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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구려, 천하의 중심에 서다
가.연표
  • 342 모용황의 고구려 침입, 환도성 함락
  • 371 백제 근초고왕, 고구려 침입
  • 고국원왕 사망, 소수림왕 즉위
  • 391 광개토대왕 즉위
  • 400 신라에 군사 파견
  • 백제, 가야, 왜 연합군 섬멸
  • 410 동부여 정벌
  • 413 장수왕 즉위
  • 414 광개토대왕비 건립
  • 427 평양성으로 천도
  • 475 백제 개로왕을 죽임
  • 중원고구려비 건립
나.시대적 배경덕흥리 고분벽화 대행렬도 342년 선비족 모용황의 침략을 받은 고구려는 환도성이 함락당하고, 5천여 명의 백성이 포로로 잡혔다. 또한 고구려는 371년에는 백제 근초고왕의 침입을 받아 고국원왕이 사망하는 등 국가적인 위기를 맞았다.
고국원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은 먼저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고 내정을 안정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소수림왕은 율령을 반포하여 국왕 중심의 지배 체제를 정비하고, 태학을 만들어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불교를 공인하여 사상 통합을 이루는 등 전반적인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소수림왕의 노력에 의해 국가 안정을 이루고 내실을 다진 고구려는 앞으로 대외 팽창을 꾀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391년 17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광개토대왕은 영토 확장에 힘을 쏟았다. 광개토대왕은 소수림왕 때부터 다져진 기반을 바탕으로하여 중장기병과 수군을 양성하는 등의 준비를 하였다. 중장기병은 비늘 모양의 철조각으로 만든 갑옷으로 전사와 말을 모두 무장한 군대로, 그 모습만으로도 위압감을 주어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철조각이 여러 겹으로 겹쳐져 있는 갑옷을 입고 쏟아지는 화살 속을 무사히 뚫고 돌파할 수 있는 부대였다. 그렇게 강한 부대를 결성하는 한편 광개토대왕은 철과 말의 산지를 확보함으로써 중장기병의 비중을 크게 늘렸고, 고구려 군대는 명실상부한 최강군이 되었다.

광개토대왕의 정복전쟁과 영토 확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광개토대왕은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였다. 392년 광개토대왕은 직접 4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고구려 대군을 맞은 백제 진사왕은 고구려 왕이 어리다고 업신여기다 패배하여 임진강 주변의 10개의 성을 빼앗겼다. 진사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아신왕은 ‘숙부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다’는 불명예를 씻기 위해서 393년 고구려의 관미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한 달이 넘게 진행된 백제의 공격을 막아내고 결국 백제군은 군량이 떨어져 퇴각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396년 광개토대왕이 5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백제를 공격하여 50여 개의 성과 7백여 개의 부락을 점령하면서 백제의 도성 30리 지점까지 진격하자 백제의 아신왕은 광개토대왕에게 항복하였다. 광개토대왕은 395년, 3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요하 상류 지역에 살고 있던 거란족의 비려국을 정벌하기도 하였다. 이 정벌로 6~7백여 개의 비려국 마을을 점령하여 항복을 받은 후, 준마 수백 필과 양떼 천여 마리를 전리품으로 노획하였다. 그리고 400 년에는 신라로부터 왜구가 침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5만 명의 군대를 파견하여 신라군 5만 명과 함께 신라 해안에서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를 소탕하고 백제·왜·가야의 연합군을 격퇴하였다. 또 404년에는 황해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백제·왜 연합군을 격퇴하였다. 410년에는 동부여를 정벌하였다.
광개토대왕의 활발한 정복사업은 집안에 있는 광개토대왕릉비에도 잘 나타나 있다. 이에 따르면, 왕은 서쪽으로 후연 모용씨를 격파하여 오랫동안의 숙원이던 요동 진출을 이룩하였고, 동북으로 숙신을 복속시켜 만주를 차지했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정벌하고 서해안으로는 임진강, 중부지역으로는 한강 상류까지 진출한 것이었다. 특히, 왜의 침입을 받은 신라를 도와 왜군을 무찌르기도 했다. 일생 동안 그는 64성, 1,400촌을 정복했다고 한다.
이렇듯 국가가 전성기에 접어든 고구려는 당시 명실상부하게 동북 아시아 천하의 중심에 우뚝 서 있었다. 이제 그 영토는 동쪽으로는 책성(지금의 훈춘),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 북쪽으로는 북부여, 서쪽으로는 요하에 이르러 남북으로는 천리, 동서로는 2천 리에 이르는 광대한 것이었다.

장수왕의 남진 정책

413년 39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광개토대왕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왕위에 올랐다. 부왕의 위업을 계승한 장수왕은 98세까지 장수한 왕으로 재위기간만도 78년이나 되는데, 그는 국가 안밖으로 국력을 크게 신장시켜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427년에는 수도를 만주의 국내성에서 한반도 내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남하정책을 추진하였다. 주변국과도 외교를 다양화하여 남북조 북연과 후위, 몽고족 등 중국 대륙의 여러 나라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왜와의 관계 회복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점차 위협을 느낀 백제는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라와는 433년 나제동맹을 맺었다. 하지만 후위, 송나라와 좋은 외교 관계를 유지하는데 성공한 고구려 장수왕은 475년 3만 명의 대군으로 백제를 공격하여 7일만에 수도인 위례성을 함락시켜 개로왕을 죽이고, 8천여 명의 포로를 획득함으로써 선대 왕인 고국원왕의 원수를 갚았다. 이때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확보하여 대동강 유역의 풍부한 경제적 부를 누리고, 서해를 통해 중국의 남북조와 교통하면서 남으로는 백제와 신라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던 것이다. 이제 고구려의 영토는 한반도의 대부분과 요동지방, 그리고 만주까지를 아우르는 일대 제국이 되었다.

