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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무력투쟁
가.연표
  • 1920 6월 봉오동 전투
  • 1920 10월 청산리 대첩
  • 1940 9월 한국광복군 창설
다.전개 과정

청산리 대첩

청산리 대첩은 1920년 10월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을 주력으로 한 대한독립군 연합부대가 중국 지린성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 대부대와 10여 회의 대격전 끝에 격파하여 대승리를 거둔 전투이다.
봉오동 대첩 후 독립군의 사기가 충천해 있을 무렵, 일제는 소위 ‘간도지역 불령선인(不逞鮮人)초토계획’을 세웠다. 일제는 만주의 실권자인 장쭤린(張作霖)에게 독립군 탄압을 강요함과 동시에 1920년 10월 초 대규모 정규군을 투입시킬 구실인 ‘훈춘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일제는 약 2만에 달하는 일본군을 간도로 침입시켜 독립군을 초멸코자 하였다. 이에 독립군들은 상호 연락을 취해 일본군의 공격을 일시 피하기로 결정하고 백두산록 서쪽으로 진영을 이동키로 하였다.
청산리 대첩(靑山里大捷)은 이와 같이 간도침입과 독립군의 이동 상태에서 전개된 것이다. 백두산록으로 향하던 북로군정서·대한독립군 등 10여 개의 독립군단들은 1920년 10월 중순 허룽현(和龍懸) 2, 3도구(道溝) 일대에 모였다. 이러한 독립군들의 주둔지를 첩보원을 통해 파악한 일본군들은 약 5천 병력으로 이 지역을 공격해왔다. 따라서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여 일간 독립군과 일본군은 대대적인 혈투를 전개하였다. 전투가 일어난 계곡은 이주 한인들이 여러 마을을 형성하여 살면서 청산리 계곡이라 불렀다. 청산리 대첩이라 기록된 이 전첩은 백운평·완루구·천수평·어랑촌 등지에서 10여 회에 걸쳐 전개되었다.
결과는 재만 한인의 목숨을 아끼지 않은 지원 아래 불굴의 정신으로 전투에 임한 독립군의 대승리였다. 청산리 대첩은 일제 침략군과 독립전쟁을 결행해 민족자주독립의 역량을 입증한 빛나는 항일전이었다. 이렇게 하여 일본군의 간도출병작전을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게 하고 만주지방의 한국민족독립운동을 보위하는 커다란 역사적 역할을 수행했으며, 또 이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국내의 독립운동도 지켜준 커다란 역사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한민족에게 독립정신을 크게 고취하고 독립에 대한 확신을 더욱 고양시켜 주었다.

봉오동 전투

봉오동 전투는 중국 지린성(古林省) 허룽시 봉오동 골짜기에서 1920년 6월 7일 독립군을 추격해 들어온 일본군 1개 대대와 싸워서 승리를 얻은 전투이다.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군무위원회 등 세 군단은 연합사령부를 발족시킨 이후 보다 효율적인 독립전쟁의 수행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여러 유격대를 조직하여 국내의 온성·남양 등 두만강변에 설치된 일제의 국경수비대를 습격하는가 하면 더욱 깊숙이 침투하여 침략기관을 파괴하였다. 그와 함께 친일 부호들에게는 군자금을 징수해 그 자금으로 러시아령 연해주에서 다량의 무기를 구입하였다.
연합사령부의 이같은 활동에 불안을 느낀 일본군은 1920년 6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반격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을 사전에 간파한 독립군들은 간도의 허룽현 삼둔자(三屯子)에서 1차 접전을 벌여 크게 승리하고, 다시 왕청현의 봉오동(鳳梧洞) 골짜기로 일본군들을 유인하여 완전한 승첩을 거두었다. 봉오동 대첩이라 기록된 이 대첩으로 독립군들의 사기는 더욱 충천하여 이후 신명을 바친 항일전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한국광복군

