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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의병
가.연표
  • 1895 신임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 부임.
           일본낭인들,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내각을 성립시킴(을미사변).
  • 1896 이범진, 이완용 등의 친러파가 고종과 왕자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김(아관파천).
           로바노프 · 야마가타 아리토모, 의정서 체결(러시아와 일본의 조선 공동지배 내용).
  • 1897 고종, 러시아공사관으로부터 덕수궁으로 환궁.
  • 1898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를 개최
  • 1899 최초의 대등한 조약인 한 · 청 통상조약 체결.
  • 1904 정부, 러일전쟁 개전에 중립선언.
           한일의정서 조인(일본군의 한국 내 전략요충지 수용 인정).
           일본군, 경기선 공사를 강제로 착공(용산~마포 간).
  • 1905 청한국공사관 철수.
           고종, 허버트를 통해 일본의 강압책을 미국에 호소.
           한일신협약(을미보호조약) 조인(통감정치 실시, 외교권 박탈, 보호국화).
           이토 히로부미 초대통감에 임명됨.
  • 1906 해외 한국인에 대한 정부의 보호권을 일본외무성에 이관.
           주한영국공사 철수(청, 미국, 독일, 프랑스 등 각국 공사 차례로 철수).
           고문경찰제 확장.
  • 1907 고종의 밀서를 휴대하고 출국한 헤이그 밀사,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참석요구 좌절.
나.시대적 배경

을사늑약

1905년 11월 17일 조선의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과 일본의 특명전권공사 임권조(林權助) 사이에 강제로 체결된 문건이다.
을사늑약은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하여 강제로 체결된 문건으로 제2차 한일협약, 을사보호조약, 을사5조약이라고도 부른다. 이 조약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각 열강과의 협약에 따라 한국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어전회의가 열렸는데 궁궐 주위 및 시내의 요소에는 무장한 일본군이 경계하는 한편, 쉴새없이 시내를 시위행진하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해 만들었다. 이 늑약으로 한국의 외교권이 일본에 박탈당하게 되었으며, 국내외 한국외교기관과 각국 공사관은 폐쇄되었다.
그러나 머리에 조약의 명칭이 없으며, 이로 말미암아 늑약 체결의 강제성이 입증되었다. 형식상으로는 일본 정부가 한국 황실의 안녕과 존엄을 지지한다는 것이나, 이는 공염불이었고 결국 조선의 외교권이 이 늑약으로 일본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1895년 명성황후가 ‘삼국간섭(三國干涉)’을 기화로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써 러시아를 한반도에서 일본의 새로운 경쟁상대로 등장케 하자 러시아와 즉각 결판을 낼 수 없었던 일본이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말한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에 굴복, 이미 수중에 넣었던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자 이를 본 명성황후는 재빨리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견제하려 하였다. 이에 일본은 한반도에서 청의 위치를 대신 이어받게 된 강대국 러시아와의 대결이 불가피해졌던 바, 이에 대한 대책 마련이 무엇보다도 시급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는 청일전쟁을 끝낸 직후여서 러시아와 당장에 일전을 결할 수 없었던 일본은 황후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다. 명성황후 시해는 일본 정부를 대표하는 주한전권공사 미우라고로가 정규군, 영사경찰 등 일본의 공권력을 구사하여 자행하였다. 미우라는 우선 결행 날짜를 10월 10일로 정한 후 각기 책임자를 정해 역할을 분담시키고 행동지침을 시달하였다. 그런데 풍문으로 나돌던 훈련대 해산이 예상보다 앞당겨져 7일 오전 9시경에 군부대신 안경수(安駉壽)가 이를 정식 통고해 오자 결행일은 8일 새벽으로 수정되었다. 훈련대가 해산되면 이들을 동원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사건의 책임을 전가하려던 미우라의 계획이 차질을 빚게 되기 때문이어다. 왕궁 침입에 있어서도 일인들은 그들 계획의 성패가 달렸다고 판단하였던 대원군 끌어내기에 시간이 늦어져 서대문에서 수비대와의 합류에 차질이 빚어짐으로써 새벽 5시 30분에야 겨우 광화문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홍계훈(洪啓薰, 훈련대 연대장)이 거느리는 훈련대와 총격전이 벌어져 그를 살해하고 광화문을 통과한 시간이 5시 50분이었다(영·미 자료에 의하면 5시 15분). 대원군을 6시 10분경에 근정전 옆의 강령전에 내려놓고 나서 한 무리는 왕의 거처로, 다른 한 무리(20~25명의 일인)는 왕후의 건청궁으로 달려가 명성황후와 3명의 궁녀를 살해하였다.
다.전개 과정

