 취지에 찬성하여 길주에서도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9일 밤 길주군 장백면 도화동에 위치한 이용서 집에서 동 지들을 규합하여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12일 길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12일 길주 우시장에서의 만세운동에 1,000여명이 참석하여 길주시내에서 시위하 였다. 길주에서의 3·1운동은 이후에도 10여 차례나 일어났는데, 특히 3월 13일은 덕산면과 동해면 등지에서 5회나 일어났다. 동해면에서의 시위는 14일까지 이어졌는데, 주민 1,500여명 이 참여하였다. 길주헌병대에서는 총을 난사하여 이날 현장에서 3명이 즉사하였다.11) 명천군의 시위는 길주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다. 하가면에서는 3월 14일 5천여 명이 시위에 참가하여 헌병대의 무차별 사격으로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시위는 15일까지 이어져 면 사무소를 향해 행진하였으며, 주도자들이 대거 체포되었다. 3월 하순부터는 시위의 규모는 적어졌지만 4월 중순까지 시위는 계속되었다.12) 성진지역에서의 만세시위는 3월 10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시위는 그리어슨(Robert Grierson, 具禮善) 목사가 운영하는 욱정교회 기독교인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났다. 3월 10일 오전 10시 그리어슨 목사가 운영하는 제동병원 앞에 5,000여 명의 군중이 운집하였고, 시위 군중은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가를 행진했다. 사태가 확대되자 성진경찰서는 나남기병대에 지원을 요청하 다. 나남 보병 제37여단은 장교 1명과 사병 20명을 성진에 파견하여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그 러나 성진 읍내의 시위는 인접 지역으로 번져 3월 12일부터 14일에 걸쳐 학동면으로, 15일에 는 학성면으로 파급되어 전개되었다.13) 함경북도의 만세운동은 함남 지역에 비해 늦게 시작하였으나 4월 중순까지 지속적으로 일 어났다. 함북지역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사람의 총수는 29,206명이었으며, 일본 군경의 발포 로 인한 사망자는 17명, 부상자는 45명이었다. 피검자의 총수는 386명에 달하였다.14) 또한 함 11) 「함북지역 최종보고서」 17-18쪽. 12) 「함북지역 최종보고서」 16-17쪽. 13) 「함북지역 최종보고서」 18-19쪽. 14) 「함북지역 최종보고서」 22쪽.
38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경북도의 3·1운동은 만주 및 노령에 분포되어 있는 교포들과의 연관성을 가지고 전개된 특 징을 볼 수 있다. 만주와 노령의 한인들은 서울로부터 북상하는 만세운동에 앞서서 함경북도 내륙지방에 새 소식을 전달하고 그 지방의 만세운동을 유발하였다. 함경북도의 3·1운동은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 일제는 경찰대는 물론 나남에 주둔하는 일본군과 철도수비대, 헌병대 등을 동원하여 시위 군중을 탄압하였다. 이상 함경남도와 함경북도의 3·1운동 전개상황을 살펴보았는데, 이를 도별로 살펴보면 다 음 표와 같다. 표3. 함경도 지역 3·1운동 현황15) 지역 순국자수 부상자수 피체자수 계 시위 횟수 참가자수 비고 함경남도 61 69 1,150 1,280 110 50,555 보고서 135 620 6,166 6,921 63 42,450 혈사 139+ 약간1곳 452+ 약간6곳 6,611+ 약간1곳 7,202+ 약간8곳 . 60,890+ 불명12곳 증보 함경북도 17 45 386 448 84 29,206 보고서 0 47 49 96 38 16,950 혈사 8 74 281+ 약간3곳 363+ 약간3곳 . 35,710+ 불명7곳 증보 계 78 114 1,536 1,728 194 79,761 보고서 135 667 6,215 7,017 101 59,400 혈사 147+ 약간1곳 526+ 약간6곳 6,892+ 약간4곳 7,565+ 약간11곳 . 96,600+ 불명19곳 증보 *보고서: 「함남지역 최종보고서」, 「함북지역 최종보고서」 . 혈사: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백암박은식전집2, 522쪽, 원문 172-173쪽). 증보: 윤병석, 증보 3·1운동사, 국학자료원, 2004, 375-380쪽. 위 표에서 연구팀에서 조사한 보고서에 따르면 함경남북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순국자 78 명, 부상자 114명, 체포된 자 1,535명, 그리고 시위횟수는 194회, 참가자수는 79,760명에 달함 을 볼 수 있다. 이를 박은식이 1920년에 간행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와 비교하면, 순국자 수, 부상자수, 피체자수 등을 혈사보다도 적게 추산했다. 연구팀에서 조사한 이들의 총계 15) 「함남지역 최종보고서」, 「함북지역 최종보고서」 , 김진호, 「함경남도의 3·1운동」, 박은식, 한국독립운동 지혈사(백암박은식전집2, 522쪽, 원문 172-173쪽) 참조.
함경도 지역 조사성과❙ 39 는 1,728명임에 비해, 혈사는 7,017명이다. 2004년에 간행된 윤병석의 증보 3·1운동사는 총계가 ‘7,565명+약간 11곳’으로 더 많다. 시위횟수는 많게 조사되었으나, 참가자수는 혈사 보다는 많으나. 증보보다는 적다. 이는 연구팀에서 1차 자료에 근거하여 조사한 결과로 보 이나 보다 면밀한 재검토가 요구된다. 3. 지역별 사적지 형태와 현황 함경도 지역에서 만세운동은 2개월에 걸쳐 거의 전역에서 전개되었다. 독립만세를 일으킨 것 만해도 함남지역이 110회, 함북지역이 84회에 이른다. 이들 지역에는 만세운동을 협의 준 비했던 곳과 시작한 곳 등이 확인된다. 또한 시위대와 일제 군경과의 대치했던 곳 그리고 탄 압당한 곳 등이 있다. 이러한 곳들은 역사적인 사적지로 선정하여 역사 교육장으로 기념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사적지를 선정하는 기준으로 1)협의, 준비지, 2)봉기지, 3) 활 동 및 탄압지를 설정할 수 있겠다. 1) 협의, 준비지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준비했던 곳은 주로 주도자들의 개인 집에서 행해졌다. 북청군 신창 면 신창리의 金元燮 집에서 독립선언서 300매를 인쇄하였으며, 함흥의 李根載 집에서도 독립 선언서 3,000여매를 인쇄하고 태극기 2~30기를 제작한 것과 북청군 이원군 서면 한당리의 鄭 基玉 집에서 독립선언서를 교부하는 등 만세운동을 준비한 것 등이 확인된다. 함흥군 신창리 의 朱倍熺는 자기 집에서 동지들과 독립선언서를 바탕으로 함흥의 독립신문 원고를 작성하였 다. 이들은 함흥면의 만세교 위쪽의 산기슭에서 독립신문 200여매를 등사판으로 인쇄하여 각 처에 배포하였다. 이외에도 고원 하발면 조양리의 林根泰 집, 정평군 선덕면 구남리의 崔道坤 집, 홍원군 학천면 풍산리의 姜鍊翔 집 등이 있다. 학교 숙직실이나 면사무소, 군청과 같은 기관에서 준비되기도 하였다. 북청군의 평산면에 서는 李求俊 등이 평산보통학교 숙직실에서 대조선독립단, 조선민족독립단 명의의 경고문 등 300여장을 인쇄하였다. 함흥 읍내의 永生중학교 기숙사에서는 학생들이 수천 장의 태극기를 그렸다. 함흥군 천서면에서는 韓相鳳 등이 면사무소 소사실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 고원군에서는 군청 서기인 徐丙河가 군청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 함북 청진에서는 張
40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彩男 등이 부령군 청암면 사무소에 들어가 등사기를 훔쳐 선언서 1천여 매를 인쇄하였다. 또한 천도교구당이나 기독교회와 같은 종교 건물에서도 협의, 준비하였다. 고원군의 천도 교종리원에서도 종리원장 趙東源 등이 회합을 갖고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다. 북청군 노덕면 내리에 있는 천도교구실에서도 교구장과 韓明吉 등이 만세운동을 결의하고 독립선언서를 인 쇄하였다. 북청군의 신창면 신창리에 있는 신창천도교구당에서도 조인환 등이 만세운동을 결 의하고 ‘조선국자주독립만세’라는 깃발을 제작했다. 이원군의 천도교구실에서도 李道在 등이 독립선언서 500여 매를 인쇄하였다. 홍원군 학천면 풍산리에 있는 천도교구당에서도 교구당 강남섭 등이 만세운동을 결의하였다. 함흥군 함흥면 중하리에 있는 중하리교회에서는 李順榮 장로 등이 회합을 갖고 만세운동을 결의하였다. 원산부 남촌동의 야소교 감리교 교회는 원산 3·1운동의 진원지이다. 목사 鄭春洙와 신도 李可順 등은 독립만세를 협의하였으며, 정춘수 는 서울에서 보내온 독립선언서를 이가순에게 원산지역에 배포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독 립선언서가 함경남도 각 관청에 발송되고 광성학교 학생들을 통해 원산부내 각지에 배포되었 다.16) 2) 봉기지 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은 주로 牛시장, 米시장, 夜시장 등 시장이지만, 이 외에도 마을 공터 나 거리, 강뚝, 정거장, 商會 앞 등 군중이 모여 있거나 집결하기 쉬운 곳을 택했다. 기독교회 당이나 천도교구당에서도 집결하였다. 정평군 춘류면 신하리에서는 야소교회에 집합하였다. 풍산군 안산면과 이원군 서면에서는 천도교구당에서 군중이 집합하여 활동을 개시하였다. 산 에 올라 만세운동을 전개한 지역도 있다. 북청군 노덕면의 천도교도 학생들이 태극기를 들고 북과 징을 치며 靈德山에 올라 만세를 고창하였다. 신흥군 영고면 주민들은 동송리의 獨山에 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신흥군의 원평면에서도 高堂山에 올라 만세를 고창하였다. 홍원군 용천면 중평리의 산등성이에 인근 주민들이 집결 하여 연설을 하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면사무소나 학교운동장에서 심지어는 헌병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하였음이 확인된 다. 이원군 동면에서는 면사무소에 집결하여 만세를 고창하고 이동하였다. 교정에서 만세운 동을 일으킨 곳은 의외로 많다. 북청군의 평산면에서는 평산보통학교에서, 양천면에서는 양 16) 「함남지역 최종보고서」, 「함북지역 최종보고서」 참조.
함경도 지역 조사성과❙ 41 천보통학교에서 집결하였다. 북청군의 속후면에서는 학생들이 속후보통학교에 집결하여 만 세운동을 주도하였는데 교장 朱東律이 만세를 선창하면서 시위를 권유하기까지 하였다. 신흥 군 가평면에서는 학생들이 가평보통학교 운동장에 집결하여 태극기를 앞세우고 만세를 부르 며 행진하였다. 신흥군의 동고천면에서는 신흥보통학교 학생들이 등교하여 만세운동을 일으 켰으며, 원평면에서도 원평보통학교 학생들이 교정에서 만세를 고창하였다. 이원군 남면 주 민들은 遮湖보통학교 교정에 집결하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활동하였다. 헌병분견소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한 점은 매우 특기할 만하다. 신흥군 상원천면 邊仁德 등 주민들은 구중리에 있는 헌병주재소로 가서 한국이 독립하였다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정평면의 고산면 주민들 은 풍송리에 있는 헌병주재소에 가서 만세운동을 일으켰다.17) 일반적으로 시장이나 다른 집 결지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하고 면사무소나 주재소로 이동하는 것이 순서이지만, 이들 곳에서 는 처음부터 헌병주재소에 집결하여 활동하였다. 이는 이 지역 3·1운동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3) 활동, 탄압지 시장과 운동장 등지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한 시위대는 거리를 행진하면서 독립만세를 고창 하였다. 이들은 도중에 일제 경찰이나 헌병대의 탄압으로 체포되거나 해산되었다. 산에 올라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도 있다. 함흥 기곡면 중리 주민들은 거리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나 서 栗洞山에 올라 정상에서 만세를 불렀다. 신흥군 원평면 최양동에서는 보통학교 교정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마을 중앙에 있는 朴山에 올라 정상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원평면 중 리 주민들도 원평시장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고 면소재지인 남평리 古堂山에 올라 독립만세 를 외쳤다. 함북의 길주군에서는 덕산면 일신동에서 許鴻 등이 산봉우리에 올라 모닥불을 피 워놓고 북과 징을 치면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성진의 학성면에서도 주민 250명이 산위에 올 라 태극기를 휘두르며 만세를 불렀다. 주민들은 면사무소나 군청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력 진압에 항거하여 기관의 기물을 파괴하는 직접적인 활동이 있었다. 이원군 동 면 주민들은 면사무소에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빼앗아간 세금을 내 놓으라면 납세 반환을 요구하였다. 정평군 고산면 덕흥리와 흥봉리 주민들은 고산면사무소로 행진하여 사무를 중단 17) 「함남지역 최종보고서」, 「함북지역 최종보고서」 참조.
42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시키고 면장을 동행하고 풍송헌병주재소로 가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신흥군 상원천 면 주민들도 구중리에 있는 헌병주재소와 면사무소에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갑산군 장평 면의 천도교도 200여명은 갑산군청으로 행진하며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혜산진 수비 대는 장교 이하 12명을 출동시켜 시위대를 진압하였다. 북청군 평산면에서는 李求準과 高明 哲이 면사무소에 석유를 뿌리고 방화하는 등 격렬하게 항쟁하였다. 헌병대를 향해 행진한 곳이 많았다. 그 과정에서 총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함경 도 지방은 특히 헌병이 많이 배치되었다. 1919년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각 지역별 헌병 배 치 현황을 보면, 함경도가 1,832명으로 전국 9,088명의 20%에 달한다.18) 함남지역의 덕원 읍내에서 주민들은 헌병대의 무력 탄압에 항거하여 격한 군중들이 헌병대 를 습격하였다. 정평군 춘류리 신상면에서 韓壯蕃 등이 이끄는 시위대는 신상리 시장에서 집 결하였다가 일부 군중들은 우편소 앞에서 만세를 외쳤고, 수백 명은 신상리 헌병주재소를 습 격하고 일본인 철도 관사를 불태웠다. 출동한 헌병대의 무차별 총격으로 1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정평군 선덕면에서도 시위대는 헌병주재소의 집기들을 파괴하였다. 정평군 고산면 구창리에서도 인근 주민 1,000여명이 헌병주재소에 집결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 원군 주민들은 천도교구당에서 독립만세를 외친 후 헌병주재소로 이동하여 구금자 구출을 위 해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金喜日 金喜善 형제 등 4명이 순국하였다. 풍산군 안산면의 천도교 풍산교구당에서 봉기한 군중들은 헌병들의 무력 탄압에 항거하여 헌 병분견소에 들어가 기물을 부수고 총기 탈취를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헌병의 발포로 1명 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단천군 파도면에서도 주민들이 3월 10일 헌병분대를 향해 이동하다 가 헌병들의 발포로 徐鳳化 등 7명이 희생되었다. 다음 날 주민들은 재집결하여 헌병대와 군 청을 향해 행진하였다. 그러나 헌병대의 무차별 총격으로 현장에서 18명이 순국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143명이 체포되었다. 단천군 주민들은 3월 22일 헌병주재소에 가서 독립 만세를 부르며 구금된 주민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또 다시 헌병대의 총격으로 8명 이 현장에서 순국하는 등 단천군에서는 헌병대에 의한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함북 명천군 하가면 화대동에서는 3월 14일 시위대 5천여 명이 화대 헌병분견소에서 시위 를 벌이다가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5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주민들은 18) 헌병 1명당 인구수 역시 전국 평균이 1,846명임에 비해 함경도는 927명이다. 특히 함북의 경우에는 598명으 로 전국 평균의 3분의 1에 해당한다(조선총독부, 조선총독부통계연보1919. 신복룡, 「북부지방의 3·1운동 」, 한민족독립운동사3, 국사편찬위원회, 1988, 331쪽 인용).
함경도 지역 조사성과❙ 43 다음날 면사무소를 향해 행진하였으며 일제의 탄압으로 박승룡 등 10여명이 검거되었다. 길 주군 양사면의 李龍圭 등은 양흥동 주민들과 합수헌병주재소로 몰려가 시위하였다. 신풍리에 서도 헌병분견소에 가서 시위하였다. 성진군의 시위에서도 주민들과 학생들이 일본인 상가, 우체국, 경찰서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시위에 며칠간 지속되고 사태가 험악해지자 경찰 서에서 나남 기병대에 지원을 요청함에 나남 보병 제37여단에서 장교 이하 21명을 파견하여 진압하기까지 하였다. 헌병주재소에 비해 경찰서를 향해 시위한 곳은 오히려 적었다. 홍원군 용천면 평포면 주민 들은 池相鳳 등의 지휘로 평포경찰주재소를 향해 행진하였다. 주민들은 출동한 일경과 충돌 하여 朱洛祖 등 2명이 순국하였다. 원산에서는 시위대가 원산경찰서를 향해 향하자 헌병과 소방대들이 공포를 쏘면서 해산시켰으며, 이에 군중들은 원산역으로 이동했다. 만세운동 기간에 국경 일대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가들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활동도 있었 다. 3월 18일 홍원군 용운면의 경찰서에 순사들이 없는 때에 주재소를 습격하여 서류를 찢고 기물과 유리창을 부수고 탈출했다.19) 일제는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차별 총격을 일삼았다. 간혹 집기를 부수는 등 공세 적인 행동도 있었지만, 평화로운 시위에도 무차별 발포하였다. 4월 4일 함북의 온성지역에서 250여 명이 시장을 향해 행진하는 도중에 북창평 헌병주재소에서 파견된 헌병들이 무차별 사 격하여 崔禹吉 등 2명이 현장에서 즉사하였다. 일제는 주민들을 체포하여 원산과 함흥의 형 무소에 구금시켰다. 심지어 어린이들도 체포하였다. 4월 8일 홍원군 포청면 삼호리에서 어린 이 100여명이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자 일경이 이들 중에 9명을 함흥형무소에 투옥 시켰다. 이상에서 보았듯이, 함경도 지역에서의 3·1운동은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하였지만,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공세적인 태도를 취한 지역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이에 대하여 헌병들의 무차별 사격으로 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4) 사적지 분포 현황과 특징 이번 조사에서 함경남도의 사적지로 총 200곳을 확인하였는데, 그중에 함흥군과 북청군이 37곳으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정평군 30곳, 신흥군 22곳, 이원군 15곳, 영흥군 12곳 등의 순 19) 「함남지역 최종보고서」, 「함북지역 최종보고서」 참조.
44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이다. 함남지역의 군별 사적지 현황은 다음과 같다.20) 표4. 함남지역 사적지 현황 군 별 갑 산 군 고 원 군 단 천 군 덕 원 군 북 청 군 삼 수 군 신 흥 군 안 변 군 영 흥 군 원 산 부 이 원 군 장 진 군 정 평 군 풍 산 군 함 흥 군 홍 원 군 계 계 3 7 6 2 37 2 22 2 12 8 15 5 30 4 37 8 200 이 중에 중요 사적지로 들 수 있는 대표적인 곳으로 헌병주재소가 있다. 이곳은 봉기지이 면서 탄압을 당한 곳으로 정평, 홍원, 북청, 이원, 단천, 장진, 풍산, 신흥 등지에 걸쳐있다. 경 찰서 역시 중요 사적지로 볼 수 있다. 함흥경찰서, 영흥 성리경찰주재소, 홍원 용운경찰서 등 이 있다. 정평군청과 홍원군청, 단청군청 그리고 북청 상거서면 면사무소, 이원군 남면과 동 면 면사무소, 신흥군의 영고면과 동상면 면사무소 등 지방관청도 들 수 있다. 종교 기구로는 북청군 천도교구실, 단천군 천도교구당, 풍산군 천도교구당, 갑산군 천도교구당, 영흥 천도교 구당, 고원 천도교종리원, 그리고 정평의 신하리 야소교회 등이 있다. 그리고 학생들의 활동 지였던 이원 남면보통학교, 신흥군 원평보통학교, 북청군 속후학교와 용연학교 등이 특기할 만한 사적지로 볼 수 있다. 함북지역의 사적지는 81곳이 확인되었다. 그중에 명천군이 17곳으로 가장 많고, 성진군과 길주군이 15곳, 회령군이 11곳 등의 순이다.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21) 표5. 함북지역 사적지 현황 군별 청 진 부 경 성 군 경 흥 군 길 주 군 명 천 군 무 산 군 부 령 군 성 진 군 온 성 군 종 성 군 회 령 군 계 계 5 5 3 15 17 3 1 15 4 2 11 81 함북지역 중요 사적지로 보통학교가 많음이 특징적이다. 명천의 보촌학교, 우동학교, 명동 학교, 길주의 동일학교, 성진의 보신여학교, 임명보통학교, 무산의 무산보통학교, 회령의 회령 보통학교, 경흥의 경흥보통학교, 종성의 공립농업학교 등이 확인된다. 헌병주재소로는 길주 의 해자포와 재덕 헌병주재소, 회령의 운기동 헌병주재소가 있다. 면사무소도 여러 곳 있는 20) 「함남지역 최종보고서」 86쪽. 21) 「함북지역 최종보고서」 「별1 지역별 3·1운동 사적지 현황 참조」.
함경도 지역 조사성과❙ 45 데, 명천의 하가면, 길주의 웅평면, 회령의 봉의면 면사무소 등이 중요 사적지이다. 종교 기구 로는 성진의 욱정 기독교회가 있다. 이상에서 제시했듯이, 이번 조사에서 함경도 지역의 사적지로 모두 281곳을 확인하였다. 이 사적지는 1)협의, 준비지, 2)만세운동을 일으킨 장소, 3)활동 및 탄압지로 분류할 수 있다. 우 선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준비했던 곳은 주로 주도자들의 개인 집에서 행해졌다. 학교 숙직실 이나 면사무소, 군청과 같은 기관에서 준비되기도 하였다. 또한 천도교구당이나 기독교회와 같은 종교 건물에서도 협의, 준비하였다. 만세운동은 주로 牛시장, 米시장, 夜시장 등 시장과 마을 공터나 거리, 강둑, 정거장, 商會 앞 등 군중이 모여 있거나 집결하기 쉬운 곳에서 시작 되었다. 기독교회당이나 천도교구당에서도 처음 집결하였다. 산에 올라 만세운동을 전개한 지역도 있다. 면사무소나 학교운동장에서 심지어는 헌병주재소 앞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하였 음이 확인된다. 교정에서 만세운동을 일으킨 곳은 의외로 많다. 헌병주재소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한 점은 매우 특기할 만하다. 이는 이 지역 3·1운동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다음에 시위대는 거리를 행진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산에 올라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도 있다. 면사무소나 군청으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경찰서와 헌병대를 향해 행진한 곳 도 많다. 그 과정에서 무차별 총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특히 단천군에서의 희생자 가 많았다. 단천군 파도면에서 헌병의 발포로 3월 10일 徐鳳化 등 7명이, 다음 날에는 헌병대 의 무차별 총격으로 현장에서 18명이 순국하고 1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3월 22일에도 구금된 주민들의 석방을 요구하다가 헌병대의 총격으로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이와 같은 만세운동을 준비한곳, 처음 시작한 곳, 그리고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과 탄압당한 곳, 특히 헌병주재소와 투옥된 형무소, 판결을 받은 법원 등이 중요 사적지에 해당한다 하겠다. 4. 함경도 지역 3·1운동 문헌자료 함경도 지역에서의 3·1운동에 대한 연구는 미약한 형편이다. 기존의 연구는 박은식의 한 국독립운동지혈사와 이병헌의 삼일운동비사(시사시보사, 1959), 이용락의 삼일운동실록 (금정출판사, 1994)이 있으며, 1969년에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독립운동사 제2권 이 있다. 이후 윤병석의 3·1운동사(정음사, 1974), 신용하의 3·1독립운동(독립기념관 한 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가 간행되었다. 그러나 지역별 전개상황이 미약한 흠이 있었다.
46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2009년에는 김정인과 이정은의 국내 3·1운동1-중부,북부-를 간행하면서 보다 자세한 전개 상을 알 수 있게 되었다.22) 그러나 이 역시 1차 자료에 대한 철저한 분석에는 미흡했다. 본 연구에서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1차 자료 중에서도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판결문을 최대한 확보하여 조사하였다.23) 또한 일본 육군성 자료인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육군성)를 분석하였다. 아 울러 每日申報와 東亞日報 등 신문의 관련 기록을 최대한 수집하였다. 이외에도 독립운 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자료집4~6권, 조선독립운동(김정명 편)과 현대사자료(강 덕상 편),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간행한 한일관계사료집(1919)과 朴殷植의 한국독립운동 지혈사 등을 참고로 하여 만세운동이 일어난 일자별로 작업을 수행하였다.24) 이번 함경도 지역 3·1운동을 조사하면서 가장 심혈을 기울여 수집, 검토한 자료는 역시 판 결문이다. 판결문은 지역에서의 3·1운동에 대한 전모를 자세히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임에 도 그동안 이에 대한 조사가 미흡했음이 사실이다. 이를 지역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25) 22) 이 외에도 관련 연구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참고된다. 김승학, 한국독립사, 독립문화사, 1965. 동아일보사, 삼일운동50주년기념논집, 1969. 김진봉, 3·1운동, 민족문화협회, 1980. 신용하, 3·1운동과 독립운동의 사회사,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1. 이윤상, 3·1운동의 배경과 독립선언(한국독립운동의 역사 1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김병기․반병률, 국외 3·1운동(한국독립운동의 역사 2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조동걸, 3·1운동의 역사, 우사조동걸저술전집, 역사공간, 2010 함경북도지편집위원회, 함경북도지, 2001. 신복룡, 「북부지방 3·1운동」, 한민족독립운동사3, 국사편찬위원회, 1988. 이창건, 「3·1운동 지역별 주도세력 연구」, 효성카톨릭대박사학위논문, 1992. 박걸순, 「3·1운동과 국내독립운동」, 동양학47,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10. 23) 김진호 편,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자료집(3·1운동편, 국가기록원, 2015). 참조 24) 이 외에도 관련 문헌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참고된다. 윤소영 편역, 일본신문 한국독립운동기사집:大阪朝日新聞 3·1운동편 1.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 구소, 2009.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저팬어드버타이즈 3·1운동 기사집, 201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中國新聞 韓國獨立運動關聯記事集(Ⅰ-Ⅲ)-3·1운동편-, 2015. 笹川紀勝 編, 3·1獨立運動判決精選, 고구려, 1999(미간행). 25) 「함남지역 최종보고서」 80쪽(김진호 박사 작성).
함경도 지역 조사성과❙ 47 표6. 함남 지역 재판 회부 인사 군명 인 명 인원 갑산 김명수 등 18명(매일신보 7명) 25 고원 박헌영 등 6명/윤관흥 등 7명 13 단천 선운룡 등 2명/염원형 19명/김승호 등 5명/박승학/권명주/고승규/윤병숙/김기오 31 덕원 오응선 1 북청 김용완 등 2명/김서룡/한명길 등 7명/한병표 등 4명/주용길/염승길/강석규/전훤식 등 6 명/김사익 등 3명/이구준 등 4명/최승균/조인환 등 8명/이태윤/전지석 등 3명/손규철 등 2명/안정관 등 2명/이종률 등 2명/주동률/주열선/이주진 등 6명/박창희/김계식 등 3 명/이유년 등 6명/조석권 등 7명/한병필 75 삼수 조완오 등 8명 8 신흥 유춘갑/정학련/김정칠/박봉일/이증선/이정호/한진우/박인수 등 2명/이용제 등 2명/이 연숙/장일홍 등 12명/변인덕/박봉길(신한민보) 26 안변 김원하 1 영흥 김용환 등 4명/진상직 등 4명/한경복 등 3명/김영두 등 2명 13 원산 이가순 등 13명/김진수 등 3명 16 이원 이도재/장홍규/하홍대/이종렬/김병준 등 38명/김탁 등 12명/최류기(동아일보) 55 장진 한영태 등 28명(매일신보 13명)/김윤석 4명 45 정평 김순연 등 2명/원종집 등 4명/노용빈/이국표/김흥식/한장번 등 5명/정명원/최도곤 등 3 명/서인국 등 2명/박영환/최병헌 등 2명/정구갑/진택룡 등 6명/황명률/노용주/유제섭/ 이병근/박형인 등 4명 38 풍산 맹시정/김창영 등 20명/한주호 등 2명 23 함흥 이봉근/강봉우 등 6명/이근재 등 39명(매일신보 2명)/노영숙/장도원/이규몽 등 2명/김 창호/박상보/김국보/박금순/황인석 등 5명/이규직/이성관 등 2명/이명도 등 4명 68 홍원 강남섭 등 10명/박조섭/유주득 등 6명 17 합계 455 참조: ‘/’ 는 각기 다른 판결임을 표시한 것임. 이 판결문은 현재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함경남도의 경우, 함흥지방 영흥 지청과 원산지청 또는 함흥지방 고등법원에서 경성복심법원 또는 고등법원에 상고하여 올라 온 것들이다. 모두 157건으로 관련 인물이 455명에 달한다. 영흥지청이나 원산지청에서 상소 를 포기한 이들의 판결문은 확인이 안된다. 함경남도의 경우 체포자가 1,149명에 달하니까 694명의 경우에는 체포된 후에 일정한 판결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는 함흥지방 영흥 지청이나 원산지청에 보관된 재판 기록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한편 함경북도 지역에서 재판에 회부된 인사들의 현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26)
48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표7. 함북 지역 재판 회부 인사 제 목 인 명 인원 강승한 등 판결문 강승한, 이학복, 이서규, 이현구, 이영직 5 강학린 등 판결문 강학린, 안성윤, 김수용, 김원배, 정의탁, 김성우, 정근향, 서재영, 이효근, 배민수, 이규용, 이화선, 유훈상, 허 채, 유명식 15 박용한 등 판결문 박용한, 이종선, 남정하, 공선원, 신창화, 김용남, 권병환, 고세관 8 이태인 등 판결문 이태인, 원세율, 전용희, 이용서, 천승률, 이병용, 박일형, 정덕조, 김경찬, 김화용, 김봉수, 김병섭 12 김병련 등 판결문 김병련, 김주봉, 김명철 3 김병수 판결문 김병수 1 박승룡 등 판결문 박승룡, 김익련, 허 을 , 허영준, 허 현, 최계락, 김성련, 김재한, 마의춘, 김상훈, 최우용, 현용묵, 김하용, 박재순 14 김승락 판결문 김승락 1 전창우 등 판결문 전창우, 김창욱, 안병손 3 윤병후 등 판결문 윤병후, 서성칠, 민기수, 윤학송, 장채남, 우석구, 최재훈, 김장환 8 윤익선 등 판결문 윤익선, 이종린, 최치환, 임승옥, 김영조, 윤원삼, 김병농, 김희룡, 문창환, 이문일, 김창현, 조석권, 이기주, 이열성, 이도재, 김용환, 오택언, 김동혁, 고희준, 정호석, 인종익, 백관형, 어대선, 김백원, 차상진, 조형균, 김극선, 양주흡, 황금봉, 이애주, 윤귀룡, 홍순복, 이수창, 한흥리, 김호준, 박노영, 김세룡, 전준흐, 김형기, 윤자영, 김탁원, 최경하, 박윤하, 장기욱, 이규종, 전동환, 이용재, 김백평, 박쾌인, 김철환, 이인영, 김용희, 최흥종, 고재완, 이익종, 이형영, 최강윤, 김종현, 박승영, 채순병, 임준식, 장종건, 이계창, 김성국, 김병수, 이굉상, 오흥순, 이병주, 김응관, 양재순, 박수찬, 최사열 72 황완택 등 판결문 황완택, 박후근, 황지연 3 박원후 등 판결문 박원후, 안창의, 김관하 3 황상봉 등 판결문 황상봉, 김도흠, 유훈상 3 이경화 판결문 이경화 1 이용규 등 판결문 이용규, 최병원, 허종준 3 김형기 등 판결문 김형기, 주종의, 이공후, 윤자영, 김문진, 배동석, 한위건, 김대우, 한창환, 김탁원, 최경하, 나창헌, 박윤하, 김영조, 김백평, 박노영, 장기욱, 이규송, 장채극, 전옥결, 전동환, 이용재, 김철환, 박인옥, 유극로, 박준영, 이형영, 27 문삼언 등 판결문 김봉조, 김영옥, 김용주, 김지혁, 김천홍, 문삼언, 문종언, 박창엽,이지찬, 조영화, 최대길 11 전창우 등 판결문 전창우, 김창욱, 안병손 3 유영오 등 판결문 김귀학, 김동우, 김성륜, 김승익, 금초돌, 라경산, 유영오, 임판석, 차종협, 최계원, 한병익, 한동희, 한동원, 한승준 14 최병일 판결문 최병일 1 마하룡 등 판결문 마하룡, 허 용, 허 길, 김병한, 안상우, 안상용 6 허학봉 등 판결문 허학봉, 최국섭, 허원용 3 합계 220 26) 「함북지역 최종보고서」 별6 「함북 활동 3·1운동 유공자 판결문 목록」 참조.