한국광복군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창설한 군사조직이다. 1940년 9월 17일 중국 중경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직할 무장대오로서 창설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0년대 중국 관내를 전전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뤄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운영하며 군사양성에 힘을 기울여 왔다. 중·일전쟁(1937년)이 발발하자, 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전시체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였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군사정책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중국 정부와의 협의하에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던 것이다. 광복군은 창설 이후 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까지 편입하여 3개 지대와 각 전구 특파단·공작대를 편성함으로써 조직적인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임시정부는 즉각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중국군은 물론 영국군과 미국군과도 연합작전을 수행하여 인도와 버마(현 미얀마) 전선에까지 참전하여 일제와 투쟁하였다. 또한 포로심문, 정보수집, 선전전단 배포, 방송을 통한 심리전에도 주력하여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1945년에는 조국을 우리 손으로 되찾기 위하여 국내진공작전 계획을 세우고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협의하에 특수훈련을 실시하였다.
조국광복 후 한국광복군은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재외동포의 보호임무를 수행하다가 1946년 5월 복원선언서를 발표하고 영광스러운 독립전쟁을 끝내고 환국하였다.
라.관련자료

경신참변

경신참변은 1920년 10월부터 1921년 4월까지 서·북간도지역에서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한인 학살 사건이다.
1920년 6월 북간도의 봉오동에서 독립군에게 대패당한 일제는 그 보복으로 서북간도 지역에 근거지를 구축하고 항일전을 펼치고 있는 독립군들을 소멸시키기 위해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웠다. 이 계획에 의거 대병력을 간도지방에 침입시켜 수많은 한인을 학살함은 물론 학교·교회 및 가옥을 파괴하는 경신참변을 일으켰다. 서북간도 곳곳의 독립군 근거지는 물론이고 한인사회마저 철저히 수색하여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면 죽이고, 가옥은 방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 독립군도 가만히 앉아 일본군의 공격을 받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사전에 일본군의 습격을 감지한 독립군들은 그들의 근거지를 떠나 러시아 연해주로 병력을 이동시킨 후 후일을 기약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김좌진이 이끈 북로군정서, 홍범도가 이끈 대한독립군, 지청천이 이끈 서로군정서 등은 각기 자신들의 군단을 이끌고 근거지를 출발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1920년 10월 20일부터 약 10여 일간에 걸쳐 전개된 청산리 대첩이었다. 청산리 대첩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들은 더욱 광분하여 서북간도의 한인들에게 보복을 가하였다. 일본군들이 행한 대표적인 만행 몇 가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20년 10월 말 일본군 제14사단 제15연대 제3대 대장 오오카가 이끈 77명의 병력이 간도의 용정촌(龍井村) 동북 25리 지점에 위치한 한인마을인 장암동을 포위하여 마을 주민 전체를 교회당에 집결시켰다. 이 중 40대 이상의 남자 33명을 포박해 꿇어앉힌 후 일본군들은 짚단으로 교회 안을 가득 채운 후 석유를 뿌려 불을 질렀다. 교회당은 곧 화염에 충전하였으며, 불길에 휩싸인 한인들은 아우성을 치며 탈출구를 찾으려 안간힘을 다하였다. 