전기의병

을미의병은 1895년 을미사변 직후 봉기하여 1896년간에 걸쳐 전개된 항일의병의 반침략 무장투쟁이다. 을미의병이 봉기할 수 있었던 정치적 배경으로서 1895년 8월 20일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된 을미사변을 들 수 있다. 이는 국제적 범죄행위로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침략행위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으로 전국민을 분기시켜 의병의 봉기를 촉진시켰다. 을미변복령도 을미의병을 일으키게 한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 조선말 의복제도는 수차에 걸친 개정을 거쳐 점차 서양식 복제로 바뀌어 갔다. 즉 1895년 3월에 내려진 칙령에서 관민이 다같이 흑색의 주의(周衣)를 입도록 하였다. 전통적인 의복제도를 조선의 문화적 긍지의 한 척도로 인식하고 있던 수구적 지식인들은 변복령의 반포로 인해 심각한 문화적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1895년 11월 14일 발포된 단발령은 그동안 점차적으로 솟구쳐온 한민족의 반일감정을 비등하게 함으로써 의병봉기를 전국 각지로 확대하게 되었다. 유교 윤리가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 깊이 뿌리 내리던 조선사회에서는 상투는 곧 인륜의 기본인 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로 단발령이 내리자 유생들은 이것을 신체적 박해로 더 나아가 인륜의 파멸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 반감은 절정에 달하였다.
을미의병의 참여층은 지휘부와 병사층에 따라 유생과 평민으로 대별되어 나타난다. 지휘부는 주로 관료출신의 양반유생 또는 재지유생들로 구성되었다. 그 중에서도 화서학파(華西學派)·노사학파(盧沙學派)·정재학파(定齋學派)·남당학파(南塘學派) 등 위정척사계열의 유생들이 중심이었다. 이들 척사계열의 의병 중 다수는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을 진압하는데 참여했던 것으로 보여 동학농민운동과 의병전쟁의 정치사상적인 차이를 실감나게 한다. 그러나 의병 지휘부에는 유생만이 아닌 이족이나 평민들도 다수(전체의 약 14%)포함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심지어 나주의병의 경우는 이족출신이 지휘부의 55%나 차지하고 있으며, 해주의병의 경우는 전원이 포수출신인 것으로 보아 전기의병의 지휘부에 평민 출신의 참여율이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유생이라 할지라도 선대중에 현직을 역임한 의병장을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몰락한 양반층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은 의병의 경제적 취약점이기도 하였다. 병사층에는 일부의 유생도 포함되었으나 주로 평민층으로 구성되었다. 그 중 포수가 주요 전투력이었으며, 그 외에 소작농민을 비롯하여 보부상과 해산군인 그리고 소수의 청군과 점적성이 강한 동학교도가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전기의병의 지휘부와 병사층간에 신분적인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전기의병은 다음과 같은 성격을 띤다. 첫째, 존화양이론에 철저한 척사적 성격을 띤다. 전기의병의 지휘부를 이룬 인물들은 존화양이론에 입각하여 제국주의세력의 침략에 민족의 생존권 회복을 위한 반침략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둘째, 전기의병은 근왕적인 성격을 띤다. 전기의병의 주요 이념에서 ‘주욕신사(主辱臣死)’의 정신으로써 임금에 충성하고자 하는 근왕적인 성격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근왕적 내지는 충군애국적 국가관은 국왕을 전제로 한 국가의 독립, 즉 왕조의 복구에 궁극적인 목표가 있었다 할 것이다. 셋째, 전기의병은 반개화적인 성격을 띤다. 척사유생들은 개화는 곧 중화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인륜을 파괴하여 금수로 만듦은 물론 국가마저 멸망에 이르게 한다고 보았다. 척사유생들은 이와 같은 반개화론, 나아가 개화망국론에 입각하여 중화질서의 회복과 국가의 독립을 위해 거의한 것이다. 넷째, 전기의병은 반침략성을 강하게 띤다. 의병들은 1894년 갑오변란을 일제의 침략행위로 규정하였다. 을미의병은 친일적인 갑오정권을 타도하고 일본군을 조선에서 완전히 축출하여 민족의 자주를 수호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의병들은 단일부대로 혹은 연합부대를 편성하여 지방 관청을 공격하였으며, 지방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아 무력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을미의병의 무장투쟁은 갑오정권과 일제 침략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단발령은 철회되었으며 아관파천이 단행되어 일제의 침략정책에 타격을 주었다. 아관파천 직후 김홍집과 어윤중 같은 개화파 관리들은 처단되었으며 치략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던 개화정책은 비판되어 실효를 보지 못하였다. 또한 전기의병은 표면적으로 해산되었지만 광무황제의 해산조칙을 거부하고 만주로 들어가 재기의 항전을 주비하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다수의 의병장들 1905년 을사5조약을 전후하여 의병의 기치를 다시 세우고 전국적으로 민족수호를 위한항일투쟁을 재개하였다.

