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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의열투쟁
가.연표
  • 1909 10월 안중근의사 하얼빈에서 이토 저격
  • 1932 1월 이봉창의사 일황 저격
  • 1932 4월 윤봉길의사 홍구공원에서 폭탄 투척
다.전개 과정

안중근 의사

의사는 1879년 9월 황해도 해주읍 광석동에서 아버지 안태훈(安泰勳)과 어머니 조씨(趙氏) 사이에서 3남 1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세가 되던 1886년부터 의사는 유교경전과 조선역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무예를 익히는데도 관심을 가져 12세가 되던 해부터는 말타기와 활솜씨가 묘기를 부릴 정도가 되었으며, 13세때에는 단총을 들고 포수들을 따라 수렵에 나서 명사수로 이름을 얻기도 하였다. 16세인 1894년에는 김아려(金亞麗, 당시 17세)와 혼인하였으며, 3년 후인 1897년에는 토마스란 영세명을 받고 천주교인이 되었다. 안 의사가 이 같이 성장하고 있는 동안 조국은 외세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와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되었고, 1905년 「을사늑약」의 강제체결로 급기야 망국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에 선각자인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부터 조국의 현실을 직시했던 의사는 1905년 말, 구국의 방책을 도모하기 위해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갔다. 상해에서 의사는 유력 한인과 외국인 신부들을 만나 조국을 구할 수 있는 여러 방책을 제시하며 그들의 도움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1906년 1월 부친의 부음소식을 접하고 귀국해야만 했다.
귀국 후 의사는 서우학회(西友學會: 뒤에 서북학회로 개칭)에 참여해 활동하는 한편, 삼흥학교(三興學校)·돈의학교(敦義學校) 등을 설립해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또 1907년 초 전국적으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 관서(關西)지부를 설치해 이 운동을 주도적으로 전개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 이 같은 활동을 벌인 후 의사는 1907년 가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그리하여 1908년 초 연추(煙秋,노우키에프스코에)를 근거로 약 300명 규모의 의병부대를 조직하였다. 이 의병부대의 총독에는 김두성(金斗星)이 추대되었고, 총대장은 이범윤(李範允)이, 안 의사는 참모중장을 맡았다. 의사는 이 부대를 이끌고 그 해 6월 국내진입전을 전개하여 함경북도 경흥군에 주둔하는 일본군 부대를 습격해 수명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첫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7월에는 경흥 부근의 신아산으로 진입하여 일본군을 섬멸하는 한편, 10여 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의사는 이들 포로들을 만국공법(萬國公法)에 의거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석방하였다. 그러나 석방된 일본군 포로들에 의해 의병부대의 위치가 알려지면서 그들의 급습을 받아 오히려 대패당하고 말았다. 의사는 단 3명의 병사만 이끈 채 연추의 본 거지로 돌아왔다.
귀환 후 의병부대의 재건을 도모하였으나, 그의 포로 석방을 문제 삼은 한인 청년들이 호응하지 않아 성사시키지 못하였다. 비록 의병부대를 재건하지는 못했지만, 의사는 그럴수록 더욱 조국을 구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따라서 그는 1909년 1월 동지 11명과 구국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맹세하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을 맺었다. 의사의 약지가 잘린 모습(手形)은 이때의 단지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러한 때,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오가 만주를 시찰하러 온다는 소문이 들렸다. 이에 의사는 그를 처단할 결심을 하였고, 우덕순(禹德淳)과 사전 계획을 세운 후 조도선(曺道先)과 유동하(劉東夏) 등을 동지로 가입시켰다. 의사는 신중히 검토한 후, 만약 이토오가 탑승한 기차가 하얼빈으로 오는 철로의 교차역인 채가구(蔡家溝)에 정지하면 그 곳에서 거사가 이루어지도록 우덕순과 조도선을 배치하고, 이 계획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자신은 하얼빈 역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유동하는 통역과 두 공격 지점 사이의 연락을 담당케 하였다.
