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 전체목록 > 수나라를 꼼짝 못하게 하다
  1. 수나라를 꼼짝 못하게 하다
가.연표
  • 581 양견, 수나라 건국, 문제 즉위
  • 598 고구려, 요서지방 침공
  • 수 문제, 고구려 침입(수나라의 제1차 침입)
  • 604 수나라 태자 양광, 양제 즉위
  • 수나라,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
  • 612 수 양제, 고구려 침입(수나라의 제2차 침입)
  •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 613 수 양제, 고구려 침입(수나라의 제3차 침입)
  • 614 수 양제, 고구려 침입(수나라의 제4차 침입)
  • 618 수 양제, 우문술의 아들에게 살해됨
  • 이연, 당나라 건국
나.시대적 배경581년 양견은 수나라를 세우고 초대 황제인 문제가 되었다. 그는 계속 세력을 확장하여 589년 남북조시대를 마감하고 중국 대륙을 통일하였는데, 이로써 동북아시아의 세력 판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300여 년 동안 분열되어 여러 왕조가 흥망성쇠를 거듭하던 중국 대륙을 통일한 수나라 문제는 주변 여러 나라를 크게 긴장시켰다.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만들려고 하는 수나라는 중국 왕조와 대결하면서 강력한 국가로 성장한 고구려가 큰 부담이 되었다. 자신들 이외의 어떠한 강자도 인정할 수 없는 수나라 입장에서 고구려와의 전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신라가 한강을 차지한 후 수와 직접적인 외교관계를 맺음으로써 신라와 수나라 그리고 고구려간의 대립은 더욱 깊어갔다.
고구려와 수가 대립하는 상황에서 고구려는 신흥세력인 북방의 돌궐과 연결하였는데, 이는 전략적으로 수의 요서지방을 위협하였다. 고구려는 백제와 연계하였고,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고립되었던 신라가 수나라에 접근함으로써 한반도의 정세는 긴장관계를 이루었다. 수나라에게 위협을 느낀 고구려는 장차 벌어질지도 모를 수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군량을 모으고 군인의 수를 늘려 훈련시킬 뿐만 아니라 중국인 무기제조 기술자를 데려와 ‘쇠뇌’라는 새로운 무기를 만들었다. 고구려의 사정을 살피려고 수나라가 보낸 사신을 한 달 동안이나 한적한 곳에 머물게 함으로써 별다른 소득이 없게 하여 돌려보내기도 하였다. 수나라 문제가 ‘아무리 강한 고구려라고 할지라도 결코 수나라를 이길 수 없다’는 국서를 보내오면서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의 기운이 감돌았다.
다.전개 과정

고구려의 선제 공격

598년, 영양왕은 군사적으로 유리한 지역을 먼저 차지하려는 목적으로 고구려와 말갈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요서지방을 공격하였으나 수나라의 방어로 실패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의 선제공격에 자존심이 상한 수나라 문제는 즉각 30만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동시에 수군을 통해 군량과 보급품을 공급하도록 하였다(수나라의 제1차 침입). 수나라군의 계략을 간파한 고구려군은 해상에서 군량과 보급품을 운반하던 수나라 수군을 궤멸시켰고, 이에 따라 군량을 보급을 받지 못한 수나라 육군은 굶주린 상태로 싸워야 했으며 마침 장마철이 닥치면서 극도로 굶주린 상태에서 전염병과도 싸워야 했다. 결국 수나라 육군은 고구려군에게 거의 전멸 당하였다.
고구려는 수의 원정군이 퇴각한 뒤에 가능한한 수와의 무력충돌을 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수에 사신을 보내 관계개선을 시도했다. 수 문제는 고구려가 요서지방을 공격한 사실에 유감의 뜻을 표한 것을 받아들여 고구려에 대한 감정을 완화하였다. 이러한 외교적 활동의 결과, 고구려와 수의 양국간에는 일시적이나마 평화가 유지되었다.

