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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구려, 중국세력과 격돌하다
가.연표
  • 227 동천왕 즉위
  • 236 오나라에서 사신이 옴 
  • 238 위, 공손씨 세력 정벌 
  • 242 고구려, 위나라의 서안평 공격 
  • 244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으로 환도성 함락 
  • 259 위의 침입 격파
  • 302 현도군 공격
  • 311 서안평 점령
  • 313 낙랑군 축출
나.시대적 배경이미 1세기 후반에 초기국가의 단계를 넘어선 고구려는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갖추면서 부여 및 중국세력과 대립하는 가운데 고대국가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후 국력이 강성해지자 적극적인 대한(對漢) 공세를 감행하여 요동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요동지방의 6개 현을 취한 고구려는 후한의 만만치 않은 반격을 받았다. 3세기 전반 중국이 위·촉·오의 삼국으로 분열하여 대립하자, 고구려의 동천왕은 위나라와 손잡고 요동의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키고 서안평으로 진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위나라는 촉의 내부사정으로 양자간의 긴장이 완화되자 오히려 고구려를 침공했는데, 두 차례에 걸친 위와의 전쟁으로 고구려는 수도인 환도성을 내주고 후방지역으로 죽령지역까지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은 진(晉)나라가 붕괴되고 북방민족들이 진출하여 5호 16국 시대의 혼란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 시기에 즉위한 미천왕은 국제적인 격동기를 맞아 주변 정세를 이용해 대외 팽창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고조선 멸망 이후 400여 년 동안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던 중국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고자 하였다.
다.전개 과정

관구검의 침입

고구려의 대중국과의 접적지역은 전략적인 요충지인 요동(지금의 요양) 일대였는데, 고조선은 한때 이곳 요하를 경계로 상호간에 정면충돌을 방지하는 일종의 완충지역(buffer zone)으로 설정하기도 했다. 3세기 전반 고구려를 둘러싼 국제 정세는 매우 복잡하였다. 중국은 위·촉·오의 삼국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위나라와 고구려 사이의 요동 지역에는 공손씨 세력이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이러한 세력 관계 속에서 위나라와 오나라는 고구려 및 공손씨 세력과 친교를 맺어 서로를 견제하고자 하였다. 고구려는 처음에 위나라·오나라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으나 점차 위나라와 연합하여 공손씨 세력을 견제하였다. 당시 공손씨가 차지하고 있던 요동 지역은 교통 및 경제의 요지로 고구려의 발전을 위해서는 꼭 확보해야 하는 곳이었고, 특히 이 시기에는 공손씨 세력도 독자적인 세력을 키우기 위해 고구려를 적극적으로 압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로서는 멀리 있는 오나라 보다는 공손씨 세력의 배후에 위치한 위나라를 이용하여 이들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238년 위나라가 공손씨를 공격할 때 고구려도 군대를 보내 협공하였다. 그러나 공손씨 세력을 제거한 위나라는 고구려와의 약속을 어기고 요동지역을 모두 차지하였으며, 나아가 고구려 및 동예, 옥저까지도 위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하였다. 위나라가 맹약을 어기고 압박을 가해 오자 고구려 동천왕은 이를 물리칠 기회를 노렸다. 공손씨 세력을 몰아낸 지 4년이 지난 242년 동천왕은 요동 지방의 서안평을 공격하였다. 서안평은 한반도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로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제 위나라와 고구려와의 직접적인 충돌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위나라는 244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관구검은 낙랑 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존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의 서남부를 견제하면서 수도인 환도성으로 직진하였다. 고구려는 동천왕이 지휘하는 2만명의 군사로 적의 예상접근로인 비류수 일대에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했다. 보병과 기병으로 편성된 고구려군은 방어선을 정면으로 돌파하려던 위군을 맞아 완강하게 저항하면서 적군 3천명을 도륙하였다. 위군의 두번째 고구려군 우익에 대한 공격 역시 3천여명의 전사자만 낸 채 수포로 돌아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군은 관구검의 진지를 반격했다. 그러나 고구려군의 반격은 오히려 우군의 방어편제에 균열을 초래했고, 이 틈을 이용한 위군의 총공격으로 고구려군은 1만 8천명을 잃었다. 고구려의 비류수 방어선은 붕괴되었고, 동천왕은 수도 환도성을 내준 채 죽령지역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위군은 환도성을 점령한 뒤, 일단 요동으로 철수했다가 이듬해인245년 고구려에 대한 전면 공격을 감행하였다. 현도 태수 왕기군이 선봉이었는데, 고구려군은 환도성에서의 전투력 손실을 회복하지 못한 채 옥저의 죽령(지금의 함남 지방)까지 밀려난 상태였다. 위군의 추격전은 고구려군에게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국왕의 호위병마저 해체된 고구려군은 밀우를 중심으로 한 결사대가 편성되어 기습을 가했다. 그리고 패잔병을 수습하여 급히방어선을 구축하면서 축차적인 방어선을 유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유는 계책을 내어 거짓으로 항복하고 적진으로 들어가 위나라 장수가 방심하는 틈을 타서 그를 살해하고 자결하였다. 장수를 잃은 위나라 군사들이 크게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 틈을 타서 동천왕은 다시 기습을 가하여 위군을 낙랑군 방면으로 밀어냈다. 이후에도 위나라의 공격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고구려의 국력은 빨리 회복되어 중천왕 때인 259년에 다시 위나라 군대가 침입하였을 때는 적군 8,000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기도 하였다. 한군현 축출 고구려는 동천왕 이래 한동안 대외 국제 관계에 소극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미천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중국과의 관계에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신성 방면의 방비를 강화하면서 302년 3만의 군사로 북쪽의 현도군을 공격하여 포로 8천여 명을 사로잡고 요동진출을 꾀하였다. 특히, 311년에는 요동진출을 본격화하고, 요동군과 낙랑·대방과의 연결로를 차단하고 각개격파하고자 요동의 서안평을 공격하였다.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는 313년 낙랑군을 공격하여 남녀 2천여 명을 생포함으로써 낙랑 세력을 축출하였다. 이어 314년에는 대방군마저 멸망시켰다. 이로써 한사군이 설치(B.C. 108)된 이래 한반도를 420여년 동안 잠식했던 낙랑군과 204년 공손씨에 의해 설치되어 110년간 존속해온 대방군을 소멸시켜 중국세력을 완전히 쫓아냈다. 이제 고구려는 태조왕 이래 열망해 오던 서해안으로의 진출과 낙랑 정벌을 성사시켜 서해안의 자유로운 해상 활동으로 경제, 군사적으로 급성장을 하게 되었으며, 만주 요동에서 서안평을 거쳐 한반도로 이어지던 중국세력을 차단하였다.
라.관련자료