함경도 지역 조사성과❙ 49 이 판결문 역시 함남지역과 마찬가지로 고등법원과 경성복심법원의 판결문이다. 관련 인물 이 220명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함북 지역의 피검자의 수는 386명에 달하는 것으로 160여명 의 재판기록이 누락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상에서 함경도 출신자들에 대한 판결문 현황을 살펴보았듯이, 함남 출신이 455명, 함북 출신이 220명으로 모두 675명에 달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3·1운동에 참여한 공훈이 인정되어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함남지역 출신이 207명, 함북 출신이 58명으로 263명 에 지나지 않는다. 5. 결론 및 제언 함경도 지역에서의 3・1운동은 함남에서 110회, 함북에서 84회 등 190여회에 걸쳐 전개되었 다. 만세시위에 참가한 사람의 총수는 함남이 50,555명, 함북이 29,206명이었으며, 일본 군경 의 발포로 인한 사망자는 함남이 61명, 함북이 17명에 달한다. 부상자는 함남이 69명, 함북이 45명이었다. 피검자의 수는 함남이 1,150명, 함북이 386명에 달하였다. 함경도에서의 3·1운동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성을 지녔다. 첫째, 함남지역이 원산에서 3월 1일 시작되는 등 비교적 이른 시기에 일어났으며, 함북 지역은 뒤를 이어 3월 중순에 일 어남을 볼 수 있다. 함남지역은 3월 중순에 절정을 이루고 하순 이후 급격히 퇴조한 반면에 함북지역은 4월 중순까지 지속적으로 일어남이 특징적이다. 둘째, 종교 단체, 특히 천도교의 주도로 만세운동이 전개된 지역이 많다. 이는 함경도 지역 의 천도교인의 급격한 증가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천도교 측이 주도한 지역으로는 갑산, 단천, 북청, 이원, 흥원, 길주 등이었으며, 기독교측이 주도한 곳은 원산, 함흥, 신흥, 성 진 등지로 나타났다. 셋째, 학생들이 주도하거나 참여하여 전개한 것도 24회로, 학생층 역시 중요한 주도층였음 을 알 수 있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거나 일으켰다. 이에 따라 많은 보통학 교 교정을 사적지로 선정할 수 있겠다. 넷째,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하였지만,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공세적 태도를 취한 지역이 많다. 이는 헌병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시작하거나 전개함에 따라 헌병들의 가혹한 탄압이 있 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제는 경찰대와 헌병대를 동원함은 물론 나남에 주둔하는 일본군과
50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철도수비대까지 동원하여 시위 군중을 탄압하였다. 특히 함경도 지방에는 헌병이 많이 배치 된 결과 이들의 무차별 발포로 많은 희생이 발생하였다. 이번 조사에서 함경도 지역의 사적지로 모두 281곳을 확인하였다. 이들 사적지는 1)협의, 준비지, 2)봉기지, 3)활동 및 탄압지로 분류할 수 있다. 만세운동을 협의하고 준비했던 곳은 개인 집 이외에 학교 숙직실이나 면사무소, 군청, 그리고 천도교구당이나 기독교회와 같은 종 교 건물이 확인되었다. 봉기지로는 牛시장, 米시장, 夜시장 등 시장과 마을 공터나 거리, 강 뚝, 정거장 앞 등을 확인하였다. 기독교회당이나 천도교구당에서도 봉기하였다. 산에 올라 만 세운동을 봉기한 지역도 있다. 면사무소나 학교운동장에서 심지어는 헌병주재소 앞에서 만세 운동을 시작하였음이 확인된다. 헌병분견소에서 만세운동을 시작한 점은 매우 특기할 만하 다. 이는 이 지역 3·1운동의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 시위대는 거리를 행진하면서 만세운동 을 전개하였다. 산에 올라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도 있다. 면사무소나 군청은 물론 경찰서와 헌병대에서도 활동하였다. 그 과정에서 무차별 총격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이와 같은 만세운동을 준비한 곳과 발생지, 그리고 활동지와 탄압지 등이 중요 사적지이다. 헌병주재소 와 투옥된 형무소, 판결을 받은 법원 등도 사적지에 포함됨은 물론이다. 이번 함경도 지역 3·1운동을 조사하면서 1차 자료 중에서도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판결문을 최대한 확보하여 조사하였다. 또한 일본 육군성 자료인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를 분석하였다. 아울러 每日申報와 東亞日報 등 신문의 관련 기록을 최대한 수집하였다. 그 중에 가장 심혈을 기울여 수집, 검토한 자료는 역시 판결문이다. 판결문 분석 결과 모두 675 명의 인적사항을 찾아냈다. 지금까지 3·1운동에 참여한 공훈이 인정되어 국가로부터 훈장을 받은 독립유공자는 265명이다. 판결문 외에도 이번 조사에서 확인된 함경도 지역 3·1운동 피 해자는 순국자와 부상자, 피체자를 합하여 1,728명에 달한다. 따라서 위 판결문을 재검토하고 또한 북한지역에 남아있을 지방법원의 판결문 등 재판기록을 확인한다면 함경도 출신의 독립 유공자를 확인함은 물론 함경도 지역 독립운동사를 재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향후의 사업을 위해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는 사적지 조사 보고서의 종 합 정리와 사적지 등급의 재조정이 필요하다. ‘북한 3·1운동 사적지 선정위원회(가칭)’를 통 해 사적지 내용에 대한 전반적인 재정리와 등급에 대한 명확한 기준 제시에 따른 사적지 등 급 재조정이 필요하다. 이를 바탕으로 ‘북한 지역 3·1운동 사적지’(가제) 간행이 요망된다. 둘 째 만주지역과 연해주 지역 3·1운동 정리와 사적지 조사도 요망된다. 북한지역과 접경 지역 인 만주와 노령 연해주에서도 3·1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으며, 북한지역과의 연계 하에 전
함경도 지역 조사성과❙ 51 개된 측면도 조사할 필요가 있겠다. 셋째, 북한지역에서의 3·1운동 이외의 독립운동사 전반 에 대한 연구와 사적지 조사로의 확대 시행이 요망된다. 북한지역에서의 한말 국권회복운동 과 일제강점기 항일투쟁사를 종합적으로 연구하고, 아울러 사적지도 조사되어야 명실공히 항 일독립운동사가 완결될 수 있을 것이다. 향후 이러한 사업은 남북 공동간의 역점 사업으로 추진되기를 기대한다. 이는 민족동질성 회복을 위한 선행 사업으로 유의미하기 때문이다.
제3주제 황해도 지역 조사성과 이 용 철 _ 충북대 연구원
황해도 지역 조사성과❙ 55 황해도 지역 조사성과 이 용 철 | 충북대 연구원 1. 머리말 1919년 3월 1일, 일제강점기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났다. 서울을 중심으로 계획된 시위는 평양·의주 등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하였고, 이내 지방 도시와 농어촌으로 급격히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만세시위는 수개월에 걸쳐 지속되었으며 그와 함께 중국·러 시아·미주 등 국외로 확산되어 200만여 명 이상이 참여한 거국적 민족운동으로 승화되었다. 전국방방곡곡에서 일어난 만세 메아리는 올해를 기점으로 이미 100년 전의 함성이 되었으 나 그 장소는 현존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3·1운동의 현장을 보존하는 것은 우리 민족의 당연한 책무이다. 이 같은 견지에서 남한지역의 3·1운동 사적지에 대한 조사와 그것을 보존 을 위한 노력은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북한지역에 남아 있는 사적지에 대해서는 현실적인 제한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현재 북한 전역의 3·1운동 사적지는 직접적인 조사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그러나 현장조 사가 불가능하다고 언제까지나 방치할 수는 없다. 이 같은 견지에서 향후 조사를 대비해 일 단 문헌에서나마 확인할 수 있는 3·1운동 관련 사적지 현황을 조사해보았다. 본고에서는 황 해도 지역의 3·1운동 사적지를 대상으로 했으며, 이를 위해 황해도 지역의 3·1운동을 개관 한 뒤 유형별로 사적지를 분류하여 현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2. 황해도 지역 3·1운동 개관 황해도 지역 3·1운동의 현황을 살펴보기 위해 참고한 자료는 「判決文」과 韓國民族運動
56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시기 3·1~3·10 3·11~3.20 3.21~3.31 4.1~4.10 4.11~4.20 4.21~4.30 시위건수 32(17.3%) 22(11.9%) 25(13.5%) 90(48.9%) 14(16.6%) 1(0.5%) <표1> 시기별 3·1운동 발생 현황 史料(三一運動篇 其一)1), 그리고 獨立運動史2) 등이다. 「判決文」은 3·1운동에 참여했다 가 체포된 이들에 대한 일제의 판결자료이다. 다음으로 韓國民族運動史料는 3·1운동 당시 일제 조선군사령부 및 조선헌병대사령부가 작성한 보고내용을 담고 있다. 마지막으로 독립 운동사는 「判決文」과 일제측 보고자료는 물론 每日申報 등 신문자료와 각종 구술자료를 활용하여 3·1운동사를 정리한 자료이다. 이들 자료들은 3·1운동의 전개양상을 구체적으로 담고 있으며, 본고의 집필 목적이 되는 사적지 확인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자료들이다. 상기 자료를 근거로 황해도 지역의 3·1운동 시위 건수를 살펴보면, 3월 2일 해주군 읍내 시위를 시작으로 4월 22일 장연군 해안면 몽금포리 시위까지 총 184건이 확인된다. 시기별로 구분해보면, 3월 상순(3·1~3·10)에 32건, 3월 중순(3·11~3.20)에 22건, 3월 하순(3.21~3.31)에 25건, 4월 상순(4.1~4.10)에 90건, 4월 중순(4.11~4.20)에 14건, 4월 하순(4.21~4.30)에 1건의 시 위가 발생하였다. 이 같은 시위 발생 추이에서 알 수 있듯이 황해도 지역에서는 3월 한 달 동안 꾸준히 시위 가 일어나다가 4월 상순에 총 90여 건의 만세운동이 발발하면서 3·1운동이 절정기에 들어가 고 있었다. 황해도 지역에서 일어난 전체 시위의 절반 가량이 바로 이 시기에 집중되고 있는 것이다. 다만 황해도 지역의 3·1운동은 4월 상순을 지나면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는데, 4월 중순에 들어서는 상순에 비해 거의 8분의 1 수준으로 시위가 급감한 가운데 4월 22일 장연군 시위를 끝으로 추가적인 시위가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시위가 4월 초에 들어가 절정에 달했다는 점에서 황해도 지역의 3·1운동 역시 시위의 전국적 추세에 부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 사이에 시위가 최고 조에 이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황해도 지역의 3·1운동을 지역별로 살펴보면, 가장 많은 시위가 발생한 곳은 해주군으로 총 23회의 시위가 확인된다. 그 다음으로는 신천군이 22건, 금천군이 21건 순이었으며 가장 1) 大韓民國國會圖書館, 韓國民族運動史料(三一運動篇 其一), 大韓民國國會圖書館. 2) 獨立運動史編纂委員會, 獨立運動史 2,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1975.
황해도 지역 조사성과❙ 57 지역 해주 신천 금천 평산 안악 옹진 연백 재령 서흥 시위건수 23 22 21 15 13 13 12 11 9 장연 봉산 수안 곡산 은율 송화 황주 신계 합계 9 7 7 5 5 5 4 3 184 <표2> 지역별 3·1운동 발생 현황 적은 시위가 일어난 곳은 신계군으로 3건이었다. 이중 황해도 3·1운동과 관련해서 주목할 지역은 해주군이다. 황해도 내에서 시위가 가장 먼저 일어난 지역인 동시에 가장 많은 운동이 발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실제 해주군 해주읍 에서는 3월 1일부터 만세운동의 조짐이 있었으며, 그 다음날인 3월 2일 만세운동이 일어나면 서 옹진·황주군과 함께 도내에서 시위가 가장 먼저 일어난 지역이 되었다. 더욱이 해주군에 서만 총 23회의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는 신천군 22회, 금천군 21회보다도 많은 것이었으 며, 가장 적은 횟수가 확인되는 신계군에 비하면 거의 8배나 많은 수준이었다. 한편 수안군의 경우는 총 7건의 시위가 발생했다는 측면에서 시위 건수는 많지 않지만 시 위의 상징성이란 측면에서는 주목을 요한다. 3월 3일 수안군 수안읍에서 천도교도를 중심으 로 괄목할 만한 시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수안군 읍내에서는 安鳳河를 비롯한 천도교인 들의 주도 하에 200여 명이 참여한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조선독립선언서」를 배포 한 가운데 헌병 분대 사무실까지 나아가 퇴거를 요청하는 등 공세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일제는 발포까지 하면서 무차별적으로 시위대를 탄압하였고 이 과정에서 시위대 측에 무려 13명의 사망자와 18명의 부상자, 그리고 83명의 체포자가 발생하였다. 3월 3일 수 안읍 시위는 시위 참여자가 200여 명에 불과했다는 점에서 대규모 시위는 아니었다. 1,500명 이 참여한 3월 9일 재령군 재령읍시위나 3,000명이 참여한 12일 은율군 장연면 동부리 시위와 비교하면 참여자의 규모는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안군 수안읍 시위는 일제 헌 병대의 퇴거를 요구하는 등 어느 지역보다도 선명한 목적성을 표출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황해도 3·1운동의 참여자를 보면, 朴殷植의 韓國獨立運動之血史와 일제 측 자 료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박은식은 황해도에서 발생한 115회의 시위에 92,670명이 참여하 여 238명이 사망하고 414명이 부상한 가운데 4,218명이 체포되었다고 기술했으나, 일제 측에 서는 104회의 시위에 38,073명이 참여하여 36명 사망하고 79명이 부상했으며 2,210명이 체포
58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제는 박은식이 집계한 참여자 및 피해현황을 크게 축소 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일제는 3·1운동 참여자로서 체포된 이에 한해 연령·직업·교육수준·종교 등을 조 사하여 기록으로 남긴 바가 있다. 황해도 지역 3·1운동 참여자 역시 체포자에 한해 이를 파 악할 수 있는데, 먼저 1919년 6월 30일을 기준으로 황해도 지역 3·1운동 참여자가 주로 수감 된 해주감옥의 수감자 연령을 보자3). 남성은 924명으로 18세 미만은 28명(2.5%), 18~19세 64명 (6.9%), 20~29세 347명(37.5%), 30~39세 260명(28.1%), 40~49세 144명(15.5%), 50~59세 57명 (6.1%), 60세 이상은 24명(2.5%)으로 나뉘고 있다. 한편 여성은 24명으로 18세 미만은 5명 (20.8%), 18~19세 4명(16.6%), 20~29세 7명(29.1%), 30~39세 6명(25%), 40~49세 1명(4.1%), 50~59 세 1명(4.1%), 60세 이상은 0명(0%)으로 나뉘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황해도 3·1운동 참여자 로 수감된 총인원은 948명으로 18세 미만은 33명(3.4%), 18~19세 68명(7.1%), 20~29세 354명 (37.3%), 30~39세 266명(28%), 40~49세 145명(15.2%), 50~59세 58명(6.1%), 60세 이상은 24명 (2.5%)인데, 전국적인 추세와 마찬가지로 20대와 30대가 각각 37.3%와 28%를 차지하여 황해도 지역의 시위를 주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한편으로 18세 미만과 18~19세를 합친 비중 도 10.5%를 차지하고 있어 황해도 지역 3·1운동의 일익을 담당한 사실이 파악된다. 다음으로 학력을 보면, 고등학교 졸업이상 및 동등 이상자가 0명(0%), 중학교 졸업 이상 및 동등자가 2명(0.2%), 고등소학교 졸업 및 동등이상자가 48명(4.9%), 심상소학교 졸업 및 동등 이상인 자가 125명(12.8%), 심상소학교 2년 정도 이상인자 238명(24.4%), 무교육자 257명 (26.4%), 문맹자가 303명(31.1%)이었다.4) 전체 973명 중 소학교 이상 교육을 받은 인원이 670 명으로 68.8%에 달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보았을 때 황해도 지역 3·1운동 참여자의 상당수 이상은 교육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황해도 지역 3·1운동은 기독교와 천도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으므로 종교 현황 역시 중 요하다. 해주감옥에 수감된 황해도 3·1운동 관련자들의 종교 현황을 보면5), 총 973명 중 천 도교는 158명(16.2%), 侍土敎 1명(0.1%), 천주교 4명(0.4%), 장로교 130명(13.3%), 감리교 77명 (7.9%), 安息敎會 2명(0.2%), 무종교 611명(62.7%)임을 알 수 있다. 이중 장로교와 감리교를 합 치면 207명으로 21.2%에 육박하고 있어 전체 수감자의 5분의 1 가량이 기독교신자였고, 천도 3) 통계에는 刑事被告人과 受刑者로 구분되어 있으며, 여기에서 제시하는 수감자 수치는 양자를 합산한 것이다. 4) 大韓民國國會圖書館, 韓民族運動史料(三·一運動編 其二), 1978, 266쪽. 5) 大韓民國國會圖書館, 韓民族運動史料(三·一運動編 其二), 1978, 273쪽.
황해도 지역 조사성과❙ 59 교도 역시 16.2%에 달해 기독교도보다는 다소 적지만 역시 상당수의 천도교 신자들이 황해도 의 3·1운동에 참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직업현황을 보면, 전체 973명 중 사립학교 교사 18명(1.8%), 공립학교 학생 10명(1%)·사립 학교 학생 23명(2.3%), 면장 및 구장 1명(0.1%), 면서기 4명(0.4%), 관공서·공공단체 사무원 3 명(0.3%), 의사 및 의생 5명(0.5%), 代書業 4명(0.4%), 牧師 2명(0.2%), 전도사 9명(%), 예수교 役員 2명(0.2%), 천도교 역원 10명(1%), 공무 및 자유업 30명(3%), 농업·목축·양잠 653명 (67.1%), 토석채취 제조 8명(0.8%), 금속류제조 6명(0.6%), 직물·편물류제조 및 染酒業 1명 (0.1%), 木竹類에 관한 제조 1명(0.1%), 의복·제식품 제조 및 세탁업 3명(0.3%), 토목건축업 4 명(0.4%), 음식품·기호품제조 4명(0.4%), 이발업 4명(0.4%), 공업특기 이외자 3명(0.3%), 곡물 상 14명(1.4%), 매약상 6명(0.6%), 잡화상 57명(5.8%), 여인숙·하숙·음식상점 34명(3.4%), 상 업특기 이외자 16명(1.6%), 婢僕日雇傭業 10명(1%), 노동자 3명(0.3%), 無職이 27명(2.7%)으로 참여자의 3분의 2 이상이 농민층이었다. 황해도 3·1운동의 대표적 특징은 같은 북부지역인 평안도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천도교로 대변되는 종교집단과 밀접한 연관 하에서 시위가 전개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황해도의 3·1 운동 발생 시점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황해도에서 최초 시위가 발생한 것은 3월 2일 해주읍이었으나 그 전날인 3월 1일에도 거사 시도가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결국 황해 도 역시 3·1운동의 시작과 함께 시위가 발생했던 서울이나 평안남도 평양, 또는 평안북도 의 주·선천 등과 함께 거의 동시에 운동이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해주읍에서 시 위를 주도했던 세력이 바로 기독교와 천도교 세력이었다. 3월 1일 해주읍 남본정 기독교회 목 사 오현경이 예배당에서 광무황제 봉도식과 선언서 봉독식을 열었고, 다음날인 2일에는 천도 교인 300명이 중심이 되어 시위를 전개한 것이다. 따라서 한강 이북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황해도의 3·1운동 역시 기독교·천도교 등 종교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다. 3월 2일 해주군 시위를 시작으로 본격화된 황해도 지역 3·1운동은 4월 22일 장연군 해안면 몽금포리의 시위를 끝으로 총 184회 발생하였으며, 이 기간에 많은 기독교·천도교인들이 시 위에 참여하였다. 일례로 황해도 지역 3·1운동 참여자로 수감된 인원의 3분의 1 이상이 기독 교·천도교 신자인 것이다. 황해도 지역 3·1운동 참여자로서 기독교와 천도교를 믿는 인원 은 전국적인 차원에서 보았을 때도 결코 적은 수가 아니었다. 3·1운동 당시 전국에 수감된 시위대 중 천도교도와 기독교계 신도는 각각 1,363명과 1,879명이었는데, 그중 10.7%에 달하 는 147명의 천도교 신자와 10.9%에 달하는 기독교계 신자 206명이 해주감옥에 수감되어 있었
60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기 때문이다.6) 한편 학교에 몸담고 있는 교사와 학생들 역시 황해도 지역의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하고 있었다. 예컨대 황해도에서 발생한 시위 184회 중 학생과 교사가 참여한 시위가 무려 67 회에 달하고 있고, 여기에 서당교사가 주도한 시위까지 합하면 황해도에서는 69회의 시위가 학생·교사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 물론 대개 학생 조직은 기독교 조직과 밀접한 연관 하에서 시위에 참여했고 황해도 역시 그런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69회의 시위 건수는 황해도의 3·1운동과 학생·교사로 대변되는 학교조직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방 증하는 것이다. 3. 황해도 지역 3·1운동 사적지 현황과 특징 1) 사적지 유형별 현황 황해도 지역 3·1운동 사적지는 총 157개소가 확인된다. 시위 횟수가 184회였다는 점에서 양자 사이에 27건의 차이가 있는데, 이는 동일한 지역에서 여러 차례 만세운동이 일어난 까닭 에 사적지가 시위 횟수보다 적은 것이다. 확인되는 157개소의 사적지는 유형별로 구분 가능 하며, 해당 유형은 거리·시장·헌병주재소(분견소 포함)·면사무소·기독교회·천도교회· 학교·병원·산야로 정리될 수 있다. 각각의 유형을 보자. ‘거리’는 3·1운동이 발생한 가장 기본적인 공간이었다. 시위대가 활보하며 만세운동을 벌이기에 적합한 공간이었고, 또 한편 으로 사료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장소 개념이었다. ‘시장’ 역시 거리와 비슷 하다. 많은 시위가 장날을 이용하여 시장에서 일어났는데, 이는 만세운동의 특성상 교통이 편 리하여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장소가 선호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헌병주재소(분견소)’는 3·1운동 탄압의 전초기지였지만 그와 함께 만세운동의 목적지이기도 했다. 전국적으로 확인 되는 공세적 시위를 보면 시위대가 헌병주재소로 진출하여 체포된 이를 구출하거나 아니면 건물을 파괴하는 등의 활약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면사무소’ 역시 일제식민지배의 최말단 기구로서 3·1운동 당시 시위대의 표적이 되고 있었다. 이외 면사무소에서는 등사기 등 「조 선독립선언서」의 등사를 위한 기구들이 갖춰져 있었고, 한편으로 면사무소의 위치가 대개 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4, 독립유공자사업기금운용위원회, 980~981쪽.
황해도 지역 조사성과❙ 61 유형 거리 시장 헌병주재소 면사무소 기독교회 개소 101(64.3%) 34(21.6%) 8(5%) 4(2.5%) 4(2.5%) 천도교회 학교 병원 산야 합계 2(1.2%) 2(1.2%) 1(0.6%) 1(0.6%) 157(100%) <표3> 황해도 내 사적지 현황(유형별) 면의 중심지역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접근성이 좋기도 하였다. ‘기독교회’와 ‘천도교회’는 기독교와 천도교 세력이 비교적 강력했던 한강 이북 지역에서 시위의 발흥지로 자주 이용되 고 있었다. 또한 대한제국기 애국계몽운동은 지역을 막론하고 3·1운동의 주요 원인 중 하나 였고, 이는 학생과 교사가 참여한 만세시위로 표출된 가운데 ‘학교’라는 3·1운동 사적지를 남 기는 배경이 되었다. 황해도 지역에서 확인되는 157개소의 사적지를 유형별로 구분하여 보면, 거리 101개소 (62.5%), 시장 34개소(21.5%), 헌병주재소 및 분견소 8개소(5%), 면사무소 4개소(2.5%), 기독교 회 4개소(2.5%), 천도교구실 2개소(1.2%), 학교 2개소(1.2%), 병원과 산야가 각각 1개소(0.6%) 였다. ‘거리’는 황해도를 포함하여 전국적으로도 가장 많은 3·1운동 시위가 발생한 공간이었다. 이는 그 공간적 개념에 시위장소가 특정되지 않은 수많은 시위들이 모두 탑재되었기 때문이 기도 했다. 이 같은 배경에서 황해도 내 3·1운동 사적지로 확인되는 ‘거리’는 총 102개소로 62.5%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리’ 다음으로는 ‘시장’의 비중이 컸다. 황해도 내 시장과 관련된 3·1운동 사적지는 총 34개 소이다. 황해도 내 3·1운동 사적지로서 대표적인 시장 다섯 곳을 특정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①해주군 해주읍시장에서는 3월 10일·31일, 4월 1일에 걸쳐 세 차례 시위가 일어났고, ②평산 군 평산읍시장에서는 3월 7일과 4월 2일 두 차례 시위가 발생하였다. ③장연군 장연읍시장에서 는 3월 11일·16일과 4월 11일, ④은율군 은율읍시장은 3월 26일, 4월 5일·15일에 만세시가 있 었고, ⑤송화군 봉내면 수교리시장에서도 3월 17일과 4월 8일 두 차례 만세시위가 일어났었다. 이상의 시장들은 교통의 중심지로 해당 지역 만세운동의 중요거점으로 활용된 곳들이었다. ‘시장’ 만큼은 아니나 ‘헌병주재소 및 분견소’ 역시 황해도 지역 3·1운동과 관련하여 많은 사적지가 확인되는 유형이다. 총 8곳이 있는데 전체를 나열해보면, ①금천군 송내면 송정리
62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지역 금천 해주 신천 평산 안악 연백 옹진 서흥 재령 개소 21 19 18 12 11 11 11 9 9 장연 봉산 곡산 수안 황주 송화 은율 신계 합계 7 5 5 5 4 4 3 3 157 <표4> 지역별 3·1운동 사적지 현황 헌병주재소, ②서흥군 매양면 녹안리헌병주재소, ③수안군 수구면 석달리헌병주재소, ④신천 군헌병주재소, ⑤신천군 가련면 조우리헌병주재소, ⑥연백군 은천면 옥산리헌병주재소, ⑦평 산군 세곡면 누천리헌병분견소, ⑧해주군 장곡면 죽천리헌병주재소 등이 이에 해당한다. 다음으로는 ‘면사무소’인데, 일제의 면사무소 역시 ‘헌병주재소 및 분견소’와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다. 해당 장소로는 ①해주군 서변면사무소, ②금천군 백마면사무소, ③안악군 문산면 사무소, ④해주군 청룡면사무소가 있다. 기독교회도 4개소가 확인되는데, 황해도 3·1운동의 특성상 이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해 당 장소로는 ①서흥군 매양면 덕암리교회, ②옹진군 동남면 전당리교회, ③옹진군 흥미면 식 여리 율목동예배당, ④해주군 해주읍 남본정예배당이 있다. 천도교구실은 2개의 사적지가 확인되고 있다. 천도교 역시 기독교와 함께 황해도 지역 3·1 운동을 견인한 주요 세력이었다. ①곡산군 청계면 문양리 천도교전도실, ②수안군 수안읍 천 도교 교구실이 확인된다. 학생과 교사 역시 황해도 지역의 3·1운동을 견인한 주체였다. 관련하여 3·1운동과 관련된 황해도 지역의 학교는 총 2개소가 확인이 된다. ①재령군 북률면 내종리 숭의학교, ②황주군 양성학교가 있다. 이외 2개소는 병원과 산야로 각각 1개소씩 확인이 된다. ①해주군 기독교구세병원, ②덕월 산이 그것이다. 2) 지역별 분포 현황 황해도 지역 3·1운동 사적지의 지역별 분포 현황을 보자. 많은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황해도의 지역별 사적지 수는 일반적으로 3·1운동 발생 추이와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다만 시위가 가장 많이 일어났던 해주군의 경우는 시위 횟수가 23건이었으나 사적지는 19개로 4개
황해도 지역 조사성과❙ 63 가 감소했으며, 신천군 역시 시위는 22회가 발생했으나 사적지는 18개소로 4개가 감소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역전현상이 일어나 시위 횟수와 사적지 수가 일치하는 금천군이 가장 많은 3·1운동 사적지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 된다. 이는 동일한 지역에서 여러 차례 시위가 발생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해주군 해주읍이 대표적인데, 해주읍에서는 3월 2·10·14·30·31일, 4월 1일 등 6회에 걸쳐 시위가 발생하였다. 이 같은 맥락에서 사적지가 가장 많이 확인되는 지역은 금천·해주·신천군으로 최대 21개소에서 18개소가 확인되며, 반 대로 가장 적은 사적지가 확인되는 곳은 은율·신계군으로 각각 3개소를 보유하고 있었다. 몇몇 지역의 유형별 사적지 보유현황을 보면, 금천군의 경우 사적 21개소의 대부분이 ‘거리’ 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거리가 18개소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이외에는 시장 1개 소와 면사무소 1개소, 그리고 헌병주재소 1개소가 현존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금천군 다음으로 많은 사적지를 보유한 해주군의 경우는 총 19개의 사적지가 확인된 다는 점에서 금천군보다 수는 좀 적지만 유형별로는 다채로운 사적지가 확인되고 있다. 거리 11개소, 시장 3개소, 면사무소 1개소, 기독교회 1개소, 병원 1개소, 면사무소 1개소, 헌병주재 소 1개소가 있어서 학교와 천도교회, 산야 등을 제외하면 황해도에서 확인되는 모든 유형의 3·1운동 사적지가 확인된다. 그 다음으로는 신천군이 총 18개소의 사적지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곳 역시 사적지 유형이 다소 편중된 감이 있다. 시장이 4개소, 헌병주재소가 2개소이고, 나머지 12개소는 모두 거리 이다. 이와는 반대로 신계군과 은율군은 사적지가 가장 적은 편에 속한다. 두 군 모두 3개소의 사적지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중 은율군은 시장이 2개소, 거리가 1개소이며, 신계군은 3곳 모 두가 거리이다. 3) 중요 사적지 사적지 하나하나가 모두 소중하나 특별히 의미 부여가 가능한 곳이 있으므로 관련 사례를 보기로 한다. ‘거리’ 사적지에서는 해주군 해주읍을 꼽을 수 있다. 이곳은 3월 1일에 이미 만 세운동 시도가 있었던 곳이고, 실제 그 다음날인 3월 2일 시위가 일어나 황해도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역 중 하나이다. 더욱이 해주읍 시장까지 포함한다면 이곳에서 일어난 시위만 6회에 달하기 때문에 단일 사적지로는 황해도 지역에서 가장 많은 시위가 일어난 공 간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황해도 3·1운동의 중심지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64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이와 관련하여 해주읍 시장은 해주읍 시위의 절반에 해당하는 3회의 시위가 일어난 곳이 며, 그 자체로 황해도 지역의 3·1운동 사적지에 있어 ‘시장’ 유형을 대표하는 곳이기도 하다. 물론 해주읍과 해주읍 시장을 완전히 분리하는 것은 어찌 보면 무의미한 일일 수도 있을 것 이다. 그러나 해주읍 시장이 자료에서 시위장소로 특정되고 있는 만큼 황해도 지역 3·1운동 관련 ‘시장’ 사적지인 것은 사실이다. 또 이 같은 사실은 그만큼 해주군과 해주읍이 황해도 지 역의 3·1운동에 있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한편 해주읍에 대해서는 ‘시장’ 이외에도 황해도 지역 3·1운동을 대표하는 사적지를 한 곳 더 언급할 수 있다. 해주읍에 위치한 남본정예배당이 그것이다. 이곳은 기독교 교회로 3·1운 동이 일어난 대표적 사적지로 손색이 없다. 3월 2일 기독교인들이 회집하여 만세를 일으켰다 는 점에서 황해도 최초의 시위가 일어난 장소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황해도 지역은 기독교도 의 활약이 많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종교적 차원에서도 상징성이 있는 것이다. 시위의 상징성이란 측면에서는 3월 3일 수안군 수안읍 시위가 일어난 수안읍내 천도교교구 실도 중요한 사적지이다. 시위 참여인원이 200여 명에 그쳤다는 점에서는 대규모 시위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 곳에서 촉발된 시위가 전개되면서 시위대가 일제 헌병의 퇴거를 요구하는 등 시위의 목적성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까지 발생하여 시위의 상징성이 커졌고, 자연히 이 시위가 계획되고 촉발된 수안읍내 천도교교구 실의 중요성 역시 같이 배가된 것이다. 유형은 다르나 시위의 공세성과 관련해서는 4월 9일 시위가 일어난 서흥군 매양면 녹안리 헌병주재소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날 시위에는 500여 명이 참여했는데, 일제의 대탄압 으로 6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한 가운데 무려 61명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시위대의 피해 측면에서는 3월 3일 수안군 수안읍시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헌병주재소’가 일제의 시위대 탄압의 전초기지라는 점에 걸맞게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이다. 4. 맺음말 황해도 지역의 3·1운동은 3월 2일 해주군 등지에서 시작되어 4월 22일 장연군 시위를 끝으 로 일단락되었다. 총 184회의 시위가 확인되며, 시위 과정에서 천도교와 기독교 등 종교세력,
황해도 지역 조사성과❙ 65 그리고 학생·교사 등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이는 황해도 지역의 특성인 동 시에 한강 이북 3·1운동의 특징이기도 했다. 황해도 지역 3·1운동과 관련된 사적지는 총 157개소를 발굴하였다. 유형별로 구분하여 보 면, 거리 101개소(62.5%), 시장 34개소(21.5%), 헌병주재소 및 분견소 8개소(5%), 면사무소 4개 소(2.5%), 기독교회 4개소(2.5%), 천도교구실 2개소(1.2%), 학교 2개소(1.2%), 병원과 산야가 각 각 1개소(0.6%)였다. 특기할 만한 사적지로는 해주군의 해주읍과 읍내 시장, 남본정예배당 및 수안군 수안읍에 위치한 천도교교구실, 서흥군 매양면 녹안리에 위치한 헌병주재소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사적지는 황해도 3·1운동 사적지 중에서도 시위 빈도나 시위의 공세성 또는 시위대의 희생 차원에서 더욱 상징성이 있는 공간들이었다. 추후 정밀한 현장조사와 이를 보존·계승하기 위한 추가적인 관심과 노력이 절실하다고 하겠다.
