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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독립협회
가.연표
  • 1896 4월 독립신문 발간
  • 1896 11월 독립문의 정초식 거행
  • 1898 2월 독립협회 회원의 구국운동 결의
  • 1898 2월 절영도 조차 반대
  • 1898 3월 1차 만민공동회 개최
  • 1898 5월 러시아의 토지매수 요구를 좌절시킴.
  • 1898 9월 외국인 용병 고용 반대 운동
  • 1898 10월 개혁파 내각의 수립을 위한 운동 개재
  • 1898 12월 정부, 민회 금압령을 내림
다.전개 과정

만민공동회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는 1898년 일본 및 서구 열강의 이권 침탈과 침략정책에 대항하여 대한제국의 서울 시민들이 자주독립의 수호와 자유민권의 신장을 위하여 조직·개최하였던 시민궐기대회 또는 민중대회라고 할 수 있다.
[전기 만민공동회] 독립협회가 개최한 3월 10일의 만민공동회에는 당시 서울 인구의 17분의 1에 해당하는 1만여 명의 시민들이 운집하여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규탄하였다. 만민공동회에서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요구를 반대 결의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군사교관 및 재정고문의 철수와 한러은행의 철폐도 결의하였다. 독립협회 제1차 만민공동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기대 이상으로 1만여 명의 시민이 자발적으로 참석했으며,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만민공동회라는 새로운 형태의 민중집회가 생기고 시민들이 자주독립권 수호를 위한 확고한 결의를 내외에 과시하였다. 만민공동회를 관람한 러시아공사는 물론이요 다수의 외국 공·영사들과 외국인들은 한국민중의 정치의식의 성장에 모두 큰 충격을 받고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또 하나 놀라운 것은 3월 12일에 독립협회와 직접 관계없는 서울 남촌에 거주하는 평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개최한 사실이다. 이 만민공동회에는 이틀 전보다 더 많은 수만 명의 서울시민들이 운집하여 러시아와 모든 외국의 간섭을 규탄하고 대한제국의 자주독립 강화를 절규하였다. 러시아는 두 차례의 만민공동회 결의와 각국의 반응을 고려하여 한반도에서의 부동항과 군사기지 설치계획을 우선 포기하고 3월 27일 청국으로부터 랴오둥반도를 조차한 다음 부동항과 군사기지를 랴오둥반도의 따리엔(大連)과 뤼순(旅順)에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러시아는 대한제국으로부터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하고 한러은행을 폐쇄했으며 절영도 조차요구도 철회하였다.
일본도 독립협회의 강경한 요구에 응하여 할 수 없이 그들의 원미도 석탄고기지를 대한제국에 반환하였다. 한반도가 완전히 열강의 힘의 진공상태가 되자 러시아와 일본은 상호견제를 위하여 1898년 4월 25일 「로젠-니시협정(Rosen-Nish Agreement」을 체결하여 양국이 대한제국의 주권과 완전한 독립을 확인하고 내정에 간섭하지 않기로 합의함과 동시에 대한제국이 군사교관이나 재정고문을 초빙하는 경우에도 양국의 사전동의 없이는 응낙할 수 없도록 협약하였다. 이에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세력균형이 성립되었으며 이 균형이 1904년 1월까지 약 6년간 지속된 것이었다.
[후기 만민공동회]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의 방법으로 러시아의 침략 시도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자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와 서울시민들이 애용하는 민족운동방법으로 정립되었다. 1898년 여름 독립협회와 서울시민들은 대한제국의 자주독립의 기초강화와 민권신장을 위한 수많은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독립협회각 1898년 10월 1~12일 철야 상소시위운동 끝에 개혁파정부의 수립에 성공하고 이어서 독립협회와 개혁파정부가 협동하여 의회설립을 위한 중추원 신관제를 11월4일 공포하여 한국역사상 최초로 의회설립을 보게 된 것을 황제가 수구파의 모략전술로 취소하고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긴급체포하며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시켰을 때에는 서울시민들은 자발적으로 만민공동회를 상설기구로 조직하여 투쟁하였다. 후기 만민공동회는 만 42일간 철야 상소시위운동을 전개하면서 독립협회의 지도자 17명의 석방을 요구하고 독립협회 복설과 수구파 5대신 규탄, 개혁파정부의 수립을 요구하였다. 헌의6조의 실행과 황국협회(皇國協會)의 공격 분쇄와 규탄, 의회의 재설립 요구, 대신후보 인물 11명을 천거하는 등 맹렬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상설기구로서 후기 만민공동회의 운동은 독립협회 지도자 석방, 독립협회 복설, 황국협회의 공격 분쇄와 규탄에는 성공하였으나 그 밖의 요구사항은 황제와 수구파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전을 보지 못하였다. 광무황제는 군대를 동원해서 만민공동회를 강제 해산시킬 경우의 각국 반응을 타진하였다. 러시아측은 군대 사용을 권하였고, 다른 외국공사들은 언급을 회피하였다. 오직 일본공사만이 명치유신(明治維新) 초기에 군대를 이용하여 효율적으로 민회를 해산시킨 전례가 있음을 들면서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일거에 탄압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일본공사가 노린 것은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 세력의 붕괴였다. 일본측은 그들의 한국침략정책에 대한 한국내의 궁극적 저항 세력을 만민공동회 · 독립협회 세력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없애려고 한 것이다. 광무황제는 마침내 군대를 동원하여 서울시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1898년 12월 23일 시위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의 해산을 명령하였다. 만민공동회 회중은 시위대의 총검에 쫓기어 해산하였다. 광무황제는 12월 24일 11가지 불복종의 죄목을 들어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를 불법화시키고 해산령을 포고했으며 430명의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 간부들을 일거에 체포 · 구금하였다. 이에 황제와 수구파정부의 일본과 내통한 무력탄압에 의해 만민공동회는 강제해산당하였다.

