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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개화와 척사
가.연표
  • 1889 원산에 러시아저탄소설치 허가.
           함경감사 조병식, 흉년을 이유로 1년간 미국의 대일수출 금지시킴(방곡령).
           일 공사, 방곡령 철폐와 손해배상 요구. 정부가 방곡령 철폐를 훈령했으나 조병식은 이를 거부.
  • 1890 함경도 방곡령 철회.
           일본과 월미도 기지 조차조약 체결.
  • 1891 일본 공사, 함경도 방곡령에 따르는 손해배상 14만 7천여 원 요구.
  • 1892 동경에서 조오수호통상조약 조인.
           청으로부터 10만 냥을 차관하여 일본 제일은행과 미국인 타운센드에게 차관한 14만여 원을 상환.
  • 1893 동학교도들이 복합상소를 올리고 외국을 배척하는 벽보가 붙으면서 각국 외교관이 본국 정부에 군대파견 요청.
           일본과의 방곡령배상 문제, 11만원에 해결.
           방곡령배상금 1차분 상환을 위해 청에게 은 3만 5천원을 차관.
  • 1894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청과 일본에서 군대 파견.
           일본군 경복궁 침입, 반일적인 민씨 정권을 타도하고 대원군 정권 수립.
           청과 일본의 군대, 수원 부근에서 충돌, 청의 대패(청일전쟁의 서전).
           한 · 일 잠정합동조관 체결(경인, 경부철도 부설권 등).
           조 · 일 공수(攻守)동맹체결.
           일본군을 축출하려 봉기한 동학농민군, 공주 접전에서 일본군에 대패.
나.시대적 배경

흥선대원군

흥선대원군은 이름 이하응(李昰應), 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시호는 헌의(獻懿)로 영조의 5대손(五代孫)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흥선대원군은 12세인 고종을 왕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이 수렴청정하였다. 대원군은 세도정치를 분쇄하고 쇠락한 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한 각종 정책을 시행하였다. 당파를 초월한 인재 등용, 지방 양반 토호들의 기반이 되었던 서원의 정리, 호포제 실시, 의정부 부활, 각종 법전 편찬 등이 그러하였다. 그러나 경복궁 중수의 강행과 더불어 천주교도 박해는 그의 정치생명에 타격을 가져다 주었다. 또한 그의 쇄국정책은 구미열강의 식민주의적 침략을 극복할 수 있었으나, 조선왕조의 세계사와 합류를 역행하여 근대화의 길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광무황제 초 10년간의 대원군의 집정은 근대사의 추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여 근대국가로 전환을 이루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하나, 과감한 개혁정치와 서구침략세력에서 민족을 수호하고자 했던 측면이 높이 평가되고 있기도 하다.

갑신정변

갑신정변은 1884년(고종21) 10월 17일부터 19일까지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서재필 등 급진 개화파가 청국의 속방화정책(屬邦化政策)에 대항하여 자주독립을 주창하고 제도개혁을 단행하여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위로부터의 개혁운동이다.
급진 개화파는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 조선의 모든 제도를 급진적으로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나 명성황후와 개화를 반대하는 세력에 밀려 개화정책 추진에 어려움을 겪게 되자 자신들의 방해세력을 무력으로 제거하기로 하고 정변을 일으켜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광무황제를 경운궁으로 모신 뒤 새 내각을 조직하였다. 문벌타파, 평등, 재정의 일원화, 지조법 등의 개정, 경찰제 실시, 행정기구 개편 등 14개조로 된 개혁안을 선포하였으나 이는 명성황후가 청의 원세개(袁世凱)에게 원병 요청 후 이들 개화파를 공격하고 개화파를 비호하려 했던 일본군을 철수시키게 함으로써 3일천하로 막을 내리게 된다.갑신정변의 목적은 근대적이었으나 백성들 사이에 개화사상이 널리 퍼지지 못하였고 외국에 의존하여 정치적 목적을 이루려고 한 것이 문제였으나 첫째, 전근대적 국가체제를 청산하고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건설하려 했던 최초의 위로부터의 근대화운동이었으며 둘째, 갑신정변에서 추구된 자주부강한 근대국가와 시민사회, 그리고 자본주의경제와 근대문화, 자주국방은 향후 개화운동과 민족운동에서 계승되었고 셋째, 갑신정변은 향후 갑오개혁 · 독립협회운동 · 애국계몽운동 등으로 이어지는 변혁운동의 토대가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다.전개 과정

