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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호란을 이겨내다(양난을 극복한 조선)
가.연표
  • 1608 광해군 즉위
  • 1616 누르하치, 후금 건국
  • 1618 후금, 명의 요동 공격
  • 1619 명에 원군 파견(강홍립)
  • 1623 광해군 퇴위(인조반정)
  • 1624 이괄의 난
  • 1627 후금, 조선 침략(정묘호란)
  • 1636 후금, 국호를 청으로 바꿈
  • 청, 조선 침략(병자호란)
  • 1637 인조, 청에 항복
  • 1652 효종, 북벌정책 추진
나.시대적 배경조선과 명나라가 임진왜란을 겪는 동안 만주 지역에 흩어져 살던 여진족은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부족을 통합하면서 강성해지고 있었다. 이들은 1616년에 후금을 건국하고, 그 여세를 몰아 중국을 정복하고자 쇠퇴해 가던 명나라를 공격하여 요동지역을 빼앗았다. 그러자 명나라는 10만의 군사를 조직하여 후금을 공격할 준비를 하면서,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보내준 것에 대한 보답을 요구하며 조선에 지원군의 파병을 요구했다.
임진왜란을 겪은 우리나라는 17세기 초에 선조의 뒤를 이어 북인의 지원 아래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다. 이미 임진왜란 때에도 부왕 선조를 대신하여 백성을 위로하고 군사를 모으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광해군은 임금이 되자 전쟁의 피해를 극복하고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하고 있었다. 이렇게 전후 복구에 온 힘을 기울이던 광해군은 후금과 명나라의 전쟁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이러한 입장으로 인해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어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와의 의리를 강조하는 많은 신하들과 대립하게 되었다.
다.전개 과정

광해군의 중립외교

광해군은 사신과 첩자들을 통해 얻은 정보를 통해 기울어져 가는 명나라와 그 기세가 날로 뻗어나던 후금의 국력을 비교했다. 그 결과 전란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조선은 중립을 지키는 것이 가장 실리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성리학적인 생각에 기울어 있던 신하들 대부분이 “명나라의 은혜를 갚을 좋은 기회”라고 하며 적극 파병을 주장했다.
명나라의 요구를 거절할 마땅한 명분이 부족하고, 많은 신하들의 주장을 무시할 수도 없었던 광해군은 결국 강홍립을 도원수로 임명하여 13,000명의 군사를 파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전쟁의 형세를 보아 어떻게 행동할지를 정하라’는 밀지(비밀 명령)를 내렸다.
군사를 이끌고 요동으로 출정한 강홍립은 명나라 군과 연합하여 부차라는 곳에서 후금군과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명나라 군이 크게 패하고 조선군도 막대한 피해를 당하자 나머지 군사를 살리기 위해 후금군에게 투항했다. 강홍립은 조선은 명나라의 요구 때문에 마지못해 출병한 것이라고 후금을 설득하여 더 이상의 전쟁 확대를 막았고, 이후 후금에 머물면서 중요한 정보들을 광해군에게 보냈다. 강홍립 묘 광해군은 조선이 명나라와의 의리를 중요시하고 있다는 모습을 보여주는 한편, 후금과의 평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광해군은 이후에도 명나라의 지원병 요청을 슬기롭게 물리치면서 조선의 국력 회복에 힘을 기울였다. 또한 요동에서 조선으로 피신해 온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후금을 치겠다며 군사를 모으고 식량을 요구하자, 그를 의주 아래 철산 앞바다에 있는 가도라는 섬에 들어가 있게 함으로써 명나라에게는 모문룡을 지원할 것처럼 하고, 후금에게는 모문룡을 가두어 놓은 것처럼 함으로써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인조반정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반대하던 사람들도 많았는데, 특히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서인 세력은 광해군이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새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위시킨 죄를 묻는다는 명목과, ‘군주가 배은망덕해서는 나라가 바로 설 수 없다’는 명분으로 1623년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추대했다(인조반정). 이는 광해군을 지지했던 북인과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반대했던 서인 간의 붕당 다툼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조정은 명나라와 합세하여 오랑캐(후금)를 치자는 척화파와, 후금과 화해하여 실리를 얻자는 주화파로 의견이 갈렸다. 김상헌,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이 척화파였으며, 주화파의 대표적인 인물은 최명길이었다. 척화파에 비해 주화파의 세력이 극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에, 척화파의 주장이 강해져서 조선은 결국 후금과의 교역을 끊는 등 친명배금(명과 친하고 금을 배척함) 정책을 추진했다. 조선이 가도에 있는 모문룡에게 식량을 대주며 적극적으로 지원하자, 명나라를 공격하고 있던 후금은 배후의 불안을 느끼게 되어 먼저 조선을 칠 생각을 하게 되었다. 최명길 묘 더욱이 조선에서는 이괄의 난이 일어나 후금에게 조선을 침공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어 주었다. 인조반정이 끝나고 서인들 사이에서 논공행상을 둘러싼 분열이 일어났다. 이때 인조를 왕위에 올리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이괄은 자신이 2등 공신이 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624년 난을 일으켰다. 한때 이괄의 군사는 한양을 점령하고 인조가 공주까지 피난을 갔지만, 장만장임경업 등의 활약으로 이괄의 난은 진압되었다. 그러나 그의 잔당들이 후금으로 도망하여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함으로써 조선 침공의 빌미가 된 것이다.