환도성

환도성 환도성은 수도 국내성의 주변방어지로서209년 산상왕이 이곳으로 수도를 옮긴 후 장수왕 때 평양으로 천도할 때까지 약 200여 년간 고구려의 왕도였다. 이 사이 환도성은 여러 차례 외침을 받았는데, 244년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성이 함락된 적이 있고, 이듬해에는 현도군의 태수 왕기의 침입을 받아 왕이 옥저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342년에도 연왕 모용황의 침입을 받아 도성이 파괴되고 왕모와 5만여 명이 납치되어 일시 수도를 동황성으로 옮기도 하였으나, 끝내 항복하지 않고 다시 복귀하였다.
환도성은 국내성에서 북쪽으로 2.5km 떨어진 환도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통구하변의 수직절벽 등 자연지세를 이용한 성벽, 궁전터와 병영터, 고분 그리고 기와와 같은 당시의 생활흔적이 남아 있다. 국내성의 방어용 산성으로 기능한 환도성은 국내성과 함께 평지-산성을 연계시킨 고구려의 도성방어체계를 엿보게 한다.

밀우와 유유

관구검이 환도성을 함락하고 난 뒤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어 동천왕을 계속 추적하게 했다. 동천왕은 남옥저 방향으로 피신을 하였는데 죽령 지방에 이르러 군사들이 거의 흩어진 상태였다. 그 때 왕의 곁을 지키고 있던 동부 사람 밀우가 왕을 피신시키기 위해 "지금 추격해 오는 군사가 가까이 와 형세가 매우 급합니다. 신이 죽기를 결심하고 막겠사오니 왕은 피하소서" 라고 말하고 결사대를 모집하여 위나라 적진으로 달려가 싸웠다.
동천왕이 위기를 겨우 벗어난 뒤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밀우를 구해 오는 자에게 후한 상을 주리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하부 사람 유옥구가 나서서 밀우를 구하기 위해 싸움터로 들어갔다. 그는 싸움터에 엎어져 있던 밀우를 업고 왕에게로 데리고 왔다. 동천왕이 친히 무릎을 베어주며 보살피니 밀우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깨어났다.
동천왕은 다시 추격을 피하여 이리저리 옮기면서 옥저에 이르렀는데 위나라 군대가 계속 추격해 왔다. 또다시 위기를 맞이한 동천왕에게 동부사람 유유가 “지금 매우 급박한 때이니 헛되게 죽어서는 안 됩니다. 신에게 계책이 하나 있습니다”라고 말한 뒤 음식을 싸들고 위나라 적진으로 갔다. 그는 위나라 군대에 거짓으로 항복하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어리석어 큰 나라에 죄를 짓고 도망하여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몸 둘 곳이 없습니다. 장차 항복을 청하고 처벌을 받기 위해 신을 먼저 보내었기에 변변치 못한 물건을 가지고 왔습니다.”라고 하니 위나라 장군이 항복을 받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유유가 그릇 속에 감추어 둔 칼을 꺼내 위나라 장군의 가슴을 찌르고 자신도 자결하였다. 장군을 잃은 위나라 군대가 혼란한 틈에 동천왕이 공격하여 적군을 물리쳤다.
왕은 나라를 회복한 뒤 제일 큰 공을 세운 밀우에게는 거곡과 청목곡을 하사하고, 유옥구에게는 압록강과 두눌하원을 하사하여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전사한 유유는 구사자로 승진시키고, 그 아들 다우에게는 대사자라는 벼슬을 내렸다.

한군현

한나라의 대대적인 침입을 받은 고조선은 왕검성에서 1년 동안이나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오랜 항전 끝에 내분이 발생하였고, 끝내는 왕검성이 함락되고 고조선은 멸망하였다. 고조선이 멸망한 후 한나라는 고조선 땅에 군현을 설치하고 한나라 사람으로 군 태수와 현령을 보내어 통치하도록 하였다. 한군현의 설치 시기와 성격 그리고 지역에 대하여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아 여러 가지 다양한 견해가 있다.
한군현이 설치되자 토착 주민들은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저항하였다. 그리하여 처음에 설치된 4군 중 진번과 임둔 2군은 설치된 지 25년 만에 소멸되었고, 현도군도 20여 년 만에 본래의 지역을 토착세력에게 빼앗기고 옮겨가 불과 30여 년 만에 낙랑군만을 남기고 소멸되는 변화과정을 겪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나라의 4군이 동시에 존속한 기간은 25년 여에 불과하며 그 이후로는 낙랑군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낙랑군도 중국으로부터 태수 직을 받기는 하였지만, 거의 자치적으로 운영되었고, 313년에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멸망하면서 고구려에 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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