방곡령

1889년 10월의 ‘방곡령(防穀令)사건’은 함경도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이 원산항을 통해 수출되는 콩의 유출을 1년간 금지하면서 시작되었다. 방곡은 조선시대 행정의 강제력으로 곡물유통을 차단하던 경제정책이었다.일본은 방곡령의 폐지와 조병식의 처벌을 요구했고 조선 정부는 1890년 1월 조병식에 대해 3개월 감봉 처분을 내렸다. 조병식은 오히려 일본상인들로부터 곡물을 압수하는 등 방곡령을 강력하게 밀고 나갔다. 다시 일본이 조병식의 처벌과 손해배상을 요구하자 조병식을 강원도관찰사로 전임 조치하여 방곡령을 해제하였다. 그러나 함경도관찰사로 새로 부임한 한장석(韓章錫) 역시 곡물수출의 폐해를 들어 이를 금지하도록 건의하자 원산항의 방곡령을 다시 시행하였고, 이어서 황해도에도 방곡령을 내렸다.이에 일본은 1891년 11월 방곡령으로 일본상인이 입은 손해배상이라 해서 거액의 배상금을 요구하며 양국간에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일본의 침탈은 더욱 심해져 쌀의 유통·생산 과정에까지 침투, 조선 경제를 교란시켰다.청일전쟁 후 1895년부터 1904년까지 일본인의 곡물유통과정 지배·자금전대(資金前貸)·입도선매(立稻先買) 등을 통한 생산과정 침투는 한층 확대되었고, 1890년대 후반부터 일본인의 불법적인 토지 소유와 더불어 생산된 곡물을 직접 확보하는 등 곡물유출은 대일수출 총액의 80%를 차지하였다. 방곡령의 필요성은 한층 높아졌으나 일본의 압력으로 정부는 적절한 대응조처를 취할 수 없었다.총 14건 정도로 파악되는 당시 방곡령은 주로 충청·전라도의 곡창지대이며, 함경·경상·제주도는 1~2차례 시행되었다. 발령자는 각 읍 수령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관찰사·암행어사는 각각 2건, 정부 1건 등이었다. 종래 지역적 곡물시장보호의 입장에서 근본적으로 발생동기마저 점차 바뀌었다. 일본의 압력 강화로 이전 시기에 비해 일본상인을 대상으로 곡물시장보호를 위한 방곡령 실시는 줄어든 반면 지방관들이 무곡(貿穀)을 통하여 사복을 채우는 경우가 많았다. 상납전을 이용한 무곡행위는 빈민층의 반발을 유발하여 남학당·영학당과 같은 민중봉기로 이어졌다. 러일전쟁 이후 사실상 식민지화와 더불어 1904년 3월 전남 함평 군수가 실시한 방곡령을 마지막으로 소멸되었다.