정묘호란

인조반정 이후 서인 집권 세력이 후금과의 관계를 끊고 노골적으로 명나라를 지원하자 후금은 조선을 공격하여 배후의 위험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의 조선에서는 “우리 나라 몇천 리 넓은 땅에 어찌 누루하치 같은 야만인을 감당해 낼 사람이 없겠는가” 하며 적을 무시하고 방비를 소홀히 했다.
1627년 후금은 드디어 3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침공했다(정묘호란).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점령한 후금군은 조선군을 격파하면서 개성 가까이 내려왔다. 전세가 다급해진 인조는 소현세자를 전주까지 피신시키고 자신은 강화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의주, 용천, 철산 등지에서 정봉수, 이립이 이끄는 의병이 일어나 용골산성을 중심으로 후금군의 배후를 공격하자, 후금군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했다. 이때 주화파 최명길은 후금군과 같이 내려온 강홍립과 더불어 척화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후금과의 화약을 성립시켰다. 후금군은 물러가는 조건으로 조선이 후금을 형님의 나라로 받들고 많은 물자를 바칠 것 등을 요구했으며, 조선은 그런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병자호란

후금은 명나라를 공격하는 데 필요한 물자를 조선에 요구했다. 그 요구량은 점점 늘어갔고, 병력까지 요구하더니 형제관계를 넘어 군신관계까지 요구했다. 이에 조선은 다시 척화파의 주장대로 친명배금 정책으로 입장을 바꾸고 군신관계를 거부하며 남한산성과 강화도에 성을 쌓고 식량을 비축하며 대비책을 마련했다.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꾼 후, 조선의 왕자를 보내 사죄할 것과 척화론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잡아서 보낼 것을 요구했다. 만약 계속 조선이 척화론을 내세울 경우 대군을 보내 침공하겠다고 위협했다. 조선이 거듭된 청의 경고를 무시하고 청과 싸울 태세를 갖추자 1636년 10만여 군대를 앞세워 조선을 침공했다(병자호란).
청나라 군은 임경업이 지키던 백마산성을 피해 곧바로 한양을 향해 진격했으나 조선군은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청나라 군이 너무 빨리 한양 가까이까지 다가오자 인조는 급하게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청나라 군은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한 채 항복을 요구했으나 포위망을 뚫지는 못했다. 인조는 요청했던 명나라의 원군도 오지 않는 상황에서 어렵게 버티고 있었다.
척화파들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으나 다음해 1월,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는 결국 주화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항복했다. 청나라는, 조선이 명나라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청나라에게 신하로서의 예의를 갖출 것과 청나라가 명나라를 칠 때 지원군을 보낼 것, 세자와 왕자, 척화론을 주장했던 대신들을 인질로 보낼 것 등을 강요하여 조선의 굴복을 받아낸 후, 조선의 수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끌고갔다.
이후 청은 명을 공격하면서 조선에 지원군을 요구했다. 지원군을 이끌고 출전한 임경업은 몰래 명과 내통하여 싸우는 시늉만 했으며 소극적으로 전투에 가담했다. 청이 경제적 착취를 가하고 정치적 간섭을 자행하자 조선에서는 청에 대한 적개심이 더욱 커져갔다. 이러한 때에 청에 인질로 가 있던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의 관계를 개선시키려 노력하면서, 직접 경험한 청의 발달된 문물과 선교사를 통해 얻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조선에 들여오려 했다. 그러나 소현세자는 돌아온 지 두 달 만에 갑자기 원인 모르게 죽고 만다. 갑작스럽게 죽은 소현세자의 시신이 검게 변해 있었고, 피를 쏟고 죽었다는 기록이 있어 독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소현세자 대신 인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즉위 초부터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고자 북벌정책을 추진했다. 군사력을 강화하고 무기를 개발했으나 재정이 부족하여 직접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오히려 청나라의 요구에 의해 청나라와 러시아가 국경분쟁을 벌이던 헤이룽강 부근으로 군대를 두 차례 보내 러시아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하기도 했다(나선정벌). 이후에도 현종, 숙종 때까지 북벌정책이 계속 추진되곤 했으나 실제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그러나 조선은 북벌운동을 통해 반청의식이 고조되면서 그만큼 문화적 자존의식도 강해져 갔다. 또한 이 대청항쟁을 통해 의병과 척화 주전론자들의 구국을 위한 높은 기개가 유감없이 표출되었다. 이들의 강렬한 구국정신은 청으로 하여금 조선을 무력으로 정복할 수는 있되, 무력으로 통치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식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라.관련자료