을사의병

1904~1905년 러일전쟁·한일의정서·을사늑약 등 일련의 일제의 침략정책에 항거하여 일어난 후 1907년 7월 이전까지 전개된 항일의병을 을사의병이라 한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일제에 의해 한일의정서·한일협약 등이 강제로 체결되면서 조선은 일제의 준식민지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처럼 일제의 침략야욕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면서 반일의식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반일감정은 극도에 이르게 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하였다. 처음으로 봉기한 지역은 원주·제천·단양에서 을미의병 때 유인석(柳麟錫) 부대에서 활약한 원용석(元容錫)·박정수(朴貞洙) 등이며, 다음으로 홍주의 안병찬(安炳瓚)·민종식(閔宗植) 등이 봉기하였고, 전라북도 태인에서 최익현(崔益鉉)이 거의(擧義)하였다. 영남 지역에서는 신돌석(申乭石)의 의병부대와 정환직(鄭煥直)·용기(鏞基) 부자의 산남의진(山南義陣)이 봉기하였다. 원용석의 의병부대는 원주진위대와 일진회(一進會)의 급습으로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붕괴되고 말았으나 홍주의 민종식·안병찬 부대는 초기의 홍주성 공략에는 실패하였지만 민종식이 재조직한 의병부대는 홍주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이를 근거지로 성이 함락될 때까지 일본군에 항전하였다.
최익현 부대는 무력활동면에서는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지만, 그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사실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녀, 전국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신돌석의 부대는 규율이 엄하고 유격전술에 뛰어나 많은 전적을 올렸으며, 정환직 부자도 계속적인 항쟁을 벌였다.
이 외에도 여러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켜 대일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무기가 없는 훈련받지 못한 민병을 주축으로 하였기 때문에 항전에는 한계가 있었으며, 이후 의병다운 의병으로서 활동하게 되는 것은 군대해산에 따른 정식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참여하면서부터였다.
이처럼 전국적으로 확산된 을사의병은 1907년 군대해상 이후에 정미의병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을사의병은 유림들이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비록 양반유생이기는 하지만 위정척사적 의식의 발로가 아니라 국가와 민족을 구하려는 구국의 이념을 가지고 거병하였다. 이러한 성격으로 을사의병은 화적이나 활빈당과 같은 계층과도 연대하였으며 신돌석 의병진과 같이 평민의병이 독자적으로 봉기하기도 하였다. 홍주의병의 민종식, 태인의병의 최익현·임병찬, 산남의진의 정환직 등 관리출신 의병장들의 활약도 두드러졌던 것으로 볼 때 을사의병 단계에 들어서면 을미의병 단계까지 의병의 한계로 지적되던 지역성·학통성·혈연성이 극복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을사의병은 단절 없이 바로 정미의병으로 발전하여 1908년 이후에는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을 지속하게 된다.

