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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만세운동
가.연표
  • 1919 고종, 덕수궁에서 승하. 일본 동경유학생 6백여명,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독립선언서 발표(2.8 독립선언).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서 낭독. 서울 파고다공원을 시작으로 독립요구시위 계속되어 각지에 파급(3.1 독립운동).
           유림대표 17인, 김창숙으로 하여금 독립청원서를 파리에 보내게 함(파리장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
           국내 13도 대표, 인천만국공원에서 국민대회의 이름으로 한성임시정부 조직.
           김규식,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 제출.
  • 1923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 1926 김영진 등, 상해일본영사관에 투탄.
           6.10.만세운동 일어남.
  • 1928 조명하, 대만에서 일황족 저격에 실패하고 체포됨.
  • 1929 광주학생운동 일어남.
다.전개 과정

2·8 독립선언서

2·8독립선언서는 도쿄(東京) 유학생들이 1919년 2월 8일 조선청년독립당(朝鮮靑年獨立黨) 명의로 발표한「독립선언서」이다. 이광수(李光洙)가 기초하였는데, 「3·1선언서」의 기본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선언서 600매, 청원서 1,000매를 인쇄하여, 선언서를 소지하도록 한 후 송계백(宋繼白)을 서울에, 이광수를 상하이(上海)에 파견하였다. 선언서는 이념과 사상을 선언과 결의문의 형태로 천명하였다.
선언서에서는 첫째, 조선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민족의 실질적 지배를 받은 경우가 없는 민족이라고 선언하고, 미국과 영국이 일제의 조선 침략을 승인한 것을 비판하였다. 둘째, 침략의 부당성과 한국병탄 후 10년간의 식민통치를 비판하고 조선독립의 당위성을 피력하였다. 셋째, 국제적인 환경을 볼 때, 일제가 지금까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구실로 한반도에 들어왔던 일이 있었을지라도 자신만의 안정을 위하여 한반도를 점령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넷째, 일제가 한반도에 대한 식민통치를 계속한다면 일제에 대해 우리 민족은 영원히 투쟁할 것이며 결국은 ‘동양평화의 화원(禍源)’이 될 것이라고 일본에 경고하였다. 다섯째, 선언서는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모범을 따라서 신국가를 건설하고 반드시 세계평화에 공헌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특히 선언서는 당시의 정세 속에서 기본적인 보편적 세계사의 발전 과정에 따라서 새로운 국가건설의 현실적 요구와 필요를 담아냈으며 독립의 당위성을 국내외에 선전하였다. 결의문은 조선청년독립단 명의로 선명하게 현실적인 행동강령을 천명하였다. 우선 한국병탄이 우리 민족의 자유의사가 아니고, 우리 민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협하며 동양의 평화를 교란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독립을 주장한다고 전제하고, 일제의회와 정부에 조선민족대회를 소집하며 만국평화회의에 민족자결주의 적용 요구와 아울러 실패할 때에는 일제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할 것을 선언하였다. 여기에 표현되어 있는 민족주의사상은 명확히 민족자결·민족생존의 권리에 의한 자유와 독립을 주장하고, 그것을 위해 혈전까지도 선언한 혁명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2·8독립운동은 강경한 입장에서 끝까지 투쟁을 전개할 것을 결의한 민족운동이다. 아울러 「2·8선언서」는 국제정세에 대한 탁월함이 보임과 동시에 미국·러시아 등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민족대표 33인

