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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당나라를 무릎 꿇게 하다
가.연표
  • 618 이연, 당나라 건국
  • 626 이세민, 태종 즉위
  • 631 고구려, 천리장성 축조(부여성-비사성)
  • 645 당 태종, 고구려 침입(당나라의 제1차 침입)
  • 안시성 전투
  • 647 당 태종, 고구려 침략(당나라의 제2차 침입)
  • 648 당 태종, 고구려 침략(당나라의 제3차 침입)
  • 649 당 태종의 사망, 고종 즉위
나.시대적 배경618년 중국 대륙에서 수나라의 뒤를 이어 당나라가 들어설 즈음 고구려에서는 수나라와 전쟁을 치루었던 영양왕이 죽고 영류왕이 왕위에 올랐다. 당나라가 건국되자 619년 영류왕이 삼국 중 가장 먼저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는 화해의 기운이 감돌았다. 고구려는 수나라와 계속된 전쟁으로 지쳐 있어 당나라와 친선이 필요하였고, 당나라는 수나라의 패배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고구려를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는 삼국 간의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서서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625년 신라와 백제가 ‘고구려가 당나라와의 교류를 중간에서 방해하고 국경을 자주 침범한다’고 호소하자 당나라는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백제, 고구려 두 나라와 화해할 것을 권고하였다. 당나라가 삼국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관계는 멀어져 갔다.
626년 당나라 고조의 뒤를 이어 태종이 즉위하자 두 나라 사이에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하였다. 당나라 태종은 먼저 서역으로 진출하여 주변 여러 나라를 항복시키며 비단길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고구려에는 사신을 보내 지리와 국내 사정을 정탐하는 등 고구려와 전쟁을 위한 준비를 하나하나 착실하게 진행시켜 나갔다. 이에 맞서 고구려도 당나라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631년부터 16년간에 걸쳐 부여성에서 비사성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다. 642년 천리장성의 공사 책임을 맡고 있던 연개소문은 평양성으로 군대를 이끌고 들어와 쿠데타를 일으켜(연개소문의 정변) 당나라에 대해 유화책을 펴던 영류왕을 죽이고, 그의 조카를 보장왕으로 옹립하였으며, 본인은 스스로 대막리지가 되었다. 고구려의 실권을 잡은 연개소문은 대외적으로 강력한 정책을 폈다. 이런 상황에 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어려움에 빠진 신라는 고구려와 평화 협상을 체결하려고 하였으나 “조령과 죽령 이북 지역을 되돌려 달라”는 고구려의 요구로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후 고구려와 백제가 동맹을 맺고 신라를 압박하였다.
신라는 백제에게 대야성 등 40여개의 성을 빼앗기고, 고구려가 당나라와 중요한 교통로인 한강유역의 당항성을 공격하려고 하자 당나라에게 “두 나라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공격하자”고 제의하였다. 이에 당나라는 ‘장차 고구려를 침략할 때 신라와 동맹을 맺어두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신라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당나라는 고구려와 백제에게 “신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요구했으나 고구려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동북아시아는 군사적 위기가 높아져 갔다.
다.전개 과정

당나라의 침입

645년 당나라 태종은 ‘왕을 죽이고 백성을 괴롭히는 연개소문의 처벌과 고구려와 전쟁에서 죽은 수나라 병사의 원혼을 갚겠다’는 것, ‘신라의 구원병 요청에 응한다’는 것, 그리고 ‘고구려가 중국 중심의 천하 질서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다’는 등의 네 가지 이유를 들어 고구려를 침략하였다(당나라의 제1차 침입). 이때 당나라 태종이 거느린 군사는 과거 수나라 백만대군의 10분의 1도 안되는 10만(육군 6만 명, 수군 4만 명)의 군사였지만 그들은 우수한 무기와 뛰어난 전투력을 지닌 정예군이었다.
당나라 육군은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고구려의 현도성과 신성은 당나라군의 공격을 잘 막아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국내외의 오랜 전쟁의 과정 속에 단련된 우수한 군사력을 보유한 당나라 육군에게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 등 10여개 성을 빼앗겼다. 특히 요동성을 둘러싼 공방이 치열하였다. 요동성은 수나라 양제의 공격에도 무너지지 않았던 난공불락의 성으로 당나라 태종이 직접 나서서 지휘하였고, 고구려 보장왕 역시 4만여 명의 지원군을 보낼 정도로 두 나라 모두 관심과 지원이 크게 쏟는 성이었다. 고구려군은 10여 일 동안 새로운 무기를 이용하여 성을 공격하는 당나라 육군을 잘 막아냈다. 그러나 고구려 군사의 결사적인 항쟁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군대의 바람을 이용한 불화살 공격 등에 요동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이 전투로 고구려군은 1만여 명이 죽고, 1만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군량 50만 석을 잃을 정도로 매우 큰 피해를 입었다. 백암성 요동성을 함락시킨 당나라 육군이 여세를 몰아 백암성을 공격하자 백암성 성주는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여 버렸다. 백암성 전투에서는 당나라 태종이 독화살을 맞은 당나라 군사의 어깨를 직접 입으로 빨아 독을 제거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당나라 군대의 사기를 크게 높이기도 하였다.
한편 5백여 척의 전선과 군사 4만여 명으로 무장하여 출정한 당나라 수군은 서해를 건너 평양성을 공격하기 위해 요동의 최남단에 있는 고구려의 비사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당나라 수군은 수나라 수군의 10분의 1에도 못 미치는 규모였지만 잘 훈련된 군사와 우수한 무기로 정예의 전투력을 가진 최강의 부대였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는 8천여 명의 백성을 잃었다.