병자호란의 현장 남한산성

남한산성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있는 남한산성은 사적 57호로 지정되어 있다. 남한산성은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고, 성벽의 외부는 급경사를 이루는데 비해 성 내부는 경사가 완만한 넓은 분지를 이루고 있어 방어하기에 유리하여 백제가 위례성에 도읍해 있을 때부터 중요시했던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려시대와 조선 전기에도 이곳에는 성이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일장산성’으로 나와 있으며, ‘둘레가 3,993보, 성안에는 군자고(군수물자를 저장하는 창고)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으며 논과 밭도 꽤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조 때 이괄의 난을 겪은 후 1624년부터 1626년까지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여 대대적인 보수와 증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정묘호란 때는 이용하지 않았다. 1636년의 병자호란 때 청군이 빠르게 한양을 향해 진격해 오자 세자빈과 왕자, 대신들을 강화도로 피신시킨 인조는 세자와 함께 이곳으로 피신하여 2개월 동안 항전했다. 청군은 남한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항복을 요구했다. 한겨울의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면서도 전국에서 구원군이 몰려와서 청군을 격파하고 위기에 빠진 조선의 운명을 구해주기를 모두 기대했으나, 관군과 의병들은 작은 승리를 조금 거둔 것 이외에는 번번히 청군에게 패하여 흩어졌다. 척화파들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으나, 다음해 1월 말에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는 결국 주화파 최명길의 주장을 받아들여, 성문을 열고 나가 한강의 삼전도 나루에서 청의 태종에게 항복했다.
현재 남한산성에 남아 있는 역사유적으로는 병자호란 때 군사를 지휘했던 수어장대, 백제의 시조 온조왕과 성 쌓는 총책임을 맡았던 이서를 기리는 사당인 숭열전, 성의 동남쪽을 쌓는 책임자였다가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이회와 그의 부인의 영혼을 위로하는 사당인 청량당, 병자호란 때 끝까지 청과 싸울 것을 주장했다가 청으로 끌려가 죽음을 당한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와 김상헌, 정온 등 척화파 대신을 기리는 사당인 현절사, 군사들을 훈련시켰던 연무관, 임금이 임시로 머무는 행궁 등이 있고, 장경사, 망월사, 개원사 등 절이 위치해 있다.

