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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열강의 침입
가.연표
  • 1866 독일 상인 오페르트, 영국 상선 르나 호를 타고 와서 통상 청함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 호, 평양에서 군민의 공격으로 불에 탐
           프랑스 함대, 강화도 점령(병인양요 시작됨)
  • 1867 일본에 글을 보내어 정한론을 힐책함
  • 1868 독일인 오페르트와 프랑스 선교사 페론이 덕산(德山) 남연군(南延君)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하고 도망함.
  • 1870 일본 중앙정부의 대표, 부산에 와서 국교교섭을 재개
           일본 주재 독일 대리공사 란트, 군함 헬타 호를 타고 부산에 와서 통상을 요구
  • 1871 청나라 주재 미국공사 로우,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와 함께 군함 5척을 거느리고 와서 통상을 요구.
           미군, 강화도 광성보 점령. 5월에 군민의 저항에 의해서 미국함대 물러감(신미양요).
           척화비 세움.
  • 1872 부산 왜관의 일본인, 동래부에 침입하여 주민들에 폭행.
           초량왜관을 철폐하고 일시 국교를 중단함.
  • 1875 강화도 수병, 초지진 앞바다에 나타난 일본군함 운양호를 포격하자 퇴각한 운양호는 영종진을 포격(운양호사건).
           일본 군함, 부산에 와서 무력시위.
  • 1876 강화에서 조 · 일 수호 회담시작. 불평등 조약 조일수호조약(갑자수호조약, 강화조약) 조인.
           수신사일행 서울 출발, 부산포에서 일본기선을 타고 향일.
           부산에 사설은행 설치.
다.전개 과정

병인양요

1866년 프랑스 극동함대의 강화도 침공 사건을 병인양요라 한다. 1866년 프랑스 제국의 조선 원정은 나폴레옹 3세의 식민지정책과 대아시아 로마 가톨릭교 포교정책과 결부되어 단행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었다. 이해 조선의 대원군은 천주교 집단을 유교적 전통질서에 반항하는 ‘비공식 사교(邪敎)집단’으로 규정, 금압령을 내리면서 프랑스 신부 9명을 포함하여 조선 천주교신도 수천 명을 학살하였다. 병인사옥(丙寅邪獄)은 프랑스 함대의 대(對)조선 보복원정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조선원정은 로즈 프랑스함대 사령관 주재하에 두 차례 감행되었다. 1차 원정(9.18~10.1)은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한 수도 서울까지 한강수로를 탐사하기 위한 예비적 정찰원정이었다. 로즈는 1차 정찰원정을 마친 후 제2차 원정(10.14~11.21) 준비에 착수했다. 로즈의 조선원정 목적은 선교사 학살에 대한 보복원정으로서 강화도에만 국한하지 않고 서울까지 진격, 조선정부를 응징한다는 것이었다. 10월 16일 프랑스함대는 군함 4척 상륙군 병력 총 900명을 동원, 갑곶진 상륙작전을 전개하여 무혈점령했다. 프랑스 군의 강화도침략을 보고 받은 대원군은 네가지 항전조건을 중외에 선포하면서 양이격퇴 결의를 다졌다. 그러나 프랑스군의 우월한 화력으로 강화도가 점령되어 서울 도성의 안보가 위태로워지자, 조선정부는 순무사(巡撫使)에 이경하(李景夏) · 중군(中軍) 이용희 · 천총(千總)에 양헌수(梁憲洙)를 임명하여 강화도 수복작전을 지시하였다. 양헌수는 별군관 등 군 지휘관과 산포수(山砲手) 600명을 인솔하고 통진에 진주하여 강화수복작전계획을 수립하고 정족산성에서 매복작전으로 동문과 남문으로 쳐들어오는 프랑스군에 집중 포격을 가해 적군을 격파하였다. 정족산성 패전을 계기로 프랑스군은 당초에 계획했던 서울정복작전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리하여 프랑스군은 한 달 이상 강화도를 점거한 끝에 11월 21일 강화사고에 보관중이던 고도서 등 귀중한 문화재를 약탈한 후 철수했다.
프랑스군을 격퇴한 대원군은 강화해협 항행금지비석을 덕진 돈대 앞에 세워 척사 쇄국의 굳은 의지를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신미양요