갑오개혁

갑오개혁은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까지 조선의 친일개혁파 관료들이 일본의 비호 하에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제도를 근대적인 것으로 개편하려 했던 개혁운동이다.갑오개혁은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사건 이후 아관파천까지 제2차 동학농민운동, 삼국간섭(三國干涉) 및 명성황후시해사건 등의 대사건을 거치면서 3단계로 추진되었다. 1894년 7월 27일부터 12월 17일에 이르는 제1차 개혁에서는 새로 집권한 김홍집·김윤식·어윤중·박정양·유길준 등 개화파 관료들이 군국기무처를 통해 약 210건의 개혁안을 의결·실시하였다.제1차 개혁의 중점은 의정부와 궁내부의 관제제정을 포함한 정치·행정기구의 개편에 놓여 있었다. 군국기무처는 중앙집권화와 행정의 효율화를 도모하기 위해 중앙의 정치·행정기구를 궁내부-의정부-8아문(衙門)의 체제로 재정비하였다.제2차 개혁기간(1894년 12월 17일~1895년 7월 6일)에는 일본 특명전권공사 이노우에의 후원 하에 조직된 ‘김홍집·박영효·연립내각’ 이 총 213건의 개혁안을 입안하여 시행코자 하였다. 이 기간 중 추진된 개혁의 기본구상은 1895년 1월 8일에 공포된 「홍범(洪範) 14조」이었다. 이들은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근대적 내각제를 수립했다.「내각관제」의 발표를 통해 의정부의 명칭이 ‘내각’으로 바뀌었으며, 아문은 ‘부’로 개칭되고 농상아문과 공상아문이 농상공부로 통합되어 모두 7부가 되었다.한편, 지방제도는 소구역주를 채택하여 종래의 8도를 23부(俯)로 개편하였으며 그 아래에 있던 부·목·군·현 등을 모두 군(郡)으로 단일화하면서 337군을 두었다. 그리고 지방인사행정의 폐단을 막기 위해 지방관리의 임용제도를 개혁하고, 내부대신-관찰사-군수로 이어지는 명령계통을 확립함으로써 일원적인 행정체계를 수립하였다. 아울러 지방관에게 부여된 지방경찰권과 행형권(行刑權)을 분리시키고, 그들의 수세권 행사를 제한함으로써 중앙집권화와 지방행정의 효율화를 도모하였다.경제제도 정비의 일환으로 탁지부 관할 하에 세금징수 사무를 전담하는 관세사와 징세서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재정확충책의 일환으로 궁방전(宮房田)의 조사와 인삼전매사업의 실시, 일반인들의 사금채광허가 등의 조치를 취했다. 군사제도는 통위영 등 기존의 중앙군사기구를 폐지하고 훈련대를 창설함으로써 강력한 근대적 상비군을 육성하려는 개혁을 추진하였다.사법분야에서는 「재판소구성법」을 제정함으로써 행정부로부터 사법권의 독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방향으로 개혁을 진행하였다. 지방재판소·개항장재판소·순회재판소·고등재판소와 특별법원 등 5단위의 재판소가 설치되고, 2심제가 도입되었다.이 개혁의 주요 내용은 사회제도의 개혁에 있다. 반상(班常)·귀천을 초월한 능력본위의 인재등용이 거듭 강조되었으며, 문존무비 등 관리 상호간의 존·비 구별의 폐지, 공사노비의 혁파, 승려의 입성허락, 조혼과 남존여비의 풍습에 기인한 악폐의 금지 등 인습적인 전통을 근대적인 것으로 바꾸었다.제 3차 개혁기간(1895년 7월 7일~1896년 2월 11일)에는 총리대신 김홍집과 내부대신 유길준 등이 주동이 되어 140여 건에 달하는 개혁 법령을 제정·공포하였다. 그러나 김홍집·유길준 내각은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처리과정에서 친일적인 태도를 취하고 단발령을 무리하게 강행하였기 때문에 전국적으로 반일의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침내 1896년 2월 11일에 광무황제의 아관파천으로 조선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격감하고 갑오개혁은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김홍집 내각은 일본의 후원에 힘입어 집권하였지만 ‘건양’(健陽)이라는 독자적 연호의 채택, 원구단의 건축과 칭제(稱帝)시도 등 일련의 개혁노력을 통하여 민족주의적 국위선양을 도모하였다.갑오개혁은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을 모방하여 조선의 전통적인 체제를 혁파하고 근대적인 통치제제를 확립하려 했던 개혁운동이었지만 일본의 무력에 의존하여 추진했다는 외세지향적인 한계가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 실학에서 발원하여 갑신정변의 전통을 이어받아서 추진되었던 조선왕조 최후의 개혁운동으로서, 독립협회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단초가 되었다는 점에서는 그 역사적 의의가 있다.
라.관련자료