천하의 중심, 고구려

고구려는 백두산 줄기가 서쪽으로 뻗어 내려간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 유역의 졸본(환인)에 자리잡았다가 압록강 연안의 국내성(집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고구려는 평야지대가 적은 산악지대라는 자연적인 조건을 극복하고 대외적으로는 중국과 싸우면서 용맹하고 강인하게 성장하였다. 미천왕 때에는 낙랑군을 내쫓고 대동강 유역을 차지하는 동시에 대방군을 점령하고 북으로 진출하는 백제와 날카로운 대립을 하였다. 고국원왕 때에는 전연의 모용씨와 백제의 침입으로 위기를 겪게 되자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소수림왕은 율령을 공포하고 태학을 설립하고 불교를 공인하는 등 국가체제 정비에 주력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에 대외 영토 확장에 주력한 결과 5세기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동북아시아의 최강국으로서, 고구려는 어느 나라도 감히 넘볼 수 없는 동북아시아 천하의 중심이 되었다."
다.전개 과정

한군현 축출

고구려는 동천왕 이래 한동안 대외 국제 관계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미천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중국과의 관계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신성 방면의 방비를 강화하면서 302년 3만의 군사로 북쪽의 현도군을 공격하여 포로 8천여 명을 사로잡고 요동진출을 꾀하였다. 특히, 311년에는 요동진출을 본격화하고 요동군과 낙랑·대방과의 연결로를 차단하고 각개격파하고자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하였다.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는 313년 낙랑군을 공격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생포함으로써 낙랑 세력을 축출하였다. 이어 314년에는 대방군마저 멸망시켰다. 이로써 한사군이 설치(B.C. 108)된 이래 한반도를 420여 년 동안 잠식했던 낙랑군과 204년 공손씨에 의해 설치되어 110년간 존속해온 대방군을 소멸시켜 중국세력을 완전히 쫓아냈다.
이제 고구려는 태조왕 이래 열망해 오던 서해안으로의 진출과 낙랑 정벌을 성사시켜 서해안의 자유로운 해상 활동으로 경제, 군사적으로 급성장을 하게 되었으며, 만주 요동에서 서안평을 거쳐 한반도로 이어지던 중국세력을 차단하였다.
라.관련자료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비는 그의아들인 장수왕에 의해 414 년(장수왕 3년)에 세워졌는데, 능비의 서남쪽 약 200m 지점에 태왕릉이 있고, 동북쪽 약 1.3km에 장수왕의 분묘로 알려진 장군총이 있다. 광개토대대왕비의 높이는 6.39m이고, 네 면에 손바닥만한 크기의 글자 1,775자가 44행에 걸쳐 새겨져 있다. 이 가운데 150여자는 판독 불능의 상태다. 서체는 예서체인데, 여기에는 당시 고구려인들의 자긍심과 세상을 보는 눈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비석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처음은 하늘의 아들인 추모왕이 고구려를 세우기까지의 과정과 유리왕 및 대무신왕에 이르기까지의 왕위 계승을 새겨 놓았다. 두 번째로는 영토 확장과 관련한 광개토대왕의 치적을, 마지막에는 광개토대왕의 능에 대한 관리 제도를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은 광개토대왕이 하늘이 직계 자손이며 그를 왕으로 모시고 있는 고구려인들 또한 하늘의 자손임을 널리 알리고자 하였다. 이러한 고구려인들의 자부심을 잘 나타내주는 구절이 비석의 내용 가운데에 나온다. “태왕의 은혜는 황천(크고 넓은 하늘)에 미치고 위엄은 사해(온 세상)에 떨치었다.” 광개토대왕비 뿐만 아니라 모두루 묘지에서도 “천하사방 고구려가 최고의 성스러운 곳임을 알지니…”라는 구절이 나온다. 즉,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신이 선택하고 신의 아들이 다스리는 신성한 곳으로 여긴 것이다. 중원고구려비 중원고구려비는 장수왕이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남한강 유역의 여러 성을 공략하여 개척한 후 세운 기념비로 추정되고 있다. 1979년 입석마을 입구에서 발견되었는데, 오랜 세월이 흐르기도 했지만 비의 중요성을 몰랐던 동네 주민들이 우물가의 빨래판으로 사용하기도 하여 발견될 당시 비문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중원고구려비는 돌기둥 모양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4면에 모두 글을 새겼는데, 그 형태가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와 비슷하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앞면과 왼쪽 측면 일부만 읽을 수 있는 상태로, 내용 중 ‘고려대왕’이라는 글자가 보이는데 여기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뜻한다. 전체적인 내용은 고구려 영토의 경계를 표시하고 있는데,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함락하고 한반도의 중부지역까지 장악하여 그 영토가 중원지방까지 확장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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