채가구에서 1차 거사는 이루어지지 않고,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이토오를 실은 기차가 하얼빈 역에 도착하였다. 이토오는 환영나온 러시아 재정대신 코코프쵸프화 약 30분간 대담을 한 뒤 플랫폼으로 나와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그 순간 의장대 후방에 있던 의사는 뛰쳐나가며 8연발 권총으로 이토오를 조준해 네발을 발사하였다. 세발이 정확하게 명중되어 이토오는 쓰러졌다. 이어 의사는 쓰러진 자가 이토오가 아닐 수도 있다는 판단 아래 수행원 중 의젓해 보이는 자들을 향해 다시 세발을 연이어 발사하였다. 이 사격으로 이토오를 수행하던 가와가미[川上] 하얼빈 총영사·다나까[田中] 만철(滿鐵] 총재 등 4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그리고 이토오는 기차안으로 옮겨져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30분 후에 절명하였다.
의거 후 의사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만세]""를 연창한 후 피체되었다. 이어 일본영사관으로 호송되었다가 여순(旅順)에 있는 일제의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으로 송치되어 심문과 재판을 받았다. 재판정에서 의사는 ""나는 한국의 의병이며 지금 적군의 포로가 되어 와 있으므로 마땅히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라고 주장하며 남아로서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사의 정당한 발언은 묵살되었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여순감옥에서 일제에 의해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이봉창 의사

이봉창의사는 1900년 8월 10일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에서 효녕대군(孝寧大君) 후손인 부친 이진규(李鎭奎)씨와 모친 밀양 손씨(密陽孫氏) 사이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인이 경영하는 제과점 종업원으로 취직했으나 주인으로부터 가혹한 학대를 받게 되었고, 자리를 옮겨 남만(南滿)철도회사 용산정거장에서 운전견습을 했으나 역시 일본인 직원들로부터「조센징」이라는 참을 수 없는 수모와 설움을 받았다. 여기서 이봉창은 부모나 이웃 그리고 자신이 받은 민족적인 수모와 설움이 모두「나라를 일본에 빼앗겼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된다.
「적을 이기기 위해선 적을 알아야 한다」는 결심을 한 그는 철도원 생활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을 전전하며 일어(日語)를 익히는 한편, 상점점원이나 철공소직공·잡부역·날품팔이 등으로 직업을 바꾸면서 일인생활을 익혔다. 이렇게 6년여의‘일본습득(日本習得)’을 마친 후 독립운동 본거지인 상해로 옮겨왔다. 능숙한 일어를 바탕으로 일인상점에 취직, 임시정부청사와 거류민단 출입의 기회를 잡는다.
당시 임시정부 직원들이 기노시타라는 일인식 이름을 쓰는 한국인을 의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같은 사실은 백범에게 전해졌고 임시정부사무원인 김동우(金東宇)를 시켜 면밀히 관찰하게 하였다.
이봉창이 단순한「건달」이 아님을 간파한 백범은 여러차례 비밀리에 면담을 갖고 이 과정에서 김구는 이봉창의 투철한 애국심과 확고한 독립사상에 큰 감명을 받아 신임하게 된다.
이후, 김구선생과 이봉창 의사는 1년여의 준비 기간동안 폭탄준비, 여비 마련을 하여 때를 기다리게 되었다. 마침내, 김구선생은 중국 공병창에서 폭탄 1개와 하남성 유치(劉峙)에게서 얻어 온 폭탄 1개를 구하였다. 한 개는 일본국왕의 처단용이었고, 하나는 이봉창의 자결용이었던 것이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김구 선생은 1931년 12월 6일 프랑스 조계의 임시정부판공서에서 개최된 국무원회의에 이 거사 준비계획을 정식 상정하였다.
12월 12일, 프랑스 조계 중흥여사(中興旅舍)로 이봉창의사를 초치하고, 마지막 거사 계획을 완료하였다. 12월 13일 이봉창 의사는 정식으로 한인애국단에 입단을 하고 선서문을 낭독하였다. 수류탄 2개와 거사금을 건네 받은 의사는 안중근의사의 동생 안공근의 자택에서 역사적인 기념식을 마치게 되었다.
일인으로 가장하고 12월말 일국으로 건너간 선생은 이듬해 1월 8일 일본국왕이 도쿄 요요기 연병장에서 거행되는 신년 관병식(觀兵式)에 참석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해의 백범에게 『물품은 1월 8일 방매하겠다』는 암호전보를 보냈다.