원구단과 황궁우

광무황제가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제천의식(祭天儀式)을 거행한 제단이 원구단이다. 현재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 조선호텔 위치에 있었으며, 남아있는 황궁우(皇穹宇) · 석고(石鼓) 등 부속 건물은 사적 157호로 지정되어 있다.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광무황제가 거처를 옮긴 1897년 2월 이후로 전국의 유생들은 칭제(稱帝)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여 결국 광무황제의 승낙을 받아냈다. 유학(幼學) 강무형(姜懋馨)은 적어도 동양권에서는 국왕의 호칭에 등급이 있으므로 신하된 도리로서 황제로 즉위하기를 건의한다고 전제한 다음 하루빨리 즉위하여 백성들의 마음을 지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8월 14일에 의정부 의정 심순택(沁純澤)이 ‘광무(光武)’와 ‘경덕(慶德)’을 연호의 후보로 광무황제에게 건의하여 이튿날(15일) ‘광무’를 연호로 한다는 조칙이 내려짐에 따라 16일부터 사용하기로 하였다.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황제즉위식을 거행하기 위한 원구단 축조공사가 영선사(營繕司)의 장(長)인 이근명(李根命)의 지휘 아래 10월 2일부터 시작되었다. 위치는 세종의 사위인 경정공주(慶貞公主) 남편 조대림(趙大臨)의 사저가 있어서 ‘소공동’이라고 명명된 곳으로, 임진왜란 때 총사령관인 우키다가 사령부를 설치하였던 곳이다. 1593년 4월에 일본군이 한양에서 퇴각한 후로는명의 이여송(李如松) 군이 진주하여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당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天圓地方)’라고 인식한 우주관에 따라 황제(천자)로서 하늘에 제사할 수 있는 천제단(天祭壇)을 원형(圓形)의 3개 계단으로 축조하였다. 모두 화강암으로 3층의 계단의 중앙에는 원추형(圓錐形)의 지붕을 올리고 황제를 상징하는 황색(黃色)으로 색칠하였다. 제1층 북동에서 남향으로는 황천상제(皇天上帝)의 위(位)가 있고, 북서쪽에서 남향으로는 황지기(皇地祈)의 위를 배치하였다. 제2층에는 동쪽에 대명성(大明星), 서쪽에 야명성(夜明星)의 위를 배치하였다. 그리고 제3층 동쪽에는 북두칠성(北斗七星)·오성(五星)·이십팔숙(二十八宿)·주천성진(周天星辰)·오악(五嶽)·사해(四海)·명산(名山)·성황(城隍), 서쪽에는 운사(雲師)·우사(雨師)· 풍백(風伯)·뇌사(雷師)·오진(五鎭)·사독(四瀆)·대천(大川)·사토(司土)의 위를 봉안하였다. 1899년에는 원구단 북쪽에 부속 건물로 3층 팔각의 황궁우를 건축하여 중앙에 신위판(神位版)을 봉안하고, 태조 이성계를 ‘태조고황제’로 추존하여 천신(天神)에 배향하였다. 1층과 2층이 통층이며 주위는 회랑처럼 개방되어 있다. 3층 8각의 각 면에는 각각 3개의 대형 석고를 조각하여 설치하였는데, 황궁우와 함께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그리하여 10월 12일에는 이 원구단에서 원구 악장(樂章)이 사직(社稷) 악장·풍운뢰우(風雲雷雨) 악장 등에 우선하여 연주되는 가운데 유사 이래 처음인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제정 반포함으로써 비로소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성립된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 국왕의 지위를 중국의 황제나 일본의 천왕과 동일하게 격상시킴으로써 국가적 독립을 확고히 하여야 한다”는 국민적 여망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이유는 을미사변 이후로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전후한 시기에 전개되는 일련의 사태로 말미암아 극도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시키는 데 있었을 것이다. 즉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고종의 노력과 주변국 정세 변화에 따른 시대 상황의 유리한 전개의 산물이 황제의 즉위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후로는 제천의식을 거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며, 1904년 러일전쟁에 참전하는 5만여 병력과 군마 1만여 필이 입경하여 창덕국 · 문희묘(文禧廟)·저경궁(儲慶宮)·광제원(廣濟院) 등 18개 장소에 주둔할 때는 군영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908년 7월에는 향사이정에 관한 칙령(제50호)에 따라 궁내부(宮內府)에서 주관하여 1년에 두 차례씩 향사하도록 하였다. 그러다가 1913년에는 일제에 의해 철거되고 이듬해 9월에는 조선호텔이 낙성되었으나, 황궁우와 석고는 현존하고 있다.

경복궁 중건

조선시대 궁전건축의 극치인 경복궁은 1394년 서울 북악산 아래 중국 황성을 본 따 건립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 있다가 1867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다.건축자재의 확보의 어려움과 공사비의 염출 문제 등 곡절을 겪으면서도 대원군은 굽히지 않고 1868년에 공사는 사실상 완성되었다.정전인 근정전을 중심으로 강녕전·교태전·흥복전·사정전·만춘전·자경전 등의 전각이 있었고, 근정전 서쪽에는 수정전과 경화루가 있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의 대부분은 광무황제때 중건된 것이어서 창건 당시의 건축 양식과 차이가 있으나, 당대의 건축기술의 정수를 발휘한 것이었으며, 또한 조선왕조 최초의 궁전자리였다는 점에서 경복궁은 궁전 연구의 중요 자료가 된다.