천도교와 기독교는 1919년 3·1운동의 준비단계에서 민족 대연합전선 형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독립선언서의 작성은 천도교 측의 독립선언서 원고 지침에 따라 최남선이 기초하였다.
독립선언서의 인쇄는 천도교 측의 오세창(吳世昌)이 총책임을 담당하고, 천도교 직영의 인쇄소인 보성사 사장 이종일(李鍾一)이 담당했다.
독립선언서의 배포는 오세창의 총책임 아래 천도교, 기독교, 불교, 학생단 등으로 분담하였다. 독립선언서는 그 자체가 독립만세시위를 지시하는 기능과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따라서 적어도 독립선언서가 사전에 배포된 범위까지는 초기 조직단계의 활동가들에 의하여 3·1운동이 사전 조직화된 범위라고 볼 수 있다. 독립선언서가 사전에 배포된 지역은 서울, 평양, 선천, 원산, 개성, 서흥, 수안, 사리원, 해주, 대구, 마산, 전주, 군산 등이었다. 민족대표의 선정은 교단별로 추천을 받았다.
천도교 측에서는 손병희(孫秉熙), 권동진(權東鎭), 오세창, 임예환(林禮煥), 나인협(羅仁協), 홍기조(洪基兆), 박준승(朴準承), 양한묵(梁漢默), 권병덕(權秉悳), 김완규(金完圭), 나용환(羅龍煥), 이종훈(李鍾勳), 홍병기(洪秉箕), 이종일·최린(崔麟) 등 15명이 선정되었다. 기독교측에서는 이승훈(李昇薰), 박희도(朴熙道), 이갑성(李甲成), 오화영(吳華英), 최성모(崔聖模), 이필주(李弼柱), 김창준(金昌俊), 신석구(申錫九), 박동완(朴東完), 신홍식(申洪植), 양전백(梁甸伯), 이명룡(李明龍), 길선주(吉善宙), 유여대(劉如大), 김병조(金秉祚), 정춘수(鄭春洙) 등 16명이 선정되었다. 불교측 대표로는 한용운(韓龍雲)과 백용성(白龍城)이 서명·날인했다.
3·1운동은 민족 대표들의 계획, 추진과 전 민족의 참여로써 거족적인 독립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민족 대표들은 일제의 삼엄한 감시 아래에서도 3·1운동을 계획하고 조직하였으며, 독립 선언서를 제작하고 배포하였다. 이로써 민족 대표들은 3·1운동을 점화하는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민족 대표들은 3·1운동을 추진함에 있어 확고한 신념의 독립 정신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민족 대표들의 독립 의지는 일제에 대한 재판 과정에서 잘 나타났다.
손병희는 법정에서 “일본이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을 때에는 언제까지라도 계속하여 독립 운동을 수행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런가 하면 한용운은 “금후에도 독립운동을 할 것인가?”하는 일본인 재판장의 질문에 “그렇다. 언제까지라도 그마음을 고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몸이 없어진다면 정신만이라도 영원토록 가지고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민족대표들의 이와 같은 말은 당시 한국 민족의 독립 의지를 잘 대변한 것이다.