치욕과 교훈의 삼전도비

삼전도비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 석촌호수 부근에 삼전도비가 세워져 있다.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했던 치욕의 장소에 세워진 이 비석의 앞면 위쪽에는 ‘대청황제 공덕비’라고 쓰여 있다.
1637년 1월 30일, 2개월 동안 항전하다가 남한산성에서 나온 인조 임금은 세자와 함께 이곳 삼전도 나루에서 청의 태종에게 항복했다. 청의 장수 용골대가 주관한 항복 예식에서 청의 태종이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하고 말하자, 인조는 “천은(天恩-천자, 즉 청 태종의 은혜)이 망극합니다.” 하고 답한 후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숙여 항복했다. 청 태종에게 차와 술을 올린 후, 청 태종의 명에 따라 활쏘기 놀이를 하고, 청 태종이 하사한 여진족의 모피 옷을 입고 감사의 인사를 올린 후, 국보(옥새라고도 하는 국가의 도장)를 바쳤다. 항복 예식이 이루어지는 내내 강화도에서 잡혀온 세자빈과 왕자, 대신들도 자리를 함께 했는데, 모두들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
이때 청 태종은 자신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도록 강요했다. 아무도 비석의 글을 짓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마지못해 이조판서 이경석이 글을 지어 청으로 보내서 청 태종이 직접 검토한 후에 내용을 약간 고쳐서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청나라가 조선에 쳐들어온 이유, 조선이 항복한 사실, 항복한 뒤 청 태종이 피해를 끼치지 않고 곧 군사를 돌려 물러갔다는 것 등이다. 이 같은 내용을 한문, 만주문, 몽골문의 3개국 문자로 새겨 넣은 특이한 비석이다. 이 비문을 써야 했던 당시 한성 판윤 오준은 오른손을 돌로 찍어 두 번 다시 글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청나라가 패하자, 조선시대 가장 큰 치욕의 상징이었던 삼전도비는 사람들에 의해 한강바닥에 버려졌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던 1895년에 삼전도비는 다시 세워졌다.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짓밟고 일본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다. 해방 이후 삼전도비는 국가적으로 수치스러운 비석이라 하여 다시 땅에 묻혀졌다가, 후세들에게 패배와 치욕의 사실을 그대로 보여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으로 1983년에 서울시에서 복원하여 현재의 자리에 세웠다

삼한산두(三韓山斗) 삼학사의 충절

중국 발해대학 내에 복원되어 세워져 있는 삼학사비 1930년대에 중국의 봉천에서 용을 조각한 비석 하나가 중간이 부러진 채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다 발견되었다. 이 비석에는 ‘삼한산두(三韓山斗)’라는 휘호가 쓰여져 있는데, 이는 ‘조선의 태산과 북두, 즉 태산과 같이 높고 북두칠성과 같이 빛난다’는 뜻이다. 병자호란 때 끝까지 화의를 반대하다 청나라에 끌려가 죽음을 당한 삼학사의 기개에 굴복한 청 태종이 세웠다고 전해지고 있다.
삼학사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의 화의를 끝까지 반대한 윤집, 오달제, 홍익한의 충절을 기려 부르는 말이다. 1636년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겠다며 모욕적인 조건을 제시해 오자, 윤집, 오달제, 홍익한은 이 사신을 죽여 모독을 씻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병자호란 때 조선이 패하고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면서 화의가 성립되자 이를 끝까지 반대하던 세 사람은 청나라로 붙잡혀 갔다.
청 태종은 이들 삼학사를 회유하여 신하로 만들고자 했다. 삼학사는 온갖 회유와 엄청난 고문에도 추호의 굴함이 없이 당당히 맞서며 이를 완강히 거절했다. 이들을 처형하기 전 청 태종은 친히 국문했다고 전한다. 이때 홍익한은 국문에 맞서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못함을 안타까워할 뿐’이었으며, 윤집과 오달제도 ‘몸바쳐 나라를 구하려 했던 뜻은 죽어도 떳떳하다’는 기개를 보였다. 청 태종은 이들의 기개에 오히려 감탄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삼학사가 죽고 난 후 그들의 충절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
청나라가 몰락하고 혼란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비석은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고 파괴된 채 방치되다가 1930년대에 발견되었다. 동포들은 성금을 모아 비를 복원했다. 그러나 1960년대 중국의 문화혁명 때 이 비는 다시 파손되어 비신만이 세 조각난 채로 농가의 주춧돌로 쓰이는 신세가 되었다. 다행히 이 비석을 발해대학에서 구입하여 보관하게 되었고, 2005년에 발해대학 후원회가 중심이 되어 발해대학에 비석을 복원하여 세웠다. 독립기념관 겨레의 큰 마당에도 삼학사비를 복원하여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애국충절의 기개를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고 있다.