척화비

1871년 흥선대원군이 서양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경계하기 위해 서울·부산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세운 비석이다. 개항 직전 외세의 조선침투와 이에 대한 집권층의 인식을 보여주는 금석자료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를 갖추지 않은 통비(通碑)이다. 1866년 프랑스군대의 강화도 침공(병인양요)과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이 각기 일어나자, 대원군은 척화비에 쇄국의 의지를 강하게 천명코자 하였다. 1871년 6월 미국이 강화도를 침공하여 조선군과 초지진·광성보 등에서 교전한 후 물러간 사건(신미양요)이 일어났다. 신미양요 기간인 6월 12일 고종은 교서를 발표하여 미국 아시아함대의 침공에 강력하게 대처할 것과 그들과 화평을 거론하는 자들 모두를 ‘매국의 벌’로 강경히 다스릴 것을 천명하였다. 미군이 퇴각하자 여기에 고무된 대원군은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상태에서 이전부터 계속 진행해오던 쇄국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상징적 작업으로 그는 서울 종로 네거리를 비롯하여 경기도의 강화, 경상도의 동래군·함양군·경주·부산진 등을 포함한 전국 요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비석 내용은 병인양요 이래의 구호인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우리들의 만대자손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로 되어있다.

김옥균

김옥균(金玉均)은 갑신정변(甲申政變)의 주역이었다.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고우(古愚), 시호는 충달(忠達)이다.그는 1870~1880년대 당시 사대주의 수구파(守舊派)가 청나라의 후원을 믿고 위세를 펼쳐 국사가 나날이 그릇되어감을 보고 조선에서의 급선무는 개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오경석(吳慶錫)에게 신학문을 배웠다. 오경석 · 유홍기 · 박규수 등의 개화사상에 영향받은 김옥균은 1881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으로 떠났다가 1882년의 임오군변으로 귀국, 호조참판 · 외아문협판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개화당의 세력확대에 진력하였다. 개화당(開化黨) 정치인들을 규합하여 신축되는 우정국(郵政局) 낙성연을 계기로 수구파를 제거할 것을 계획하고 1884년 일본의 개화당에 대한 화친정책의 전환으로, 12일 일군 150명을 정변에 동원하였다. 12월 4일 우정국 준공 축하연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단행, 호조참판을 맡아 신정부를 주도하였다. 이튿날 조직된 새 내각에 호조참판으로 국가재정의 실권을 잡았으나 3일만에 실패하고 정변의 주모자인 김옥균·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이 일본으로 망명하자, 조선정부는 일본정부에게 갑신정변의 책임을 추궁하고 이들의 송환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조선정부의 요구를 거절하였고 일본에 체류하던 김옥균은 빨리 조선에 돌아가 민씨정권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1885년 일본 낭인(浪人)들과 결탁하는 한편 강화유수(江華留守) 이재원에게 서한을 보내 국내정세를 정탐하고 무기를 구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편지 내용이 폭로되면서 조선·일본·청국 3국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으며, 조선정부는 김옥균의 거사계획을 문제삼아 다시 그의 체포와 송환을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일본은 이러한 계획은 김옥균 개인의 생각일 뿐, 편지 내용만으로는 범행을 저지른 증거라고 볼 수 없으므로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한다고 하여 김옥균의 송환 요구를 거절하였다. 김옥균의 인도 요구를 단념한 조선정부는 그를 암살하기 위해 1886년 5월 통리군국사무아문의 주사 지운영을 자객으로 일본에 보냈다. 그러나 도쿄에 간 지운영이 개화당 인사에게 자신의 신분과 도일하게 된 목적을 자백함으로써 암살 기도가 백일하에 드러났다. 사건이 발생하자 김옥균은 이노우에 외무경과 이토총리에게 이 일을 알리고 경시총감에게 신변보호를 의뢰하였으나, 김옥균 때문에 생긴 양국간 외교분규로 성가시게 된 이론정부는 지운영을 조선으로 돌려보내는 한편 김옥균을 태평양의 절해고도인 오가사와라섬으로 강제 추방하였다. 무덥고 습기가 많은 섬에서 약 2년간에 걸친 유배생활로 건강이 악화된 김옥균은, 1888년 7월 병을 치료하기 위해 추운 지방인 훗카이도로 옮겨 억류되었다가 1890년 11월이 되어서야 약 4년간에 걸친 유배생활을 끝내고 도쿄로 돌아올 수 있었다.1892년 5월 민씨정권의 핵심 인물인 민영소는 다시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당 영수를 암살하고자 자객 이일직을 일본으로 보냈다. 이일직은 프랑스에서 귀국 도중 일본에 들른 홍종우를 매수하고, 김옥균을 경찰권이 엄하지 않은 중국 상하이로 유인하여 살해하려고 하였다. 김옥균은 이일직의 계략에 빠져 1894년 3월 이홍장의 양자인 이경방의 초청으로 홍종우와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였다. 이 사건이 터지자 청국은 김옥균 시신과 홍종우를 조선정부에 인도하였으며, 민씨정권은 김옥균 시신을 양화진에서 능지처참하여 전국에 효수(梟首)하였다.