6·10만세운동

1926년 5월 20일 이병립·이선호 등 ‘조선학생과학연구회’간부들은 40여 명의 학생들을 모아놓고 순종의 인산일을 맞아 일대 시위운동을 일으키기로 결의하였다. 이들은 여러차례 투쟁계획을 숙의한 후 6월 8일 경 연세대 뒷산 송림정에서 시위에 사용할 태극기 60여 매를 제작하였으며, 그날 밤 이석훈(李錫薰 : 연희전문)의 집에 모여 격문을 인쇄하는 등 준비를 하였다. 이날 인쇄된 격문은 어렵게 구한 명함 인쇄기로 만들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2천만 동포야, 원수를 몰아내자. 피의 값은 자유이다. 대한독립만세!”라는 짤막한 것이었다. 이들은 김인오·권오상 등 학생대표자들에게 전단과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학생들을 동원하도록 했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중앙고보생 이동환·박용규·곽대형 등과 중동학교생 김재문·황정환 등의 학생들(통동계)도 거사를 모의하였다. 이들은 5월에 준비를 착수하여 각 학교별 축구시합을 위장하고 동지 50여 명을 규합하였다. 그리고 5월 29일 “조선민중아! 우리의 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라는 격문을 등사판으로 인쇄하였다. 이들 중에는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 참여한 것으로 보이는 학생도 있어, 두 조직은 사전에 서로 접촉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이나 비밀유지 등을 위하여 별도로 거사를 준비하고, 시위도 각기 장소를 나누어 독자적으로 거행하였다.
학생들은 이러한 준비작업 끝에 6월 10일 순종의 인산행렬이 서울 시내를 지나가는 것에 맞추어 시내 요소요소에서 산발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는 오전 8시 반 경 대여(大與)가 단성사 앞을 지나가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간부 이선호의 선동으로 중앙·중동고보생 30·4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 격문을 살포하면서부터 시작하였다. 연도에 늘어선 수백명의 학생들은 일제히 만세를 불렀으며 일반 대중들도 만세를 부르며 동조하였다. 이를 필두로 순종의 장례행진에 맞추어 길목길목에서 잇달아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터져 나왔다. 관수교 남쪽 부근에서는 이병립·박하균의 선동으로 연희전문학생 50여 명이 만세를 불렀고, 을지로·훈련원·동대문으로 만세시위가 이어졌다. 오후 2시 20분 경 장례행진이 동묘(東廟)부근에 다다르자 박용구, 이동환, 관대형, 황정환 등 이른바 통동계열의 학생들이 격문을 살포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순종의 인산일을 맞아 벌어진 만세시위는 이 소식이 전국에 알려지자 고창·순창·정주·군산·울산·평양·홍성·공주 등지로 파급되었고, 당진·홍성·강경·전주·하동·이원에서는 학생들이 여기에 동조하는 동맹휴교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6·10만세운동으로 5천여 명이 연행되었고, 시위행진을 저지하는 일제의 야만적인 폭행으로 160명의 중·경상자가 났다. 한편 이 운동으로 서울에서 검거된 학생은 210 여 명에 이르렀으며 수많은 학생들이 이 일로 무기정학 등의 징계를 받아야 했다.
6·10만세운동은 거의 전적으로 학생들이 주동이 되어 일어났다. 학생들이 이러한 거사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1920년대 독자적인 학생단체의 설립과 잇따라 전개된 동맹휴학 등 그 동안에 이루어졌던 학생운동의 성과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되는 바는 이 운동과정에서 1920년대 국내에 전파된 사회주의계의 영향력이 상당히 작용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당시의 사회주의운동은 민족주의운동과 명확히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학생들의 격문이나 국호에서도 사회주의적 색채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러한 면에서 6·10만세운동은 내부의 이념적 편차가 없지 않았겠지만 이전의 민족주의운동의 틀과 양상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광주학생 항일운동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1월 광주에서 촉발, 해를 넘겨 전국으로 파급되고, 만주·일본 등지에도 영향을 미친 학생들의 일련의 가두시위, 동맹휴교 운동을 지칭한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광주학생운동의 도화선이 된 한일학생의 충돌이 일어났다. 이 날 충돌은 학생들이 통학하는 열차가 나주역에 도착하였을 무렵 일본인 학교인 광주중학생이 광주여자고보 한국인 여학생의 댕기머리를 잡아다니며 희롱하자 광주고보생이 이를 제지하고 나섬에 따라 시작되었다. 이미 광주고보생과 광주중학생은 여러 차례 충돌한 경험이 있었고, 이 사건을 둘러싸고 또다시 경찰이 편파적인 수사를 하자 광주고보생들은 분개하기 시작하였다.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보생들은 일제히 거리로 몰려나와 일대 시위운동을 단행하였다. 일요일인 이 날 등교해서 오전에 명치절 행사를 마친 학생들은 시내로 나와 한·일 학생간의 충돌사건을 왜곡보도한 광주일보를 습격하고 시내 곳곳에서 일인 학생들과 충돌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시위에는 광주농업·광주사범학교 학생들도 합류하였는데, 학생들은 ‘조선독립만세’,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를 외치면서 시내를 활보하였다. 시민들도 여기에 합세해서 시위대는 약 3만 가량이 되었다고 한다.
광주의 학생운동은 일제의 언론통제로 신문에 잘 보도되지 않았으나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면서 시위는 불길처럼 전국으로 번져갔다. 학생시위는 11월에 목포·나주 등 전남 인근지역으로 확산되었고, 12월에는 가장 많은 학생들이 모여있는 서울로 파급되었다. 서울에서는 12월 2일과 일 여러 학교에서 학생들과 일반민중의 총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이 살포되었으며, 5일에는 제2고보 학생들이 동맹휴교와 함께 가두진출을 기도하였고, 7일에는 제1고보와 경신·중동학교에서 동맹휴학이 일어났다. 이러한 술렁임 속에서 마침내 12월 9일 서울의 학생들은 대대적인 항일 시위를 단행하였다(제1차시위). 이후 10일에서 13일까지 시위항쟁의 여파로 서울시내 각 학교에서는 잇따라 맹휴가 일어났다. 이에 일제 당국은 12월 13일 조기에 동계방학을 실시하여 학생들의 시위를 잠재우려 했다.
방학으로 잠시 휴지기에 들어갔던 학생운동은 해를 넘겨 1930년 1월 개학이 되자 다시 불붙기 시작하였다. 1월 15일 서울시내의 각급 학교생 5천여 명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내로 쏟아져 나와 시위를 단행하였다(2차시위). 특히 이날 시위에는 이화여자고보·경영여자상업·숙명여자고보·진명여자고보 등 여학생들이 대거 진출한 것이 특징이었다. 1930년 1월과 2월의 학생시위와 동맹휴교는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곳곳의 학생들이 밀집되어 있는 거의 모든 도시로 확산되었다. 전국 곳곳에서 학생들은 시위행진과 격문배포, 동맹휴교 등을 전개하였다.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한 학교는 무려 149개 교였으며, 참여 학생수는 약 9만2천 정도였으니 당시 학생들의 참여 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준다 할 것이다.
광주학생운동은 학생독립운동사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시가행진을 벌인 것은 광주학생운동이 처음은 아니었다. 3·1운동 때에도, 6·10만세운동 때에도 학생들의 시위행진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의 학생층은 하나의 대중운동으로서 조직되고 자각된 상태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소수의 자각된 선구자로서 나왔을 따름이었다. 따라서 이때의 동원 양상은 학생대중을 결집하여 학생이라는 사회계층을 글어 들이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광주학생운동은 이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학생층은 동맹휴교 등을 통해 자신의 일상적인 삶의 문제를 바탕으로 학생대중을 자각시키고 조직화시켰고, 이것을 바탕으로 학생층을 하나의 대중운동의 역량으로 결집하여 민족운동의 대열에 합류하고, 나아가 이를 선도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은 이처럼 소수의 자각된 학생층의 움직임이 아니라 학생대중의 항일운동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를 부여받을 수 있다.
라.관련자료

