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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학
가.연표
  • 1894 1월 고부민란이 일어남
  • 1894 3월 전봉준이 손화중, 김개남과 함께 농민군을 조직함
  • 1894 4월 전주 감영군을 격파, 전주성에 입성
  • 1894 5월 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여 정부군과 농민군 사이에 화약 체결
           집강소 설치
  • 1894 6월 일본군이 무력으로 왕궁을 점령
           갑오경장 추진
  • 1894 10월 농민군의 북상 개시
  • 1894 11월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
나.시대적 배경

최제우의 동학창시

최제우(崔濟愚; 1824~1864)는 동학(東學)의 창시자로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수운(水雲)· 수운재(水雲齋), 초명은 복술(福述)·제선(濟宣)이다. 그는 일찍부터 경사(經史)를 익혀 학문연구에 전심하였고 이후 구도(求道)를 위해 전국을 유람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하던 중, 1855년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스님에게 얻은『을묘천서(乙卯天書)』로 도를 터득하였다. 1859년 용담정(龍潭亭)에서 보국안민의 대도(大道)를 깨우치기 위한 수도에 정진한 후 이듬해 기독교적 영향과 유·불·선의 동양 3교를 토착 민간신앙에 융합하여 시천주(侍天主)의 사상을 핵심으로 하는 인내천(人乃天)의 교리를 완성, 동학을 창시하였다.
그는 천(天)·인(人)을 대도의 근원으로 하고 성(誠)·경(敬)·신(信)을 도의 본체로 하며 수심정기(守心正氣)를 요결(要訣)로 삼아 포교를 시작하였다. 1862년 보국사(補國寺)에 들어가 도수사(道修詞)·권학가(勸學歌)를 짓고 동학론(東學論)을 집필하며 포교에 전심, 각 지방에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접주를 두어 1863년에는 교인 3천여 명, 접소 14개소에 달하였다.
1863년 7월에 제자 최시형(崔時亨)을 북접대도주로 삼은 뒤, 8월에 최시형(崔時亨)에게 도통을 계승시키고 이듬해 각 접소를 순회하던 중 용담정에서 선전관 정운구에게 체포되어 사도난정(邪道亂正)의 죄목으로 3월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처형되었다. 1893년 교조신원운동은 동학농민전쟁의 계기가 되었으며 그는 1907년 신원되었다.
그의 저서로는 《용담유사(龍潭遺詞)》, 《동경대전(東經大全)》 등이 있다.
다.전개 과정

전봉준과 동학혁명

전봉준은 전라북도 태인(泰仁) 출생으로 호는 해몽, 초명은 명숙(明叔), 별명은 녹두장군(綠豆將軍) 이었다. 아버지가 민란의 주모자로 처형된 후부터 사회개혁에 대한 뜻을 품게 되었다. 30여 세에 동학에 입교하여 고부접주(古阜接主)로 임명되고 은거 중인 흥선대원군과도 접촉하여 국정개혁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였다.
1892년(고종 29)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이 농민들로부터 과중한 세금을 징수하며 재산을 갈취하고 만석보(萬石洑) 밑에 다시 보를 축조, 불법으로 700섬의 수세(水稅)를 징수하는 등의 탐학(貪虐)을 자행하였다. 이에 농민 대표와 함께 그 시정(是正)을 진정했으나 거부당하자 1894년 1월 1,000여 명의 농민과 동학교도를 이끌고 관아(官衙)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강탈당했던 세곡(稅穀)을 농민에게 배분하고 부패한 관원들을 감금하였다. 이 보고를 받은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태를 조사·수습케 했으나 이용태는 민란의 책임을 동학교도에게 돌려 체포·투옥·살해하고 가옥을 파괴하는 등 오히려 동학교도를 탄압하였다.
이에 전봉준 등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기치를 내세우고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들에게 통문을 보내어 궐기를 호소하였다. 고부에 인접한 태인(泰仁)·무장(茂長)·금구(金溝)·정읍(井邑)·부안(扶安) 등지의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봉기, 8,000여 명이 고부 백산(白山)에 모여 제폭구민(除暴救民)·진멸권귀(盡滅權貴)·축멸왜이(逐滅倭夷)를 내세우고 금구·부안을 점령, 전주를 향해 진격 중 황토현(黃土峴)에서 관군을 격파하고 계속 정읍·고창·무장 등을 장악, 4월 28일 전주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으로 청군(淸軍)이 인천에 상륙하고 동시에 톈진조약[天津條約]을 빙자하여 일군(日軍)도 상륙하여 국가운명이 위태롭게 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의 선무(宣撫)에 응하기로 결정하고 탐관오리의 응징, 노비의 해방, 토지균분제 실시 등 12개 조목의 시정개혁(施政改革)에 대한 확약을 받고 해산하였다.
그리고 전라도 지방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동학의 조직강화에 힘쓰고 도정(道政)에 참여, 감시하였으나 근본적인 시정개혁이 실현되지 않아 재궐기를 계획하던 중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우세를 이용하여 침략행위를 노골화하자 이에 격분, 재봉기하였다. 전봉준은 남도접주(南道接主)로 12만의 병력을 지휘, 북도접주(北道接主) 손병희(孫秉熙)의 10만과 연합하여 교주(敎主) 최시형(崔時亨)의 총지휘하에 항일구국(抗日救國)의 대일전(對日戰)을 시작했다. 한때는 중부·남부 전역과 함남·평남까지 항쟁규모가 확대되었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배를 거듭하였으며 공주(公州)에서 일본군과의 대격전 끝에 대패(大敗)하고 10월 금구싸움을 끝으로 종식되었다.
교세가 점차로 증대하고 또 신도들의 대부분이 양반이나 사류(士類)에 대한 불간세력인 데다가 경전에는 ‘천주’니 ‘상제’아니면 ‘한울님’등 당시에 탄압받던 천주교에서 흔히 쓰이는 구절이 보이게 되자, 최제우는 1863년 사학(邪學)으로 몰리어 1864년 3월 10일에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되었다.
라.관련자료