제4주제 경기·강원 북한 편입지역 조사성과 강 진 갑 _ 경기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
경기·강원 북한 편입지역 조사성과❙ 69 경기·강원 북한 편입지역 조사성과 강 진 갑 | 경기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장 1. 조사 개요 1) 조사 내용 북한지역에 편입된 경기도 및 강원도 북부지역 3·1운동사적지 조사는 역사문화콘텐츠연 구원이 연구팀을 구성하여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로부터 학술 조사를 의뢰받아 실시하였다. 조사는 2018년 5월 11일부터 11월 11일 사이에 실시하였으며, 조사 결과 경기 북 부지역에서 75개, 강원 북부지역에서 83개, 총 158개의 사적지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 글은 조사단원인 강진갑, 성주현, 이승원이 공동조사하여 독립기념관에 제출한 2018년 도 북한지역 독립운동 사적지기초조사 학술용역 최종보고서/ 경기·강원 3·1운동사적지 기 초조사(현행 행정구역 상 북한지역 편입) 학술조사 보고서 내용을 발표 주제에 맞게 재구성 한 것이다. 조사 대상 지역이 북한지역으로 현지답사가 불가하므로 부득이 문헌사료 중심의 조사를 진 행하였다. 조사 내용은 3·1운동 관련 사적지, 북한지역에 편입된 경기도 및 강원도 북부지역 출신 독립운동가 및 3·1운동 참여 유공자 생몰 유적이다. 조사는 1단계로 일제가 만세시위 상황을 보고한 「일차보고」를 수록한 金正明編, 朝鮮獨立 運動 第Ⅰ卷(原書房, 1967)과 姜德相編, 現代史資料, 25-28(みすず書房, 1970)을 토대로 일 자별로 만세시위 일지를 정리하고, 이를 지역별로 분류하였다. 2단계에서는 각 지역의 만세 시위 상황의 구술까지 참고하여 정리한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의 독립운동사 제2권(3·1운 동사)과 대조하여 정리 작업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행정구역과 지명 변화 여부를 조사하고 대조하여 신구 일치화 작업을 진행하였다. 3단계에서는 조사된 자료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사 적지 조사표」를 작성하였다.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이 5종의 자료로 정리되어 독립기념관에
70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제출되었다. ① 경기 및 강원도 북한지역 3·1운동 총괄표 ② 경기 및 강원도 북한지역 3·1운동 현황(일자별) ③ 경기 및 강원도 북한지역 3·1운동 현황(지역별) ④ 경기 및 강원도 북한지역 출신 독립운동가 및 포상 현황 ⑤ 경기 및 강원도 북한지역 3·1운동 포상자 중 국립현충원 안장자 목록 2) 조사에 참고한 문헌자료 상술한 바처럼 조사 대상 지역이 북한지역으로 현지답사가 불가하므로 문헌자료 중심으로 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시 참고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가. 1차 사료 - 姜德相編, 現代史資料, 25-28, みすず書房, 1970. - 국가기록원 독립운동사 재판 판결문 컬렉션 - 국가기록원,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자료집 3·1운동편, 2015. - 金秉祚, 韓國獨立運動史略 上篇, 上海 宣民社, 1920. - 金正明編, 朝鮮獨立運動』 第Ⅰ卷, 原書房, 1967. - 大韓民國臨時政府, 韓日關係史料集, 1919.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日本新聞 韓國獨立運動關聯記事集(Ⅰ-Ⅲ) 3·1운동편 大阪朝日新聞, 2009.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저팬어드버타이즈 3·1운동 기사집, 2015.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中國新聞 韓國獨立運動關聯記事集(Ⅰ-Ⅲ) - 3·1運動 編 -, 201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獨立運動史資料集 4-6권 -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白巖朴殷植全集書 제2권, 동방미디어, 2002) - 笹川紀勝 編, 3·1獨立運動判決精選, 고구려, 1999(미간행). - 每日申報 등 신문자료
경기·강원 북한 편입지역 조사성과❙ 71 나. 2차 사료 및 단행본 - 강성천 외,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자료집 : 3·1운동, 2014. - 국가보훈처, 3·1운동 독립선언서와 격문, 2002. - 김소진, 한국독립선언서연구, 국학자료원, 1999. - 김승학, 한국독립사, 독립문화사, 196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2권(3·1운동사), 1969. - 역사문제연구소 민족해방운동사연구반, 민족해방운동사, 역사비평사, 1990. - 李炳憲, 三·一運動秘史, 시사시보사, 1959. - 李龍洛, 三·一運動實錄, 금정출판사, 1994. - 이정은, 3·1독립운동의 지방 시위에 관한 연구, 국학자료원, 2009. -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국내 3·1운동 - 중부·북부(한국독립운동의 역사 19), 2009. - 한국역사연구회·역사문제연구소 편, 3·1 민족해방운동 연구, 청년사, 1989. 다. 논문 - 김소진, 「3·1독립선언서 33인에 대한 인적 분석」, 한국민족운동사연구7, 1993. - 김한종·남정우·이해영, 「독립운동사교육에서 사적지 활용방법과 그 효과」, 한국독립 운동사연구39, 2011. - 박걸순, 「3·1운동과 국내독립운동」, 동양학47,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2010. - 신복룡, 「북부지방의 3·1운동」, 한민족독립운동사3, 국사편찬위원회, 1988. - 신용하, 「3·1독립운동 발발의 경위」, 한국근대사론2, 지식산업사, 1977. - 이기백, 「3·1운동론」,민족과 역사, 일조각, 1971. - 이정은, 「3·1운동 연구의 현황과 과제」, 한국사론26, 국사편찬위원회, 1996. - 조동걸, 「3·1운동의 지방사적 성격-강원도지방을 중심으로」, 역사학보47, 1970. - 조항래, 「3·1독립선언서의 이념적 배경」, 산운사학5, 산운학술문화재단, 1991. 라. 북한 출간 도서의 3·1운동 관련 부분 - 과학·백과사전출판사, 조선전사15 근대편, 1980.
72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마. 관련 사이트 - http://search.i815.or.kr/main.do(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Main.do(국가기록원 독립운동 판결문 컬렉션). - http://www.mpva.go.kr/narasarang/gonghun_list.asp(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2. 지역별 3.1운동 개관 1) 경기도 지역 북한지역에 편입된 경기도는 개성군과 장단군 2개 지역이다. 이들 지역의 만세시위는 기독 교 계열 학교와 학생이 주도하였다. 개성군의 경우 기독교 계통을 통해 독립선언서가 전달되 었으며, 이를 관내에 배포한 것 역시 기독교 조직이었다. 오화영으로부터 전해진 독립선언서는 호수돈여자보통학교 유치원 교사 권애라와 기독교 목사 어윤희를 통해 개성군 전역으로 배포되었다. 이를 계기로 호수돈여자보통학교 학생들이 첫 만세시위를 전개하였고, 뒤를 이어 한영학원 학생과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 소학교 학생 등이 시위에 적극 참여하였다. 이와 같은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일반 민중으로, 관내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횃불을 이용한 만세시위가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횃불만세시위는 주변 지역으로 만 세시위를 확산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만세시위 과정에서 면사무소와 경찰서, 헌병 분견소 등 식민기관을 습격하는 등 공세적인 시위가 전개되었다. 알려진 바와 같이 3·1운동 은 비폭력 원칙이었으나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투쟁 일한으로 식민통치기관 을 공격하는 형태로 전개되기도 하였다. 이들 면사무소 등 식민통치기관은 비록 말단기관이 었지만, 식민지 조선인에 대한 가장 실질적인 통치기관이었다. 때문에 만세시위는 식민 관공 서를 습격하는 등 과격한 시위로 이어졌다. 각 군별 시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개성군 개성군은 경기도 서북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의 옛 도읍지로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곳이다. 개성군은 비록 경기도 북부에 위치하고 있지만, 경의선이 부설되면서 근대적 인식이 일찍이 수용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에 저항하는 반일의식 또한 일찍부터
경기·강원 북한 편입지역 조사성과❙ 73 배태되었다. 한말 윤치호가 세웠던 한영서원에서는 1913년부터 우리의 역사를 올바르게 교육 하는 초등본국역사(初等本國歷史)와 창가(唱歌)를 통해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시켰 다.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도 ‘국민의 정신을 감발(感發)’시키는 창가를 보급하여 민족 의식을 심화시켰다. 이에 따라 이들 학교를 졸업한 청년과 학생들은 3·1운동이 전개되자 ‘조 선독립개성회’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학생들을 규합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개성군 의 3·1운동은 경기도에 가장 이른 3월 3일부터 전개되어 4월 2일까지 한 달간 전개되었다. 개성군의 첫 만세시위는 3월 3일 송도면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 개하였다.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독립가와 찬송가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하였다. 이외에도 이 날 송도면 곳곳에서 만세시위가 계속되었다. 송도면 남산정의 이형순이 3월 3일 개성 시내에 서 1천 5백여 명의 군중과 같이 만세 시위를 하였고, 또 이날 오후 5시 반경부터 소학교 학생 들이 선죽교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여 시내로 진출하였다. 3월 4일의 송도면 만세시위는 한영서원에서 시작되었다. 이날 아침 한영서원, 호수돈여자 고등보통학교와 송도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고 나팔을 불면서 시위를 전개하 였다. 오후에는 일반 군중들이 합세하여 6백여 명의 시위대를 형성하여 시가를 행진하는 동 안 여러 차례 경찰과 충돌하였지만 해산을 하지 않고 밤늦게까지 만세시위를 하였다. 진봉면 만세시위는 지금리에 사는 이재록이 주도하여 3월 26일 펼쳐졌다. 이재록은 자기 집에서 대한제국동포신문, 대한제국신문, 대한신문, 대한제국독립창가 등을 회람하 면서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중면에서도 3월 26일 창내리 앞산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중면 대룡리에서는 경성고등보통학교 학생 등이 주동이 되어 3월 31일부터 4월 2일까지 계속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다. 대형 태극기를 만들어 마을 뒷산에 세워 놓고 저녁마다 봉화를 올 렸다. 동면의 만세시위는 3월 28일부터 31일까지 4일 동안 전개되었다. 3월 28일부터 31일까지 4 일 연속으로 오관산에서 횃불 시위가 펼쳐졌다. 상도면 만세시위는 3월 29일에 전개되었다. 이날 만세시위대는 헌병분견소를 포위하고 전화선을 끊고 전신주를 넘어뜨렸다. 광덕면에서 는 3월 31일 시위가 있었다. 중서면 만세시위는 다른 지역보다는 늦은 4월 1일 시작되었다. 영북면 만세시위도 4월 1일 시작되어 6일까지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전개하였다. 나. 장단군 장단군은 한말 의병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의병장 김수민은 1907년 의병을 일으켰으
74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며 13도 총도독으로 장단과 풍덕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이외에도 강기동, 서상렬, 연 기우, 김짐묵 등 의병장의 활동이 있다. 이처럼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의 항일운동은 3·1운동을 그대로 이어졌다. 장단군의 3·1운동은 서울보다 한 달 정도 늦은 3월 24일부터 전개되어 4월 중순까지 이어졌다. 장단군의 첫 만세시위는 3월 24일 진남면 거곡리에서 전개되었다. 3월 26일 진남면 동장 리 일대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장도면 만세시위는 3월 29일부터 4월 초까지 여러 날에 걸쳐 전개되었다. 3월 29일 장도면 항동리에 거주하는 우정시와 우정화 등이 항동리에 서 동리 사람들과 함께 도덕암산에서 횃불을 올리며 대한 독립만세를 불렀다. 다음 날 30일에 는 마을 뒤쪽에 있는 시라위산 위에서 횃불을 들고 만세를 불렀고, 31일 밤에는 마을 주민 70여 명이 태극기를 들고 고읍리에 있는 면사무소로 몰려가서 만세를 부르고 석주원리에 있 는 면장의 집에 가서 면장을 불러내어 만세를 부르게 하였다. 4월 3일에는 항동리 구 시장 자리에서 오전부터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진서면의 만세시 위는 3월 29일 밤 면민 100여 명이 참여하여 전개되었는데, 면사무소에 도착한 시위대는 보관 된 일장기를 꺼내 불태웠다. 대남면 만세시위는 4월 초에 두 차례 전개되었다. 강상면 만세시 위는 4월 1일 구화리에서 전개되었다. 이날 면민 수백 명의 시위대는 면사무소를 습격하여 방화를 하면서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2) 강원도 지역 북한지역에 편입된 강원도 지역의 3·1운동은 천도교 조직이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시 작되었다. 북한지역에 편입된 강원도 지역은 1900년 전후 동학이 포교되었다. 3·1운동 전인 1914년 당시 철원군 교구, 김화군 교구, 회양군 교구, 안협 교구, 금성 교구, 평강군 교구, 이천 군 교구 등이 이미 조직되어 있었으며, 각 교구 조직은 서로 연락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지역 독립선언서 배포를 맡은 안상덕은 평강군 교구에 가장 먼저 독립선언서를 전달하 였다. 그런데 3월 초 각 지역 독립선언서 배포를 담당한 천도교인들이 일경에 체포되었기에 3월 초에 시위가 일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3월 중순 이후부터 천도교 조직이 본격적으로 교인을 동원하고 만세시위를 주도하면서 강원도 지역의 3·1운동은 활발히 전개되었다. 그렇다고 북한지역에 편입된 강원도 지역의 3·1운동이 천도교 조직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기독교와 학생 중심의 연합 만세시위도 전개되었다. 이 지역은 천도교뿐만 아니 라 일찍부터 기독교가 포교되어 학교를 설립하여 근대적 교육을 전개하였다. 이를 토대로 기
경기·강원 북한 편입지역 조사성과❙ 75 독교 조직이 학생과 연합하여 3·1운동을 전개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가. 평강군 평강군은 강원도 북부에 해당하지만 경원선이 지나는 관계로 서울의 3·1운동 소식이 일찍 전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천도교 측의 독립선언서 배포 계획에 따라 강원도의 어느 지역 보다도 먼서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었고, 강원도 중부 이북지역의 3·1운동을 확산시키는데 크 게 기여하였다. 강원도와 함북지역의 독립선언서 배포를 맡은 안상덕은 2월 28일 평강 천도교구장 이태윤 에게 7백 매의 독립선언서를 전달하였다. 이태윤은 천도교당에서 이면하, 김창석, 김찬호, 김 정찬 등과 대책회의를 갖고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첫째, 서울의 만세시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김찬호를 파견할 것 둘째, 철원과 김화의 천도교에 연락하여 3월 1일 공동 대책 협의할 것 김찬호는 서울로 올라가 만세운동의 동향을 파악한 후 곧 바로 돌아와서 상황을 보고하였 다. 그리고 공동대책 협의의 결과 독립선언서를 천도교 조직을 통해 철원군, 김화군, 화천군, 춘천군, 회양군, 통천군, 이천군에 배포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최병훈은 천도교 철원교구 에 170매, 채장숙은 천도교 김화교구에 150매를 전달하기로 하였으며, 채장숙은 150매 중 90 매를 천도교 화천교구에 전달하였다. 김천일은 회양교구에 88매, 통천교구에 32매를 전달하 기로 하였고, 장선처는 이천교구에 15매를 임종한과 신윤철은 춘천교구에 150매를 각각 전달 키로 하였다. 이로서 강원도 중부 이북지역에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었고, 해당 지역에서는 3·1운동이 추진되었다. 평강군의 3·1운동은 3월 2일과 3일 독립선언서를 군내에 배포하면서 시작되었다. 평강면 은 김창석, 남면은 김병철, 현내면은 김동률, 서면은 권병식, 고삽면은 최명구와 최일룡, 유진 면은 전용섭·권대철이 각각 맡아서 면사무소 등 관공서에 배포하거나 부착하기로 하였다. 그렇지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던 중 일경에 피체되어 독립선언서 배포 계획은 뜻대로 이루어 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평강군의 3·1운동은 3월 하순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76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나. 철원군 철원군은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이다. 경원선 철도가 읍내를 경유함 으로 서울로부터 빠르게 각종 소식들이 전해졌다. 철원읍 만세시위는 일찍 천도교 평강교구 독립선언서가 전달되어 3월 2일 이후 배포를 시작하였으나 독립선언서를 배포한 천도교인들 이 대부분 검거됨에 따라 기독교 측 주도로 만세시위가 펼쳐졌다. 3월 10일과 11일의 운동을 추진한 중심인물은 철원농업학교와 철원보통학교 학생, 교회의 청년 그리고 지방 청년이었다. 한동안 잠잠했던 철원읍의 만세시위는 장날인 3월 18일 다시 전개되었다. 갈말면 만세시위는 철원읍과 같은 날인 3월 11일 밤부터 전개되었다. 동송면 만세시위는 4월 5일 전개되었다. 이날은 천도교 창도일이므로 천도교인이 주동이 되어 수백 명이 뒷산으로 올라가 태극기를 걸어놓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만세시위 에는 신서면과 인근 면에서도 호응하여 참여하였다. 내문면 만세시위는 4월 8일에 이르러 전 개되었는데,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었다. 내문면 독검리는 묘장면 산명리와 더불어 철원군 천도교회의 중심지였다. 3월 초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다가 검거되었던 최병훈이 풀려나 내문 면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다. 이천군 이천군의 3·1운동은 천도교 평강교구로부터 독립선언서가 전달되면서 촉발되었다. 평강 교구에서 독립선언서 15매를 받은 장선처는 3월 3일 동면 저동리의 주일섭의 집에서 이춘호 에게 전달하였다. 이춘호는 이천면 추목리의 이광선과 논의한 후 이천면 탑리에 있는 천도교 이천교구실에서 김순필 등 수십 명의 천도교인들에게 3·1운동의 정당성을 설명한 후 동면, 용포면, 판교면, 서면 등 이천군 내에 배부하였다. 이를 계기로 이천군의 천도교인은 곳곳에서 3·1운동의 정당성을 선전 계몽하는 활동을 전 개하였다. 특히 헌병보조원을 천도교구실에 불러 설득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천면 탑 리 교구실에서는 박인호, 김병주 등은 3월 10일 보조원을 불러서 설유한 결과 김유기, 김인관 이 보조원을 사임하였다. 만세시위가 본격적으로 전개된 것은 4월 초였다. 4월 4일부터 12일 까지 지속적으로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라. 김화군 김화군의 3·1운동 역시 천도교 평강교구에서 독립선언서가 전달되면서 계획되었다. 당시
경기·강원 북한 편입지역 조사성과❙ 77 천도교 김화교구장이었던 채장숙은 평강교구에서 독립선언서 150매를 받았다. 그리고 이중 90매를 천도교 화천교구에 전달하였다. 회천교구의 독립선언서 전달은 노화병이 맡았고, 나 머지 60매는 금성지역과 김화지역에 배포되었다. 김화지방은 신동민(申東敏)이 맡아서 30매 를 곳곳에 배포하였고, 금성지방 박나영이 주관하여 이기훈, 이영손, 이형극, 노병태, 조흥만, 김치수, 이만식 등 천도교 조직을 통해서 김화군 북부인 금성지방과 회양군 남부에까지 배포 하였다. 당시 독립선언서의 배포지는 주로 군청, 면사무소, 주재소 등의 게시판이었다. 신동민은 사 람이 자주 왕래하는 장소에도 독립선언서를 부착하라고 당부하기도 하였다. 김화군 만세운동 은 3월 28일과 29일 두 차례에 걸쳐 기오면에서 전개되었다. 4월1일에는 김화읍에서, 4월 4일 에는 근동면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마. 회양군 회양군의 3·1운동은 천도교 평강교구에서 전달된 독립선언서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3월 1 일 평강교구로부터 3·1운동에 대한 공동대책협의에 참석해 줄 것을 요청받은 회양교구는 김 천일을 파견하였고, 평강교구로부터 독립선언서 120매를 전달받았다. 이중 일부를 천도교 통 천교구에 다시 배부하였다. 회양군에 전달된 독립선언서는 즉시 천도교 조직을 통해 송환순, 유한영, 유인경, 박병운, 신태윤, 임병준, 공면술 등에 의해 군내에 배포되었다. 회양군 내에는 독립선언서 이외에도 선전문과 경고문 등도 군청, 경찰서, 우편소 등의 식민 통치 기관의 게시판에 부착되었다. 이 과정에서 부착하였던 인물들이 일경에 검거되었다. 이 로 인해 회양군의 3·1운동은 4월 중순경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회양군의 3·1운동은 4월 15일과 16일에서 하북면과 회양읍에서 연계되어 전개되었다. 바. 통천군 통천군은 강원도 동부의 최북단에 위치하였고, 3월 초부터 천도교, 기독교, 노동자, 보통학 교 학생 등 다양한 계층에서 독자적으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통천군에 독립선언서가 전 달된 것은 천도교와 기독교를 통해 이루어졌다. 먼저 천도교는 평강교구와 회양교구를 통해 3월 3일경에 전달되었고, 기독교는 3월 20일경에 전달되었다. 이에 따라 천도교는 3월 초에, 기독교는 3월 중순 이후에 각각 통천군 일대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였다. 통천군의 만세시위 는 4월 2일 임남면에서부터 전개되었다.
78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3. 특기할 사적지와 지역 사적지의 특징 1) 경기도 지역의 특기할 사적지 가. 개성군 가) 경기도 개성군에 3·1독립선언서가 전달된 장소 ① 성경학원 경기도 개성군 지역에 손병희의 조선독립선언서가 최초로 전달된 장소. 1919년 2월 26일 경 기도 개성군 송도면 성경학원 기숙사에서 어윤희가 성명미상의 사람으로부터 손병희의 조선 독립선언서 2,000장을 받았다. 이 선언서는 3월 1일 오후 2시경 개성읍내 각 도로에서 조선인 과 부근의 주민에게 배포되었다. 이로써 3·1운동 만세소식이 개성지역과 그 일대에 전파되 었다. ② 개성군 송도면 북부 예배당 지하실 석탄고 1919년 2월 28일 강조원·신공량이 오화영·김지환으로부터 조선독립선언서 100매를 전달 받아 보관한 곳. 이 선언서는 3월 1일 정오 경 신공량이 이 예배당 지하실에서 사립호수돈여 자고등보통학교 유치원 교사 권애라에게 전달하였고, 기독교 전도인 어윤희를 통해 개성읍내 에 배포되었다. 나) 개성군 3·1운동을 펼친 학교 ① 호수돈여학교 3월 3일 개성군 송도면에서 일어난 대규모 만세시위가 시작된 학교. 1919년 3월 3일 오후 2시 개성군 송도면 소재 호수돈여학교 학생 35명이 삼삼오오 대를 지어 찬송가와 독립가를 부르고 만세시위를 펼쳤다. 일부는 경찰에 연행되고 교장의 설득으로 학교로 돌아왔다. ② 한영서원 1919년 3월 4일 개성군 송도면 만세시위가 시작된 학교. 한영서원은 윤치호가 세운학교이 다. 3월 4일 한영서원 생도들이 아침에 전부 학교 뜰에서 만세와 독립가를 부르고 나팔을 불 면서 3·1운동을 전개하였고 오후 2시경에 한영서원 생도 150명과 군중들이 합하여 600여 명 이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를 시작하였다. 헌병분대 및 수비대가 출동하여 남
경기·강원 북한 편입지역 조사성과❙ 79 대문에서 해산을 명하였지만 이에 응하지 않고 경계선을 돌파하면서 시위를 계속하였다. 이 에 학생 4명과 군중 8명이 검거되고 3시 30분에 해산되었다. ③ 사립 송도고등보통학교 1919년 3월 4일 만세시위가 펼쳐진 학교. 3월 3일 기독교 남감리파 감사인 신호승이 철원에 서 전도하고 개성으로 돌아오던 중, 용산역에서 경성부 내의 3·1운동 만세시위를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와 송도고등보통학교에 가서 보고 들은 것을 학생들에게 전파하였다. 3월 4일 송 도고등보통학교 교정에 100여명의 동창생이 주도하여 조선독립시위운동단이 형성되었고, 조 선독립만세를 외치면서 만세시위를 시작하였다. 다) 만세시위지 ① 개성군 송도면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3, 4, 5, 23일, 4월 1, 2, 7일까지 지속적으로 3·1운동 만세시위가 전개된 거리. 3월 3일에는 1,500여 명 군중이, 같은 날 호수돈여학교 학생 35명이 일대에서 만세시위를 펼쳤 다. 3월 4일에는 한영서원 생도들이, 오후에는 600여 명의 시위대가, 오후 8시경에는 2,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5일에는 600여 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시작하여 관헌에게 투석, 순사보 1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3월 7일에는 700여 명의 군중이, 3월 23일에는 개성을 중심으로 주위 2리 내지 3리의 12개소에서 200~400여 명의 군중이 봉기하여 오후 11시 경까지 만세시위를 하고 해산하였다. 4월 1일에도 100~300여 명의 군중이 만세운동을 펼쳤으 며 헌병이 발포하여 쌍방에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나. 장단군 경기도 장단군은 개성군과 달리 지리적 특성상 서울보다 한 달 정도 늦은 3월 24일부터 만 세운동이 전개되었다. 가) 횃불 반세 시위지 ① 장단군 장도면 항동리 도덕암산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29일 저녁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향도리 주민 수십 명이 횃불을 피우며 만세운 동을 전개한 장소.