기미독립선언서

기미 독립선언서는 1919년 3월 1일 서울 인사동 태화관에서 33명의 민족대표 명의로 발표한 「독립선언서」이다. 제목은 「선언서」로 되어 있으며,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기초하였다. 3·1운동기에 나온 여러 종류의 「독립선언서」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다. 「3·1독립선언서」또는 「민족대표독립선언서」라고 부르기도 한다.
1919년 미국 대통령 T.W.윌슨의 민족자결주의원칙이 발표되자, 일제의 통치 아래에 있던 한국의 민족지도자들은 이 기회를 포착, 각각 독립운동의 본격적 추진계획을 세웠다.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의 천도교측 중진들은 독립운동의 실천방법으로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국권반환요구서 등을 작성하기로 하고, 또 거족적 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이승훈(李昇薰) 등 기독교측과 한용운(韓龍雪) 등 불교측과 연합하였다. 이렇게 하여 작성된 독립선언서는 천도교측 15명, 기독교측 16명, 불교측 2명 등 33명이 민족대표로서 서명하였다.
「독립선언서」인쇄는 오세창의 책임하에 천도교에서 경영하는 보성사(普成社) 사장 이종일에게 맡겼다.
이 선언서는 종교교단과 학생대표들을 통하여 사전에 전국으로 전달, 배포되었으며 서울 광무황제 국장에 참여한 수만 명의 지방인사들에 의해 지방으로 전파되는 등 거족적 3·1운동의 전개에 결정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이 독립선언서는 인도주의에 입각한 비폭력적·평화적 방법으로 민족자결에 의한 자주독립의 전개방법을 제시하였다.
독립선언서는 우리 민족의 독립선언과 독립의 역사적 · 원리적 당위성을 당당하게 밝혔다. 제1소절 6행에서는 우리나라의 국가적 독립과 우리 민족이 자주민임을 선언하였다. 제2소절 4행은 일본제국주의 식민치하에서의 피해를 열거하며, 일본제국주의의 본질이 구시대적이며 침략주의 · 강권주의로, ‘신천지’로 대변되는 새시대, 즉 도의의 시대와 대비시켰다. 제3소절 6행은 독립의 필요성과 그 방법에 관한 내용으로서, 시간적으로는 과거(구래의 억울 선양) · 현재(현재의 고통 파탈) · 미래(장래의 협위 삼제)를 통하여 주체 단위별로 민족(민족적 양심 흥분 신장) · 국가(염의의 신장) · 개인(인격의 발달) · 자제(고치적 재산 불유여), 자자손손(경복)을 위해 독립이 필요한 것, 그리고 방법으로는 개개인이 결의를 품고 정의와 인도라는 정당성을 확신하며 나아감으로써 달성할 수 있음을 밝혔다. 공약3장은 행동강령을 담고 있다. 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은 당시 한국사회의 신흥종교였던 천도교계 15명, 기독교계 16명, 불교계 2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림과도 연결이 시도되었으나, 촉박한 시일 때문에 참여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유림들은 따로 유림단의 파리장서라고 일컬어지는 「증파리평화회의서」가 작성되어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통해 파리강화회의에 전달되었다.