백만 대군의 침입

604년, 수나라 문제의 둘째 아들 양광이 아버지와 맏형을 죽이고 황제로 즉위하였다. 수나라의 두번째 황제에 오른 양제는 급격한 개혁을 추진하고 폭압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또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겨 궁궐을 새로 건설하였으며, 중국 대륙을 경제적으로 하나로 묶으려는 야망으로 1백만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황하와 양자강을 연결하는 3천리 정도의 대운하를 건설하였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주변 여러 나라를 제압하려 하였다. 그 첫 번째 대상이 고구려였다.
양제 즉위 후에도 한동안 고구려와 수나라의 우호관계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런데 607년 8월 양제가 돌궐지역을 순행하다가 돌궐 추장의 처소에서 고구려의 사신을 발견하고 고구려와 돌궐이 연합하여 수나라를 치려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고구려와 수의 관계는 급격히 나빠졌고 외교적 문제가 되었다.
수나라 양제는 고구려가 신하의 예로 대할 것을 거부하자 고구려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수나라는 신무기 개발에 주력하여 이동식 사다리차인 운제, 성문을 부수기 위한 당차, 성벽 밑의 땅을 파기 위한 전호피차, 돌을 날리기 위한 발석차, 수십 명의 군사가 타고 싸울 수 있는 팔륜누차 등 성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무기들을 만들었다.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 준비를 위한 많은 비용을 마련하려고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거두었다. 그렇지 않아도 궁궐과 운하 건설과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 때문에 지쳐있는 데다가 전쟁준비를 하게 되니 수나라 백성들은 견디지 못하고 집을 떠나 도망가거나 도적이 되기도 하는 등 수나라의 민심이 매우 어지러워졌다. 만반의 전쟁 준비를 마친 수나라 양제는 612년, 113만 명이라는 엄청난 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쳐들어 왔다(수나라의 제2차 침입). 수나라 군대가 북경 부근 탁군을 모두 출발하는 데는 40여 일이 걸렸고, 행렬의 길이가 9백 60여리나 될 정도로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대군이었다. 이에 비해 고구려 군사는 고작 수나라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 30만 명에 불과하였다. 고구려군은 수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요하와 요동성 등의 요새들에 대한 수비를 강화하였다. 수나라군은 고구려군의 강력한 수비와 기습 공격에 부딪쳐 요하를 건너는데 실패하자 다시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정면 공격하여 요하를 간신히 건넜다.
요하를 건넌 수나라 대군은 여세를 몰아 요동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고구려군은 성 주변에 마름쇠를 뿌려 수나라 대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수나라의 성을 공격하는 무기를 파괴하는데 주력을 하였다. 또 고구려군은 백성들을 성안으로 피신시키고 성 밖의 양식이 될 만한 것들을 모두 성 안으로 옮기거나 태워버림으로서 적에게 양식을 제공하지 못하도록 하는 청야전술을 펼쳐 수나라군을 지치게 하였다. 4개월이 넘도록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지루하게 계속되는 전쟁에 수나라 병사들은 지쳐가고 장군들은 초조해지기 시작하였다.
수나라의 주력 부대가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수나라군은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기동력이 뛰어난 정예부대를 수도 평양으로 보내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고구려의 항복을 받아내겠다는 속전속결의 전략을 세운 것이다.