무릎 꿇은 당 태종

이제 고구려 요동의 방어선 중에서 남은 성은 안시성과 건안성으로 당나라 육군의 주요 공격 대상이었다. 당나라 태종은 작전 회의 결과 안시성을 먼저 공격하기로 하였다. 양만춘이 지키고 있는 안시성은 주위가 매우 높고 험준한 산으로 되어 있는 천연의 요새였다.
당의 공격으로 다급해진 고구려 조정에서는 안시성을 지켜내기 위하여 말갈군이 포함된 15만 명의 지원군을 보냈으나 당나라 육군의 유인 작전에 걸려들어 한번도 싸워 보지도 못하고 항복하여 버렸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는 3만여 명의 사상자와 3만 6천여 명의 포로, 그리고 말 5만 마리, 소 5만 마리를 잃는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
안시성을 빼앗기면 평양성이 매우 위험하다는 판단 아래 고구려의 실권자인 연개소문은 안시성 성주 양만춘에게 사람을 보내 당나라 공격으로부터 성을 꼭 지켜줄 것을 부탁하였다. 고구려의 지원군을 물리친 당나라 육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안시성을 에워싸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격을 감행하였다. 당나라 육군은 돌을 날려 보내는 투석기와 성벽을 파괴하는 공격용 수레를 이용하여 하루에 6, 7 차례에 걸쳐 성벽을 부수면서 안시성 공격에 총력을 기울였으나 고구려군의 신속한 방어로 성을 무너뜨리지는 못하였다.
끊임없는 공격에도 안시성이 한 달이 넘도록 함락되지 않자 당나라 육군은 여러 번의 작전회의를 거쳐 성안을 살필 수 있도록 안시성보다 높은 흙산을 쌓아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성의 동남쪽에 60여일에 걸쳐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흙산을 쌓기 시작하였다. 당나라 육군의 토산이 안시성의 높이와 같아지자 고구려군도 이에 뒤질세라 기존의 성을 더 높게 쌓아 올렸다. 그러나 급하게 쌓아 올린 당나라 육군의 흙산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갑자기 무너져 내렸고, 안시성의 성벽의 일부도 함께 무너져 버렸다. 이 기회를 틈타 고구려군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혼란에 빠져있는 당나라 육군을 공격하여 흙산을 빼앗아 버렸다. 고구려군은 흙산 주위에 불을 질러 당나라 육군이 흙산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당나라 육군은 흙산을 되찾기 위하여 3일에 걸쳐 공격하였으나 실패로 끝났다. 고구려군의 사기는 충천하였고, 흙산마저 빼앗겨 사기가 땅에 떨어진 당나라 육군은 추위와 굶주림을 버티지 못하고 80여 일 간의 안시성에 대한 포위를 풀고 서둘러 철수하였다. 안시성 전투도 이후에도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은 계속되었다. 647년과 648년에 걸쳐 당나라군은 안시성 전투의 실패를 거울삼아 먼저 소부대를 고구려의 국경에 침투시켜 교란시킨 후 대부대로 하여금 전면 공격을 감행하게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두터운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하였다. 당나라 태종이 직접 고구려 원정에 직접 나섰다가 눈을 다치고 돌아온지 4년, 이어 두 차례의 원정도 실패로 끝난 다음 해인649년, 당나라 태종이 등창과 풍질을 앓다가 죽음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침략은 중단되었다. 당나라 태종이 마지막 죽어가면서 ‘고구려 공격을 그만 두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로 고구려는 연개소문이나 양만춘과 같은 훌륭한 지도자, 지도자와 백성들의 단결된 의지, 강한 군사력, 뛰어난 전술 등으로 당나라를 무릎 꿇게 하였다.
라.관련자료