집강소

동학농민군의 집강소는 1894년 2월 무장봉기 이래 점령지 군현에 대한 계속적인 장악과 그곳의 여러 가지 민정(民政)을 처리하려고 접주(接主)나 접사(接司)를 둔 데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집강소 체제는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물러난 뒤인 7월 초 전봉준(全琫準)과 전라도관찰사 김학진(金鶴鎭)이 도내의 안정과 치안질서를 바로잡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방법으로서 군현 단위로 집강소를 두기로 하는 관민상화책(官民相和策)에 합의함으로써 전면화되었다. 전봉준은 전주성 안에 농민군의 총본부인 전라좌우도 대도소(大都所)를 설치한 뒤 군현단위로 집강소를 두도록 하였다. 나주 ·남원 ·운봉 등 몇 곳은 양반 지주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설치되지 못한 곳도 있지만, 호남 대부분의 고을에 집강소가 설치되었다.
집강소는 지방행정을 원활히 수행하려고 수령의 보조기구로서 마을 단위에 두었던 집강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이후의 집강소는 농민군의 지방 통치조직으로서 역할하였다. 각 고을의 관아 안에 설치된 집강소는 1인의 집강 아래 서기·성찰(省察)·집사·동몽(童蒙) 등의 인원을 두어 각 지방의 대민 행정업무를 처리하였다. 각 군현에는 비록 군수나 현령 ·현감 등의 지방관이 있었지만 농민군이 호남 일대를 장악한 상태에서 그들의 지위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고 집강소가 사실상 지방행정을 좌우하였다. 집강소는 주로 관민상화책에 따라 무기관리와 치안유지 그리고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폐정개혁활동을 벌였지만, 곳에 따라서는 부정한 지방관과 아전들에 대한 반관투쟁(反官鬪爭), 지주들에 대한 반부민투쟁(反富民鬪爭) 그리고 양반을 대상으로 하는 신분해방투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지방행정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던 집강소는 1894년 10월 농민군의 2차 봉기 때 농민군을 조직·동원하는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고, 이후 농민군이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집강소 체제도 무너지고 말았다. 집강소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농민의 입장을 대표하면서 폐정개혁의 시행을 지향한 농민군의 지방 자치기구였다.

사발통문

통문(어떤 일이 있을 때 사람을 모으기 위하여 알리는 고지문(告知文))은 조선 후기에 많이 이용되었으며, 특히 19세기 후반 농민항쟁이 거세지면서 관에 항의하고자 각 마을마다 통문을 돌려 사람을 모았으며, 서원과 향교에서도 사람을 불러모을 때 이를 돌렸다.
예를 들면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고부봉기 때 사용한 사발통문을 들 수 있는데, 후대에 필사되었을 가능성도 있는 이것은 1968년 12월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古阜面) 송준섭(宋俊燮)의 집 마루 밑에 70여 년 동안 묻힌 족보에서 발견되었다. 각 리(里)의 집강(執綱)을 수신자로 하여 1893년 11월에 돌린 이 사발통문은 전봉준 등이 그해 11, 12월에 관에 정소를 준비하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이들은 지난날 소청(訴請) 당시에 장두(狀頭)들만이 심한 보복을 당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통문(通文)을 먼저 만든 다음 그 앞머리에 20명이 사발처럼 둥그렇게 서명함으로써 주모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도록 하였으니 후세인들이 이를 가리켜 사발처럼 생겼다고 해서 ‘사발통문(沙鉢通文)’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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