살수대첩

살수대첩도 수 양제는 한편으로 요동성 공격을 계속하면서 한편으로 별동대를 편성하여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칠 계획이었다. 그것이 우문술과 우중문이 이끄는 30만 명의 별동대였다. 그들은 정예병이었지만 각자가 각종 무기와 100일 분량의 식량을 지급받아 짊어지고 가기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군사들은 지휘관의 감시를 피해 식량과 장비를 조금씩 파묻어 무게를 줄였다.
한편, 고구려는 수나라 군대의 속사정을 알아보려고 을지문덕을 수나라 군대 진영에 보냈다. 이때 을지문덕은 수나라 군대 장군들의 지휘가 잘 되지 않고 별동부대가 심각한 식량난을 겪고 있음을 알고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기 위해 고구려땅 깊숙히 유인하는 대담한 작전을 구상하였다. 을지문덕의 유인작전으로 수나라 대군은 평양성 근처 30리 밖까지 들어왔다.
이때 을지문덕은 평양성 북방 산악지대에 정예부대를 배치하고 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군 별동부대가 작전에 걸려든 것을 비꼬면서 우중문에게 철군을 하라는 오언시를 지어 보냈다. 이와 동시에 우문술의 진중에도 사자를 보내어 항복의사를 밝혔다. 우문술은 애초에 추격전을 반대했는데, 고구려의 항복 서신에 체면은 세웠다고 판단하고 혼자서 철군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고구려군의 기습공격을 두려워하여 조심스럽게 철수하였다.
수군의 별동부대가 철수를 시작하여 안주에 도착한 것은 7월 하순 무렵이었다. 그들은 살수(청천강)에 도착하여 서둘러 강을 건넜다. 이미 고구려군이 강 상류지역에 임시 제방을 만들었기 때문에 강물의 수량도 많지 않아 강을 건너기가 쉬운 상황이었다. 고구려군은 수군 철수부대의 주력이 강심을 통과할 때 상류의 제방을 한꺼번에 무너뜨렸다. 적진을 빠져나가는 데서 오는 두려움과 굶주림에 지쳐있던 수나라군을 고구려는 수공작전으로 전열을 뒤흔드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고구려는 수나라군에게 돌이킬 수 없는 패배를 안겼고, 수나라군은 가까스로 일부 패잔병만이 압록강 하류지역으로 도망쳤다. 끝까지 도망하여 수군의 요동성 본대에 합류한 병사는 별동대 30만명 중에서 겨우 2,700명에 불과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수나라 양제는 별동대가 패배한 책임을 물어 별동대의 지휘관인 우중문을 끈으로 묶은 채 후퇴하였다.

계속되는 수나라의 침입

수나라 양제는 613년에도 군대를 직접 지휘하여 요하를 건너 고구려를 침략하였다(수나라의 제3차 침입). 이때에도 최신식 무기를 이용하여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20여 일 동안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때에 본국에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잦은 전쟁으로 많은 목숨을 잃고 생활이 극도로 궁핍해진 수나라 백성들은 반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수나라 양제는 많은 무기와 군량을 남겨둔 채 어쩔 수 없이 본국으로 돌아와 가까스로 반란을 진압하였으나 백성들의 원성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러나 614년, 수나라 양제는 백성들의 원성을 뒤로한 채 또다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수나라의 제4차 침입). 수나라 군대는 비사성을 함락시키고 평양성을 공격하려고 하였으나 고구려가 수나라에게 강화를 요청해 마침내 두 나라 사이에 강화가 이루어져 전쟁이 끝났다. 수나라 양제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엄청난 인명과 물자를 잃게 되고 민심을 잃어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 속에서 결국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고구려가 승리한 이유는 단순히 군사력이 우수했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고구려는 상대방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전략의 우세를 통하여 사실상 승리를 쟁취했던 것이다. 그들은 수준 높은 금속 기술로 마구와 무기를 생산하여 중장기병을 육성했고, 빠른 기동력을 자랑하는 중기병은 적의 약점을 파고들어 적의 지휘 계통을 무력화시켰다. 여기에 고구려의 산성은 전술을 유리하게 펼칠 수 있도록 치와 옹성을 갖추고 있어 매우 견고하였다. 그리고 여러 산성이 서로 보완하는 모양을 취하고 있어 설령 하나의 성을 함락시킨다고 할지라도 남아있는 다른 성을 모두 함락시키지 않고는 고구려의 방어선을 뚫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고구려의 병사들은 만주 일대를 무대로 살아가면서 유목 민족을 능가할 정도로 말 타는 솜씨와 활 쏘는 기량이 매우 뛰어났다. 또한 병사들은 유격전, 성곽 방어전 등 모든 형태의 전쟁에 능숙하였다. 고구려의 승리는 이러한 여러 요소들이 결합된 국력의 결정판이었다.
라.관련자료