헤이그 특사

광무황제(光武皇帝)가 1907년에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Hague)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한국의 주권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한 외교활동을 이른다.
1905년 일제는 한국의 황제를 비롯해서 각료들을 위협하여 을사늑약을 체결하고, 이에 따라 외교권을 박탈하여 외국에 나가 있는 사신(使臣)을 소환하고 통감부(統監府)를 설치하여 조선의 실권을 하나하나 강탈하였다.
1907년 6월 네덜란드의 수도 헤이그에서 제2차 만국평화회의가 열렸는데, 1906년 4월에 파나마 등 남미의 몇몇 나라와 함께 대한제국황제에게도 비밀리에 초청장을 보내왔다. 광무황제는 이 초청장을 받고 구미열강의 도움으로 일제의 기반에서 벗어날 절호의 기회라 여겨 이상설(李相卨)·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 세 사람을 비밀리에 특사로 임명하였다. 세 특사는 일제의 감시를 감쪽같이 속이고 6월 24~25이경 헤이그에 도착하는데 성공하여 황제의 친서를 갖고 회의에 참여하려 했으나,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신문인 W.스테드의 주선으로 한국대표는 평화회의를 계기로 개최된 국제협회에서 호소할 기회를 얻었다. 이때 러시아어·프랑스어·영어 등 외국어에 능통한 젊은 이위종이 세계의 언론인에게 조국의 비통한 실정을 호소한 연설의 전문(全文)은 한국을 위하여 호소한다라는 제목으로 세계 각국에 보도되어 주목을 끌었으나 구체적인 성과를 얻지 못하였으며, 이에 특사 가운데 이준은 울분한 나머지 그곳에서 분사(憤死)하였다. 그러나 이상설과 이위종 등 남은 대표들은 좌절하지 않고 구미열강을 차례로 순방하면서 국권회복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제국주의적 세계질서 속에서 열강간의 평화유지를 목적으로 개최되었던 만국평화회의의 성격상 일제에게 외교권마저 유린당한 대한제국의 특사일행이 그 사행의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처음부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과적으로 고종의 특사파견은 실질적인 소득을 거두지 못한 채 오히려 일제의 한국침략을 촉진시키는 구실을 주고 말았다. 이 사건이 전해지자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7월 18일 외무대신 하야시를 서울로 불러들여 그와 함께 광무황제에게 사행의 책임을 추궁, 강제로 퇴위시켰다. 또한 「정미7조약」을 체결하고, 27일에는 언론탄압을 위한 「신문지법」을, 29일에는 집회·결사를 금지하는 「보안법」을 연이어 공포한 뒤 31일에는 군대해산령을 내려 대한제국을 무력화시켰다.
라.관련자료

을사오적

을사늑약 체결 당시 찬성을 표시했던 정부 대신 이근택·이지용·박제순·이완용·권중현 등 5명을 일컫는다. 이 중 이근택과 권중현이 피격당하는가 하면, 이완용과 박제순의 집은 분격한 민중에 의해 불살라졌다.
대종교 초대 교주인 나인영(나철) 등은 을사늑약의 체결에 반대하여 1907년 1월부터 을사오적을 암살하려고 계획하고, 3월 25일 오적의 주살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서창보 등이 체포되자, 나철·오기호 등은 평리원에 자수하여 나철은 10년 유배형을 받아 무안군 지도로 갔었으나, 그 해 광무황제의 특사로 풀려났다.
김석항·김일제·기산도(奇山度)·박경하·박종섭·이종대·안한주·손성원·송효철·정재헌·현학표 등 11명은 직업상 전연감 전주사로부터 농민·상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며, 연령도 25세부터 51세까지 포함되어 있다. 광무10년(1906) 5월 13일자로 평리원 재판장 이윤용 등의 판결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았다.