신미양요는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침공사건을 말한다. 1866년 8월 평양 대동강에서의 제너럴셔먼호사건이 발생한 후 미국은 두 차례 진상탐문조사 자행을 실시하면서 셔먼호사건에 대한 응징과 통상관계 수립을 목적으로 1871년 조선을 침략하였다. 미국은 조선원정을 단행하기로 결정하면서 주청미국공사 로우(F. F. Low)에게 조선원정의 전권을 부여하고,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J. Rodgers)에게 전함대를 총동원, 응징보복원정을 명하였다. 로저스는 휘하 전함대를 1871년 5월 초까지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집결시켰다. 인천 앞바다 무치섬을 기함 정박지로 정한 후 서울까지 항행여부를 탐사하기 위해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6월 1일 강화해협 탐측항행을 강행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강화해협은 국방 안보상 가장 중요한 해로이기 때문에 미군함대가 조선의 최고당국의 정식허가 없이 항행함은 주권침해요 영토침략 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 및 사죄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협상이 결렬되면서 로저스는 강화도 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강화도 5개 요새지를 점거하면서 조선군 수백 명을 학살한 것은 조선을 군사적으로 굴복시킴으로써 조선대표를 협상테이블로 이끌어내려는 포함외교의 책략이었다. 로저스는 작약도 기함에서 20일간 조선대표의 파견을 고대했지만 허사였다. 마침내 미군은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에 부딪혀 조선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전함대를 철수시키고 말았다. 흥선대원군은 미군 철수를 곧 패퇴로 간주하면서 폐관자수(閉關自守)만이 국가안보의 유일한 방책이라고 확신, 척화비를 전국 주요도시에 건립하는 등 서양 오랑캐의 침략을 경계하였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

운요호사건은 1875년 9월 일본 군함 운요호가 강화도에 불법적으로 접근하다가 조선군의 공격을 받고 충돌한 사건이다. 일본에서는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 조선과 외교 교섭이 난항에 빠지자 조선정벌을 주장하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었다. 조선에 파견된 바 있는 모리야마는 일본의 군함 1~2척을 조선에 파견하여 해로를 탐측하면서 무력시위를 벌이면 조선과의 교섭에 유리한 권리를 획득할 수 있다는 내용의 건의서를 제출하였다. 일본은 모리야마의 건의를 받아들여 열강 세력에 앞서 무력시위로 조선을 침략하고자 중무장한 일본군함 운요호를 출동시켰다. 조선의 동해안을 측량하며 무력시위를 마친 운요호는 이어서 서해안 해로를 측량하는 체하며 북상하였다. 이리하여 운요호는 앞서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함대와 신미양요 당시 미국함대 등 어떤 외국함선도 접근할 수 없었던 한강하류 강화근해의 요새지인 초지진(草芝鎭) 포대로 접근하였다. 신미양요와 병인양요를 겪은 조선군 포대의 수비병들은 수차례 경고했지만 이 말을 듣지 않자 포격을 가하였다. 조선군의 발포를 유도하는데 성공한 일본군은 운요호로 철수하면서 초지진에 대한 맹렬한 포격을 가하였다. 포의 성능이나 포술이 일본군에 비해 떨어진 조선수비병들은 근대식 포와 소총을 장비한 일본군을 대적할 수 없어 패주하고 말았다. 일본군은 대포와 화승총 등을 약탈하고 영종진에 대한 방화 ·살육·약탈을 감행하여 공해와 민가가 분탕되어 화염에 휩싸였다. 일본군의 엄연한 침략 행위였음에도 일본은 이 포격전의 책임을 조선에 씌워 전권대사를 파견하고 조선에 항의하였고, 한편 일본 내의 반한감정을 고취시키면서 대규모의 군대 파견을 준비하면서 조선에 수교회담을 요구하였다. 일본은 8척의 군함과 600명의 군대를 부산에 따로 상륙시켜 무력적 위협과 함대시위를 하는 가운데 1876년 2월 「한일수호조규(韓日修好條規: 강화도조약」를 체결하였다.
이 조약으로 인해 조선은 개항정책을 취하게 되어 세계무대에 등장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나, 불평등조약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식민주의적 침략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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