80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② 장단군 장도면 항동리 시라위산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30일 저녁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향도리 주민 수십 명이 횃불을 피우며 만세운 동을 전개한 장소. 나) 만세 시위 거리 ① 장단군 진남면 동장리 1919년 3월 26일 장단군 진남면 동장리에서 주민 150명이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한 장소. 2) 강원도 지역의 특기할 사적지 가. 평강면 ① 평강면 동변리 천도교회당 3·1 독립선언서가 강원도 각지에 배포된 장소. 1919년 2월 28일 안상덕이 독립선언서 600 매를 지참하고 천도교회당에 와서 평강 교구장 이태윤과 이면하·김찬호에게 독립선언서를 교부하였다. 3월 1일 이창석 등은 천도 교회당에서 다수의 신도와 집회하여 선언서를 숙독하 고 이를 각 곳에 배부할 것을 의결하였다. 전창석, 김병철, 임종한, 신윤철, 김동률, 권병식, 최일룡, 전용섭, 채장숙, 김천일, 최병훈, 권대철 등이 독립선언서를 강원도 각 군에 배포하기 로 하였다. 그러나 배포 중 일경에 체포되어 강원도 3·1운동은 3월 중순 이후 전개되었다. 나. 철원군 ①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천도교 교구실 독립선언서가 평간군에서 철원군에 전달된 장소. 1919년 3월 1일 이태윤이 강원도 평강군 평강읍내 천도교 대교구실에서 독립선언서 200매를 교부 받아, 같은 날 철원군 철원읍 천도 교구실에서 이석구에게 전달하였다. 이후 3월 2일 예배를 하러 교구실에 모인 김현구, 이성 구, 서순봉, 한홍준, 이순철, 김명식 등 교도들이 독립선언서를 철원군내에 배포하기로 하였 다. 그런데 독립선언서 배포맡은 천도교인들 대부분 검거됨에 따라 철원군 3·1운동은 기독 교 측에서 준비하고 주도하게 되었다.
경기·강원 북한 편입지역 조사성과❙ 81 다. 이천군 ① 이천군 이천면 탑리 천도교회 강원도 이천군 각 지역에 조선독립선언서가 전파된 장소. 1919년 3월 2일 이광선이 강원도 이천군 동면 저동 이춘호와 안상덕으로부터 교부받은 독립선언서가 이 곳 탑리 천도교구실에 서 여러 천도교도원들에게 전달했다. 라. 회양군 ① 회양군 난곡면 상송관리 유한영 가옥 강원도 회양군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가옥. 독립선언서를 화양군 내 각처에 배포한 유한 영의 아들 유인경의 집. 1919년 3월 1일 평강군 평강읍내 천도교구장인 이태윤이 조선독립선 언서 120매를 김천일에게 전달하였고, 김천일은 3월 2일 회양군 난곡면 상송관리 유한영의 집 에 가지고 가서 그의 아들인 유인경에게 교부하고 배부를 부탁하였다. 유인경은 선언서를 회 양군 내 각 처에 배포하였다. 마. 통천군 ① 통천군 임남면 장전리 492번지 최상린 가옥 최상린이 1919년 2월 말 조선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한 자택. 최상린 은 경성 방면으로부터 손병희의 독립선언서를 우편으로 받아 김두만, 안흥식, 우낙영을 자택 으로 불러 만세운동을 펼칠 계획을 세웠다. 3월 22일 강원도 간성군 신북면 면사무소 부근 모 래밭에서 면사무소에 비치된 등사판을 사용하여 인쇄물 91매를 인쇄하고, 3월 31일에는 태극 기 250여 장을 만들어 4월 1일 통천군 임남면 장전리 기독교도 수십 명의 집을 방문하여 전달 하였다. 4월 2일 이른 아침부터 최상린 등이 집집마다 돌면서 참가자를 동원하면서 만세시위 가 펼쳐졌다. 3) 사적지 분포 형태와 특징 북한지역에 편입된 경기도 강원도 지역의 3·1운동 사적지는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경 기도 지역이 75개, 강원도 지역이 83개이다. 경기도 개성군은 3·1운동 사적지가 59개로 북한 지역에서 가장 많은 3·1운동 사적지를 보유한 지역이다. 이는 개성군이 북한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3·1운동이 펼쳐진 결과이다.
82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앞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개성군은 경기 북부에 위치하고 있지만, 경의선이 부설되면서 서 울과 원활한 교통 체계를 이루고 있어 서울의 소식이 빠르게 전달되고, 근대적인 의식이 일찍 부터 수용될 수 있는 지리적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는 항일의식이 일찍부터 배태되었다. 개성의 한영서원에 서는 우리 역사를 교육하였으며,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는 창가를 보급하여 민족의식 을 심화시켰다. 그 결과 개성에서 3·1운동이 다른 지역보다도 활발히 전개되었던 것이다. 강원도 지역 역시 북한 지역에서는 상대적으로 3·1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북한지역 전체 군(郡) 당 평균 9.4개의 사적지가 있는데 반해 강원도 지역 군은 평균 13.8개의 사적지를 보유하고 있다. 북한지역에 편입된 강원도 지역은 경원선이 경유하기에 서울의 3·1운동 소 식이 빠르게 전달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은 1900년 전후 동학이 포교되었으며, 3·1운 동 전인 1914년에 이미 천도교 철원군 교구, 김화군 교구, 회양군 교구, 안협 교구, 금성 교구, 평강군 교구, 이천군 교구 등이 조직되어 있었고, 이 교구 조직을 통해 독립선언서가 전파되 었기에 3·1운동 사적지가 많은 것이다. 표 1)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지역별 분포 현황 도 군 합계 평안북 도 신 의 주 의 주 용 천 철 산 선 천 정 주 곽 산 태 천 영 변 구 성 운 산 삭 주 창 성 벽 동 초 산 위 원 강 계 자 성 후 창 3 36 11 5 18 11 2 5 2 10 2 13 8 4 6 4 6 4 1 151 평안남 도 평 양 강 동 강 서 개 천 대 동 맹 산 성 천 순 천 안 주 양 덕 영 원 용 강 중 화 진 남 포 평 원 21 3 9 1 4 2 3 2 4 1 1 2 5 5 1 64 함경북 도 청 진 경 성 명 천 길 주 성 진 부 령 무 산 회 령 온 성 경 흥 종 성 5 5 17 15 15 1 3 11 4 3 2 81 함경남 도 갑 산 고 원 단 천 덕 원 북 청 삼 수 신 흥 안 변 영 흥 원 산 이 원 장 진 정 평 풍 산 함 흥 홍 원 3 7 6 2 37 2 22 2 12 8 15 5 30 4 37 8 200 황해도 곡 산 금 천 봉 산 서 흥 송 화 수 안 신 계 신 천 안 악 연 백 옹 진 은 율 장 연 재 령 평 산 해 주 황 주 5 21 6 9 4 5 3 18 11 11 11 3 7 9 12 19 4 158 경기 개 성 장 단 59 16 75 강원 평 강 이 천 철 원 통 천 회 양 김 화 9 22 14 6 11 21 83 총계 812
경기·강원 북한 편입지역 조사성과❙ 83 북한지역에 편입된 경기도와 강원도 지역의 3·1운동 사적지의 형태별 분포 현황은 표 2)에 서 보는 바와 같이 다른 북한지역과 같이 비슷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경기도 지역 사적지 중 산야(山野)가 많은 것은 경기도 개성군과 장단군 시위 전개 과정에서 야간에 산에 서의 횃불 시위가 많았기 때문이다.1) 표 2)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형태별 분포 현황 구분 거리 건물 가옥 산야 기타 합계 평안북도 116 33 1 1 151 평안남도 5 37 20 2 64 함경북도 44 29 7 1 81 함경남도 96 81 15 5 3 200 황해도 138 19 1 158 경기도 36 23 8 8 75 강원도 35 22 26 83 총계 470 244 77 16 5 812 4. 제언 1) 2019년이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사업’의 첫해가 되어야 한다 2019년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이하여 중앙 정부는 물론이고 지방정 부에서 봇물 터지듯이 독립운동 관련 사업을 추진하고 있고 독립운동 콘텐츠 개발 사업을 지 원하고 있다. 이 역시 반가워해야 할 일이나, 2019년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이라는 특정한 시기에 맞추어 여기저기서 많은 사업이 추진되다보니 사업이 부실해질 것 같 아 걱정이다. 더욱 걱정스러운 것은 2019년이 지나 2020년이 되어 독립운동 대한 관심이 멀어 지고 독립운동 콘텐츠 개발 지원 사업 규모가 2018년 이전 시기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는 독립운동을 하나의 이벤트로 취급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2019 1) 개성군에서 야간 횃불시위가 있었던 산은 동면 대조족리 오관산, 중면 대룡리 무명산이다. 장단군은 장도면 항동리 도덕암산과 장단군 장도면 항동리 시라위산이다.
84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년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사업’을 추진한 각급 기관은 엄정한 역사적 평가 를 받을 것이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사업’은 2019년도 일회성 사업으로 추진되어서는 안된다. 2019년도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사업’을 시작하는 첫 해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국가보훈처, 독립기념관 등 독립운동 관련기관, 독립유공자 후손과 연구자를 포함한 관련자들은 이러한 여건이 형성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19년 현재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의 하나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 주년 기념사업’이 아니라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사업’ 로드맵을 작성하여 2020년 이후에도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사업’이 지속되게 하는 일이다. 2) 남북 학술 교류 제안 및 실현 현재 남북 관계가 급변하고 있고 평화무드가 조성되고 있으며, 남북 간의 교류가 활발히 논의되고 추진되고 있다. 2018년 11월 14일부터 17일까지 경기도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 평화번영을 위한 국제대회’에 북한의 리종혁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겸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 장, 김성혜 통일전선부 통일전선책략실장 등 7명으로 꾸려진 고위급 대표단이 참석하였다. 이는 향후 학술행사에 북한의 대표단 및 학자들이 남한을 방문하여 참석할 가능성이 높아졌 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여 남북 공동학술회의를 남한 및 북한 지역에서 개최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으므로 이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 북한에 공동 학술답사와 연구 및 출판을 제안하여 학술교류를 통한 남북 화해를 더욱 적극적으로 도모할 필요가 있다. 독립기념관이 경기도와 협력하여 북한지역에 편입된 경기북부 지역의 3·1운동 사적지 남 북 공동 조사를 제안하고, 주체적으로 이 사업을 추진할 것을 제안한다. 3) 3·1 운동을 포함하여 독립운동을 주제로 하는 역사문화콘텐츠 개발 활용 독립운동을 소재로 역사문화콘텐츠를 활발히 개발하고 보급하여야 한다. 독립운동가를 주 제로 하는 축제를 확대하고, 책자 발간과 함께 다양한 매체를 활용 영상물을 제작하여 보급할 필요가 있다. 현재 매체를 활용한 영상물 제작은 민간이 주도하고 있다. 따라서 영상물 제작도 민간의 영상물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지원하는 방향도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독립운동을 주제로 하는 교육, 관광콘텐츠를 개발하여 학교 교육과 박물관 문화교육에 적
경기·강원 북한 편입지역 조사성과❙ 85 극 활용하고, 독립운동 사적지를 테마로 하는 탐방 여행 코스를 개발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독립운동을 주제로 하고 이를 경험하는 테마파크도 조성하여야 한다. 문학 창작, 공연, 시각, 영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여러 분야에서 독립운동 콘텐츠가 개발될 수 있도록 지원을 강화 해야 한다.
제5주제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활용 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박 걸 순 _ 충북대 교수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활용 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89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활용 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박 걸 순 | 충북대 교수 Ⅰ. 머리말 독립기념관은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개년 계획으로 「북한지역 독립운동사적지 기초조사 학술용역」(이하 학술용역으로 약칭)을 시행하였다. 이 학술용역은 북한지역 독립운동사적지 가운데 3·1운동 현장을 대상으로 하되, 당시 행정구역을 중심으로 6개 권역으로 구획하여 외 부 전문가 용역으로 진행되었다.1) 3·1운동 직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3·1운동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韓日關係史料集 (1919)을 편찬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박은식의 韓國獨立運動之血史(1920)와 김병조의 韓國 獨立運動史略 上篇(1921)이 저술된 바 있다. 또한 해방 후 정부의 조사를 통해 三一運動被 殺者名簿(1952)가 만들어졌고,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가 조사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사 제2 권과 제3권(1972)으로 3·1운동사를 정리하였으나, 개별 사적지 현황을 통계 낸 것은 없었다. 물론 일제 자료에도 구체적으로 지역의 만세시위를 통계 낸 사례는 없다.2) 그런 의미에서 이 학술용역은 3·1운동 이후 처음으로 진행된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전수조사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조사 결과 북한지역에서 812개소의 만세시위 현장이 확인되었다. 매우 의미 있는 조사이고 값진 결과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 학술용 역은 문헌자료 조사에만 국한된 것으로서, 현장을 답사하지 못한 중대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는 분단 현실에서 불가피한 상황에 기인한 것이다. 본고는 이 학술용역의 성과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이를 활용하기 위한 방안과, 특히 이 1) 본고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제공한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기초조사 학술용역 보고서를 바탕으로 정리하였다. 2) 박걸순, 「3·1운동, 국가의 기억과 기록」, 한국근현대사연구 제87집, 2018 참조.
90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결과를 바탕으로 북한과 학술교류를 모색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작성된 것이다. Ⅱ. 조사 개요와 성과 이 학술용역은 북한지역을 당시 행정구역상 6개 권역으로 나눠 2016년~2018년간 3개년 계 획으로 진행되었다. 2016년은 계획이 약간 지체되는 바람에 조사 용역 수행 기간이 4개월에 불과하였고, 2017년과 2018년은 6개월의 조사 기간을 부여하였다. 조사기관은 제안공모를 받 아 심사하여 선정하였는데, 대상지별 조사기간과 연구책임자 현황은 다음과 같다. - 평남 : 2016. 7. 27~11. 23(대한민국역사문화원 이정은) - 평북 : 2016. 7. 27~11. 23(충북대 박걸순) - 함남 : 2017. 6. 14~12. 11(충남대 김상기) - 함북 : 2017. 7. 17~12. 10(동국대 조성운) - 황해 : 2018. 5. 9~11. 11(충북대 박걸순) - 경기․강원(북한지역) : 2018. 5. 11~11. 11(역사문화콘텐츠연구원 강진갑) 학술용역의 과업 내용은 ① 각 도별 3·1운동의 개관, ②개별 사적지 조사, ③활용 방안 제 시 등 세 영역으로 구성되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작업은 개별 사적지 조사표를 작성하 는 일이다. 개별 사적지 조사표는 독립기념관이 제시한 시트지를 작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 었다. 시트지의 양식은 ①사적지명, ②주소(당시․현재), ③관련내용(정의․관련 역사적 사실․관련인 물․관련단체․관련사건), ④종합평가(종류․등급․조사 의견), ⑤근거자료, ⑥참고문헌으로 구성되 었다. ①사적지의 명칭은 건물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는 ‘터’로, 사건의 지점을 표기할 경우는 ‘지’ 로 통일하기로 하였다. 주요 사건 관련 사적지는 사건명을 넣어 예컨대 ‘아우내장터 3·1운동 만세시위지’, ‘양성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등으로 명명하도록 하였다. ②사적지의 주 소는 신․구 주소를 대비하여 볼 수 있게 하였다. ③관련내용에서는 사적지의 정의를 육하원칙 에 의거하여 서술하고, 관련 역사적 사실을 사건․인물․단체 등 중요한 요소를 조합하여 서술하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활용 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91 도록 하였다. 관련 인물은 해당 사적지와 관련된 인물을 중요도에 따라 가급적 모두 가나다 순으로 기술하고 한자명을 괄호로 표기하도록 하였다. 관련 단체나 사건의 표기 원칙도 인물 과 동일하였다. ④종합평가에서는 종류를 가옥․건물․거리․산야로 구분하여 기록하되, 어느 항 목에도 속하지 않는 경우는 기타로 분류하도록 하였다. 사적지의 등급을 A․B․C 3등급으로 구 분하여 부여하되, 단일 사건이 여러 군데에서 일어난 경우 관련성이나 영향력이 높은 1~2곳 을 B등급 이상으로 부여하여 다른 곳(사적지)과 함께 설명하도록 하였다. ⑤근거자료는 문헌 근거와 일제 당시의 지도나 사진, 간행물 등을 제시하도록 하였고, ⑥참고문헌은 관련 사적지 와 관련 문헌을 제시하도록 하였다. 학술 용역의 결과, 평남은 평양(21)․강서(9)․중화와 진남포(각각 5) 등 15개 부군에서 64개소, 평북은 의주(36)․선천(18)․삭주(13) 등 19개 부군에서 151개소, 함남은 함흥과 북청(각각 37)․정 평(30)․신흥(22) 등 16개 부군에서 200개소, 함북은 명천(17), 길주와 성진(각각 15)․회령(11) 등 11개 부군에서 81개소, 황해는 금천(21)․해주(19)․신천(18) 등 17개 부군에서 158개소의 사적지 가 확인되었다. 경기와 강원은 현행 행정구역상 북한으로 편입된 지역으로 범위를 설정하여 경기에서는 개성(59)․장단(16) 등 2개 부군에서 75개소, 강원에서는 평강(9)․이천(22)․철원(14)․통 천(6)․회양(11)․김화(21) 등 6개 부군에서 83개소의 사적지가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확인된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의 도별 통계는 다음과 같다.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도별 통계> 도별 평남 평북 함남 함북 황해 경기 강원 합계 사적지 64 151 200 81 158 75 83 812 韓日關係史料集에는 부군별 대표적 시위일자와 회집인원만 통계하였으나, 韓國獨立運 動之血史에는 자료 가운데에는 유일하게 부군별 회집회수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의 숫자를 합산해 보면 함경도 105회, 평안도 315회, 황해도 115회로서,3) 학술용역의 조사 결과와는 상 당한 편차를 보인다. 즉, 평안도는 韓國獨立運動之血史의 통계가 훨씬 많고, 함경도와 황해 도는 학술용역의 통계가 더 많다. 물론 韓國獨立運動之血史는 전문에 의한 기록이다 보니 정확성이 떨어지고, 저본이 된 韓日關係史料集과 동 시기에 저술된 아류의 韓國獨立運動 史略 上篇과도 통계의 차이가 크다.4) 그러나 이번 문헌의 전수조사 성격을 띤 학술용역을 3) 朴殷植, 韓國獨立運動之血史, 1920, 維新社, 28~33쪽(白巖朴殷植全集 제2권, 동방미디어, 2002, 520~522쪽).
92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통해 어느 정도 실체적 규모가 확인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들 사적지의 형태별 유형을 구분해 보면 거리(470), 건물(244), 가옥(77), 산야(16), 기타(5) 순으로 조사되었다. 도별 사적지의 유형별 통계는 다음과 같다.5)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유형별 통계> 도별/형태 거리 건물 가옥 산야 기타 합계 평안남도 5 37 20 2 / 64 평안북도 116 33 1 / 1 151 함경남도 96 81 15 5 3 200 함경북도 44 29 7 / 1 81 황해도 138 19 / 1 / 158 경기도 36 23 8 8 / 75 강원도 35 22 26 / / 83 합계 470 244 77 16 5 812 이는 문헌상의 기록에 따른 형태 분류이다. 북한지역은 현장 답사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3·1운동 사적지의 현재 상태는 전혀 알 수 없다. 조속히 답사가 시행되어 문헌의 기록과 대 비해 보고 현재의 상태를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런데 학술용역 팀의 판단과 기준에 따라 통계 작성이 진행된 경우가 있고, 연구팀 사이에 통계 방식의 편차가 보인다. 예컨대 사적지의 통계이기 때문에 발생회수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예컨대 △△장터에서 연속하여 4회의 만세시위가 일어난 경우가 있다. 이 경우, 발생회 수는 4회이지만 사적지는 한 곳이다. 그러나 어떤 연구팀은 발생회수를 통계로 제시하고, 어 떤 연구팀은 사적지수를 통계로 제시하는 등 통계의 기준이 다르다. 따라서 독립기념관은 각 연구팀의 조사 결과를 산술적으로 집계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단일한 기준에 따라 조사 결과를 종합적으로 재검토하여 정확한 통계를 산출하고 이를 공식 통계로 제시하여야 할 것 이다.6) 4) 박걸순, 「3·1운동, 국가의 기억과 기록」, 27~28쪽. 5) 이 분류는 독립기념관의 자료를 원용한 것인데, 기타는 교량이나 항구 등 다른 형태로 분류할 수 없는 사적지 를 말한다. 6) 최근 국사편찬위원회는 3·1운동 D/B를 구축하고 전국에서 1,716건의 만세시위가 일어났다고 공개하였다. 이 에 의하면 시위건수가 평남 110, 평북 149, 황해 181, 함남 86회, 함북 67회 등 지역에 따라서는 큰 편차가 보 인다(조선일보 2019. 2. 7). 국가기관 간 3·1운동 통계의 격차는 역사적 사실의 불신을 초래할 우려가 있으 므로 상호 긴밀한 협의과정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활용 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93 Ⅲ. 사적지의 활용 방안 본 학술용역은 주요 과업의 하나로써 사적지의 활용방안을 제시하도록 하였다. 작년 남북 관계가 극적으로 개선되기까지 전쟁 일보 직전의 험악한 대치 국면이 조성되어 왔다. 연구자 의 왕래는 전혀 불가능하였고, 결국 학술용역은 현장 답사를 시행하지 못한 상태에서 문헌조 사로만 그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여건에서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의 활용 방안을 제시하라고 한 것은 그야말로 ‘활용’ 불가능한 다소 공허한 요구라고 사료된다. 활용 방안이란 활용하고자 하는 주체의 의 지가 실행될 수 있을 때 가치와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북한지역 사적지 활용 방안은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실행될 수 없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본고에서 학술용역을 종 합하여 그 활용 방안을 논의하는 것 또한 그런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따라서 당장 실현 가능 한 활용 방안이라기보다는, 조만간 성사될 수도 있는 가능성에 대비하여 3·1운동을 포함한 북한지역 사적지 조사에 대한 제언이나 과제를 제시하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된다. 현재 남북관계의 개선에 따라 교류와 협력의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독립기념관이 중심 이 되어 보다 구체적이고 적극적인 계획을 수립해 두고 대비할 필요가 있다. 그 방안의 하나 로서 각 연구팀에서 제시한 활용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부 연구팀의 경우, 독립기념 관이 요구한 사적지 활용 방안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시트지 구성상의 보완점만 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선행의 연구 용역 팀에서 제기한 활용 방안을 그대로 ‘재활 용’한 연구팀도 몇 있었다. 학술용역에서 제기된 활용 방안 중 몇 가지 의미 있는 제안을 정리 하면 다음과 같다. 1. 북한지역 독립운동 사적지 조사로 확대 대부분의 연구팀은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의 조사를 위시하여 전체 독립운동사적지에 대한 전수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한말 국권회복운동인 의병과 계몽운동을 비롯하여 각 종 비밀결사 및 신간회 등 중앙조직에 대한 지회, 기독교와 천도교 등 종교 관련 사적지로도 확대 시행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對岸’이라 표현된 중국과 접경지역에서 전개된 무
94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장투쟁 관련 사적지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해외 독립운동과의 연계를 밝혀야 한다는 제안 은 평북 연구팀의 제기 이래 각 연구팀이 공통적으로 제시한 방안이었다. 이 같은 전수 조사 가 시행되면 현재 독립기념관 홈페이지에서 운용하고 있는 「국내 독립운동사적지」 사이트를 북한지역까지 확대 개편하여 우리나라 전체의 독립운동 관련 사적지에 대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2. 만주 등 해외 3·1운동 사적지의 조사 3·1운동은 국내는 물론, 해외 한민족사회로 파급되어 동포가 거주하는 곳이면 어디에서든 지 전개된 만큼, 국내와 인접한 만주와 연해주는 물론 미주 등지의 3·1운동 사적지에 대한 조사도 시행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개별 연구자에 의해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해외 독립운동 사적지 조사는 2002년 문화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독립기념관과 한국근현대사학회 가 공동으로 시행한 「국외항일운동유적(지) 실태조사사업」을 통해 새로운 이정을 만들었다. 이 사업은 2002년 1월부터 8월까지 세계를 7개 권역으로 나눠 40여명의 전문 인력이 참가한 최초의 독립운동유적지 전수 조사였다. 7개 권역은 독립운동 유적지가 가장 많은 중국을 남 부․서북부․동북부(만주) 등 3개 권역으로 나누고, 여기에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일본, 미주, 유 럽지역으로 나눈 것이다. 독립기념관은 이후 추가적 조사를 실시하여 현재 전 세계 24개국에 서 905개소의 독립운동사적지를 확인하였다.7) 2002년 조사 이후 상당 시일이 경과하였으므로 현황을 파악할 필요가 있고, 새롭게 밝혀진 연구 성과를 반영한 조사도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3. 3·1운동 사적지 등 독립운동 사적지를 주제로 한 역사문화콘텐츠 개발 이 제안은 북한지역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사실은 남한지역의 사적지도 콘텐츠의 개발 은 취약한 부분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전역에 산재한 독립운동 사적지를 교육과 문화관광자 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독립운동 분야별 사적지 책자 발 7) 독립기념관 국외사적지 관리팀 제공자료(2018).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활용 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95 간, 영상물(다큐멘터리) 제작, 독립운동가를 주제로 하는 지역 축제 개발, 봉화시위 등 독특한 만세시위 방법을 특화한 재현 행사,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문화상품의 개발, 문화 창작물 개발 의 지원, 독립운동 테마파크의 개발, 독립운동 사적지로 특화된 테마관광 상품의 개발, 애니 메이션과 게임 등 디지털 콘텐츠 개발 등 다양한 방안이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Ⅳ. 맺음말 - 남북 학술교류를 제안하며 -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조사 학술용역 연구팀이 공통적으로 제안한 활용 방안은 이 학 술조사를 바탕으로 분단시대 남북 학술교류의 물꼬를 트자는 것이었다. 이 제안은 2016년 연 구팀부터 제시되었으나, 정상회담의 개최로 남북관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특히 ‘9월 평양 공동선언’을 통해 남북이 3·1운동 100주년을 공동으로 경축하기로 합의하며 2018년 연구팀에 서 더욱 희망적으로 제시되었다.8) 이 학술용역과 관련하여 독립기념관이 중심이 되어 북측에 남북 학술교류의 구체적 방안으 로 제시할 수 있는 다음의 몇 가지 사안을 상정하는 것으로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첫째, 남북 전문가로 공동 학술답사단을 구성하여 남북한에 산재한 3·1운동 사적지를 포 함한 독립운동 사적지를 답사하고 그 결과를 책자로 발간해 내는 일이다. 지금까지 북한의 문화유산은 KBS-TV의 역사스페셜을 통해 고대사 중심의 유적이 소개된 바 있고, 국립중앙박 물관의 북한 국보 특별전시가 진행되거나, 북한의 금석문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었다.9) 또한 국립문화재연구소가 1984년부터 북한의 문화재 조사를 시작하였고, 2015년 북한 미술유산 학 술정보를 구축하는 등 적지 않은 성과도 거뒀다.10) 최근에는 매장문화재를 중심으로 북한의 문화유산 활용방안이 모색되기도 하였다.11) 그러나 대개 선사시대를 포함한 고대사나 미술사 분야의 협력을 통해 거둔 성과였다.12) 이런 분야와는 달리, 남북의 독립운동사에 대한 인식의 8) 2018년 9월 19일, 남북 정상은 평양에서 3차 회담을 갖고 6개항을 합의하였는데, 이 중 4-③항에서 ‘3·1운동 100주년을 남북이 공동으로 기념하기로 하고, 그를 위한 실무적인 방안을 협의’하기로 하였다. 9) 정창현, 「북한의 문화유산 정책과 관리체계」, 통일인문학 53, 2012, 건국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23~251쪽. 10) 국립문화재연구소 홈페이지(https://www.nrich.go.kr/kor/page.do?menuIdx=330). 11) 하문식, 「북한의 문화유산 활용 방안(案) : 매장문화재」, 先史와 古代 제57호, 2018, 79~97쪽. 12) 북한의 문화유산 개념도 고분·성곽·사찰·고건축 등 시대는 주로 고대, 형태는 유형, 주제는 미술사 분야에 치중되어 있다(문화성 물질문화유물보존사업소, 우리나라 주요 유적, 군중문화출판소, 1963 참조).
96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편차가 크기 때문에 근대사 분야의 교류 협력은 쉽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남북이 역사적 평가 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고 100주년의 계기를 맞아 남북 정상이 공동 기념하기로 합의한 3·1 운동 사적지에 대한 답사는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2월말로 예정된 제2차 북미 정상회담의 결과에 따라 남북관계도 큰 변화가 파생될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독립기념관이 남북 정상의 9월 평양 합의를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 방안으로 3·1운동 사적지 공동 답사단 구성과 조사 실시를 제안하는 것은 매우 좋은 방안이 될 것이다. 이 때 3년간 진행된 학술용역의 결과물은 유용한 기초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연차적인 독립운동사 학술회의를 기획하여 실시하고, 그 결과를 남북 공동 명의로 독 립운동사 학술총서를 간행하는 일이다. 먼저 합의가 가능한 3·1운동 등의 분야나, 안중근․홍 범도처럼 남북이 공동으로 존숭하고 있는 독립운동가를 주제로 선정, 학술교류를 시작하여 역사인식의 공감대를 형성해 나가는 것은 통일을 위한 중요한 시금석이 될 것이다. 금년처럼 3·1운동 100주년이나 내년처럼 경술국치 110주년 등 계기를 맞이하는 독립운동의 사건이나 단체, 인물 등을 학술회의 주제로 선정하여 진행한다면 가능한 일일 것이다. 학술 희의는 남 북 순회 개최를 원칙으로 하되, 장소는 반드시 서울과 평양이 아니더라도 특별한 의미가 있는 지방을 선택하여 진행하는 것도 바람직할 것이다. 학술회의를 위해서는 남북의 책임 기관을 선정, ‘남북 독립운동사 연구 기획단’(가칭)을 구성하여 진행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남측 은 독립기념관이 담당하고, 북측은 사회과학원이나 상응하는 기관이 파트너가 되어 상시적 기구로서 정례 모임을 갖고 교류 협력 방안의 지혜를 모은다면 가시적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셋째, 독립운동사 자료의 발굴과 자료집의 공동 출간을 하는 일이다. 학술 회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료의 발굴과 출판도 쌍방이 기획단을 구성하고 상시기구로서 운영해야 한다. 3·1운동사에서 북측 소재 지방법원의 판결문이 남아있지 않아 북한지역 만세시위의 구체적 양상을 알 수 없음은 주지하는 안타까운 사실이다. 만일 북에서 지방법원 판결문이 발굴된다 면 3·1운동사 연구의 새로운 전기가 될 것이다. 북측에 함흥지방법원 검사국 이시카와[石川 信重] 검사의 「大正 八年 保安法事件」과 같은 자료가 존재할 가능성에 대비하여 적극적인 자 료 발굴에 나서야 할 것이다. 넷째, 이미 알려진 북한 소장 신채호 자료를 확인하고 공동으로 전집 발간을 추진해야 한 다. 독립기념관은 이미 2007년에 단재신채호전집(전9권)을 편찬한 바 있으니, 그 후속으로 서 응당 이 사업을 주관해야 한다. 현재 여러 경로로 신채호 전집의 남북 공동 발간을 타진하
북한지역 3·1운동 사적지 활용 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97 고 있으나, 이 또한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 경제제재 조치와 연동하여 전혀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단재를 ‘한국의 브레히트’로 삼아 독일이 그랬던 것처럼 단재 전집을 공동 편찬하여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의 마중물로 삼을 것을 제안한 바 있다.13) 평양 인민대학습당에 있어야 할 신채호 친필 원고 중 일부가 탈북자에 의해 반출되어 중국을 떠돌 거나 국내로 들어온 정황이 있다. 매우 우려되고 안타까운 일이다. 하루 속히 남북 공동 조사 단이 인민대학습당 등에 있는 신채호 자료를 조사하고 전집 발간에 나서야 한다. 북측이 소 장하고 있다고 하여 그들만의 소유가 아니다. 그것은 남북 모두의 귀중한 민족적 자산이다. 이에 대비한 사업 주체로서 독립기념관의 적극적 준비가 필요하며, 북측의 전향적이고 성의 있는 답변을 기대한다. 13) 박걸순, 「北韓 소장 미공개 申采浩 遺稿의 현황과 성격」, 한국근현대사연구 제79집, 2016, 269~295쪽.