제암리

제암리는 1919년 3·1운동 때 수원군(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 감리교회에서 3·1운동 탄압의 일환으로 일제가 저지른 주민 학살사건이 일어났던 곳이다. 일제는 주민들을 교회에 감금하고 총격을 가하며 방화하여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24명을 사망하게 하고 일대 주민들에 대해 살육과 방화를 자행하는 등 국제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제암리 주민 대부분은 천도교와 감리교 신자들이었다. 동학농민운동 이전에 이 지역에 동학이 포교되어 동학신자가 많았고, 감리교는 1905년 아펜젤러(Appenzeller, Henry Gerhard)의 전도에 의해 안종후가 입교함으로써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3·1운동 이 일어나자 제암리 감리교 신자인 안종후와 장안 우정면 시위운동을 주도한 백낙렬, 고주리 김홍렬의 동생 김성열 등은 서울에 올라가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김홍렬은 수촌에 있는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교사, 수촌리 구장과 장안면의 구장회장을 겸하면서 고주리 천도교 전교사였다. 이들은 천도교 순회교사 안종린과 전교사 안종환을 3월 16일 수원으로 보내 중앙총부에서 내려온 이병헌을 만나게 했다. 수원에서 이들은 일제 소방대원의 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제암리에 내려오는 것을 제암리에 살면서 주민들을 감시하던 순사보 조희창에게 목격 당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제암리 주민들을 인근지역 격렬한 시위운동의 중심으로 주목받게 되었다. 4월 1~2일 인근지역 산위에서 일제히 봉화시위가 있었고, 4월 3일 장안면 우정면 주민들의 격렬한 만세시위, 4월 5일 발안장 시위 등 시위운동이 이어지며 관공서 파괴·방화·순사 피살 등 시위의 양상이 다른 곳과 달리 격렬하였다. 이에 4월 15일 조선주차군 보병 제20사단 제79연대 아리다(有田)중위가 이끄는 수비병 11명이 오후 3시 반 발안장을 출발하여 제암리에 들이닥쳤다. 그들은 주민들에게 15세 이상 남자들은 다 제암리 감리교회당 안으로 모이도록 하였다. 주민들은 거듭된 탄압에 그들이 미안하여 주민들에게 위무연설을 하려나보다 하고 교회당에 모여들었다. 주민들이 모여들자 수비대는 교회당을 포위하고 출입구와 창문을 못으로 박아 도망가지 못하게 한 다음 무차별한 사격을 가하였다. 안종환은 어린 아들을 안고 교회당으로 들어갔다가 어린 것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으나 일본군은 어린 아이를 군도로 내리쳐 참살하였다. 이어 교회당에 불을 질렀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안종엽과 김정헌이 교회당 흙벽을 뚫고 사력을 다해 도망하였으나 수비대의 총탄을 맞고 즉사하였고, 안경순도 뒤이어 도망가자 수비대가 쫓아가 칼로 목을 쳐서 죽였다. 초가집이었던 교회당은 순식간에 화염에 휩싸였다. 수비대는 교회당 뿐만 아니라 마을을 돌며 민가에도 방화를 하여 33채의 집중에서 31채가 모두 불에 타 잿더미가 되었다. 교회당 안에서는 오직 노경태 한 사람만 구사일생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1982년 제암리 학살현장의 유적은 사적 제299호로 지정되었다.