독립신문

독립신문은 1896년 4월 7일 서재필(徐載弼)과 개화파가 합작하여 창간한 한국 최초의 민간신문이다. 갑신정변(甲申政變) 실패 후 미국으로 망명한 서재필은 10여 년 전 갑신정변의 실패의 주요 요인으로 민중의 지지결여 때문이었다고 보았고 나라의 독립을 지키려면 국민의 애국심과 자주 정신이 필요하며 이런 정신은 신문을 이용하여 깨우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서재필의 제안에 개화파 정부 내부협판 유길준은 1896년 1월 하순 새로운 신문사의 설립과 국문판 및 영문판을 동시에 창간하여 1896년 3월 1일부터 발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서재필은 정부가 지출해 준 이 자금으로 일본에서 인쇄기와 활자 등을 구입하고 정동에 있는 정부 소유의 건물을 사옥으로 빌려 독립신문사를 설립하고 1896년 4월 7일『독립신문』창간호를 발행하였다. 창간 당시 『독립신문』은 타블로이드판 크기로 모두 4면이며 제3면까지는 국문판으로 하고 제4면은 The Independent라는 제호로 영문판을 편집하여 격일간으로 발행하였다. 서재필은 사장 겸 주필로 있으면서 국문판 논설과 영문판 사설을 맡았으며 주시경(周時經)은 국문판 편집과 교정을 담당하였다.
『독립신문』의 사장 겸 책임자는 서재필이었고, 부책임자는 주시경이었으며 그 아래 탐방원(探訪員)이라고 부르는 기자를 두었다. 영문판 편지에는 서재필의 조수로 헐버트(H. B. Hullbert)의 도움을 받았다. 창간 당시는 서울 정동의 본사 이외에 인천·원산·부산·파주·개성·평양·수원·강화 등지에 지국을 두었다. 그 후 신문이 발전하면서 지방지국은 전국 주요 도시로 확대되었다. 외국 통신으로는 중국 텐진(天津)을 통하여 로이터통신을 직접 전신으로 받았다.『독립신문』의 구독방식은 오늘날과 같이 한 사람이 1부를 읽고 접어 두는 것이 아니라 돌려가며 읽고 때로는 시장에서 낭독도 했으므로 실제로 『독립신문』을 읽거나 낭독을 들은 사람의 수는 발행부수의 수십 배나 수백 배가 되었다. 서재필은 1부가 최소한 200명에게 읽혔다고 기록하였다.
『독립신문』은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가 강제 해산당한 직후부터 친러수구파 정권에 의해 매수가 추진되다가 정부가 1899년 11월 27일 독립신문사의 사옥의 반환을 재촉하자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1899년 12월 4일 정부에 의해 매수당하였다. 친러수구파 정권도 『독립신문』매수 당시에는 아일랜드인을 주필로 하여 일간으로 속간하겠다고 발표하였으나 매수 이후에는 속간하지 않고 영구히 폐간시켰다. 이 신문은 여러 가지로 한국 신문사상 기념비적인 위치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한국사회의 발전과 민중의 계몽을 위하여 지대한 역할을 수행한 한 시대의 기념비적인 신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라.관련자료