부록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01 1. 북한 3·1운동 사적지 지역별 현황 평북 신의주 의주 용천 철산 선천 정주 곽산 태천 영변 구성 운산 삭주 창성 합계 3 36 11 5 18 11 2 5 2 10 2 13 8 151벽동 초산 위원 강계 자성 후창 4 6 4 6 4 1 평남 평양 강동 강서 개천 대동 맹산 성천 순천 안주 양덕 영원 용강 중화 64 21 3 9 1 4 2 3 2 4 1 1 2 5 진남포 평원 5 1 함북 청진 경성 명천 길주 성진 부령 무산 회령 온성 경흥 종성 81 5 5 17 15 15 1 3 11 4 3 2 함남 갑산 고원 단천 덕원 북청 삼수 신흥 안변 영흥 원산 이원 장진 정평 200 3 7 6 2 37 2 22 2 12 8 15 5 30 풍산 함흥 홍원 4 37 8 황해 곡산 금천 봉산 서흥 송화 수안 신계 신천 안악 연백 옹진 은율 장연 158 5 21 6 9 4 5 3 18 11 11 11 3 7 재령 평산 해주 황주 9 12 19 4 경기 개성 장단 75 59 16 강원 평강 이천 철원 통천 회양 김화 83 9 22 14 6 11 21 총계 812 2. 북한 3·1운동 사적지 유형별 현황 구분 거리 건물 가옥 산야 기타 합계 평안북도 116 33 1 1 151 평안남도 5 37 20 2 64 함경북도 44 29 7 1 81 함경남도 96 81 15 5 3 200 황해도 138 19 1 158 경기도 36 23 8 8 75 강원도 35 22 26 83 총계 470 244 77 17 4 812
102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1 신의주읍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4일 신의주 읍민 약 6백여 명이 독립선포식을 지내고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신의주 신의주읍 거리 2 신의주시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5일 신의주 주민 약 300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신의주 노송동 거리 3 노송동 3.1운동 만세시 위지 1919년 3월 30일 수천 명의 신의주 시민들 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신의주 의주읍 거리 4 의주서부교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일 유여대목사를 중심으로 기 독교와 천도교가 연합하여 1천여 명의 의주 군민들에게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 위를 일으킨 곳 평북 의주군 의주읍 건물 5 의주군 남대문 3·1운 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2일 천도교인 최동오·최안국· 최석련 등이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배포하 고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의주군 의주읍 거리 6 피현 3·1운동 만세시위 지 1919년 3월 3일 피현 주민 3백여 명이 만세 운동을 벌인 곳 평북 의주군 피현면 거리 7 의주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일 고종 국장을 맞아 공립농업 학교 교사·학생·지역유지 약 1천 2백여 명의 읍민들이 독립선포식을 거행하고 만세 시위를 벌인 곳 평북 의주군 의주읍 거리 8 의주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4일 의주 읍민들과 읍내 상인들 의 철시운동이 일어난 곳 평북 의주군 의주읍 거리 9 의주군 양실중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4일 양실중학교 학생 약 6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의주군 의주읍 건물 10 피현 3·1운동 만세시 위지(피현장터·채마동 장터) 1919년 3월 4일 피현 주민 3백여 명이 만세 운동을 벌인 곳 평북 의주군 피현면 거리 11 소곶관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5일 소곶관 일대 주민 약 5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의주군 소곶관 거리 12 수구진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5일 수구진 만세시위 당시 2백 여 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의주군 수구진 거리 13 (구) 영산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6일 고령삭면 만세시위에서 백 여 명의 군중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의주군 고령삭면 영산시장 거리 14 의주군 양실중학교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6일 일어난 의주읍 만세시위에 서 양실중학교 학생 약 5백여 명이 만세시위 를 벌인 곳 평북 의주군 의주읍 건물 15 피현 체장장터 3·1운 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7일 다수의 피현면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인 곳 평북 의주군 피현면 체장 거리 16 가산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9일 의주군 가산면민 백오십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의주군 가산면 거리 17 광평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4일 의주군 광평면 주민들의 만세 시위가 일어난 곳 평북 의주군 광평면 거리 18 가산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일 만세 시위가 일어난 곳 평북 의주군 가산면 도령동 거리 3. 북한 3·1운동 사적지 목록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03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19 광평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5일 의주군 광평면민 약 2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삭주군 광평면 거리 20 청성진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5일 의주군 청성진 주민 약 3백 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의주군 청성진 거리 21 광평면 광무과출장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6일 의주군 광평면민들이 2회 에 걸쳐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삭주군 광평면 광무과출장 소 건물 22 고성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7일 의주군 고성면 대산동 주 민 수백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삭주군 고성면 대산동 거리 23 월화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26일 의주군 월화면 주민 약 6 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삭주군 월화면 거리 24 의주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27일 의주읍민 약 3천 명이 장 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의주군 의주읍 거리 25 월화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28일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된 의주군 월화면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의주군 월화면 거리 26 방적도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28일 의주군 주내면 방적도 주 민 약 6백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의주군 주내면 원화동 방적도 거리 27 영산시장 3·1운동 만 세시위지(영산시장, 헌 병주재소 숙사자리) 1919년 3월 30일 의주군 고령삭면 주민 약 3 천 명이 영산시장에 모여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시위대에 의해 파괴된 헌병주재소 숙사 평북 의주군 고령삭면 영산시장 거리 28 영산시장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31일 의주군 고령삭면 주민 약 3 천 명이 재차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의주군 고령삭면 영산시장 거리 29 수구진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1일 수구진의 주민들이 만세시 위를 일으킨 곳 평북 의주군 수구진 거리 30 옥강진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1일 의주군 옥강진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의주군 옥강진 거리 31 방산동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일 의주군 가산면 방산동에서 다수의 주민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의주군 가산면 방산동 거리 32 구룡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일 의주군 구룡포 주민 약 4백 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의주군 구룡포 거리 33 수구진 3·1운동 만세 시위지(도수장과 친일 파 가옥 자리) 1919년 4월 1일 의주군 수구진 만세시위 당 시 시위대가 파괴한 도수장과 친일파 가옥 자리 평북 의주군 수진면 수구진 가옥 34 중도세관감시서 3·1운 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1일 의주군 상단동 만세시위 당시 시위대에 의해 파괴된 중도세관 감시서 터 평북 의주군 위하면 상단동 중도 세관감시서 거리 35 의주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일 오후, 의주읍민 약 1천 2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의주군 의주읍 거리 36 청성진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1일 청성진 주민 약 3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던 곳 평북 의주군 청성진 거리 37 피현 경찰관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2일 피현 면민 약 3천 명이 시위 운동을 전개한 곳 평북 의주군 피현면 건물
104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38 수진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수구진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2일 수구진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평북 의주군 수진면 수구진 건물 39 옥상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2일 박성득·김시혁·김시항 등 의주군 옥상면 상하동 주민 약 2천 명이 사 무소를 점거하고 자치민단을 설치했던 곳 평북 의주군 옥상면 건물 40 고관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4일 의주군 고관면민들이 만세 시위를 벌였던 곳 평북 의주군 고관면 거리 41 광성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4일 의주군 광성면민들이 산상 횃불시위를 전개한 곳 평북 의주군 광성면 거리 42 하단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4일 의주군 하단면민 5백여 명 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평북 의주군 하단면 거리 43 양시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4일 두 차례에 걸쳐 약 5천 명의 용천군 양시면 주민들이 집결하여 용천군 최초의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용천군 양시면 거리 44 양시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5일 밤, 용천군 양시면 주민 약 5백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용천군 양시면 거리 45 남시시장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6일 용천군 남시면 주민 2백여 명이 남시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벌 인 장터 평북 용천군 남시면 거리 46 남시 경찰관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1일 용천군 남시면 주민 3백여 명이 습격한 주재소 평북 용천군 남시면 건물 47 용암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25일 용천군 용암포읍 주민 약 1 천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용천군 용암포읍 거리 48 남시면 헌병분주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31일 용천군민 약 5천여 명이 일 제 헌병과 맞서 헌병분주소를 포위하고 격 렬하게 저항했던 곳 평북 용천군 남시면 거리 49 남시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일 용천군민 약 천오백여 명이 격렬하게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용천군 남시면 거리 50 양광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1일 용천군 양광면 충렬동 주민 약 5백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평북 용천군 양광면 충렬동 양광면사무소 거리 51 외하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일 용천군 외하면의 주민과 농 민 약 8백여 명이 만세운동을 벌인 곳 평북 용천군 외하면 거리 52 용천군 구읍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6일 용천군 구읍 주민 3백여 명 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용천군 구읍면 거리 53 양광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6일 용천군 양광면 충렬동 주민 5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평북 용천군 양광면 충렬동 건물 54 차련관 3·1운동 만세 시위지(영성상회) 1919년 3월 5일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약 3 천여 명의 철산군 차련관 주민들이 만세시 위를 벌인 곳 평북 철산군 참면[차련 관] 유정동 건물 55 철산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6일 5백여 명의 철산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철산군 철산읍 거리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05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56 철산읍 3·1운동 만세 시위지(읍내, 기독교회, 쪽다리, 명흥학교) 1919년 3월 7일 명흥학교 교원 안태영 등 천 도교인과 기독교인의 주도로 수천 명의 철 산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쪽다리 -만세시위 중 일경과 투석전을 벌인 곳 평북 철산군 철산읍 건물 57 철산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0일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을 중 심으로 수천 명의 철산 주민들이 만세시위 를 일으킨 곳 평북 철산군 철산읍 거리 58 백양면사무소·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7일 철산군 백양면 풍천동 주민 3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철산군 철산읍 건물 59 선천군청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1일 신성중학교 교사 홍성익과 기독교·천도교의 주도 하에 학생·선천군 민 등 약 1천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선천군 백양면 풍천동 건물 60 가물남동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2일 선천군 가물남의 주민 백오 십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선천군 선천읍 거리 61 선천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일, 선천군 선천읍에서 천도 교·기독교가 각각 주도하여 주민 천오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선천군 가물남동 거리 62 선천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4일 읍내장날을 이용하여 선천 군 각 면에서 모인 1만 명의 군민들이 만세 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선천군 선천읍 거리 63 삼봉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5일 선천군 삼봉리 주민 50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선천군 삼봉리 거리 64 가물남리 면사무소·경 찰관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5일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리 주 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리 건물 65 고군영리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5일 선천군 심천면 고군영리 주 민 약 2백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선천군 심천면 고군영리 거리 66 가물남리 면사무소·경 찰관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5일 선천군 용연면 보암 주민들 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선천군 용연면 보암 건물 67 신미도 3·1운동 만세 시위지/운종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5일 선천군 운종면 주민들이 점 검인수하여 자치행정사무를 집행한 곳 평북 선천군 운종면 신미도 건물 68 가물남리 면사무소·경 찰관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6일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리 주 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리 건물 69 가물남리 면사무소·경 찰관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6일 선천군 용연면 보암 주민들 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선천군 용연면 보암 건물 70 가물남리 면사무소·경 찰관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7일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리 주 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리 건물 71 가물남리 면사무소·경 찰관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7일 선천군 용연면 보암 주민들 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선천군 용연면 보암 건물
106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72 가물남리 면사무소·경 찰관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8일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리 주 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리 건물 73 가물남리 면사무소·경 찰관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8일 선천군 용연면 보암 주민들 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선천군 용연면 보암 건물 74 가물남리 면사무소·경 찰관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9일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리 주 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선천군 수청면 가물남리 건물 75 가물남리 면사무소·경 찰관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9일 선천군 용연면 보암 주민들 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선천군 용연면 보암 건물 76 정주군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일 천도교·기독교가 주도하여 정주군민 천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정주군 정주면 거리 77 정주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5일 기독교·천도교가 연합하여 정주 주민들과 함께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평북 정주군 정주면 거리 78 고읍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7일 3백여 명의 정주군 고읍 주 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정주군 고읍면 거리 79 덕달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7일 정주군 덕달면 덕성리 주민 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정주군 덕달면 덕성리 거리 80 아이포면 3·1운동 만세 시위지(아이포면 면사무 소) 1919년 3월 7일 정주군 아이포면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정주군 아이포면 면사무소 건물 81 정주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8일 정주군 정주면 주민 오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정주군 정주면 거리 82 정주장터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15일 정주군 정주면의 기독교인 을 중심으로 30여 명의 주민들이 만세운동 을 벌인 곳 평북 정주군 정주면 거리 83 고읍역 3·1운동 만세 시위지/ 익성리 3·1운 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31일 정주군 갈산면 익성리에서 용동교회와 오산학교 교직원들의 계획에 의 해 만세시위가 발생한 곳 평북 정주군 갈산면 익성리 거리 84 동주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31일 정주군 동주면 삼리 주민 약 6백여 명이 극렬하게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평북 정주군 동주면 삼리 건물 85 정주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정주우편국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31일 약 2만 5천 명의 정주읍 주 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정주군 정주면 건물 86 월훈동 새장거리 헌병 출장소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초순 정주군 고덕면 월훈동 주 민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정주군 고덕면 월훈동 거리 87 곽산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곽산역 3·1운 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3일 천도교·기독교가 제휴하여 약 1천 명 곽산군 곽산읍 주민들이 만세시위 를 일으킨 곳 평북 곽산군 곽산읍 거리 88 곽산읍 3·1운동 만세 시위지(영창학교) 1919년 3월 6일 영창학교 교사·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천여 명의 곽산군 곽산읍 주민 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곽산군 곽산읍 건물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07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89 태천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1일 천도교·기독교가 제휴하 여 수천 명의 태천군 태천읍 주민들이 만세 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태천군 태천읍 거리 90 장림면 3·1운동 만세 시위지(점남동 산상 시 위지) 1919년 4월 2일 장림면 주민들이 산에 올라 가 독립만세를 고창한 곳 평북 태천군 장림면 점남동 산야 91 태천경찰서 3·1운동 만세시위지/ 태천읍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2일 태천군 태천읍 주민 약 1천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태천군 태천읍 거리 92 서면 3·1운동 만세시 위지 1919년 4월 4일 태천군 서면 주민 5백여 명 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태천군 서면 거리 93 영변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8일 기독교인과 영변농업학교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수백 명의 영변군 영 변읍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영변군 영변읍 거리 94 영변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9일 천도교가 주도하여 영변군 영변읍 주민 수백 명의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평북 영변군 영변읍 거리 95 구성군 남시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1일 4백여 명의 구성군 남시 주 민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구성군 남시 거리 96 사기면 신시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8일 기독교인의 주도로 구성군 사기면 신시 주민 약 4백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구성군 사기면 신시 거리 97 구성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0일 천도교인 중심으로 구성군 구성읍 주민 3백여 명이 두 차례에 걸쳐 만 세 시위를 벌인 곳 평북 구성군 구성읍 거리 98 남시 3·1운동 만세시 위지 1919년 3월 31일 장날을 이용하여 약 5천 명 의 구성군 남시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구성군 남시 거리 99 사기면 신시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31일 구성군 사기면 신시의 주 민 약 1천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구성군 사기면 신시 거리 100 구성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일 구성군 구성읍내에서 약 구 백여 명의 군민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평북 구성군 구성읍 거리 101 구성군 남시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1일 구성군 구성 읍내시위와 함 께 남시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된 곳 평북 구성군 남시 거리 102 구성군 신시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1일 구성군 사기면 신시에서 약 1천 5백 명의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구성군 사기면 신시 거리 103 지경장터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4월 4일 사기면의 지경 주민들이 만 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구성군 사기면 지경 거리 104 지경장터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4월 5일 구성군 사기면 지경 주민들 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구성군 사기면 지경 거리 105 북진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5일 운산군 북진면 주민 약 3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운산군 북진면 거리 106 운산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5일 운산군 운산읍 주민들이 만 세시위를 전개한 곳 평북 운산군 운산읍 거리
108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107 삭주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5일 삭주군 삭주읍 주민 약 3천 명이 기독교·천도교의 주도 하에 만세시위 를 일으킨 곳 평북 삭주군 삭주읍 거리 108 삭주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8일 삭주군 삭주읍 주민 5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삭주군 삭주읍 거리 109 삭주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9일 삭주군 삭주읍의 기독교인 약 50명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삭주군 삭주읍 거리 110 삭주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4일 삭주군 삭주읍에서 주민 3~4백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평북 삭주군 삭주읍 거리 111 외남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7일 삭주군 외남면에서 대관교 회 교인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전개된 곳 평북 삭주군 외남면 대관리 거리 112 대관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1일 삭주군 외남면 대관리에 군중 수천 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삭주군 외남면 대관리 거리 113 삭주헌병분견소 3·1운 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31일 삭주군 삭주읍 주민 2천여 명의 만세시위가 발생한 곳 평북 삭주군 삭주읍 헌병분견소 건물 114 삭주헌병분견소 3·1운 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1일 삭주군 삭주읍 주민 2천여 명의 만세시위가 발생한 곳 평북 삭주군 삭주읍 헌병분견소 건물 115 외남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6일 삭주군 외남면 대관리에서 일어난 만세시위 결사대 항전지 평북 삭주군 외남면 대관리 거리 116 대유동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1일 창성군 동창면 대유동 천 도교인 약 60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창성군 동창면 대유동 거리 117 대유동 3·1운동 만세 시위지/ 대유동교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1일 창성군 동창면 대유동의 주 민 약 1천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창성군 동창면 대유동 건물 118 창성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일 기독교 장로 강제희의 주도 로 창성군 각 면의 군민 약 2천 명이 만세시 위를 일으킨 곳 평북 창성군 창성읍 거리 119 대유동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2일 창성군 동창면 대유동 주민 5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평북 창성군 동창면 대유동 거리 120 대유동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4일 창성군 동창면 지경 장터에 서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주민들이 만세 운동을 전개한 곳 평북 창성군 동창면 지경 거리 121 대유동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5일 창성군 동창면 지경 장터에 서 기독교인이 주도하여 주민들이 만세운동 을 전개한 곳 평북 창성군 동창면 지경 거리 122 학송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5일 천도교와 기독교를 중심으 로 한 창성군 청산면 학송리 주민 약 3백 명 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창성군 청산면 학송리 거리 123 청룡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6일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한 창 성군 청산면 청룡리 주민 약 70명이 만세시 위를 일으킨 곳 평북 창성군 청산면 청룡리 거리 124 벽동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0일 기독교와 천도교인들이 주 축이 되어 벽동군 최초의 만세시위가 발생 한 곳 평북 벽동군 벽동읍 거리 125 벽동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0일 벽동군 벽동읍 주민 2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벽동군 벽동읍 거리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09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126 벽동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1일 벽동군 벽동읍 주민 약 3백 명이 두차례에 걸쳐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벽동군 벽동읍 거리 127 벽동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일 천도교인을 주축으로 벽동 군 벽동읍 주민 천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 킨 곳 평북 벽동군 벽동읍 거리 128 초산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5일 천도교와 기독교의 주도로 초산군 초산읍의 주민 약 1천 명이 만세시위 를 일으킨 곳 평북 초산군 초산읍 거리 129 초산군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0일 초산군 각 면의 주민들이 연합하여 일제히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 평북 초산군 거리 130 초산군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9일 초산군 각 면의 만세시위 가 일어난 곳 평북 초산군 거리 131 초산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1일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초산군 초산읍 주민 약 6백 명이 두 차례에 걸쳐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초산군 초산읍 거리 132 초산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일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초산 군 초산읍 주민 약 3천 6백여 명이 오전과 밤을 기해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평북 초산군 초산읍 거리 133 초산군 3·1운동 횃불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2일 수백 명의 초산군 주민들이 횃불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초산군 거리 134 위원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6일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한 수 백 명의 위원군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일으 킨 곳 평북 위원군 거리 135 위원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0일 최제우 순도기념일을 맞아 천도교인이 주도하여 수천 명의 위원군 위 원읍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벌인 곳 평북 위원군 위원읍 거리 136 위원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1일 위원군 위원읍의 천도교인 30여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던 곳 평북 위원군 위원읍 거리 137 한장교회/ 숭정면 3·1 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17일 위원군 숭정면 한장교회 교인 약 1백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평북 위원군 숭정면 한장 건물 138 입관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일 강계군 입관면의 천도교인 수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강계군 입관면 거리 139 강계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5일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강계 군 강계읍 주민 수천 명이 만세시위를 전개 한 곳 평북 강계군 강계읍 거리 140 강계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8일 강계군 강계읍 장날에 맞춰 천도교·기독교, 학교 주민 등 약 7백여 명 이 제휴하여 강계군 최대의 만세시위를 전 개한 곳 평북 강계군 강계읍 거리 141 고산진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1일 강계군 성간면 고산진 기독 교 상인들의 철시운동이 전개된 곳 평북 강계군 성간면 고산진 거리 142 서동 3·1운동 시위지 1919년 4월 11일 강계군 성간면 서동지역 기 독교 상인들의 철시운동이 전개된 곳 평북 강계군 성간면 서동 거리 143 풍용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6일 강계군 어뢰면 풍용리의 주민 수천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강계군 어뢰면 풍용리 거리
110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144 자성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5일 자성군 자성읍에서 천도교 인과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주민 수백 명 이 두 차례에 걸쳐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자성군 자성읍 거리 145 중강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6일 자성군 중강면 중강진시위 가 발생한 곳이다. 평북 자성군 중강면 중강진 거리 146 중강진 3·1운동 만세 시위지(중강진 일대) 1919년 3월 23일 자성군 중강면 중강진의 신성학교·자성공립보통학교 교사와 학생, 기독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가 일어 난 곳 평북 자성군 중강면 중강진/여 연면 중상동-건 하동 거리 거리 147 호하동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0일 자성군 장토면 호하동의 주민 약 40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자성군 장토면 호하동 거리 148 후창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0일 후창군 군민 수백 명이 만 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후창군 거리 149 옥구진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7일 옥구진 주민 2백여 명이 만 세시위를 일으킨 곳 평북 의주군 옥구진 거리 150 선천읍 3·1운동 1주년 기념만세시위지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 기념만세시 위가 발생한 곳 평북 선천군 선천읍 거리 151 태천공립보통학교 만세 시위지 1920년 8월 31일 태천공립보통학교 학생들 이 독립만세를 고창한 곳 평북 태천군 태천읍 건물 152 남산현교회_평양 만세 시위 감리교측 시발지 1919년 3월 1일 평양 감리교 남산현 교회측 의 독립선언 및 만세시위 시발 장소 평남 평양부수옥리 332 건물 153 장대현교회_평양 만세 시위 장로교측 책원지 1919년 3월 1일 평양 장로교측 만세시위 주 도 교회 평남 평양부관후동 254 건물 154 숭덕학교_평양 만세시 위 장로교측 시발지 1919년 3월 1일 평양 장로교 장대현 교회측 의 만세시위 시발 장소 평남 평양부관후동 254 건물 155 평양천도교구당_평양만 세시위 천도교측 시발 지 1919년 3월 1일 평양 천도교측의 만세시위 시발 장소 평남 평양부설암리 8-1 건물 156 일본군 제20사단 제77 연대 본부_평양만세시 위 탄압기관 1919년 3월 1~8일 평양만세시위 탄압기관 평남 평양부 건물 157 기홀병원 민족대표 이승훈이 입원하여 서북지방의 기독교계 인사들과 비밀리에 접촉하며 3·1 운동을 준비했던 병원 평남 평양부 서문안 시약소 옆 건물 158 예수교 서원 예수교서원 서기 안세환을 중심으로 서울과 평양, 평양과 주변 지역 독립만세 시위 준비 및 연락 기관 역할을 하였던 장소 평남 평양부 관후동 혹은 차관동 건물 159 숭현여학교 1919년 2월 27일 윤원삼 등 평양 만세시위 운동 실행위원들이 만세시위를 결의하고 준 비한 장소 평남 평양부 상수구리 211 건물 160 길선주 목사집 3·1운동 민족대표이자, 장로교계의 대표자 격인 사람으로서, 평양 장대현교회 길선주 목사의 집 평남 평양부 관후동 61 가옥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11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161 평양경찰서 1919년 3월 평양의 독립만세 시위운동의 중심장소이며, 평화적 시위 시민에 대해 야만적 탄압을 자행한 경찰기관 평남 평양부 건물 162 사무엘 오스틴 모펫 (Samuel Austin Moffet) 집 장대현교회, 숭덕학교, 평양신학교, 기독교 서원 등을 설립한 미국인 선교사로서 1919 년 3월 1일 장로교인들의 숭덕학교 독립선 포식에 참석하였으며, 일제 탄압만행을 국 제여론화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다. 평남 평양부 신양리 26 가옥 163 엘리 밀러 모우리(Eli. Miller Mowry) 선교사 집 1919년 3월 평양 3·1운동 때 시위 참여자 5 명을 집에 숨겨주었다가 범인 장익(藏匿)사 건으로 재판을 받은 모우리 목사의 집 평남 평양부 신양리 가옥 164 숭실대학 평양 장대현교회 독립선언식과 시내 만세시 위의 학생측 주도 학교 평남 평양부 신양리 39 건물 165 신홍식(申洪植) 집 기독교 북감리파 목사 출신의 민족대표 33 인의 한 사람 집 평남 평양부 대찰리 38 가옥 166 임예환(林禮煥) 집 천도교 도사로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 람인 임예환의 집 평남 평양부 경제리 99 가옥 167 김창준(金昌俊) 집 기독교 북감리파 전도사로서 민족대표로 3·1운동에 참여했으며 목사로 활동하다 6.25 때 월북한 인사 김창준의 집 평남 평양부대찰리 106 가옥 168 나인협(羅仁協) 집 평양지역 천도교 도사로서 3·1운동 민족대 표의 한 사람인 나인협의 집 평남 평양부 육로리 25 가옥 169 황에스터 집 2.8독립운동과 3·1운동, 대한민국애국부인 회 운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한 여성독립운 동가 황에스더의 집 평남 평양부 대찰리 151 가옥 170 윤원삼(尹愿三) 집 평양 장대현 교회 신자로서 1919년 3월 1일 숭덕학교 독립선언식장에 독립선언서를 배 포하고, 진남포에도 전달하였으며, 상해로 망명했던 평양 3·1운동 주역 윤원삼의 집 평남 평양부상수리 269 가옥 171 강규찬(姜奎燦) 집 1919년 3월 1일 평양 장대현교회 봉도식 및 만세시위의 실질적인 준비 책임자이며 선언 식 연설자 강규찬 목사 집 평남 평양부 계리 72 가옥 172 김선두(金善斗) 목사 집 1919년 3월 1일 평양 장로교 장대현교회 만 세시위 주도자 김선두 목사 집 평남 평양부신양리 103 가옥 173 신흥동(新興洞)감리교 회당 1919년 3월 1일 진남포 만세시위의 발발 장 소 평남 진남포 부 신흥리 42 건물 174 덕원루(德源樓) 1919년 2월 중순 이승훈이 임치정과 홍기황 등 감리교회 간부급들과 만나 진남포 만세 시위를 협의한 곳 평남 진남포 부 삼화정 건물 175 홍기황(洪基璜)집 1919년 3월 1일 진남포 3·1운동의 총지휘 자 홍기황의 집 평남 진남포 부 신흥리 3통 5호 가옥 176 노윤길(盧允吉) 집 1919. 3. 1 진남포부 만세시위 를 주도한 노 윤길의 집 평남 진남포 부 신흥리 16통 4호 가옥 177 서선광무사업소(西鮮鑛 務事業所) 진남포 만세시위 주도자 임치정(林蚩正)의 사무소 터 평남 진남포 부 건물