유관순 열사

유관순은 1902년 11월 17일 천안군 지금의 병천면 용두리(당시는 동면 지령리는 자연부락 명치)에서 유중권(柳重權)과 이소제(李小悌) 사이에 3남 2녀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공주 영명학교를 2년간 다니다 미국인 순회 선교사 부인 사이러시의 도움과 권유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여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학우 6명과 함께 학교 뒷담을 넘어 탑동공원까지 가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거기서 경관에게 붙들렸으나 곧 석방되어 3월 5일 남대문역 앞에서 벌어진 학생단 시위에 다시 참여하고 무사히 기숙사로 돌아왔다.
유관순은 학교가 휴교 상태가 되자 사촌언니인 유예덕(柳禮道)와 함께 3월 8일 고향으로 왔다. 천안에서는 그때까지 만세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3월 9일 주일밤 예배가 끝나 교인들이 흩어진 후 부친의 주선으로 조인원과 그의 친구 이백하(李伯夏) 등 20여명이 있는 자리에서 관순과 예덕은 서울에서 일어난 3·1운동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고, 즉석에서 아우내(竝川) 장날인 4월 1일(음력 3월 1일)을 기해 거사를 하기로 계획했다. 지령리에 총본부를 아우내 장을 가운데 두고 상호 5리 거리에 삼각형으로 있는 수신면 장명리(長命里)와 갈전면 백전리(栢田里)에 중앙 연락기관을 둘 것과 아우내 장을 중심으로 안성·진천·청주·연기·목천 등 여섯 고을을 망라하여 각 촌 각 면의 연락기관을 분담시키는 동시에 유림의 대표들과 한 마을에 수백 호씩 차지하고 사는 대성(大姓)의 문장(門長)들을 움직일 계획을 했다. 연락원은 비교적 의심을 덜 받을 수 있는 애더와 관순이 맡기로 하였으나 몸 약한 사촌 애더가 일찍이 탈락하고 유관순 혼자서 연락일을 담당하였다.
병천 장날을 하루 앞둔 1919년 3월 31년 밤(음력으로 2월 그믐). 동생 관복과 친척 유제한에게 미리 준비해 둔 여러 자루의 홰를 돌려 매봉 꼭대기로 올라가 불을 붙여 들어 올리게 하였다. 그러자 매봉을 중심으로 구밋들(龜坪) 우각산, 강당산, 백적리 돌산, 세성산 등 동서남북에서 24개의 불꽃이 하늘을 밝혔다.
이튿날 유관순은 아우내 장터로 나섰고 정오가 가까워 오자 3천여 장꾼들이 장거리를 뒤덮었다. 오후 1시 조인원이 큰 태극기를 장터 한가운데 세우고 쌀가마 위에 올라서서 독립만세를 부르자 군중들의 만세소리가 온 마을을 뒤흔들었다. 태극기와 조인원을 선두로 군중은 가쟁이 장터에서 병천 헌병분견소 앞까지 잇따라 만세소리를 높이며 행진해 갔다. 유중권, 김구응, 김상헌, 김구헌, 김교선, 주병호 등이 조인원을 뒤따랐다. 곧 그 뒤에 유관순과 어머니 이씨와 각 고을에서 모여든 군중들이 태극기의 물결을 이루며 대열을 지어 나아갔다.
헌병들이 해산을 명했으나 듣지 않자 상등병 진상부(溱相部)가 기총(騎銃)을 발포하여 3천 군중이 일단 물러섰으나, 이 발포로 말미암아 유관순의 부친 유중권과 남씨의 남편이 사망하자 약 40여명의 군중들이 그 시체를 떠메고 헌병분견소로 몰려왔다. 유관순은 "제 나라를 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무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로 대들었다. 1천 5백명의 군중도 함께 몰려와 헌병분견소에 돌을 던지며, 소장을 잡아 끌고 밀치는 등 격렬하게 항의하고 있을 때 천안 헌병분대에서 20여 명의 응원병이 도착하여 무차별 발포를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19명이 즉사하고 43명이 부상하여 피바다가 되었다. 유관순의 부친에 이어 모친 이씨도 현장에서 숨졌다. 그 날 유관순은 자기 마을로 돌아왔다가 헌병에게 검거되어 헌병 분견소로 끌려갔다.
이후에도 유관순은 서대문감옥에서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고,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아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고 결국,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1920년 10월 12일,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10월 14일 정동예배당에서 김종우 목사의 주례로 유족 3형제와 동창생들이 애통해 하는 가운데 영결식이 거행되었고, 시신은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러나 그녀의 무덤은 도로개설로 손실되어 그 근방 어디에 옮겨졌다가 그 조차도 유실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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