요동성

요동성은 북방의 백암성, 남방의 안시성과 함께 고구려 수비를 책임지는 최고의 요충지였다. 특히 요동성은 주몽의 사당이 있을 정도로 고구려의 중요한 정치적 중시지였다. 612년 수 양제가 이끈 백만 대군의 첫 공격 목표도 요동성이었으며, 살수 대첩으로 위축된 국력을 회복하려고 당나라가 군사력을 재집결시킨 곳도 요동성이었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를 침입할 때 요동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며, 고구려의 멸망 후 부흥 운동이 거세지자 당나라가 평양에 있던 안동 도호부를 옮긴 곳도 요동성이었다.
현재 요양 시내에는 8각 13층으로 높이가 71m나 되는 백탑이 세워져 있는데 현재의 백탑 근처가 요동성이 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 태자하를 해자로 삼아 평지에 세워진 요동성은 높이가 30미터나 될 정도로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고구려군은 요동성에 50만 석의 군량을 쌓아놓고 수나라 대군의 3개월에 걸친 공격을 잘 막아냈다. 수나라 대군은 이후에도 한번도 요동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비사성

비사성은 고구려 부여성에서 시작하는 고구려 천리장성의 끝자락으로서,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다. 비사성은 중국에서 평양에 갈 때 꼭 들러야 하는 교통의 요지로 역사적으로 많은 침략을 받은 곳이다. 비사성의 지명 유래는 ‘장성(長城)’이라는 뜻에서 나왔다.
614년(영양왕 25) 수나라의 내호아가 요동만에 상륙하여 비사성에 이르자 고구려군이 이를 맞아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당시에는 고구려와 수나라가 모두 전쟁에 지쳐 있던 시기였으므로 영양왕의 타협안을 받고 수양제는 뒤에 철군하였다. 그 뒤 645년(보장왕 4) 당나라 대군이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와 비사성을 공격하였다. 비사성은 삼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서문으로만 오를 수 있었는데, 치열한 전투 끝에 성이 함락되어 8,000여 명의 주민이 생포되기도 하였다.

을지문덕과 살수대첩

612년 수나라 양제는 수륙 113만명에 달하는 대군을 직접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요동성에서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전쟁은 지지부진한 상태에 빠졌다. 한편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기로 결정한 수나라는 우문술과 우중문의 지휘하에 30만 별동대를 압록강 서쪽에 집결시켰다.
이때 을지문덕은 적진을 엿볼 겸 거짓으로 항복할 의사를 표했다. 우중문은 앞서 수나라 양제에게서 영양왕이나 을지문덕이 오면 사로잡으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위무사 유사룡이 말려서 돌려보냈다. 우중문이 곧 후회하고 다시 오게 하려 했으나 을지문덕은 즉시 압록강을 건너 돌아왔다. 속은 것을 안 수나라군은 압록강을 건너 추격했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적군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음을 알아채고 하루에도 일곱 번 싸워 일곱 번 도망가는 등 거짓으로 패주하면서 적군을 더욱 피로하게 했다.
겨우 살수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까지 도착한 적군에게 을지문덕은 "신비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고 오묘한 계산은 지리를 다했다. 전쟁에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원컨대 족함을 알고 그침이 어떠랴"라는 5언시를 지어 보냈다. 그리고 다시 사람을 보내어 철군하면 왕을 모시고 조견(제후가 천자를 찾아가는 것)하겠다고 전했다. 적군은 거짓임을 알면서도 군량이 부족한 데다 군사들이 지쳐 고구려군을 이길 수 없다는 판단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을지문덕은 군사를 출동시켜 사방에서 적군을 추격하면서 살수에 도착한 적군이 강을 건널 때 맹렬한 공격을 가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압록강을 건너 요동까지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2,700명 정도였다고 한다.

인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