유인석

유인석은 1842년 강원도 춘성군 남면 가정리에서 유중곤과 고령 신씨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4살 되던 해 족숙(族叔)유중의 양자로 들어간 이후 양가의 문벌을 배경으로 성장하였다. 양가의 증조부 유영오가 잠강에 은거하고 있던 당대의 거유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 - 1868)와 일찍이 교분을 맺고 있었던 덕택으로, 유인석은 입양되던 그해에 화서 문하에 나아갈 수 있었다.
특히 그는 화서의 정통 도맥을 이어받은 김평묵(金平默), 유중교(柳重敎) 양인으로부터 직접 수업을 받음으로써 당대 최고의 학문적 분위기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유인석은 화서학파의 핵심 사상인 위정척사(衛正斥邪), 존화양이(尊華攘夷)정신에 철저히 경도되어, 서양과 일본을 과거의 어떤 오랑캐보다도 교활한 국가라고 혹독히 비판하였다.
1876년의 강화도조약 체결에 반대입장을 표명했던 유인석은,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을미사변)단발령을 공포(1895)하자, 이에 대한 대처방안인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하였다. 그것은 거의소청(擧義掃淸: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소탕하는 안), 거지수구(去之守舊:국외로 망명해서 중화의 정통성을 지키자는 안), 자정치명(自靖致命:의리를 간직한 채 자결하는 안)의 세 가지였다.
유인석은 처음에 적극적인 행동방안인 거의나 자정을 택하지 않고 거수를 결심하였다. 그것은 거의나 자정이 당시 상황에서는 실현성이나 큰 효과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인석은 곧 이필희, 인춘영, 서상렬, 안승우 등 여러 의병장의 간청을 받아들여 호좌창의진(湖左創意陳)의 대장으로 취임하였다.(1896. 2. 3 음력 1895.12.20) 이 호좌창의진은 지평 의병 4백여 명을 주축으로 하고 화서의 문하생을 중심으로 한 각 지역 단위의 소규모 의병진들이 연결된 연합부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유인석은 먼저 호서의 중심부인 충주성과 제천성을 점령하면서 친일 개화파 관리들을 처단하였다. 이 과정에서 관군과의 치열한 전투로 인하여 전력의 소모와 함께 보급로를 차단당한 유인석은 새로운 전기를 모색하기 위하여 서북행을 단행하였지만, 서북지역 관리들이 의병진을 핍박하는 바람에 재기항쟁의 준비를 할 생각으로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 회인현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 현을 다스리는 서본우에게 무장해제를 당함으로써 유인석의 을미의병항쟁은 종말을 맞았다.
의병해산 후 유인석은 이주한인이 많이 살고 있는 통화현 오도구로 가서 정착하였다. 유인석은 그곳에서 효제(孝悌)와 충순(忠順)을 덕목으로 하는 향약을 실시해 이주한인들의 교화에 힘썼다.1900년 7월 의화단의 난을 계기로 귀국한 유인석은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서 제자를 양성하면서, 이 지역 주민들의 항일의식 고취에 기여하였다.
1907년 일제에 의해서 광무황제가 강제 퇴위당하고 이어서 정미7조약이 체결되자, 유인석은 1908년 7월 67세의 노구를 이끌고 부산항을 출발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유인석은 이곳에서 이상설(李相卨), 이범윤(李範允) 등과 함께 연해주를 중심으로 국외에서 활동하던 항일세력을 하나의 조직체로 통합코자 1910년 6월 10일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였고, 그 도총재에 추대되었다.
십삼도의군은 국내외를 망라하여 계몽운동자와 의병운동자 모두가 합류한 조직이었다. 십삼도의군은 고종황제에게 상소문은 보내 러시아로 망명해 올 것을 건의하고, 그 군비를 정식으로 요청함으로써 본격적인 의병전쟁을 수행코자 하였다. 그러나 이 의군이 미처 항일무력전을 개시하기도 전에 대한제국은 일제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1910년 8월 23일 하오 경술국치의 비보가 전해지자 블라디보스톡을 중심으로 한 연해주 지방의 한인들은 신한촌(新韓村)의 한민학교(韓民學敎)에 모여 한인대회를 개최하고 성명회(聲名會)를 조직하였다. 적의 죄를 성토하고 우리의 억울함을 밝힌다. (聲彼之罪 明俄之寃)는 말에서 이름을 딴 성명회에서 유인석은 다시 총대에 추대되었다. 유인석은 즉시 강제합병 반대 서명운동을 전개하여, 중국 ·러시아 원근에 산재해 있던 거의 모든 독립운동가가 망라된 8천 6백 24명이라는 엄청난 인원의 서명을 받아냈다. 유인석을 대표로 하는 이 서명록은 성명회 선언서의 부본으로 첨부되어 각국 정부 및 신문사에 발송되었다.
1910년 8월 중순 이후 노령지역에서는 일제의 위협을 받은 러시아 당국의 탄압으로 독립운동가들이 피체되는 등 국권회복운동이 극심한 제약을 받았다.1911년 러시아 당국에 구금되었던 성명회 및 십삼도의군 간부들이 석방되자 이들은 1911년 5월20일 한인의 실업을 권장하고 친목을 다진다는 목적으로 권업회(勸業會)를 발족시켰다. 그러나 실상은 국권회복운동에 더 큰 비중을 두고 활동하였던 권업회는 한인 자치단체로서 러시아 당국의 공식 승인을 얻고 유인석을 수총재로 추대하였다.
권업회 수총재를 마지막으로 사회활동을 중지하고 중국 서간도로 이거한 유인석은 1915년 1월 29일 74세를 일기로 손에 의자기(義字旗)를 들고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였다. 유인석은 보수 유림의 대표적인 인물이었지만, 민족의 독립을 위해서 혼신을 다바친 애국자였다. 계몽운동적인 성격이 강한 성명회의 회장에 무력항쟁을 기본 노선으로 삼았던 십삼도의군 도총재인 유인석이 다시 추대된 것은 일제강점 초기 민족항쟁사에서 차지하는 유인석의 상징적인 입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신돌석