예정대로 수류탄은 일왕에게 던져졌으나 불행히도 명중되지 못하고 궁내대신(宮內大臣)의 마차만 뒤집어 놓았다. 의사는 현장에서 피체되어 동경의 인고쿠(印谷)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의사는 형무소에 수감된지 9개월이 지난 10월경,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32년 10월 10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당시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에서는 이봉창의사의 의거를 기념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의사의 의거를 동경폭탄사건의 진상이라는 제목으로 전세계에 공표하였다. 비록, 일왕의 처단을 이루지 못하였을지라도 의사의 그 의거는 윤봉길의 상해 홍구공원 의거로 이어졌고, 한·중협력의 새로운 관계를 통한 독립운동 진작에 큰 활력소가 되게 한 커다란 의열투쟁이라 할 수 있다. 선생의 유해는 1946년 7월 고국으로 모셔져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윤봉길 의사

윤봉길은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윤황과 김원상을 부모로 모시고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명은 우의(禹儀) 봉길은 별명이며 호는 매헌이다.
11세때인 1918년 덕산보통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독립운동의 함성고 함께 학교를 자퇴하고 이후 1921년 매곡(梅谷) 성주록(成周錄)의 문하에 들어 오치서숙(烏峙書塾)에서 한학 수업을 받았다. 전통교육을 받으면서도 당시 민족잡지인「개벽(開闢)」등을 구독하며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하여 갔다.
1926년 서당에서 수학하던 중 농촌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었다. 당시 윤봉길은 19세였다. 우선 자신의 집 사랑방에서 인근 학동들을 가르치다가 학생들이 늘어나자 야학당을 개설하여 한글 교육 등의 문맹퇴치와 민족의식의 고취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밖에도 1927년「농민독본(農民讀本)」3권을 저술하여 본격적인 농촌개혁의 실행에 착수하였다.
1928년에는 부흥원(復興院)을 세워 구체적인 농촌개혁을 실시하였는데 그 주된 사업은 농가부업장려 등의 증산운동과 공동판매 공공구입의 구매조합 설치, 토산품(국산품) 애용과 일화배척(日貨排斥), 생활개선 등이었다. 이듬해에는 월진회(月進會)를 조직하여 농촌개혁운동을 추진할 중심인물들을 규합하였고 위친계(爲親械), 수암체육회(修岩體育會) 결성을 통한 친목, 체력향상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윤봉길은 1930년 3월 6일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1931년 중국 상해에 도착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주시하며 조국독립을 앞당길 수 있는 길을 찾던 중 마침내 임시정부 국무령 백범 김구 선생을 만나게 된다. 백범과 윤봉길은 의열투쟁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던 중“1932년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 경축식과 합동으로 상해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다”는 상해 일일신문의 보도에 접하게 된다. 드디어 기회를 맞은 것이다.
이를 위해 치밀한 준비가 진행되었다. 의거 3일전인 4월 26일 윤봉길은 백범 선생이 주도하던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여 선서를 하고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현 노신공원)을 답사하여 거사에 만전을 기하였다.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경 홍구공원에서 축하식 중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윤봉길은 수통형 폭탄의 덮개를 벗겨 안전핀을 뽑아 사람을 헤치고 나아가 단상위로 투척하였다. 폭탄은 그대로 야촌과 중광의 면전에서 폭발, 천지를 진동하는 굉음을 내고 식장은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이 의거로 백천과 하단은 사망하고 야촌 중장은 실명, 육군중장 식전은 다리를 절단하였으며 중광은 절름발이가 되고 촌정과 우야(友野)도 중상을 입었다.
윤봉길의 이 쾌거는 곧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특히 중국의 장개석 총통은 이 의거에 감격하여 종래 무시로 일관하던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여 군관학교에 한인 특별반을 설치하는 등 비로소 한국인의 독립운동이 갖는 의미를 인정하게 되었다. 또한 한동안 침체일로에 있던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것도 윤봉길의 이 의거에 힘입은 바가 컸다.
피체된 윤봉길은 가혹한 고문 끝에 그해 5월 28일 일제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32년 12월 19일 순국하였다.
윤봉길의 유해는 일제에 의해 쓰레기 처리장에 방치되었다가 광복 후인 1946년에 조국에 환국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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