112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178 보통벌 모랫내 1919년 3월 3일 대동군 고평면 주민 수천명 의 만세시위 장소 평남 대동군 고평면 산야 179 취명학교(就明學校) 1919년 3월 2일 대동군 대보면(大寶面) 만세 시위의 준비장소 평남 대동군 대보면 대평역전 건물 180 홍기조(洪基兆)집 천도교 장로로서 3·1운동 민족대표 중 한 사람인 홍기조의 집 평남 용강군 오신면 가양리 749 가옥 181 모락장 1919년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金祭面) 원장 (院場)에서 집결한 시위대가 구금자 구출을 위해 이웃 고을인 강서군(江西郡) 반석면(班 石面) 상사리(上四里)의 모락장[沙川市場]으 로 진격하여 유혈투쟁을 전개하고 주도자가 사형된 시위 현장 평남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거리 182 조진탁(曺振鐸)집 1919년 3월 4일 모락장 시위를 주도하고 사 형을 당한 반석교회(盤石敎會) 조진탁 장로 의 집 평남 강서군 성태면 연곡리 204 가옥 183 임이걸(林利杰) 집 원장ㆍ사천시장 만세시위 주도자 집 평남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 가옥 184 원장교회 1919년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金祭面) 원장 (院場) 시위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모락장 시위를 주도한 교회 평남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 건물 185 반석교회(盤石敎會) 1919년 3월 4일 대동군 금제면(金祭面) 원장 (院場) 시위와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모락장 시위를 주도한 교회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육리 건물 186 상원 주재소 1919년 3월 2일 천도교인 중심의 만세시위 가 전개되었던 현장 평남 중화군 상원면 신읍리 건물 187 김동식(金東植) 집 중화 만세세위 주도자 집 평남 중화군 상원면 직현리 가옥 188 나용환(羅龍煥)집 천도교 도사이며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 인 나용환의 집 평남 중화군 상원면 장항리 32 가옥 189 상원신읍 주재소 1919년 3월 2, 3일 상원 읍내 천도교인이 중 심이 되어 한때 일경의 무장해제를 하는 등 만세시위의 중심지 평남 중화군 상원면 신읍리 건물 190 중화읍내 장터 1919년 3월 3일에는 예수교회와 천도교구가 제휴하여 약 1천명이 시위를 전개한 곳 평남 중화군 중화면 낙민리 거리 191 강동군청(江東郡廳) 1919년 3월 30일과 31일 강동군 강동 읍내 만시시위 중심지 평남 강동군 강동면 건물 192 강동군 삼등면(三登面) 사무소 천도교 삼등교구 교인들이 주도하여 일어난 만세시위 중심 장소 평남 강동군 삼등면 봉의리 건물 193 천도교 삼등교구 천도교 삼등 교구에서 교구장 백인덕(白仁 德)을 중심으로 강동군 삼등면 만세시위 주 도 단체 평남 강동군 삼등면 건물 194 온정리 주재소 1919년 3월 6일에 해운면(海雲面) 용반 1리 (龍磻1里), 용반 2리·궁산리(弓山里) 일병 리(日屛里) 등 주민들이 온정리 시위 중심지 평남 용강군 해운면 온정리 건물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13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195 성천 천도교구당 1919년 3월 4일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4천여 명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 를 시작한 곳 평남 성천군 성도면 상부리 건물 196 성천 헌병대 1919년 3월 4일 남녀 천도교인을 중심한 4천 여 명의 시위대에 대해 총격을 가하여 20여 명을 사살한 곳 평남 성천군 성도면 상부리 동명관 앞 건물 197 신창교회 1919년 3월 5일 신창면 만세시위 주도 이윤 영 목사 시무지 평남 순천군 신창면 신창리 건물 198 은산 천도교구실 1919년 3월 2일 천도교구장 김기수(金基洙) 가 주도하여 약 1천여 명 군중이 만세시위를 한 시발지 평남 성천군 성도면 상부리 건물 199 순천군 신창면 사무소 1919년 3월 5일 순천군 신창면 만세시위 때 ‘대한독립운동준비사무소’라는 간판을 걸고 태극기를 게양한 후 면사무소에 비치하고 독립선포식 준비와 거행을 했던 곳 평남 순천군 신창면 신창리 건물 200 안세환(安世桓) 집 平壤 예수교 서원회 총무로서 평양 시위에 연락 및 준비역할과 독립청원서를 일본 정 부에 전달한 안세환의 집 평남 평원군 순안면 포정리 26 가옥 201 강서시장 강서군 강서면 만세시위의 중심 장소 평남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거리 202 강서교회 1919년 3월 3일 강서 읍내에서 4천명의 만 세시위의 주도단체 평남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661 건물 203 강서 천도교회 1919년 3월 3일 강서감리교회와 함께 강서 읍내에서 4천명이 대대적으로 궐기한 만세 시위의 주도단체 평남 강서군 강서면 덕흥리 건물 204 증산주재소 1919년 3월 4일 군중 5백여 명이 헌병주재 소 청사를 파손시키고 일본인 헌병 상등병 (上等兵) 1명과 헌병보조원 3명을 죽이고 보 조원 집에 불을 지른 곳 평남 강서군 증산면 취룡리 건물 205 함종공립보통학교 1919년 3월 8일 경성의학전문학교 출신의 개 업의(開業醫) 강기팔(姜基汃) 등이 주도하여 5백여 명 군중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인 곳 평남 강서군 함종면 함종리 건물 206 감기팔(姜基汃)집 함종면 만세시위 주도자 강기팔의 집 평남 강서군 함종면 함종리 120 가옥 207 안주읍 장로교 동예배 당(東禮拜堂) 1919년 3월 1일 안주 읍내 독립운동의 준비 및 발원지 평남 안주군 주내면 북문리 건물 208 천도교 안주교구실 1919년 3월 3일 안주 읍내 시위의 책원지 평남 안주군 주내면 율산리 건물 209 안주읍 율산공원(栗山 公園) 1919년 3월 3일 안주 읍내 5천 명의 군중이 모여 전개한 시위지 평남 안주군 주내면 율산리 산야 210 안주군 입석장터 1919년 3월 23일 2천여명의 입석면민이 벌 인 독립만세 시위장소 평남 안주군 입석면 신안주역 서남방 30리 지점 거리
114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211 개천장터 1919년 4월 21일 외동면(外東面) 순흥(順興) 안씨촌(安氏村)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1 천명이 일어난 만세시위지 평남 개천군 외동면 용소리 거리 212 영원군 천도교회 1919년 3월 9일 하오 2백 명의 천도교인들 이 읍내 시위를 주도한 교회 평남 영원군 영원면 영원리 건물 213 맹산헌병 분견대 1919년 3월 10일 헌병소 마당에서 50여 명 을 학살한 곳 평남 맹산군 군내면 수정리 건물 214 맹산 천도교회 1919년 3월 10일 맹산 학살의 만세시위 중 심 추진기관 평남 맹산군 군내면 수정리 건물 215 양덕천도교회 1919년 3월 4일과 8일 일제의 학살만행이 자행된 만세시위 주도 기관 평남 양덕군 양덕면 상석리 향교 아래 건물 216 청진부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0일부터 시작되어 31일까지 전개된 함경북도 청진부 3·1운동 만세시위 장소 함북 청진부 거리 217 신암동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1일 함경북도 청진부 신암동에 서 3·1운동 만세시위가 일어난 장소 함북 청진부 신암동 85 거리 218 포항동 3·1운동 만세 시위지 함경북도 청진부 포항동 주민들이 일으킨 만세시위의 중심지로 포항시가지와 청진보 통학교를 포함 함북 청진부 포항동 거리 219 인곡동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9일 함경북도 청진부 인곡동에 서 3·1운동 만세시위를 계획함 함북 청진부 인곡동 거리 220 미음동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9일 함경북도 청진부 미음동에 서 3·1운동 만세시위를 계획함. 함북 청진부 말음동 거리 221 용성면 개동 박영하 집 터 1919년 3월 15일 천도교 경성대교구의 만세 운동 당시 배포자료인 「조선독립만세」를 인쇄한 장소 함북 경성군 용성면 개동 497 가옥 222 용성면 수성동 3·1운 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5일 함경북도 경성군 용성면 수 성동에서 3·1운동 만세시위가 일어난 장소 함북 경성군 용성면 수성동 거리 223 천도교 경성대교구 1919년 천도교 경성대교구의 교사 등이 교 도들과 함께 3·1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실 행한 장소 함북 경성군 용성면 수성동 건물 224 어대진 3·1운동 만세 시위지 함경북도 경성군 어대진에서 일어난 3·1운 동 만세시위지 함북 경성군 어대진 거리 225 어랑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함경북도 경성군 어량면에서 일어난 3·1운 동 만세시위지 함북 경성군 어랑면 거리 226 하가면 화대동 3·1운 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4일 함경북도 명천군 화가면 화대동에서 전개된 3·1운동 만세시위 함북 명천군 하가면 화대동 거리 227 화대 헌병분견소 3·1 운동 만세시위지 하가면 화대동에서 만세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헌병의 무차별 사격으로 5명이 순국한 장소 함북 명천군 하가면 화대동 건물 228 하가면 화대장터 3·1 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4일에 이어 3월 15일 함경북도 명천군 화가면 화대동 화대장터에서 전개된 3·1운동 만세시위 함북 명천군 하가면 화대동 거리 229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 면사무소 1919년 3월 15일 계속된 함경북도 명천군 하가면 화대동 3·1운동 만세시위에서 행진 한 목적지 중 한 곳 함북 명천군 하가면 하가면사무 소 건물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15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230 상가면 낙동동 3·1운 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5일 함경북도 명천군 상가면 낙동동에서 최명극이 구한국기를 제작하여 자택 앞에다 걸고 동민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친 장소 함북 명천군 상가면 낙동동 거리 231 아간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6일 함경북도 명천군 아간면에 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 함북 명천군 아간면 거리 232 상고면 보촌동 광장 3·1운동 만세시위지 함경북도 명천군 상길면 보촌동에 거주하는 장약운, 김동을, 김동섭 등이 주민들과 함께 모여 3·1운동 만세시위를 진행한 장소 함북 명천군 상길면 보촌동 거리 233 상고면 보촌동 사립보 촌학교 1919년 함경북도 명천군 상실면 보촌동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을 주도한 김동을과 김 동섭이 소속된 학교 함북 명천군 상길면 보촌동 사립보촌학 교 건물 234 함경북도 명천군 우계 장 3·1운동 만세시위 지 1919년 함경북도 명천군 우계장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지 함북 명천군 우계장 거리 235 함경북도 명천군 상고 면 목진동 운만태 선지 곡 1919년 3월 22일 명천군 상고면 목진동에서 3·1운동 만세시위가 일어난 장소 함북 명천군 상고면 목진동 운만태 선지곡 거리 236 함경북도 명천군 서면 우동동 3·1운동 만세 시위지 함경북도 명천군 서면 우동동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지 함북 명천군 서면 운동동 거리 237 함경북도 명천군 서면 우동동 우동사립학교 명천군 서면에서 일어난 만세시위를 주도한 교사들이 재직한 학교 함북 명천군 서면 운동동 운동사립학 교 건물 238 함경북도 명천군 서면 명남동 명동학교 3·1 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14일 강승한등이 함경북도 명천 군 서면 산성동에서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대중을 규합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조선독립 만세운동을 한 장소 함북 명천군 서면 명남동 명동학교 건물 239 함경북도 명천군 서면 고성동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4일 오후 2시 함경북도 명천군 서면 고성동 주민 약 200명이 3·1운동 만 세시위를 한 장소 함북 명천군 서면 고성동 거리 240 함경북도 명천군 양하 3·1운동 만세시위지 함경북도 명천군 양하에서 만세시위를 계획 하던 7명이 체포됨 함북 명천군 양하 거리 241 함경북도 명천군 상우 북면 하장동 시장 3·1 운동 만세시위지 919년 황완택등이 4월 18일 상우북면 하장 동의 장날에 태극기를 나누어 주며 약 300의 군중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장소 함북 명천군 상운북면 하장동 거리 242 함경북도 명천군 상우 남면 상장동 황완택 등 의 집터 1919년 함경북도 명천군 상우북면 하장동 3·1운동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구한국기를 제작한 황완택·박후근의 가옥 함북 명천군 상운남면 상장동 108 상운남면 상장동 160 가옥 243 함경북도 길주군 장백 면 도화동 이용서 집터 1919년 3월 12일 길주장터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운동이 계획된 장소 함북 길주군 백장면 도화동 856 가옥
116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244 함경북도 길주군 길성 면 길북동 박서룡 집터 함경북도 길주군 길주읍에서 일어난 3·1운 동 만세운동에 대한 계획이 논의된 장소 함북 길주군 길성면 길북동 가옥 245 함경북도 길주군 길주 읍 3·1운동 만세시위 지 1919년 3월 12일 李泰仁 등은 天道敎徒를 중심으로 함경북도 길주군 길주읍 장날을 이용하여 민중 약 1000명과 함께 구한국기 를 휘두르며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길주 읍내를 행진함 함북 길주군 길주읍 거리 246 함경북도 길주군 길주 읍 우시장 1919년 3월 12일 길주군 길주읍에서 일어난 대규모 만세시위가 처음 시작된 장소 함북 길주군 길주읍 우시장 거리 247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 면 일신동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13일 함경북도 길주군 덕산면 일신동에 거주하는 허홍이 주민들을 모아 독립만세를 외친 장소 함북 길주군 덕산면 일신동 산야 248 함경북도 길주군 동해 면 면사무소 1919년 3월 13 사립동일학교 교사인 한장희 가 학생들을 지휘하여 3·1운동 만세시위를 진행한 장소 함북 길주군 동해면 건물 249 함경북도 길주군 동해 면 사립동일학교 1919년 3월 13․14일 함경북도 길주군 동해면 에서 일어난 만세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이 소속된 학교 함북 길주군 동해면 사립동일학 교 건물 250 함경북도 길주군 길주 읍 해자포 헌병분견주 재소 1919년 3월 13일 길주읍민의 일부가 해자포 헌병분견주재소를 포위하여서 만세시위를 한 장소 함북 길주군 길주읍 해자포 헌병분견주 재소 건물 251 함경북도 길주군 동해 면 창촌리 용원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3․14일 함경북도 길주군 동해면 에서 3·1운동 만세시위가 진행된 장소 함북 길주군 동해면 창촌리 용원시장 거리 252 함경북도 길주군 장백 면 상팔동 권명주 집터 1919년 3월 15일 함경남도 단천군 북두일면 대신리의 황희종 집에 가서 3·1운동이 일 어나고 있음을 알리고 대신리에서도 독립운 동을 거행하라는 내용을 전달한 천도교도 권명주의 집터 함북 길주군 장백면 상팔동 가옥 253 함경북도 길주군 양사 면 양흥동 합수헌병주 재소 1919년 3월 15일 함경북도 길주군 양사면 양흥동에서 최병원 등은 주민 3백여 명을 모 아 태극기를 흔들며 함께 몰려가 조선독립 만세운동을 전개한 장소 함북 길주군 양사면 양흥동 합수헌병주 재소 건물 254 함경북도 길주군 웅평 면 용천동 웅평면사무 소 1919년 3월 15일 함경북도 길주군 웅평면 용천동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가 일 어난 장소 함북 길주군 웅평면 용천동 건물 255 함경북도 길주군 양사 면 신풍동 3·1운동 만 세주도자 김병련·김주봉·김명 철 집터 함경북도 길주군 양사면 신풍동 3·1운동 만세시위를 주도한 김병련·김주봉·김명철 등이 거주하던 가옥 함북 길주군 양사면 신풍동 302 양사면 신풍동 314 가옥 256 함경북도 길주군 양사 면 신풍동 3·1운동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16일 함경북도 길주군 양사면 신풍동에서 마을주민들이 3·1운동 만세시 위를 한 장소 함북 길주군 양사면 신풍동 거리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17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257 함경북도 길주군 양사 면 재덕 헌병분견소 1919년 3월 16일 함경북도 길주군 양사면 신풍동에서 김병련 등이 주도하여 일어난 3·1만세운동이 진행된 장소 함북 길주군 양사면 재덕 헌병분견소 건물 258 함경북도 성진군 성진 읍 3·1운동 만세시위 터 함경북도 성진군 성진읍에서 일어난 3·1운 동 만세시위 장소 함북 성진군 성진읍 거리 259 함경북도 성진군 성진 읍 욱정 욱정기독교회 함경북도 성진군 성진읍 3·1운동 만세시위 를 준비하고 주도한 기독교 교회 함북 성진군 성진읍 욱정 욱정기독교 회 건물 260 함경북도 성진군 성진 읍 보신여학교 함경북도 성진군 성진읍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계 여학교 함북 성진군 성진읍 보신여학교 건물 261 함경북도 성진군 성진 읍 보신학교 함경북도 성진군 성진읍에서 일어난 3·1운 동 만세시위를 주도한 교사 및 학생들이 소 속된 기독교계 학교 함북 성진군 성진읍 보신학교 건물 262 함경북도 성진군 농장 동 3·1운동 만세시위 지 함경북도 성진군 임명부근의 농장동에서 일 어난 3·1운동 만세시위 장소 함북 성진군 성진읍 농장동 거리 263 함경북도 성진군 임명 3·1운동 만세시위지 함경북도 성진군 임명부근에서 일어난 3·1 운동 만세시위 장소 함북 성진군 성진읍 임명 거리 264 함경북도 성진군 성진 읍 제동병원 함경북도 성진군 성진읍에서 일어난 3·1운 동 만세시위를 주도한 그리어슨 목사가 운 영하는 병원으로 만세시위가 시작된 장소 함북 성진군 성진읍 재동병원 건물 265 함경북도 성진군 학서 면 업억리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11일 함경북도 성진군 학서면에 서 김승락이 억업리에서 주민 다수를 모아 구한국 국기를 앞세워 군중을 지휘하며 3·1만세운동을 전개함 함북 성진군 학서면 업억리 거리 266 함경북도 성진군 학동면 방동 3·1운동 만세시위 지 함경북도 성진군 학동면 방동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 장소 함북 성진군 학동면 방동 거리 267 함경북도 성진군 학중면 임명동 임명공립보통학 교 함경북도 성진군 학중면 임명동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 주도자들이 속한 공립보 통학교 함북 성진군 학중면 임명동 임명공립보 통학교 건물 268 함경북도 성진군 학중 면 임명동 임명순사주 재소 함경북도 성진군 학중면 임명동 임명공립보 통학교 생도 許學鳳등이 주민 약 200명과 함께 동리 다리 위에 집합하여 군중을 인솔 하여 몰려가 조선독립만세를 외친 장소 함북 성진군 학중면 임명동 임명순사주 재소 건물 269 함경북도 성진군 학동 면 3·1운동 만세시위 지 함경북도 성진군 학동면에서 일어난 만세시 위의 중심지로 학동면사무소와 주변 지역을 포함 함북 성진군 학동면 방동 거리 270 함경북도 성진군 학성 면 3·1운동 만세시위 지 함경북도 성진군 학성면에서 일어난 3·1운 동 만세시위 장소 함북 성진군 학성면 거리
118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271 함경북도 성진군 학동 면 하천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4일 함경북도 성진군 학동면 하천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 장소 함북 성진군 학동면 하천 거리 272 함경북도 성진군 하천 경찰관주재소 1919년 3월 15일 함경북도 성진군 하천경찰 관주재소 관내에서 만세시위를 시도하려다 가 해산됨 함북 성진군 하천경찰관 주재소 건물 273 함경북도 부령군 도동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1일 함경북도 부령군 도동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 함북 부령군 도동 거리 274 함경북도 무산군 연사 면 사지동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4월 1일 함경북도 무산군 연사면 사 지동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 함북 무산군 연사면 사지동 거리 275 함경북도 무산군 성천 동 무산공립보통학교 1919년 4월 7일 함경북도 무산군 성천동에 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 주도자들이 속한 학교 함북 무산군 성천동 건물 276 함경북도 무산 동경대 1919년 4월 15일 함경북도 무산 우안 동경 대(茂山右岸東京臺)에서 조선인 약 400명이 모여 헌병주재소를 습격한곳 함북 무산군 우암 동경대 거리 277 함경북도 회령군 3·1 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9일 함경북도 회령군에서 일어 난 3·1운동 함북 회령군 거리 278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 우편국 1919년 3월 25일 회령교회 장로가 교도 30 명과 우편국 앞에서 3·1운동 만세시위를 한 곳 함북 회령군회령우편국 건물 279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 교회 1919년 3월 25·26일 함경북도 회령군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던 기 독교 교회 함북 회령군 회령교회 건물 280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 보통학교 1919년 3월 25·26일 함경북도 회령군 회령 보통학교 학생들은 25일에 이어 26일에도 계속하여 3·1운동 만세시위를 한 곳 함북 회령군 회령보통학 교 건물 281 함경북도 회령군 읍내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25일에 이어 26일에도 함경북도 회령읍내에서 회령교회 신도들과 회령보통학 교 학생들이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함북 회령군 회령보통학 교 거리 282 함경북도 회령군 벽성 면 영채동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27일 함경북도 회령군 벽성면 영채동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 함북 회령군 벽성면 앵채동 거리 283 함경북도 회령군 봉의 면 남산동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28일 봉의면 남산동에서 3·1운 동 만세시위를 전개한 곳 함북 회령군 봉의면 남산동 거리 284 함경북도 회령군 봉의 면 운기동 헌병주재소 1919년 3월 28일 봉의면 남산동에서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 군중들이 습격한 헌병주 재소 함북 회령군 봉의면 운기동 건물 285 함경북도 회령군 봉의 면 면사무소 1919년 3월 28일 봉의면에서 군중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한 장소 함북 회령군 봉의면 건물 286 함경북도 회령군 화풍 면 인계동 고령진 3·1 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29일 함경북도 회령군 화풍면 인계동고령진에서 주민들이 3·1운동 만세 시위를 한 곳 함북 회령군 화풍면 인계동 고령진 거리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19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287 함경북도 회령군 연대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31일 함경북도 회령군 연대에서 청년들이 3·1운동 만세시위를 준비하다가 발각된 곳 함북 회령군 연대 거리 288 함경북도 온성군 영와 면사무소 1919년 3월 20일 함경북도 온성군 영와면 상화동의 최성암의 집에서 발견된 독립선언 서가 등사된 것임을 확인한 장소 함북 온성군 영와면 영와면사무 소 건물 289 함경북도 온성군 상화 동 최성암 집터 1919년 3월 19일 온성군 온성읍에서 발견된 동일한 독립선언서가 온성군 영와면 상화동 최성암의 집에서도 발견됨으로서 온성군의 3·1운동 만세시위계획의 전개과정이 확인됨 함북 온성군 영와면 상화동 가옥 290 함경북도 온성군 상원 진 곤륜산 3·1운동 만 세시위지 함경북도 온성군 상원진 곤륜산 부근에서 1919년 3월 30일 3·1운동 만세시위가 일어 난 장소 함북 온성군 유원진 곤륜산 거리 291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 면 회덕동 회동교 3·1 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4일 함경북도 온성군 영충면 회 덕동 회동교 부근에서 전창우등이 주민들을 모아 3·1운동 만세시위를 한 장소 함북 온성군 영충면 회덕동 회덕교 거리 292 함경북도 경흥군 상하 면 귀락동 서당 1919년 4월 경흥군 상하면 귀락동의 서당학 도 2명이 총독부 유고문을 파손한 곳 함북 경흥군 상하면 귀락동 86 상하면 귀락동 292 건물 293 함경북도 경흥군 하여 평 1919년 4월 6일 경흥공립보통학교 학생 5명 이 하여평에 이르는 도로에 크고 작은 글씨 로‘大韓獨立萬歲’라고 씀 함북 경흥군 하여평 거리 294 함경북도 경흥군 경흥 보통학교 1919년 4월 8일 오후 7시경 경흥보통학교 앞에서 15~16명의 청년이 3·1운동 만세시 위를 계획한 곳 함북 경흥군 경흥보통학 교 건물 295 함경북도 종성군 종성 공립농업학교 1919년 5월 20일 함경북도 종성군에서 일어 난 3·1운동 만세시위 주도자들이 소속된 학교 함북 종성군 종성공립보 통학교 건물 296 함경북도 종성군 3·1 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5월 20일 함경북도 종성군에서 일어 난 3·1운동 만세시위장소 함북 종성군 종성공립보 통학교 거리 297 북청 북리 북청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권유지 함남 북청군 노덕면 북리 건물 298 북청 호만포리 북청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권유와 독립 신문 배포지 함남 북청군 양화면 호만포리 거리 299 북청 동리 북청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권유와 독립 신문 배포지 함남 북청군 신창면 동리 거리 300 북청 룡연학교 북청 3·1운동의 용연학교 독립만세운동의 전개지 함남 북청군 신창면 호만포리 용연학교 건물 301 북청 속후학교 북청 3·1운동의 학생 독립만세운동 권유지 함남 북청군 속후면 하천리 건물 302 북청 우신학교 북청 3·1운동의 우신학교 독립만세운동 전 개지 함남 북청군 거산면 평리 건물 303 북청 거산면내 북청 3·1운동의 거산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북청군 거산면 거리
120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304 북청 평리 북청 3·1운동의 평리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북청군 거산면 평리 거리 305 북청 수서리 북청 3·1운동의 방촌시장 독립만세운동 권 유지 함남 북청군 상거서면 수서리 거리 306 북청 상돌리 북청 3·1운동의 방촌시장 독립만세운동 권 유지 함남 북청군 상거서면 상돌리 거리 307 북청 엄동리 북청 3·1운동의 방촌시장 독립만세운동 권 유지 함남 북청군 상거서면 엄동리 거리 308 북청 방촌시장 북청 3·1운동의 방촌시장 독립만세운동 전 개지 함남 북청군 상거서면 방촌시장 거리 309 북청 평산보통학교 북청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유인 물 제작지 함남 북청군 평산면 광천리 건물 310 북청 평산면사무소 청 3·1운동의 일제 말단행정기관인 면사무 소 방화지 함남 북청군 평산면 서도리 건물 311 이원 천도교구실 이원 3·1운동의 이원시장 독립만세운동 준 비지 함남 이원군 이원천도교 구실 건물 312 이원 이원시장 이원 3·1운동의 이원시장 독립만세운동 전 개지 함남 이원군 서면 이원시장 거리 313 이원 차호시장 이원 3·1운동의 남면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이원군 남면 차호시장 거리 314 이원 남면헌병주재소 이원 3·1운동의 남면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이원군 남면 남면헌병주 재소 건물 315 이원 남면사무소 이원 3·1운동의 남면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이원군 남면 남면사무소 건물 316 이원 남면 보통학교 이원 3·1운동의 남면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이원군 남면 보통학교 건물 317 이원 남면 야소교교회 당 이원 3·1운동의 남면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이원군 남면 야소교 교회당 건물 318 이원 동면 면사무소 이원 3·1운동의 동면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이원군 동면 면사무소 건물 319 이원 리원읍내 보통학 교 이원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이원군 서면 리원읍내 보통학교 건물 320 이원 이원헌병주재소 이원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이원군헌병주재소 건물 321 이원 수출수산주식회사 차호출장소 이원 3·1운동의 일본회사 고용 한국인 응 징지 함남 이원군 남면 룡항리 건물 322 단천 단천천도교당 단천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단천군 단천천도교 당 건물 323 단천 단천 읍내 단천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단천군 파도면 단천 읍내 거리 324 단천 단천군청 단천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단천군 파도면 송동리 건물 325 단천 대신리 헌병주재 소 단천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단천군 북두일면 대신리 건물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21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326 삼수 조완오 家 삼수 3·1운동의 중평장리 독립만세운동 권 유지, 준비지 함남 삼수군 별동면 광생리 180번지 가옥 327 삼수 중평장리 삼수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집결지 함남 삼수군 삼남면 중평장리 거리 328 갑산 갑산천도교구실 갑산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갑산군 장평면 서부리 건물 329 갑산 갑산군청 갑산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갑산군 장평면 동부리 건물 330 장진 고토리 水市 장진 3·1운동의 고토리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장진군 신남면 고토리 수시 거리 331 장진 고토리헌병주재소 장진 3·1운동의 고토리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장진군 신남면 고토리 건물 332 장진 서덕리 장진 3·1운동의 헌병보조원 응징지 함남 장진군 상남면 서덕리 거리 333 장진 운수리 장진 3·1운동의 운수리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장진군 상남면 운수리 거리 334 장진 상남면내 장진 3·1운동의 상남면내 독립만세운동 전 개지 함남 장진군 상남면 면내 각리 거리 335 풍산 풍산천도교 교구 당 풍산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풍산군 안산면 하지경리 건물 336 풍산 풍산헌병분견소 풍산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지 함남 풍산군 안산면 하지경리 건물 337 풍산 수상리 풍산 3·1운동의 펑산리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풍산군 안수면 수상리 거리 338 풍산 평산리헌병주재소 풍산 3·1운동의 평산리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풍산군 안수면 평산리 건물 339 신흥 읍내 신흥 3·1운동의 흥경리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신흥군 동고천면 신흥 읍내 거리 340 신흥 신흥공립보통학교 신흥 3·1운동의 흥경리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신흥군 동고천면 흥경리 건물 341 신흥 신흥헌병분견소 신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신흥군 동고천면 신흥헌병분 견소 건물 342 신흥 원평보통학교 신흥 3·1운동의 최양동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신흥군 원평면 최양동 건물 343 신흥 박산 신흥 3·1운동의 최양동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신흥군 원평면 최양동 산야 344 신흥 영고면사무소 신흥 3·1운동의 영고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신흥군 영고면 흥경리 건물 345 신흥 동송리 독산 신흥 3·1운동의 동송리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신흥군 영고면 동송리 독산 산야 346 신흥 중리 신흥 3·1운동의 가평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신흥군 가평면 중리 거리
122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347 신흥 동흥리 신흥 3·1운동의 가평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신흥군 가평면 동흥리 거리 348 신흥 중양리 신흥 3·1운동의 가평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신흥군 가평면 중양리 거리 349 신흥 가평보통학교 신흥 3·1운동의 가평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신흥군 가평면 가평보통학 교 건물 350 신흥 원평시장 신흥 3·1운동의 원평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신흥군 원평면 중리 거리 351 신흥 남평리 고당산 신흥 3·1운동의 원평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신흥군 원평면 남평리 산야 352 신흥 신성리 신흥 3·1운동의 동상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신흥군 동상면 신성리 거리 353 신흥 원풍리 헌병주재 소 신흥 3·1운동의 동상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신흥군 동상면 원풍리 건물 354 신흥 동상면사무소 신흥 3·1운동의 동상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신흥군 동상면 원풍리 건물 355 신흥 초리 신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신흥군 OO면 초리 거리 356 원산부내 원산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원산부 거리 357 고원 읍내 고원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고원군 읍내 거리 358 영흥 인흥 영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영흥군 인흥면 거리 359 영흥 진평 영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영흥군 진평면 거리 360 영흥 진흥장 영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영흥군 진평면 진흥장 거리 361 영흥 동흥학교 영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권유지 함남 영흥군 횡천면 대평리 건물 362 영흥 횡천면사무소 영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권유지 함남 영흥군 횡천면 면사무소 건물 363 영흥 대평리시장 영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권유지 함남 영흥군 횡천면 대평리 시장 거리 364 정평 선덕면내 정평 3·1운동의 선덕면내 독립만세운동 권 유지 함남 정평군 선덕면 구남리;흥 덕리;경흥 리 거리 365 정평 구창리 정평 3·1운동의 고산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집결지 함남 정평군 고산면 구창리 거리 366 정평 한동리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OO면 한동리 거리 367 함흥 이화봉(이화봉) 家 함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권유 활동가 체포지 함남 함흥군 하기천면 상통리 거리 368 이원 정기옥 家 북청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을 위해 독립 선언서 배포지 함남 이원군 서면 한당리 가옥 369 북청 김용완 家 북청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독립 선언서 배포지 함남 북청군 성대면 조양리 가옥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23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370 북청 서장내리 북청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독립 선언서 배포지 함남 북청군 덕성면 서장내리 거리 371 북청 중와면 북청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집결 지 함남 북청군 중와면 거리 372 북청 3·1운동을 위한 독립운동자금 모금 활동지 함남 북청군 거리 373 원산 차광은 家 원산 3·1운동에 있어 원산의 독립선언서를 인쇄한 곳 함남 원산부 상동 193번지 가옥 374 원산 남촌동 교회 원산 3·1운동을 협의하고 준비한 곳 함남 원산부 남촌동 건물 375 원산 이성호 家 원산 3·1운동에 있어 순사보를 응징한 곳 함남 원산부 석우동 가옥 376 안변 강진성 家 안변 3·1운동에 있어 조선독립선언서의 배 포지 함남 안변군 학성면 학성리 가옥 377 고원 림근태 家 고원 3·1운동을 협의하고 준비한 곳 함남 고원군 하발면 조양리 가옥 378 고원 하발헌병분견소 고원 3·1운동을 협의하고 준비한 인사를 체포한 곳 함남 고원군 하발면 헌병분견소 건물 379 정평 상흥리 정평 3·1운동에 있어 초원시장 독립만세운 동의 집결지 함남 정평군 춘류면 상흥리 거리 380 정평 최도곤 家 평 3·1운동에 있어 선남면 독립만세운동을 권유한 곳 함남 정평군 선덕면 구남리 가옥 381 정평 신풍리 정평 3·1운동에 있어 고산 독립만세운동의 전개지 함남 정평군 고산면 신풍리 거리 382 정평 고산면사무소 정평 3·1운동에 있어 고산 독립만세운동의 전개지 함남 정평군 고산면 신풍리 건물 383 정평 신경리 정평 3·1운동에 있어 고산 독립만세운동의 전개지 함남 정평군 고산면 신경리 거리 384 함흥 석종점 家 함흥 3·1운동에 있어 태극기를 흔들며 독 립만세를 외친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함흥군 함흥면 대화정 가옥 385 함흥 정차장 함흥 3·1운동에 있어 독립만세운동의 전개 지 함남 함흥군 함흥면 정차장 건물 386 함흥 중하리 함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의 전개지 함남 함흥군 함흥면 중하리 거리 387 함흥 하동리 함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함흥군 함흥면 하동리 거리 388 함흥 우시장 함흥 3·1운동에 있어 독립만세를 외친 독 립만세운동의 전개지 함남 함흥군 함흥면 우시장 거리 389 함흥 심상소학교 함흥 3·1운동에 있어 학교 창고를 소각한 곳 함남 함흥군 함흥면 公立尋常小 學校 건물 390 함흥 만세교 함흥 3·1운동에 있어 함흥 읍내에 배포된 독립신문을 인쇄한 곳 함남 함흥군 함흥면 만세교 기타 (교 량) 391 함흥 동상리 함흥 3·1운동에 있어 덕천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함흥군 덕천면 동상리 거리 392 함흥 덕천헌병주재소 함흥 3·1운동에 있어 덕천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함흥군 덕천면 덕천헌병주 재소 건물