수신사

수신사는 조선말기에 일본에 파견한 외교사절이다. 이때까지 일본에 파견하던 사신을 통신사(通信使)라고 하였는데,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수신사로 개칭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단절되었던 일본과의 외교관계가 강화도조약으로 재개되면서 일본은 초대외교의 형식을 취하여 조선에 사신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조선왕조는 예조참의 김기수(金綺秀)를 정사(正使)로 한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이들은 일본에 머무는 동안 예정에 없던 일왕(日王)과의 접견식을 가지고 일본 정계의 초대연을 받는 등 외교의례상 전례가 없는 환대를 받았다.
이러한 일본의 수신사 초대외교는 조선왕조에게는 세계정세나 근대문물을 배우는 계기가 되었지만, 그 이면에는 이를 통해 조선의 봉건지배층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권력기구의 일부를 친일파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최익현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은 1833년 경기도 포천군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에 당대의 명유학자인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선생의 문하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1855년 (23세)에 명경과(明經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사헌부지평 등의 관직을 지냈다.1866년(36세)에는 포천 자택에서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고 1876년에는 강화도조약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러한 상소를 통한 일제 배격과 자주· 자강의 노력과는 반대로 정세는 국권 상실의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이에 최익현은 1898년에는 국권회복과 외세배격을 위한 시무 12진소를 올려 자신의 간곡한 충정을 전하였다. 시무 12진소는 광무황제가 최익현에게 의정부 찬정·궁내부 특진관에 임명하였으나 나라가 기울어가는 상황에서 관직을 사양하면서 상소한 것이다.최익현은 1900년(68세) 거처를 충남 청양군으로 이주하고 1904년에는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상경하여 광무황제의 정치적 자문에 임하였다. 그는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바로 잡기위한 노력을 거듭 펼치었으나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강제되자 일본정부의 죄목 16개조를 나열한 격문을 작성, 항일 구국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마침내 의병대열로 나가게 되었다. 흥주의병 투쟁을 지도한 이후 1906년 4월에 전북 태인에서 의병투쟁의 깃발을 드날리게 된 것이다. 최익현은 문하생인 최제학을 임병한에게 보내 거병 준비를 하게 한 다음 태인 무성서원에 문생 80여명을 모아 놓고 국권회복의 기개를 호소하였다. 국가가 위급존망의 지경에 있으니 의병을 일으키는 것이 의(義) 본분임을 강조하였다. 순식간에 의병 천여명이 모이게 되었으나 관군은 곡성 순창 등지에 모인 의병부대를 공격해왔고 유생들은 선생과 함께 그 자리를 함께 하였다. 우여곡절 속에서 최익현은 관군 및 일본군에게 피체되어 임병찬과 일본 대마도로 압송케 되었다. 그 대마도에는 이미 흥주 의병진의 지사들이 구금되어 가혹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때 최익현은 식음을 전폐하고 유소(遺疎)를 임병찬으로 하여금 쓰게하였다. 당시 대마도 수비대장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핍박하고 그의 고매한 의기와 항일투쟁의 정신을 꺾으려고 하였으나 그 기개는 어찌할 수 없었다.최익현은 일제의 음식을 일체 거절하고 본국에서 보내오는 약간의 음식으로 지내다 마침내는 일제의 대마도 감옥에서 생애를 마감하게 되었다. 최익현의 정신은 이후의 수많은 의병 투쟁의 지도자와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지루가 되었던 것이다.유해는 1906년 11월 대마도에서 유해가 환국하여 충남 예산에 입장(入葬)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1907)부터는 전국의 유림들이 매년 추모제 향을 지내면서 1909년부터는 최익현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충남 홍성에 모덕사(慕德祠)를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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