독립문과 영은문

독립문은 독립협회(獨立協會)에서 1897년 11월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기 위하여 건립한 석조문이다. 독립협회는 영은문을 철거한 자리에 새로이 독립문을 건립하여 한국인의 자주독립의 의지를 전세계와 자손만대에 보여야한다고 판단하여 독립문을 건립하기로 결의한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독립문 건립을 국민들의 성금으로 건립하기로 하고 성금을 모집하였다. 당시 자주독립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팽배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각계각층의 국민들이 독립협회의 목적을 지지하고 독립문 건립을 위한 성금을 냈다.
독립협회는 창립 3개월 후인 1896년 9월 6일 서재필(徐載弼)로 하여금 독립문 건립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독립문의 설계는 서재필이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형으로 하여 비용관계로 축소해서 기본 스케치를 하고 독일영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서재필을 도와서 세부설계를 작성했으며 공역(工役)은 한국인 기사 심의석(沈宜碩)이 담당하였다. 석공은 한국인 고급 석재기술자들이 담당하고 역사(役事)는 주로 중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하였다. 독립협회는 1896년 11월 21일 오후 2시 반에 독립문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독립문은 정초한 지 만 1년 후인 1897년 11월 준공되었다. 독립문은 한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석재인 화강암으로 축조되었고 높이가 42척, 폭이 22척, 깊이가 21척, 터널의 폭이 17척이나 된다. 탑의 서쪽에는 독립문의 지붕위로 나선형의 층계를 만들었다. 또한 독립문의 남쪽 서울 시내를 향한 머리에는 국문으로 독립문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고 중국을 향한 북쪽에는 한자로 독립문(獨立門)이라고 하였다. 문 이름 좌우에는 태극기를 넣었다. 독립협회는 독립문을 건립함과 동시에 그 부근 일대가 공지였으므로 이 지역에 나무를 심고 공원을 꾸며 독립공원(獨立公園)을 만들었다. 또한 독립협회는 중국사신을 맞아들이던 영은관인 모화관(摹華館)을 개수하여 독립관(獨立館)을 만들어서 독립협회의 사무소와 회의장으로 사용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건립된 독립문은 화강암의 견고한 건축물로서 19세기말 한국민족의 독립의지의 기념물로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대하여 한국인의 자주독립의 결의를 널리 알리고 한국인의 자각과 독립의지를 과시하였다. 또한 장구하게 보존 가능한 석조기념물을 건립함으로써 후손들에게 자주독립의 중요성과 독립의지를 각성시켜 주었다.
광복 후 1979년 성산대로 공사로 독립문의 이전이 불가피하게 되자 서울시는 그 자리에 독립문이 있었던 터라는 기념동판을 묻고 원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미터 떨어진 지점으로 독립문을 이전시켰다.

독립관

독립관(獨立館)은 독립협회에서 1897년 개수(改修)·건립한 회관이다. 1896년 7월 2일 창립된 독립협회는 영은문(迎恩門)을 철거한 차리에 독립문(獨立門)을 새로 건립하기로 결정할 때에 버려진 모화관(慕華館)을 전면 개수하여 독립관을 만들기로 하였다. 모화관은 중국사신단 일행을 영접하여 연회를 베푸는 영빈관이었는데, 갑오경장 이후로 개화당정부가 1895년 영은문을 철거할 때 ‘모화관’도 폐쇄하여 방치하였다. 독립협회는 모화관 건물을 전면 개수하여 독립관(獨立館, The Independence Pavilion)이라 새로 이름을 짓고 독립협회의 사무소 및 집회장소와 강연회 장소로 사용키로 하였다. 독립관은 1897년 5월 23일 개수가 완료되었다. 이에 독립협회는 왕태자(王太子)가 국문으로 독립관이라고 친서한 현판을 거는 현판식을 1897년 5월 23일 오후에 개최하고 독립관을 개관하였다. 독립협회는 독립협회 사무소를 독립관 안에 두고, 매주 일요일 오후 3시에 회원들이 독립관에 모여서 강연회를 갖기로 하였다. 독립협회는 1897년 8월 8일 회의에서 매주 토론회를 독립관에서 개최하기로 결정하였다.
독립협회의 토론회는 1897년 8월 29일부터 시작되어 모두 34회로 개최되었다. 이 독립관에는 평균 500명씩 모여 시민과 회원 계몽에 큰 역할을 하였다. 독립관은 국민들로부터 독립문에 버금가는 자주독립의 상징물로써 간주되었다. 안중근(安重根)의사가 1908년 3월 21일자 『해조신문(海朝新聞)』에 기고한 글에 “속히 국권을 회복한 뒤에 태극기를 높이 달고 처자권속과 독립관에서 서로 모여 일심단체로 육대주(六大洲)가 진동하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기약하자”고 쓴 사실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독립관은 일제에 의해 완전히 철거되었다. 현재 서대문 독립공원의 독립관은 옛 독립관의 원형을 추적해서 자리를 옮겨 1996년 12월 28일 복원한 것이다.
독립관은 한말 열강의 침투 속에서 이룩하고자한 독립협회의 활동의 근거지이자 자주독립의 상징적 건물이었다.