124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393 함흥 천서면사무소 함흥 3·1운동에 있어 천서 흥선학교 학생 들에게 배포된 독립선언서를 등산 인쇄한 곳 함남 함흥군 천서면 당산리 건물 394 함흥 흥선학교 함흥 3·1운동에 있어 천서에서 제작된 독 립선언서가 학생들에게 배포된 곳 함남 함흥군 천서면 흥선학교 건물 395 함흥 천서면내 함흥 3·1운동에서 천서 독립만세운동의 전 개지 함남 함흥군 천서면 면내 거리 396 홍원 강련상 家 홍원 3·1운동에 있어 독립선언서를 등사 인쇄한 곳 함남 홍원군 학천면 풍산리 가옥 397 홍원 천도교구당 홍원 3·1운동에 있어 독립만세운동을 전개 하기 위한 준비 활동을 한 곳 함남 홍원군 학천면 풍산리 건물 398 북청 동리 구시장 북청 3·1운동에 있어 동리 독립만세운동의 전개지 함남 북청군 로덕면 동리 구시장 거리 399 북청 가회면사무소 북청 3·1운동에 있어 가회면사무소를 방화 한 곳 함남 북청군 가회면 중리 건물 400 북청 평리헌병주재소 북청 3·1운동에 있어 거산 독립만세운동의 전개지이고 일제의 탄압에 저항한 항쟁지 함남 북청군 거산면 평리 건물 401 북청 초리 흥리촌 북청 3·1운동에 있어 독립만세운동 참가를 위해 초리에서 권유한 곳 함남 북청군 니곡면 초리 흥리촌 거리 402 리원 군선항 이원 3·1운동에 있어 동면 독립만세운동의 전개지 함남 이원군 동면 군선항 기타 (항 구) 403 리원 창평리 헌병주재 소 이원 3·1운동에 있어 동면 독립만세운동의 전개지 함남 이원군 동면 창평리 건물 404 리원 상선리 이원 3·1운동에 있어 동면 독립만세운동의 전개지 함남 이원군 동면 상선리 거리 405 단천 하서리시장 단천 3·1운동에 있어 단천 읍내의 독립만 세운동 전개지 함남 단천군 파도면 하서리 거리 406 단천 주남리 삼거리 단천 3·1운동에 있어 단천 읍내의 독립만 세운동 전개지이고 일제의 무력 탄압에 저 항한 항쟁지 함남 단천군 파도면 주남리 거리 407 갑산 갑산진 단천 3·1운동에 있어 철시운동을 전개한 곳 함남 갑산군 갑산진 거리 408 신흥 동고천 우편국 신흥 3·1운동에 있어 동고천의 독립만세운 동 전개지 함남 신흥군 동고천면 우편국 건물 409 신흥 한대리 광업소 신흥 3·1운동에 있어 동상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신흥군 동상면 한대리 건물 410 신흥 구중리 헌병주재 소 신흥 3·1운동에 있어 상원천의 독립만세운 동 전개지 함남 신흥군 상원천면 구중리 건물 411 신흥 상원천면사무소 신흥 3·1운동에 있어 상원천의 독립만세운 동 전개지 함남 신흥군 상원천면 구중리 건물 412 신흥 천불산광업소 신흥 3·1운동에 있어 민가에 투입할 태극 기를 제작한 곳 함남 신흥군 원평면 건물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25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413 정평 박문익 家 정평 3·1운동에 있어 선남면 독립만세운동 을 권유한 곳 함남 정평군 선남면 흥덕리 가옥 414 정평 경흥리 정평 3·1운동에 있어 선남면 독립만세운동 을 권유한 곳 함남 정평군 선남면 경흥리 거리 415 함흥 주배희 家 함흥 3·1운동에 있어 함흥 읍내에 배포된 독립신문 원고를 작성한 곳 함남 함흥군 함흥면 신창리 가옥 416 원산 진성여학교 원산 3·1운동 실행을 위해 협의한 장소 함남 원산부 건물 417 원산 원산리시장 원산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지 함남 원산부 원산리 거리 418 원산역 원산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원산부 거리 419 원산 영정-석우동(원산 철시 거리) 원산 3·1운동의 철시운동(撤市運動) 전개 지 함남 원산부 영정-석우 동 거리 420 영소학교 안변 3·1운동의 독립선언서를 제작한 장소 함남 안변군 학성면 영춘리 건물 421 덕원 읍내 안변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덕원군 부내면 (읍내) 건물 422 덕원 덕원헌병분견소 안변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덕원군 부내면 (읍내) 건물 423 고원 천도교종리원 고원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협의하고 준 비한 장소 함남 고원군 건물 424 고원군청 고원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통지서를 인 쇄한 곳 함남 고원군 하발면 창항리 건물 425 고원 덕지시장 고원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고원군 군내면 석연리 거리 426 고원 읍내 하시장 고원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고원군 군내면 거리 427 영흥 영흥천도교구당 영흥 3·1운동의 경성 독립선언서 도착지와 배포지 함남 영흥군 홍인면 도랑리 건물 428 영흥 군자루 영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영흥군 홍인면 군자루 거리 429 영흥 읍내 영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영흥군 홍인면 도랑리 거리 430 영흥 영흥장 영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영흥군 홍인면 도랑리 거리 431 영흥 성리시장 영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영흥군 선흥면 성리 거리 432 영흥 성리경찰관주재소 영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영흥군 선흥면 성리 건물 433 정평 풍남리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부내면 풍남리 거리 434 정평 남산리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부내면 남산리 거리 435 정평 정평헌병분견소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부내면 풍양리 건물 436 정평 정평군청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부내면 풍양리 건물 437 정평 영성리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주이면 영성리 거리
126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438 정평 신하리시장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춘류면 신하리 거리 439 정평 신포리 어시장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춘류면 신포리 거리 440 정평 신상리시장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춘류면 신상리 거리 441 정평 신하리 야소교회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춘류면 신하리 건물 442 정평 신상우편소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춘류면 신상리 건물 443 정평 신상리헌병주재소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춘류면 신상리 건물 444 정평 新上里 철도관사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춘류면 신상리 건물 445 정평 선덕장시장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선덕면 선덕장 거리 446 정평 선덕장헌병주재소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선덕면 선덕장 건물 447 정평 초원시장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장원면 교항리 거리 448 정평 풍송리 헌병주재 소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고산면 풍송리 건물 449 정평 풍서리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고산면 풍서리 거리 450 정평 구창리헌병주재소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고산면 구창리 건물 451 정평 금진강반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집결지 함남 정평군 고산면 거리 452 정평 흥봉리 정평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정평군 고산면 흥봉리 거리 453 함흥 신창리 교회 함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분위기를 고 조시킨 장소 함남 함흥군 함흥면 신창리 건물 454 함흥 중하리 교회 함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한 장 소 함남 함흥군 함흥면 중하리 건물 455 함흥 중리(권영주 家) 함흥 3·1운동의 학생 독립만세운동 협의회 지 함남 함흥군 함흥면 중리 가옥 456 함흥 영생중학교 함흥 3·1운동의 학생 독립만세운동 준비지 함남 함흥군 함흥면 읍내 건물 457 함흥 상리(이근재 家) 함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을 위한 준비 지 함남 함흥군 함흥면 상리 가옥 458 함흥 함흥경찰서 함흥 일대 3·1운동가들의 탄압지 함남 함흥군 함흥면 건물 459 함흥 읍내 함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함흥군 함흥면 대화정(서 문거리) 거리 460 함흥 하서리 함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함흥군 함흥면 하서리 거리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27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461 함주 지경리 순사주재 소 함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함흥군 주지면 지경리 거리 462 함흥 품량교 함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함흥군 하조양면 인흥리 기타 (교 량) 463 함흥 흑림강 함흥 3·1운동의 오노리 독립만세운동 출발 지 함남 함흥군 하조양면 인흥리 거리 464 함흥 오노리시장 함흥 3·1운동의 오노리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함흥군 상기천면 오노리 거리 465 함흥 상리시장 함흥 3·1운동의 상리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함흥군 상조양면 상리 거리 466 함흥 본궁 함흥 3·1운동의 본궁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함흥군 함흥면 본궁(궁서 리) 거리 467 함흥 신한리시장 함흥 3·1운동의 신폐리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함흥군 조양면 신한리 거리 468 함흥 중리 함흥 3·1운동의 중리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함흥군 기곡면 중리 거리 469 함흥 중리 율동산 함흥 3·1운동의 중리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함흥군 기곡면 중리 산야 470 함흥 퇴조리 함흥 3·1운동의 퇴조리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함흥군 서퇴조면 퇴조리 거리 471 함흥 동흥리 함흥 3·1운동의 동흥리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함흥군 주북면 동흥리 거리 472 함흥 상리시장 함흥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함흥군 함흥면 상리 건물 473 함흥 야시장 함흥 3·1운동의 본동 독립만세운동 집결지 함남 함흥군 함흥면 본동 거리 474 함흥 우편국 함흥 3·1운동의 본동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함흥군 함흥면 본동 거리 475 함흥 지대리장터 함흥 3·1운동의 지대리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함흥군 주지면 지대리 거리 476 홍원 읍내 시장 홍원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홍원군 주익면 홍원 읍내 거리 477 홍원 홍원군청 홍원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이고 일제의 탄압지 함남 홍원군 주익면 신흥리 건물 478 홍원 용운경찰서 홍원 3·1운동의 구금자 구출을 위한 습격 지 함남 홍원군 용운면 신덕리 건물 479 홍원 仲坪里 홍원 3·1운동의 평포 독립만세운동 집결지 함남 홍원군 용천면 중평리 거리 480 홍원 평포경찰관주재소 홍원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이고 일제의 탄압지 함남 홍원군 평포면 서포리 건물 481 홍원 삼호 홍원 3·1운동의 어린이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홍원군 보청면 삼호 거리 482 북청 읍내 북청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북청군 노덕면 북청 읍내 거리
128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483 북청 령덕산 북청 3·1운동의 영덕산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북청군 노덕면 령덕산 산야 484 북청 노덕면내 북청 3·1운동의 노덕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북청군 노덕면 면내 거리 485 북청 천도교구실 북청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준비지이고 집결지 함남 북청군 노덕면 내리 거리 486 북청 상거서면사무소 북청 3·1운동의 상거서면 독립만운동 전개 지 함남 북청군 상차서면 중돌리 건물 487 북청 내리 구시장 북청 3·1운동의 내리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북청군 노덕면 내리 거리 488 북청 영덕산 북청신사 북청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통지서 배포 지 함남 북청군 노덕면 영덕산 북청신사 건물 489 북청 신창리(김원섭 家) 북청 3·1운동의 신창리 독립선언서 제작지 함남 북청군 신창면 신창리 가옥 490 북청 신창헌병분견소 북청 3·1운동의 신창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북청군 신창면 신창리 건물 491 북청 신창천도교구당 북청 3·1운동의 신창리 독립만세운동 협의 지이고 준비지 함남 북청군 신창면 신창리 건물 492 북청 신창시장 북청 3·1운동의 신창리 독립만세운동 전개 지 함남 북청군 신창면 신창리 거리 493 북청 양천보통학교 북청 3·1운동의 중리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북청군 양천면 중리 건물 494 북청 동리 피병사 북청 3·1운동의 동리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북청군 노덕면 동리 거리 495 북청 읍내 남문 북청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전개지 함남 북청군 노덕면 북청 읍내 거리 496 북청 북청농학교 기숙 사 북청 3·1운동의 독립만세운동 권유지 함남 북청군 노덕면 북리 건물 497 송항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4일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만 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곡산군 곡산읍 송항리 거리 498 광천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4일 광천면민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곡산군 곡산읍 광천면 거리 499 문양리 천도교전도실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4일 문양리 천도교인들이 만세 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곡산군 곡산읍 청계면 문양리 천도교전도 실 건물 500 금성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4일 금성리 천도교인들이 만세 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곡산군 곡산읍 서촌면 금성리 거리 501 화천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4일 김두환, 김창렬 등이 만세시 위를 일으킨 곳 황해 곡산군 곡산읍 화천면 거리 502 토산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7일 천도교인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금천군 토산면 거리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29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503 백마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1일 80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 킨 곳 황해 금천군 백마면사무 소 건물 504 명성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2일 76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금천군 백마면 명성리 거리 505 입암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2일 약 70명이 만세시위를 일으 킨 곳 황해 금천군 백마면 입암리 거리 506 송정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2일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만 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금천군 현내면 송정리 거리 507 매후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2일 약 3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금천군 합탄면 매후리 거리 508 구성동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2일 만세시위가 일어났던 곳 황해 금천군 고동면 구성동 거리 509 구포동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2일 만세시위가 일어났던 곳 황해 금천군 고동면 구포동 거리 510 금천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3일 약 300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금천군 금천면 거리 511 송정리헌병주재소 3·1 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3일 3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금천군 현내면 송정리 헌병주재소 건물 512 금천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3일 오후 1시, 오후 7시에 만 세시위가 있었던 곳 황해 금천군 금천읍 거리 513 문성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3일 약 3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금천군 구이면 문성리 거리 514 미당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3일 약 1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금천군 구이면 미당리 거리 515 행정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3일 약 3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금천군 숙인면 행정리 거리 516 계정역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3일 약 6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금천군 경의선 계정역 거리 517 병점시장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4월 4일 6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금천군 고동면 병점 시장 입구 거리 518 문양동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5일 약 100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금천군 동화면 문양동 거리 519 법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5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금천군 동화면 법천리 거리 520 문탄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6일 기독교도 350명이 만세시위 를 일으킨 곳 황해 금천군 동화면 문탄리 거리 521 신명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6일 6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금천군 산외면 신명리 거리 522 신장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8일 6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 킨 곳 황해 금천군 산외면 신장리 거리 523 사리원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일 4~5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봉산군 사리원 시내 거리 524 단장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1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봉산군 서종면 단장리 거리
130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525 경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24일 서당 교사와 학생 등 54명 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봉산군 영천면 경천리 거리 526 은파시장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4월 3일 오후 1시, 오후 9시경 만세 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봉산군 초와면 은파 시장 거리 527 봉산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봉산군 봉산읍 거리 528 양동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10월 약 1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봉산군 초와면 양동리 거리 529 덕암리교회당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3일 기독교인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서흥군 매양면 덕암리 교회당 건물 530 능리 3·1운동 만세시 위지 1919년 3월 9일 약 80명이 만세시위를 일으 킨 곳 황해 서흥군 도면 능리 거리 531 능리시장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10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서흥군 도면 능리 시장 거리 532 서흥읍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8일 약 200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서흥군 서흥읍 시장 거리 533 하석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4일 약 150명의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서흥군 내덕면 하석리 거리 534 상석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4일 기독교인 100명이 만세시위 를 일으킨 곳 황해 서흥군 내덕면 상석리 거리 535 신촌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7일 기독교인 300명이 만세시위 를 일으킨 곳 황해 서흥군 내덕면 신촌리 거리 536 녹안리 헌병주재소 3·1운동 만세시위지 4월 9일 약 5백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서흥군 매양면 녹안리 건물 537 흥수리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9일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만 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서흥군 목감면 흥수리 시장 거리 538 송화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2일 군중 약 2백 명이 만세시위 를 일으킨 곳 황해 송화군 송화면 거리 539 수교리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7일, 4월 8일 수백 명이 만세시 위를 일으킨 곳 황해 송화군 봉내면 수교리 시장 거리 540 세진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1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송화군 율리면 세진리 등지 거리 541 풍천읍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11일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만 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송화군 풍천읍 시장 거리 542 수안읍천도교교구실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3일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만 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수안군 수안읍 천도교교구 실 건물 543 홀동시장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7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수안군 수구면 석달리 홀동 시장 거리 544 율리 3·1운동 만세시 위지 1919년 3월 7일, 19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수안군 연암면 율리 거리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31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545 석달리헌병주재소 3·1 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9일 약 150명의 군중이 만세시 위를 일으킨 곳 황해 수안군 수구면 석달리 헌병주재소 건물 546 두대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0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수안군 천곡면 두대리 거리 547 구남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5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신계군 마서면 구남리 거리 548 무고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7일 천도교인의 만세시위가 일 어난 곳 황해 신계군 고면 무거리 거리 549 무시랑리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4월 9일 약 5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신계군 미수면 무시랑리 거리 550 문화면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1일, 16일 수백 명이 만세시위 를 일으킨 곳 황해 신천군 문화면 시장 거리 551 신천군헌병주재소 3·1 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2일 약 5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신천군 헌병 주재소 건물 552 달천리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5일 약 3백 명의 군중이 만세시 위를 일으킨 곳 황해 신천군 초리면 달천리 시장 거리 553 유천리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9일 약 60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신천군 용진면 유천리 시장 거리 554 달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20일 기독교인 약 50명이 만세 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신천군 초리면 달천리 거리 555 신천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27일·28일, 4월 7일 만세시위 가 있었던 곳 황해 신천군 신천읍 거리 556 산천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2일 기독교, 천도교, 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신천군 산천면 거리 557 오국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3일 보통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한 군중 300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신천군 노월면 오국리 거리 558 유천리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6일 약 300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신천군 용진면 유천리 시장 거리 559 조우리헌병주재소 3·1 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7일, 8일 만세시위가 있었던 곳 황해 신천군 가련면 조우리 헌병 주재소 건물 560 원동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7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신천군 두라면 원동리 거리 561 간성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7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신천군 가산면 간성리 거리 562 석당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7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신천군 북부면 석당리 거리 563 사직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7일 기독교인과 보통학교 학생 이 중심으로 한 군중 100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신천군 신천면 사직리 거리
132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564 유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7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신천군 용진면 유천리 거리 565 사창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7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신천군 용문면 사창리 거리 566 신천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7일 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시 위를 일으킨 곳 황해 신천군 신천읍 거리 567 백운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9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신천군 두라면 백운리 거리 568 온정리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1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안악군 은홍면 온정리 시장 거리 569 안악읍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28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안악군 안악읍 시장 거리 570 동창포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29일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안악군 용문면 동창리 동창포시장 거리 571 동창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0일, 4월 8일 만세시위가 일어 난 곳 황해 안악군 용문면 동창리 거리 572 문산면 면사무소 3·1 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31일 문산면민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안악군 문산면 면사무소 건물 573 원성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안악군 문산면 원성리 거리 574 안악군청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4월 3일 150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안악군 안악군청 거리 575 안악읍내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4월 6일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만 세를 일으킨 곳 황해 안악군 안악읍내 거리 576 용순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7일 약 4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안악군 용순면 거리 577 붕봉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8일 기독교인과 보통학교 학생 을 중심으로 한 군중 200명이 만세를 일으 킨 곳 황해 안악군 대행면 붕봉리 거리 578 학포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8일 보통학교 학생을 포함한 군 중 350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안악군 안곡면 학포리 거리 579 연안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5일 김덕배, 김종석 등이 만세 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연백군 연안읍 거리 580 나진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6일 나진포 주민들이 만세시위 를 일으킨 곳 황해 연백군 연안읍 나진포 거리 581 연안읍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8일 연안읍 장날에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연백군 연안읍 시장 거리 582 연안읍내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21일 2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연백군 연안읍내 거리 583 벽란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23일 1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연백군 해월면 벽란리 거리 584 금곡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24일 장순영·주시경 등이 만세 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연백군 유곡면 금곡리 거리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33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585 배천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0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연백군 배천읍 거리 586 옥산리헌병분견소 3·1 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31일 학생과 청년들이 만세시위 를 일으킨 곳 황해 연백군 은천면 옥산리 헌병분견소 건물 587 홍현시장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31일 김태희 등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연백군 유곡면 영성리 홍현시장 거리 588 운산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1일 운산면 면직원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연백군 운산면 거리 589 옥산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1일 약 300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연백군 은천면 옥산리 거리 590 전당리교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2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옹진군 동남면 전당리 교회 건물 591 식여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2일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한 60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옹진군 흥미면 식여리 거리 592 당장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일 기독교인 60명이 만세시위 를 일으킨 곳 황해 옹진군 동남면 당장리 거리 593 옹진읍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3일, 8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옹진군 옹진읍 시장 거리 594 옹진군내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13일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옹진군 옹진군내 거리 595 장현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7일 약 2백 명의 군중이 만세시 위를 일으킨 곳 황해 옹진군 가천면 장현리 거리 596 안락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3일, 14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옹진군 흥미면 안락리 거리 597 율목동예배당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15일 5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옹진군 흥미면 식여리 율목동 예배당 건물 598 전당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6일 기독교도 60명이 만세시위 를 일으킨 곳 황해 옹진군 동남면 전당리 거리 599 원산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6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이 다. 황해 옹진군 용천면 원산리 거리 600 옹진군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7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옹진군 거리 601 장연읍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2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은율군 장연읍 시장 거리 602 은율읍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26일, 4월 5일·15일 만세시위 가 일어난 곳 황해 은율군 은율읍 시장 거리 603 동부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1일 보통학교 학생들이 만세시 위를 일으킨 곳 황해 은율군 장연면 동부리 거리 604 장연읍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1일·16일, 4월 11일 만세시위 가 일어난 곳 황해 장연군 장연읍 시장 거리