양만춘

양만춘은 고구려 시대의 명장으로 우리 역사상 위대한 장군의 한 사람이지만 「삼국사기」와 같은 역사 기록에는 그 이름이 나오지 않고 ‘안시성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송준길의 문집인 『동춘당선생별집』이나 박지원이 쓴『열하일기』등에 양만춘으로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그는 지금의 만주 요녕성 동남쪽에 위치한 영성자산성으로 추정되는 안시성의 성주였다. 안시성은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 자리잡은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군사들 또한 정예한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양만춘은 연개소문이 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했을 때,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이에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연개소문은 결국 안시성 성주의 직책을 그대로 맡겼다. 이는 그가 용기와 소신 있는 인물이었음을 말해준다.
645년 당나라 태종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여 요동성과 백암성을 함락시키고 안시성을 공격하자 안시성의 군사와 성민들은 고립되어 아무도 도와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로 뭉쳐 완강히 저항하였다. 당나라 군대는 연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어 60여일 동안 높은 흙산을 쌓아, 이를 발판으로 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당나라군대는 하루에 6, 7회의 공격을 가하고 마지막 3일 동안은 전력을 다해 총 공세를 펼쳤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마침 9월에 접어들어 요동의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했고, 군량 또한 바닥을 드러내자 당나라 태종은 포위를 풀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그는 성루에 올라 송별의 예를 표하고, 당나라 태종은 그의 용감함을 높이 평가해 비단 100필을 주면서 왕에 대한 충성을 격려하였다고 한다. 일부 역사 기록에 의하면 이때 당나라 태종이 눈에 양만춘이 쏜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천리장성

당나라 사신 장손사가 와서 고구려가 지난 날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경관을 헐어버린 사건이 발생하자 고구려의 당에 대한 경계심은 높아졌다. 그리하여 고구려는 당나라의 침략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당의 침략에 대비하여 영류왕 14년(631년) 12월부터 보장왕 6년(647년)까지 16년의 공사 끝에 천리장성을 완성하였다. 천리장성의 북단은 부여성(농안)으로부터 남단은 비사성까지이며 연개소문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연개소문은 이 성과 축조를 감독하면서 요동 지방의 군사력을 장악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천리장성은 고구려 변경선 밖의 방어선에 축조된 것이 아니라 각각의 변경성곽들을 서로 연결시켜놓은 형태로서, 천리장성으로 연결되어 있는 랴오허 강 동쪽의 기존 성곽들은 적의 침입을 막는 주요 방어거점 구실을 했다. 즉, 이 천리장성은 기존의 성곽을 연결시켜 독립적인 방어 체계로 구축하였으며, 천리 장성의 핵심부는 요동성이다. 그리고 그 북방의 백암성과 남방의 안시성은 배후 산성으로서 고구려 수비를 책임지는 요충이다.

백암성

백암성은 둘레 약 2,500m로 요동성에서 동쪽으로 22.8km 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태자하 북쪽 기슭에 있는 영주성으로 추정된다. 북쪽으로 개모성, 서쪽으로 요동성, 남쪽으로 안시성으로 둘러쌓여있는 2km에 걸친 성으로, 외성과 내성으로 되어 있다. 현재 북쪽과 동쪽 성만 남아 있으며, 북쪽 성벽의 높이는 5~8m이다. 북쪽 성벽에서 동쪽으로1km 걸어가면, 35㎡의 내성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점장대이다. 바위산의 험준한 지형을 이용하여 성을 쌓았으며 남서쪽만 앞이 틔어 있어 방어하기에 유리하였다.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547년(양원왕 3년) 신성과 함께 개축하였다고 한다. 551년 돌궐이 성을 침공하였으나 고구려군은 이에 맞서 1,000여 명의 적군을 물리쳤다고 한다.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침공했을 때 성주 손대음의 항복으로 함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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