서재필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 외가인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서 서광언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여 고향인 충남 논산에서 성장하였고, 그 후 자식이 없던 7촌 서광하의 양자로 들어가 대덕에서 살게 되었다. 그는 7세경 서울에 있는 외숙부인 김성근의 집에서 공부하여, 1882년에 23명의 합격자 중 최연소로 병과 3등에 급제하였다.
그는 일찍부터 개화파의 거두인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 서광범 등과 교류하면서 개화에 눈을 떴다. 과거 합격 후 서재필은 김옥균의 제의를 받고, 문관의 길을 마다하고 1883년 5월 도일, 동경의 호산(戶山)육군하사관학교에 입교하여 이듬에 7월까지 신식 군사지식과 기술을 배웠다.
1884년 7월 귀국 후 서재필은 급진적인 개화·혁신운동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등과 함께 1884년 12월 4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청군을 앞세운 수구파의 무력공격으로 3일천하에 끝나 일본으로 도피하였다.
그 후 미선교사의 도움을 얻어 다시 일본을 떠나, 188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하여 이후 미국에서의 새로운 생활을 전개하였다. 그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한편 저녁에는 YMCA에서 영어를 배우고 일요일에는 교회에 나갔는데, 이 때 탄광을 경영하는 사업가 홀렌백을 알게 되어 그의 호의로 윌커스 베리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 졸업 후 미육군 총감실 소속 도서관에 취직하여 중국어 및 일본어로 된 의학관련 책을 번역·정리하는 일을 하면서, 1889년 콜럼비아대학 의학부에서 의학공부를 시작하여 1892년 한국인 최초의 의학사(M.D)가 되었다.
1895년 국내에서 갑오개혁이 일어나면서 서재필에게 씌워졌던 역적의 죄명은 벗겨지고, 박영효의 귀국제의가 있자, 서재필은 한국에 민주주의의 도입과 사회개혁의 실천을 목적으로 1895년 12월 26일 고국으로 돌아왔다. 귀국 후 그는 공식적으로 중추원의 고문직을 맡았으나 실제로는 개화운동의 선구자로서 국민계몽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먼저 배재학당을 통해 한국 최초로 공개강연회를 개최하였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독립신문』을 간행하는데 온힘을 쏟았다. 또한 협성회를 조직하여 토론회를 지도하고, 건양협회의 결성을 추진하였으며, 독립협회와 독립관을 설립하는 등, 민족의 자주독립사상을 내외에 선양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의 민중계몽활동이 점차 확대되어 당시 제국주의 일본과 러시아의 한국침투에 방해를 주자 이들 국가는 한국 정부의 수구세력을 움직여 서재필 추방공작을 전개하였고, 그 결과 그는 1898년 5월 14일 미국으로 다시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서재필은 도미 후 외견상 1904년부터 1924년까지 인쇄 및 문방구 사업을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로 활동하였으나, 3ㆍ1운동이전부터 이승만·윤병구· 여운홍· 안창호 등 국내외 애국지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사정을 교감하며 기회가 오면 언제라도 독립운동의 일선에 뛰어들 자세를 갖추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새로운 민주주의의 사조와 평화의 기운이 국제정세를 지배하고,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그 후부터 1922년까지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하여 한국의 독립열망과 새로운 국가건설의 이상을 알렸고, 한국통신부를 조직하여 『KOREA REVIEW』등 수많은 선전책자를 발간하였으며, 또 미전역에 21개지부의 한국친우회를 조직하여 미국민에게 일본의 잔학성을 고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등 활발한 대외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서재필은 1921년 11월에 시작된 워싱톤군축회의에 대한 준비를 직접 담당하면서, 당시 한인들간 분열되어 독립운동이 침체되어 있던 미주한인사회와 임시정부 그리고 국내외의 모든 한인들에게 독립운동의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이후 서재필은 1926년 7월 하와이에 열린 범태평양회의에 해외한인대표로 참석하여 한국의 위상을 떨쳤으며, 대부분 『신한민보』 등을 통한 저술활동을 하였으나 생계를 위해 62세가 되던 1926년부터 다시 의사로서의 수업과 활동에 주력하였다.
해방 후 서재필은 미군정사령관 하지의 초빙으로 1947년 7월 83세의 나이로 미군정최고고문으로 귀국하여 이듬해 9월까지 한국에서 머물렀다. 그는 라디오방송과 강연 및 저술활동을 통해 참된 민주주의국가의 길을 제시하고, 사분오열된 해방정국정돈에 온힘을 기울였다. 이러던 중 백인제를 비롯한 주요인사들이 그의 의사와 관계없이 대통령후보로 추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자신으로 인해 정치적 소용돌이를 일으킬 수 없다고 판단, 결국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51년 1월 5일 87세의 생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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