134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605 태탄리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5일 군중 1천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장연군 속달면 태탄리 시장 거리 606 남호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8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장연군 후남면 남호리 거리 607 남창시장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4월 11일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한 2 백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장연군 후남면 남호리 시장 거리 608 도경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16일 약 150명의 군중이 만세시 위를 일으킨 곳 황해 장연군 용연면 도경리 거리 609 송천리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18일 청년 약 80명이 만세시위 를 일으킨 곳 황해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 시장 거리 610 몽금포리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22일 청년을 중심으로 한 군중 약 1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장연군 해안면 몽금포리 시장 거리 611 해창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6일 윤택진이 기독교인들과 함 께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재령군 남률면 해창리 거리 612 재령군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9일 기독교인, 천도교인 등이 함 께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재령군재령군시장 거리 613 숭의학교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10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재령군 북률면 내종리 숭의학교 거리 614 청석두리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28일 3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재령군 상성면 청석두리 거리 615 재령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2일, 7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재령군 재령읍 거리 616 해창리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4일 5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재령군 남률면 해창리 시장 거리 617 신원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5일 80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 킨 곳 황해 재령군 하류면 신원리 거리 618 신환포리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4월 7일, 8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재령군 남률면 신환포리 거리 619 신유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9일 약 80명이 만세시위를 일으 킨 곳 황해 재령군 은산면 신유리 거리 620 평산읍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7일, 4월 2일 만세시위가 일어 난 곳 황해 평산군 평산읍 시장 거리 621 한포리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31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평산군 금암면 한포리 시장 거리 622 기린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1일, 4월 1일 만세시위가 일어 난 곳 황해 평산군 인산면 기린리 거리 623 누천리헌병분견소 3·1 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2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평산군 세곡면 누천리 헌병분견소 건물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35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624 문구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3일 약 3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평산군 문무면 문구리 거리 625 남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4일, 7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평산군 보산면 남천리 거리 626 두무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5일 약 5백 명의 군중이 만세시 위를 일으킨 곳 황해 평산군 보산면 두무리 거리 627 물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5일 신석찬 등이 만세를 일으킨 곳 황해 평산군 안성면 물개리 거리 628 운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7일 약 3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평산군 보산면 운천리 거리 629 주답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7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 황해 평산군 마산면 주답리 거리 630 온정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7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곳 황해 평산군 적암면 온정리 거리 631 산막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8일 보통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 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평산군 보산면 산막리 거리 632 남본정예배당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2일 예수교인이 모여 만세시위 를 일으킨 곳 황해 해주군 해주읍 남본정예배 당 건물 633 서원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9일 최부은 등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해주군 석동면 서원리 거리 634 해주읍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0일·31일, 4월 1일 만세시위 가 일어난 곳 황해 해주군 해주읍 시장 거리 635 서변면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0일 이계빈 등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해주군 서변면 거리 636 청단시장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12일 500명이 만세시위를 일으 킨 곳 황해 해주군 추화면 약현리 청단시장 거리 637 해주군기독교구세병원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4일 약 30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해주군 기독교 구세병원 건물 638 청룡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17일 2백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해주군 청룡면 건물 639 해주읍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0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해주군 읍내 거리 640 죽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1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해주군 대거면 죽천리 거리 641 취야리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3일 약 6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해주군 가좌면 취야리 시장 거리 642 서변면사무소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3일 서변면 문정리의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해주군 서변면사무 소 거리 643 죽천리헌병주재소 3·1 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4월 6일 약 3백 명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해주군 장곡면 죽천리 헌병주재소 건물 644 이목동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7일, 8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해주군 검단면 이목동 거리
136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645 삼정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7일 저녁 김창오 등 70여 명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해주군 동운면 삼정리 거리 646 죽천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7일 보통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 어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해주군 대거면 죽천리 거리 647 숙달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8일 보통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한 120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해주군 대거면 숙달리 거리 648 백정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8일 이치성 등이 만세시위를 일 으킨 곳 황해 해주군 운산면 백정리 거리 649 지남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8일 약 30명이 만세시위를 일으 킨 곳 황해 해주군 검단면 지남리 거리 650 삼현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4월 8일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해주군 월록면 삼현리 거리 651 황주읍시장 3·1운동 만세시위지 1919년 3월 2일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한 만 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황주군 황주읍 시장 거리 652 겸이포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3일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만 세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황주군 송림면 겸이포읍 거리 653 덕월산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6일 황주공립보통학교 남학생의 만세시위가 일어난 곳 황해 황주군 산야 654 양성학교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6일 양성학교 학생 30명이 만세 시위를 일으킨 곳 황해 황주군 양성학교 건물 655 송도면 성경학원 1919년 2월 26일 개성군 송도면에서 손병희 의 조선독립선언서 2,000장을 받은 감리파 건물 경기 개성군 송도면 성경학원 건물 656 송도면 북부 예배당 지 하실 석탄고 1919년 2월 28일 개성군으로 전달된 조선독 립선언서 100매가 보관되어 있던 장소 경기 개성군 송도면 북부 예배당 건물 657 송도면 충교 기독교예 배당 1919년 3월 1일 개성군 개성읍내 충교 기독 교예배당에서 신공량에게 조선독립선언서 80매를 교부받은 건물 경기 개성군 송도면 충교 기독교예배 당 건물 658 송도면 만월정 거리 1919년 3월 1일 어윤희와 신관빈이 조선독 립선언서를 배포한 거리 경기 개성군 송도면 만월정 거리 659 송도면 북본정 거리 1919년 3월 1일~4일 동안 개성읍내에서 만 세시위를 주도한 주민들이 만세시위를 한 거리 경기 개성군 송도면 북본정 거리 660 송도면 동본정 거리 1919년 3월 1일 어윤희와 신관빈이 조선독 립선언서를 배포한 거리 경기 개성군 송도면 동본정 거리 661 개성읍내 3·1운동 만 세시위지 1919년 3월 3일,4일,5일,23일,4월 1일,2 일,7일까지 지속적으로 3·1운동이 전개된 만세시위 장소 경기 개성군 송도면 거리 662 송도면 호수돈여학교 1919년 3월 3일 개성읍내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이 속한 기독교학교 경기 개성군 송도면 호수돈녀학 교 건물 663 송도면 서본정 거리 1919년 3월 3일 개성읍내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주민들이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 한 거리 경기 개성군 송도면 서본정 거리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37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664 송도면 남본정 순사파 출소 1919년 3월 3일 개성읍내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주민들이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 한 건물 경기 개성군 송도면 남본정 거리 665 송도면 사립송도고등보 통학교 1919년 3월 3~4일 개성군 송도면에서 일어 난 3·1만세운동 전개과정에 관련된 건물. 경기 개성군 송도면 사립송도고 등보통학교 건물 666 경기도 개성군 1919년 3월 3일 개성읍내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주민들이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 한 대화정의 헌병대 건물 경기 개성군 송도면 대화정 건물 667 중촌시모 집 1919년 3월 3일 개성읍내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주민들이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 한 일본인 건물 경기 개성군 송도면 서본정 157번지 중촌しも 건물 건물 668 고교선조 집 1919년 3월 3일 개성읍내에서 3·1운동에 참여한 김익룡이 공격한 일본인 우편배달부 고교선조의 자택 경기 개성군 송도면 북본정 가옥 669 송도면 대화정 거리 1919년 3월 3일 개성읍내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주민들이 3·1운동 만세시위를 한 거리 경기 개성군 송도면 대화정 거리 670 송도면 한영서원(韓英 書院) 1919년 3월 4일 개성읍내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이 속한 서원 경기 개성군 송도면 건물 671 송도면 북본정 남대문 거리 1919년 3월 4일 개성군 송도면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 전개과정에 관련된 거리 경기 개성군 송도면 북본정 남대문 거리 672 송도면 북본정 병교 1919년 3월 4일 개성군 송도면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 전개과정에 관련된 거리 경기 개성군 송도면 북본정 병교 거리 673 송도면 북본정 조선식 산은행 1919년 3월 4~5일 개성군 송도면에서 일어 난 3·1만세운동 전개와 관련된 건물. 경기 개성군 송도면 북본정 조선식산은 행 건물 674 송도면 북본정 장성한 포목점 1919년 3월 5일 개성군 송도면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 전개와 관련된 건물. 경기 개성군 송도면 북본정 張成漢 포목점 건물 675 송도면 개성경찰서 1919년 3월 6일 시위대가 몰려가 만세운동 을 한 장소 경기 개성군 송도면 건물 676 이형기집 1919년 3월 27일 개성시내 상점을 폐점함으 로써 3·1운동만세시위에 참여하는 계획을 논의한 장소 경기 개성군 영남면 용흥리 거리 677 중면 동강리 사립중립 학교 1919년 3월 26일 개성 군중면 창내리 앞산 에서 3·1운동 만세시위를 주도한 이철영이 재직하던 학교 경기 개성군 중면 동강리 사립중립학 교 건물
138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678 군중면 창내리 1919년 3월 26일 개성 군중면 창내리 앞산 에서 3·1운동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만세운 동이 전개되었다. 경기 개성군 군중면 창내리 산야 679 진봉면 지금리 1919년 3월 26일 개성군 진봉면 지금리에서 이재록과 마을사람 수 십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경기 개성군 진봉면 지금리 거리 680 상형태 집 1919년 3월 26일 개성군 진봉면 지금리에서 이재록이 자택에서 만세운동을 고조시킬 목 적으로 작성한 취지서를 뿌린 상형태의 가 옥 경기 개성군 운문동 가옥 681 방치록 집 1919년 3월 26일 개성군 진봉면 지금리에서 이재록이 자택에서 만세운동을 고조시킬 목 적으로 작성한 취지서를 뿌린 방치록의 가 옥 경기 개성군 금암동 가옥 682 상공익 집 1919년 3월 26일 개성군 진봉면 지금리에서 이재록이 자택에서 만세운동을 고조시킬 목 적으로 작성한 취지서를 뿌린 상공익의 가 옥 경기 개성군 금암동 가옥 683 이병도 집 1919년 3월 26일 개성군 진봉면 지금리에서 이재록이 자택에서 만세운동을 고조시킬 목 적으로 작성한 취지서를 뿌린 이병도의 가 옥 경기 개성군 장지동 가옥 684 상근식 집 1919년 3월 26일 개성군 진봉면 지금리에서 이재록이 자택에서 만세운동을 고조시킬 목 적으로 작성한 취지서를 뿌린 상근식의 가 옥 경기 개성군 장지동 가옥 685 동면 대조족리 오관산 1919년 3월 28~29일 개성군 동면 대조족리 오관산 정상에서 수십 명의 주민이 모인 가 운데 횃불을 피우고 만세를 부르면서 3·1 운동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경기 개성군 동면 대조족리 산야 686 상도면 상도리 1919년 3월 29일 개성군 상도면 상도리에서 3·1운동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경기 개성군 상도면 상도리 거리 687 대성면 풍덕리 1919년 3월 29일 개성군 상도면 상도리에서 전개된 3·1운동 만세시위가 대성면 풍덕리 읍내까지 진행되었다. 경기 개성군 대성면 풍덕리 거리 688 개성군 동면사무소 1919년 3월 30일 개성군 동면 대조족리 면 사무소에 주민들이 몰려가 3·1운동 만세시 위를 전개하였다. 경기 개성군 동면 대조족리 건물 689 서경원 집 1919년 3월 30일 개성군 송도면 남본정 서 경원의 음식점에서 순사보에게 3·1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구함 경기 개성군 송도면 남본정 가옥 690 동면 백전리 1919년 3월 31일 개성군 동면 대조족리 면 사무소에서 전개된 3·1운동 만세시위에 백 전리 주민들이 몰려와 함께 만세시위를 전 개하였다. 경기 개성군 동면 백전리 거리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39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691 진봉면 탄동리 1919년 3월 31일 개성군 동면 대조족리 면 사무소에서 전개된 3·1운동 만세시위에 탄 동리 주민들이 몰려와 함께 만세시위를 전 개하였다. 경기 개성군 진봉면 탄동리 거리 692 광덕면 황강리 1919년 3월 31일 경기도 개성군 광덕면 일 대에서 3·1운동 만세시위가 발생하였다. 경기 개성군 광덕면 황강리 거리 693 광덕면 고척리 1919년 3월 31일 경기도 개성군 광덕면 일 대에서 3·1운동 만세시위가 발생하였다. 경기 개성군 광덕면 고척리 거리 694 광덕면 사분리 1919년 3월 31일 경기도 개성군 광덕면 일 대에서 3·1운동 만세시위가 발생하였다. 경기 개성군 광덕면 사분리 거리 695 광덕면 광덕리 1919년 3월 31일 경기도 개성군 광덕면 일 대에서 3·1운동 만세시위가 발생하였다. 경기 개성군 광덕면 광덕리 거리 696 광덕면 중연리 1919년 3월 31일 경기도 개성군 광덕면 일 대에서 3·1운동 만세시위가 발생하였다. 경기 개성군 광덕면 중연리 거리 697 중면 대룡리 무명산 1919년 3월 31일~4월 2일까지 개성군 중면 대룡리에서 주민 수 십명이 인근의 무명산 에서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경기 개성군 중면 대룡리 산야 698 중면·진봉면·동면 1919년 4월 1일 저녁 중면, 진봉면, 동면의 각 리에서 주민들이 인근 고지에 올라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기 개성군 중면·진봉 면·동면 산야 699 중서면 곡령리 미륵당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경 경기도 개성군 중서면 곡령리 미륵당에서 주민 35~36명이 개성방면으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기 개성군 중서면 곡령리 미륵당 거리 700 송도면 만월당정 만월 대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경 경기도 개성군 중서면 곡령리에서 주민들이 송도면 북본정 당교까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기 개성군 송도면 만월당정 만월대 거리 701 송도면 북본정 당교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경 경기도 개성군 중서면 곡령리에서 주민들이 송도면 북본정 당교까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기 개성군 송도면 북본정 당교 거리 702 송도면 만월정 음지현 1919년 4월 1일 오후 8시경 경기도 개성군 중서면 곡령리에서 주민들이 만월정 음지현 을 거쳐 송도면 북본정 당교까지 만세운동 을 전개하였다. 경기 개성군 송도면 만월정 음지현 거리 703 송도면 북본정 고려교 1919년 3월 4일 개성군 송도면에서 일어난 3·1만세운동 전개과정에 관련된 거리 경기 개성군 송도면 북본정 고려교 거리 704 대성면 풍덕리 헌병주 재소 경기 개성군 대성면 풍덕리 건물 705 중면·진봉면·영북면 1919년 4월 2일 저녁 진봉면, 중면, 영북면 의 각 리에서 주민들이 인근 고지에 올라 만 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기 개성군 중면·진봉 면·영북면 산야 706 중면 율관동 1919년 3월 31일~4월 2일까지 개성군 중면 대룡리에서 주민 수 십명이 중면 율관동에 서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경기 개성군 중면 율관동 거리
140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707 영북면 고덕리 1919년 4월 2일 개성군 영북면 고덕리 및 길 상리 주민 약 200여명은 만세운동을 전개하 였다. 경기 개성군 영북면 고덕리 거리 708 영북면 길상리 1919년 4월 2일 개성군 영북면 고덕리 및 길 상리 주민 약 200여명은 만세운동을 전개하 였다. 경기 개성군 영북면 길상리 거리 709 영북면 기독교 예배당 1919년 4월 2일 개성군 영북면 고덕리 및 길 상리 주민 약 200여명은 만세운동을 전개하 였다. 경기 개성군 영북면 건물 710 개성군 영남면 1919년 4월 5일 저녁 영남면에서 주민들이 인근 고지에 올라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기 개성군 영남면 산야 711 영남면 양합리 1919년 4월 6일 오후 9시경 개성군 영남면 양합리에서 주민 약 1,000명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기 개성군 영남면 양합리 거리 712 개성군 석곡리 1919년 4월 6일 개성군 석곡리에서 기독교 도를 중심으로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하 였다. 경기 개성군 석곡리 거리 713 흥교면 흥교리 1919년 4월 1일 개성군 흥교면 흥교리 도로 위에 백지 2매를 이용해서 3·1운동 만세시 위를 알리는 게시물이 발견되었다. 경기 개성군 흥교면 흥교리 거리 714 장도면 항동리 도덕암 산 1919년 음력 2월 28일 저녁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향도리 주민 수십 명은 항동리 도덕 암산 위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기 장단군 장도면 항동리 도덕암산 산야 715 장도면 항동리 라우이 (ラウイ, 시라위) 산 1919년 음력 2월 29일 저녁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향도리 주민 수십 명은 항동리 라우 이(ラウイ) 산 위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 다. 경기 장단군 장도면 항동리 산야 716 장단군 장도면사무소 1919년 음력 2월 30일 저녁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향도리 주민 70여명은 태극기를 앞 세워 장도면 고딕리에 소재하는 장도면 면 사무소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기 장단군 장도면 건물 717 윤우영 집 1919년 음력 2월 30일 저녁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향도리 주민 70여명은 태극기를 앞 세워 장도면 고딕리에 소재하는 장도면 면 사무소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기 장단군 장도면 석주원리 가옥 718 장도면 항동리 구 시장 터 1919년 음력 2월 28일~3월 2일 저녁 경기 도 장단군 장도면 향도리 주민들은 태극기 를 앞세워 거주지 일대에서 만세운동을 전 개하였다. 경기 장단군 장도면 항동리 거리 719 장단군 고랑포 1919년 음력 3월 2일 경기도 장단군 장도면 향도리 구 시장터에서 고랑포 시장 통행인 100여명이 주민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 하였다. 경기 장단군 고랑포 거리 720 장단군 진남면사무소 1919년 3월 26일 장단군 진남면 동장리에서 주민 150명이 면사무소를 향해 3·1운동 만 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경기 장단군 진남면 동장리 건물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41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721 진남면 동장리 사립성 화학교 1919년 3월 26일 장단군 진남면 동장리 사 립성화학교에서 100여명이 군중들이 조선독 립만세를 부르며 만세시위를 하였다. 경기 장단군 진남면 동장리 사립성화학 교 건물 722 장단군 진서면사무소 1919년 3월 29일 장단군 진서면 면사무소에 서 주민 100여명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기 장단군 진서면 건물 723 장단군 진동면 1919년 4월 1일 장단군 진동면에서 주민 약 800여명이 면장과 면서기 및 구장을 앞세워 군청으로 몰려가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 다. 경기 장단군 진동면 거리 724 장단군 강상면사무소 1919년 4월 1일 장단군 강상면 구화리 소재 면사무소에 주민 약 2,000명이 몰려가 불을 붙이고 부속건물을 전부 불태우며 만세운동 을 전개하였다. 경기 장단군 강상면 구화리 건물 725 강상면 구화장 헌병주 재소 1919년 4월 1일 장단군 강산면 구화리에서 1시 30분경 주민 2,000명이 강상면 면사무 소에 몰려가 만세시위를 하다가 구화장 헌 병주재소로 몰려들어 만세시위를 전개하였 다. 경기 장단군 강상면 구화리 건물 726 대남면 위천리 용산동 1919년 4월 1일 경기도 장단군 대남면 마을 내 주민 약 100명은 대남면 위천리 용산동 에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고, 3일에도 계속하여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경기 장단군 대남면 위천리 용산동 거리 727 장단군 대남면사무소 1919년 4월 1일과 3일에 경기도 장단군 대 남면 마을내 주민들이 만세운동을 전개한 장소이다. 경기 장단군 대남면 위천리용산 동 건물 728 대남면 사립명성학교 1919년 4월 1일과 3일에 경기도 장단군 대 남면 마을내 주민들이 만세운동을 전개한 장소이다. 경기 장단군 대남면 위천리용산 동 건물 729 장단군 소남면 1919년 4월 9일 경기도 장단군 소남면내 수개소에서 면민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 하였다. 경기 장단군 소남면 거리 730 평강면 동변리 천도교 회당 1919년 2월 28일 안상덕은 손병희외 32명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평강군 동변리 천도교회당에 와서 이를 교부하였다. 이후 3 월 1일 이후 이태윤 등이 3월 3일까지 평강 군 각 곳에 배부하였다. 강원 평강군 대남면 동변리 건물 731 평강군 유진면사무소 1919년 3월 2일 평강군 유진면 후평리의 게시판에 김용섭은 조선독립선언서를 첩부 하였다. 강원 평강군 유진면 후평리 건물 732 평강군 평강정류장 1919년 3월 2일 평강 정류장에서 김현일은 안상덕에게 독립선언서 십 수매를 전달받았 다. 강원 평강군 거리 733 평강군 평강읍내 1919년 3월 30일~4월 1일, 6일~7일 강원도 평강군 평강읍내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 다. 강원 평강군 거리
142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734 평강군 읍내리,서변리, 동변리 1919년 4월6일~7일 약 500명의 군중들은 읍내리, 서변리, 동변리등을 순회하며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원 평강군 읍내리·서 변리·동변 리 거리 735 평강면 나매리 강원 평강군 평강면 라매리 거리 736 평강군 전중리·복계리 1919년 4월 7일 평강군 전중리, 복계리에서 천도교도를 중심으로 약 400명의 군중이 만 세시위가 전개하였다. 강원 평강군 전중리·복 계리 거리 737 평강군 현내면 백용리 1919년 4월 7일 평강군 현내면 백용리에서 약 160명의 군중이 만세시위가 전개하였다. 강원 평강군 현내면 백용리 거리 738 평강군 평강경찰서 1919년 4월 7일 평강군 일대에서 일어난 만 세시위를 진압하였다. 강원 평강군 건물 739 이천면 탑리 천도교회 1919년 3월 2일 이후 강원도 이천군 이천면 탑리 천도교회에서 이천군 각 지역에 조선 독립선언서를 전파하였다. 강원 이천군 이천면 탑리 건물 740 박필주 집 1919년 3월 3일 이천군 판교면 남좌리 박필 주의 가옥에 사람들이 모여 조선독립선언서 의 취지를 듣고 만세시위운동의 의의를 전 파하였다. 강원 이천군 판교면 남좌리 가옥 741 이흥선 집 1919년 3월 3일 이천군 판교면 군지리 이흥 선의 가옥에 사람들이 모여 조선독립선언서 의 취지를 듣고 만세시위운동의 의의를 전 파하였다. 강원 이천군 판교면 군지리 가옥 742 김희환 집 1919년 3월 3일 이천군 판교면 군지리 김희 환의 가옥에 사람들이 모여 조선독립선언서 의 취지를 듣고 만세시위운동의 의의를 전 파하였다. 강원 이천군 판교면 용암동 가옥 743 김응제 집 1919년 4월 4일 강원도 이천군 김응제의 가 옥에서 김병하, 김이순, 이여종등이 모여 만 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강원 이천군 낙양면 내낙리 가옥 744 낙양면 내락리·지하 리·지상리·문석리 시 장 1919년 4월 4일 강원도 이천군 김응제의 가 옥에서 김병하, 김이순, 이여종등이 모여 만 세시위를 계획하였다. 강원 이천군 낙양면 내낙리·지 하리·지상 리·문석리 거리 745 용포면 비석리 시장 1919년 4월 4일 오후 3시 비석리 시장에서 천도교도 5명이 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었 다. 강원 이천군 용포면 비석리 거리 746 김명기 집 1919년 4월 4일 김병하는 낙양면 지석리에 사는 김명기에게 찾아가 만세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강원 이천군 낙양면 문석리 가옥 747 박재곤 집 1919년 4월 6일 탑리 시장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를 위하며 태극기 2개를 박재곤 자택에 서 만들었다. 강원 이천군 이천면 남좌리 가옥 748 낙양면 지하리 헌병주 재소 1919년 4월 5일 이천군 낙양면 지하리 헌병 주재소에 천도교를 중심으로 한 주민들이 몰려가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강원 이천군 낙양면 지하리 건물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43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749 용포면 식전리·비석 리·탑리 시장 1919년 4월 6일 이천군 용포면 창전리 마을 제사에 모여든 주민 100여명은 이천읍내를 향하여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원 이천군 용포면 창전리·식 전리·비석 리·탑리 거리 750 판교면 용천리 1919년 4월 8일 판교면 용천리에서 이만권 등은 3·1운동 만세시위를 독려하였다. 강원 이천군 판교면 용천리 거리 751 고재룡 집 1919년 4월 7일 이천군 판교면 명덕리 고재 룡의 가옥에서 조건봉외 사람들이 모여 문 암리 시장에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계획하였다. 강원 이천군 판교면 명덕리 가옥 752 이천면 헌병분견소 1919년 4월 7일~8일 동안 이천면 이천헌병 분견소에 앞에 군중들이 몰려들어 만세운동 을 전개하였다. 강원 이천군 이천면 건물 753 판교면 용천리 김태선 가옥 1919년 4월 8일 이만권등은 판교면 용천리 김태선의 집에 찾아가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였다. 강원 이천군 판교면 용천리 가옥 754 이형모 집 1919년 4월 7일 박송규,박응규 등은 만세운 동을 할 것을 계획하고 8일 아침 이형모의 집에서 태극기 1폭을 만들었다. 강원 이천군 이천면 남좌리 가옥 755 박응규 집 1919년 4월 8일 오전 박응규는 사람을 보내 서 이계원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이천 읍내까지 동행하여 조선독립만세 시위를 함께 할 것을 권유하였다. 강원 이천군 이천면 남좌리 가옥 756 이천면 남좌리 1919년 4월 7일 박송규,박응규 등은 만세운 동을 할 것을 계획하고 8일 아침 이형모의 집에서 태극기 1폭을 만들었다. 강원 이천군 이천면 남좌리 거리 757 이천군 이천읍내 1919년 4월 8일 오후 8시경 이천읍내에서 천도교 약 20명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원 이천군 이천읍내 거리 758 안협면 거성리 시장 1919년 4월 10일 박용의·장강환은 이천군 안협면 거성리 시장에서 주민 20~30명을 모아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원 이천군 안협면 거성리 거리 759 안협면 헌병분견소 1919년 4월 21일 박용의는 안협면 거성리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며 안협 헌병분견소 앞에가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 다. 강원 이천군 안협면 건물 760 서면 사현동 헌병주재 소 1919년 4월 21일 박용의는 안협면 거성리 주민들에게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며 사견 헌병주재소 앞으로가서 독립만세를 부르다 체포되었다. 강원 이천군 서면 사현동 건물 761 철원읍 관전리 천도교 교구실 1919년 3월 1일 강원도 평강군에서 전달된 조선독립선언서가 철원군 철원읍 천도교구 실로 전달되어 철원읍내에 배포되었다. 강원 철원군 철원면 官田里 건물 762 박의병 집 1919년 3월 10일 철원군 철원읍 월하리 박 의병 가옥에 곽진근을 비롯한 사람들이 몰 려가 이완용을 내놓으라고 하며 만세시위를 하였다. 강원 철원군 철원읍 월하리 가옥
144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763 강원도 철원군 철원군 청·철원헌병분대 1919년 3월 10일 강원도 철원군 철원 헌병 분대와 철원군청 앞에서 많은 군중들이 도 로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강원 철원군 철원읍 거리 764 철원공립보통학교 1919년 3월 10일 오후 4시경부터 철원공립 보통학교생도 및 읍내외 주민 약 500명이 철원군 읍내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강원 철원군 철원공립보 통학교 건물 765 철원복음전도관 1919년 3월 10일 철원 복음전도관 앞 도로 에서 사람들이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하 였다. 강원 철원군 건물 766 철원역 1919년 3월 11일 철원군 철원역 앞 도로에 서 군중들이 모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원 철원군 거리 767 갈말면 문혜리 1919년 3월 11일 저녁 강원도 철원군 갈말면 문혜리에서 수 백명의 군중이 조선독립만세 를 외치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원 철원군 갈말면 문혜리 거리 768 철원군 철원읍내 1919년 3월 11일 아침 기독교도를 포함한 군 중 약 700명이 만세를 고창하면서 철원읍내 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원 철원군 철원읍 거리 769 갈말면사무소 1919년 3월 14일 신성규는 갈말면 문혜리 면사무소의 직원들의 청에 의해 만세시위를 하는 군중들을 설유하였다. 강원 철원군 갈말면 문혜리 건물 770 갈말면 지포리 1919년 3월 12일 철원군 갈면면 주민 약 800명은 청양리에서 집합하여 지포리를 향 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던 중 일본측의 진 압으로 2명이 검거되고 해산되었다. 강원 철원군 갈말면 지포리 거리 771 김칠료 집 1919년 3월 13일 저녁 강원도 철원군 갈말 면 문혜리 주민들은 김칠룡의 집에서 3·1 운동 만세시위에 대해 논의하였다. 강원 철원군 갈말면 문혜리 가옥 772 철원읍 시장 1919년 3월 17일 철원읍내 시장에서 군중들 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원 철원군 철원읍 거리 773 내문면 독검리 1919년 4월 7일 철원군 내문면 독검리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만 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강원 철원군 내문면 독검리 거리 774 내문면사무소 1919년 4월 8일 철원군 내문면 주민들이 태 극기를 앞세우고 내문면 면사무소에 집합하 여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전개 하였다. 강원 철원군 내문면 마방리 건물 775 김화면 암정리 천도교 회 1919년 3월 2일 김화군 암정리 천도교회에 조선독립선언서가 전달되어 김화군 각 지역 으로 전파되었다. 강원 김화군 김화면 암정리 건물 776 이흥석 집 1919년 3월 2일 강원도 평강군에서 전달된 조선독립선언서를 이흥석의 집에서 모여 김 화군 각 지역에 배포할 계획을 논의하였다. 강원 김화군 김성면 상리 가옥 777 김화읍 김화보통학교 1919년 3월 2일 김화군 암정리 천도교회에 전달된 조선독립선언서가 김화보통학교 전 달되어 김화군 각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강원 김화군 김화읍 김화보통 학교 건물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45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778 김화읍 석비·수차장· 잡화상점 앞·학사리 장창범의 집 대문 1919년 3월 2일 김화군 암정리 천도교회에 전달된 조선독립선언서가 박윤실에 의해서 김화군 각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강원 김화군 김화읍석비 ·수차장· 잡화상점전 ,학사리장 창범가옥 거리 779 김화읍 이현·신촌·덕 석리 1919년 3월 2일 김화군 암정리 천도교회에 전달된 조선독립선언서가 김화 읍내, 이현, 신촌, 덕석리에 전파되었다. 강원 김화군 김화읍이현 ·신촌·덕 석리 거리 780 김화군 1919년 3월 3일 김화군 4곳에서 독립선언서 7매가 발견되어 혐의자 1명이 체포되어 취 조당하였다. 강원 김화군 거리 781 김화읍 관아 1919년 3월 3일 김화군 김화읍 관아 앞에서 선언서 3매가 첩부되어 주도자 2명이 체포 되었다. 강원 김화군 김화읍 건물 782 김화군 금성면 1919년 3월 3일 김화군 금성면에서 독립선 언서 12매가 발견되어 배포자 3명이 체포되 어 취조 당하였다. 강원 김화군 금성면 거리 783 기오면 창도리 1919년 3월 28일~29일 밤 주민 수 백명이 모여 김화군 기오면 창도리 길가를 행진하 였다. 강원 김화군 기오면 창도리 거리 784 기오면 창도리 시장 1919년 3월 28일 밤 김연태는 약 700여명의 마을 주민들을 이끌고 기오면 창도리 시장 에 가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원 김화군 기오면 창도리 거리 785 김운하 집 1919년 3월 28일~29일 군중들은 김화군 기 오면 창도리를 돌며 집집마다 문을 두드리 며 만세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였다. 강원 김화군 기오면 창도리 가옥 786 김상묵 집 1919년 3월 28일 김상묵의 집에서 김화군 기오면 창도리 3·1운동 만세시위에 참여하 는 사람들이 연명부에 이름을 쓰고 체포되 는 경우 빼내러 가겠다고 결의하고 있다. 강원 김화군 기오면 창도리 가옥 787 김청민 집 1919년 3월 29일 김청민의 집에서 기오면 창도리 만세시위에 사용될 태극기 2개를 만 들었다. 강원 김화군 기오면 창도리 가옥 788 김연태 집 1919년 3월 29일 김연태의 집에서 기오면 창 도리 만세시위에 사용될 태극기를 만들었다. 강원 김화군 기오면 창도리 가옥 789 원전정추 집 1919년 3월 28일~29일 김화군 기오면 창도 리에 거주하는 일본인 잡화상 원전정추(原 田政槌)가옥에 주민 수 백명이 몰려들어 만 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강원 김화군 기오면 창도리 가옥 790 이준재 집 1919년 3월 28일~29일 김화군 기오면 창도 리 주민 수 백명이 만세시위 일으켜 기오면 면장인 이준재의 집에 몰려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원 김화군 기오면 창도리 가옥
146 ❙ 북한 3·1운동 사적지 조사성과 활용방안과 남북 학술교류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791 기오면 창도리 창도 헌 병주재소 1919년 3월 28일~29일 김화군 기오면 창도 리 주민 수 백명이 만세시위 일으켜 창도헌병 주재소 앞에 몰려가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원 김화군 기오면 창도리 건물 792 기오면 창도리 창도 우 편소 1919년 3월 28일~29일 김화군 기오면 창도 리 주민 수 백명이 만세시위 일으켜 창도우 편소 앞에 몰려가 투석을 하면서 만세운동 을 전개하였다. 강원 김화군 기오면 창도리 건물 793 기오면 창도리 자갈밭 1919년 3월 28일 저녁 김화군 기오면 창도 리에서 수 백명의 주민들이 3·1운동 만세 시위를 전개하면서 사방으로 나아갔는데 일부는 다리를 건너서 자갈밭 쪽으로 가서 돌을 주워와 주재소 쪽으로 투석하였다. 강원 김화군 기오면 창도리 거리 794 김화군 기오면면사무 소 1919년 3월 28일 오후 8시 30분경 김화군 기오면 창도리 중심가에서 주민 수 백명이 만세를 부르면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자 면장 이준재(李俊宰)는 면사무소에서 나와 우편 소로 피난하였다. 강원 김화군 기오면 창도리 건물 795 근동면 하소리 1919년 4월 4일 김화군 근동면 하소리에는 수 많은 군중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전개하 였다. 강원 김화군 근동면 하소리 거리 796 유한영 집 1919년 3월 1일 평강군 천도교구장 이태윤 은 조선독립선언서 120매를 김천일에게 전 달하였고 김천일은 이를 회양군 난곡면 상 송관리 유한영의 집에 가지고 가서 배부를 부탁하였다. 강원 회양군 란곡면 상송관리 가옥 797 사동면 구만리 1919년 3월 1일 평강군 천도교구장 이태윤 은 조선독립선언서 120매를 김천일에게 전 달하였고 이것은 3월 3일 회양군 사도면 구 만리에서 신태윤에게 교부되었다. 강원 회양군 사동면 구만리 거리 798 하북면 초일리 영락교 1919년 3월 1일 평강군 천도교구장 이태윤 은 조선독립선언서 120매를 김천일에게 전 달하였고 이것은 3월 3일 회양군 하북면 초 일리 영락교에서 박병운에게 교부되었다. 강원 회양군 하북면 초일리 영락교 거리 799 벽양면 고림리 1919년 3월 1일 평강군 천도교구장 이태윤 은 조선독립선언서 120매를 김천일에게 전 달하였고 이것은 3월 3일 회양군 벽양면 고 림리에서 임병준에게 교부되었다. 강원 회양군 벽양면 고림리 거리 800 공면술 집 1919년 3월 1일 평강군 천도교구장 이태윤 은 조선독립선언서 120매를 김천일에게 전 달하였고 이것은 3월 3일 회양군 통천면 송 산리 공면술의 가옥에 교부되었다. 강원 회양군 통천면 송산리 가옥 801 송찬용 집 1919년 4월 12일 회양군 하북면 초일리에 거주하는 송찬용,송두용 형제의 집에 신영 규가 찾아와 경성에서 일어난 3·1운동 만 세소식을 전하자 이에 찬성하고 만세운동을 할 것을 계획하였다. 강원 회양군 하북면 초일리217 번지 가옥
북한 3·1운동 사적지 현황 및 목록❙ 147 연번 사적지명 정의 당시 주소 종류 도 군 상세주소 802 김일호 집 1919년 4월 12일 회양군 하북면 초일리에 거주하는 송찬용,송두용 형제의 집에 신영 규가 찾아와 경성에서 일어난 3·1운동 만 세소식을 전하자 이에 찬성하고 만세운동을 할 것을 계획하였고, 이에 대해서 김일호 집 에 이르러 등사지를 이용하여 통고문을 작 성하였다. 강원 회양군 하북면 초일리 가옥 803 이완조 집 1919년 4월 12일 회양군 하북면 초일리에 거주하는 송찬용,송두용 형제의 집에 신영 규가 찾아와 경성에서 일어난 3·1운동 만 세소식을 전하자 이에 찬성하고 통고문을 만들어 14일에 마산리 이완조 집외 각 주민 에게 배부하였다. 강원 회양군 하북면 마산리 가옥 804 하북면 선암리 1919년 4월 14일 하북면 선암리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강원 회양군 하북면 선암리 거리 805 하북면 초일리 1919년 4월 16일 하북면 초일리에서 다수의 주민들이 3·1운동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강원 회양군 하북면 초일리 거리 806 송환순 집 1919년 10월 12일 송환순은 3월달에 일어난 3·1운동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둘째 아들이 서대문 감옥에 입감 중이고 자신도 미결감으 로 구류 2개월을 지낸 뒤 무죄로 풀려났다. 강원 회양군 하북면 초일리21번 지 가옥 807 최상린 집 1919년 2월 말 경성 방면으로부터 조선독 립선언서의 내용을 듣고 최상린의 자택에서 김두만,안흥식,우낙영등이 모여 4월 2일 만 세시위 할 계획을 세웠다. 강원 통천군 임남면 장전리492 번지 가옥 808 임남면 장전리 다리 1919년 4월 2일 임남면 장전리 다리에서 기 독교도 20여명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강원 통천군 임남면 장전리 거리 809 장전리 경찰관 주재소 1919년 4월 3일 임남면 장전리 경찰관 주재 소에서 주민 수 백명이 모여 만세시위를 전 개하였다. 강원 통천군 임남면 장전리 건물 810 순령면 고저리 강원 통천군 순령면 고저리 거리 811 순령면 고저리 경찰관 주재소·면사무소·우 편소 1919년 4월 6일 저녁 8시 약 300명의 주민 들이 고저리 경찰관주재소와 순령면사무소 및 우편소에 몰려들어 만세운동을 전개하였 다. 강원 통천군 순령면 고저리 건물 812 통천군 통천공립보통 학교 1919년 4월 9일 통천에서 전개된 만세운동 의 주도자인 통천공립보통학교 생도들이 소 속된 학교 강원 통천군 통천공립보 통학교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