신돌석은 1878년 11월 3일 경북 영해군 남면 북평리(현재 영덕군 축산면 부곡리)에서 신석주(申錫柱)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순경(舜卿)이며, 이명으로는 대호(大浩)·태호(泰浩)·태을(泰乙)·돌석(乭錫)·돌석(突石) 등이 있다.
신돌석(1878~1908) 의병장은 일제가 우리 국토를 침략하고, 주권을 유린하자 의병 봉기를 주도하여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였다. 신돌석은 1895년 명성황후의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19세의 젊은 나이로 1896년 3월 13일 영해에서 1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기의하였다. 타고난 용기와 담력으로 선생은 일본군과 대적할 때마다 큰 전공을 세웠고, 그에 따라 영해의병진의 중군장이 되었다. 특히 1907년 8월 군대 해산 후에는 해산 군대까지 휘하에 들어와 막강한 병력으로 경상북도 북동부 지역에서 일제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신돌석은 한말의병투쟁에 있어서 평민 출신의 의병장으로는 가장 먼저 기병하여 민중적 기반위에 막강한 의병세력으로 성장,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일제는 신돌석의 의병부대에 대한 탄압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신돌석을 회유하기 위한 수작을 벌이기도 하였다. 경상북도 관찰사의 서약서, 통감의 편지 등을 보내 귀순을 권유하기도 하였지만, 신돌석의 불같은 항전의지를 꺾지는 못하였다. 그는 일제의 귀순 권유서를 불살라 버리고 신명이 다할 때까지 항일 투쟁을 전개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에 따라 신돌석은 의병을 이끌고 9월 영해 희암에서, 10월 영양 금정여점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영해와 평해를 중심으로 흥안·울진·삼척 등 동해안 일대와 안동·영양 등 경북 내륙을 넘나들며 의병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뒤 겨울이 다가오자 그 동안의 전력 손실을 보충하여 다음해 봄에 재기할 것을 기약하고 잠시 의진을 해산하였다. 이후 가족들을 산중으로 피신시키고 명년의 재기를 위해 여러 곳의 동지들을 찾아다니던 중, 11월 중순 영덕 눌곡(訥谷)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신돌석은 우연히 옛 부하였던 김상렬(金相烈)을 만나 그의 집에 묵게 되었다. 그런데 김상렬은 동생 김상근과 함게 선생에게 술과 고기를 권해 만취하게 한 뒤,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그들은 일본이 신돌석을 체포할 목적으로 현상금을 걸었는데, 그 현상금을 노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신돌석은 자신이 굳게 믿었던 부하의 손에 살해되어, 1908년 11월 18일 31세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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