그러나 일본군들은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이들을 총검으로 찔러 결국 모두를 몰살시켰다. 가족들이 넋을 잃고 울부짖다가 일본군들이 돌아간 뒤 숯덩이로 변해 버린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의 시체를 찾아 장사지냈다. 그런데 유족들의 비통이 채 가시기도 전인 5~6일 후 다시 일본군들이 이 마을에 찾아와 모든 유족들을 모아 놓고 무덤을 파 시체를 한곳에 모으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유족들은 어쩔 수 없이 일본군의 명령에 따라 언 땅을 파 시체를 꺼내 모았다. 일본군들은 이미 숯덩이 같이 검게 탄 그 시체들 위에 다시 짚단을 올려놓고 석유를 뿌린 뒤 불을 붙여 뼈만 남을 때까지 완전히 소각하였다. 이들 33인은 누가 누구인지를 분간할 수 없어 결국 가족들은 그 뼈로 합장 무덤을 만들어야만 하였다. 장암동의 이 같은 참변 외에도 한인의 참변은 허다하다. 그중에 옌지시 의란구 남동이란 곳은 30여 호의 이씨 성을 가진 한인들이 사는 곳이었는데 중국 성으로 변성한 3명을 제외하고 모든 촌민이 몰살당하는 참변을 겪어야 했다. 이 중 어느 4형제는 불타는 가옥 속에 한꺼번에 던져져 죽어 갔다. 또한 1920년 12월 6일에는 일본군 수십 명이 옌지시 와룡동에 살고 있던 교사 정기선(鄭基善)을 다른 곳으로 끌고 가 심문하면서 고문을 가했는데, 정기선이 얼굴 가죽을 몽땅 벗겨도 말을 듣지 않자 두 눈을 칼로 도려내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도록 만들었다. 또 옌지시 팔도구에서는 어린아이 4명을 칼로 찔러 죽였으며, 옌지시 약수동에서 살해한 시신을 다시 불에 태운 후 강물에 던졌다. 어느 지역에서는 부녀자를 잡으면 강간한 후 살해하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2~3세 되는 유아를 창끝에 꿰어 들고 울부짖는 비명을 들으며 쾌재를 부르는 사례조차 있었다.
일본군들은 이와 같이 한인을 살해했을 뿐만 아니라 가옥을 방화하여 태우고, 곡식과 가축에까지도 불을 질러 이후 한인의 살길을 완전히 박탈하였다. 국치 전후부터 민족주의교육기관으로 수많은 항일 민족운동자와 독립군을 양성하였던 명동학교도 일본군들에 의해 교사는 물론 기밀서류 및 도서가 소각되었다. 우스다(臼田) 중위가 인솔하는 22명의 일본군은 1920년 10월 20일 명동촌을 습격하여 마을을 폐쇄한 후 모든 주민을 명동학교 교정에 모아놓고 이 학교의 교장 김약연(金躍淵)은 항일의식이 강한 자로 이 학교를 통해 많은 독립군을 길러내고 있다고 으름장을 놓은 후 학교 전체를 불길에 휩싸이게 했던 것이다. 명동학교에 이어 명동교회 역시 일본군의 방화로 소각되고 말았다.
일제의 이같이 잔인한 한인사회 말살작전은 해가 바뀐 1921년 4월까지 계속되었다. 약 6개월 동안 계속된 악랄한 만행 끝에 살아남은 한인들은 산간오지로 피신하여 그들의 만행대상이 없어지자 일본군은 간도지역에 일부 잔여부대만 남기고 1921년 4월초부터 주력부대들은 철수시켰다.

김좌진 장군

김좌진(金佐鎭)은 1889년 음력 11월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金衡圭) 선생과 오숙근 여사 사이의 둘째로 태어났다. 김좌진은 유년시절 글공부보다는 활쏘기ㆍ말타기ㆍ전쟁놀이 등을 즐겨했으며, 삼국지와 수호지 및 군사학에 관련된 책자를 탐독하였고 무술연마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또한 계몽운동가인 김광호(金光浩)와 홍주의병장 김복한(金福漢)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다. 특히 김복한으로부터 구한말의병의 기본정신이라 할 의리정신과 민족수호정신을 배웠는데, 이것은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그는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앞서 국권회복운동에 노력하였다. 즉 김좌진은 집안에서 거느리고 있던 30여 명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노비들에게 전답을 무상으로 분배한 이후 상경하여 무관학교에 입학하여 정식 군사교육을 배웠다. 1905년 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홍성으로 귀향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는 한편으로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홍주지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등 교육운동과 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경술국치 이후 군자금 모금과 대한광복회 활동 등 직접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