강홍립

강홍립의 묘 강홍립은 명종 15년(1560)에 태어나 선조 22년(1589)에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원래 문관이었지만, 1605년에 도원수 한준겸의 종사관이 된 이후 주로 무관의 길을 걸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했으며,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다음해(1609)에는 한성부우윤(지금의 서울특별시 부시장에 해당)이 되었고, 광해군의 신임을 얻어 중요한 관직을 거친 후에 1618년에는 진녕군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때 새로 일어난 후금과 명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명이 지원군을 요청하자, 광해군은 강홍립에게 ‘(전쟁의) 형세를 보아서 행동을 결정하라’는 비밀명령을 내리고 13,000의 군사를 주어 보냈다. 강홍립은 일부러 매우 천천히 군사를 움직였지만, 명의 독촉이 심해서 할 수 없이 압록강을 넘어 유정 휘하의 명군과 합세했다. 유정은 임진왜란 때 조선에 구원군을 이끌고 왔었던 인물이었다. 조선과 명의 연합군은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을 따라 후금의 본거지를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명의 장수 간에 의견이 맞지 않고 후금의 교묘한 작전에 말려들어서 사르후 전투에서 명의 주력군이 대패했고, 이어 벌어진 부차 전투에서 조선과 명의 연합군도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조선의 장군 김응하는 후금군에게 포위되어 끝까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렇게 되자 강홍립은 후금군에게 사신을 보내 “조선군은 어쩔 수 없이 출병한 것”이라는 뜻을 밝히고 부하 장군 김경서와 함께 남은 군사를 이끌고 투항했다. 이후 그는 후금에 머물면서 몰래 광해군에게 후금과 명의 사정을 알림으로써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뒷받침해 주었다. 그러나 조선의 척화파들이 그를 역적으로 몰아세우며 그의 가족들을 대신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광해군은 그의 가족을 감옥에 가두는 것으로 대신했다. 1627년 정묘호란 때 강홍립은 후금군과 함께 들어와서 조선의 주화파 최명길과 함께 화해를 성립시켰다. 그는 후금군이 물러갈 때 그대로 남았다가 “오랑캐에게 항복한 역적”이라는 욕을 먹으며 관직을 박탈당했고 그 해 7월에 죽었다. 그가 죽은 후에 관직은 복관(원래대로 임명)되었다.

최명길

1586년에 태어난 최명길은 이항복과 신흠에게서 배웠고, 20세였던 1605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로 나갔다. 서인에 속했기 때문에 광해군 때는 북인과 대립했으며 인조반정에 가담했다.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정묘호란 때 후금에 가 있다가 후금군과 함께 들어온 강홍립과 함께 화해를 성사시켰다. 병자호란 때에도 “싸우자니 힘이 부치고, 감히 화의(화해)하자고 못하다가 하루 아침에 성이 무너지고 임금과 백성이 물고기처럼 죽임을 당하면 종사(나라)를 어디에 보존하겠느냐”며 척화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외롭게 화해를 주장했다. 삼전도에서 인조가 굴욕적으로 항복했기 때문에 그는 대부분 사람들로부터 ‘비겁한 소인배’라는 욕을 먹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성리학의 정통만을 고집했던 척화파와는 달리 실제적인 것을 추구하는 양명학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서인 중에서도 개혁파에 속했다. 그는 주화론을 주장하면서도 척화파의 입장을 이해했으며, 청나라에 항복했으면서도 임경업을 통해 기울어져 가던 명과 몰래 연락을 취하는 등 실리적인 외교를 하다가 청나라에 발각되어 청으로 끌려가기도 했다. 1645년 인질로 청에 갔던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는데, 소현세자가 갑자기 죽고 세자빈도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게 되었을 때에도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용서할 것을 주장했다. 백성의 삶과 정치의 안정에 주력하다가 1647년에 운명했다.

용골산성

조선시대에는 평안도 용천부였으며, 현재 북한의 행정구역상으로는 평안북도 염주군 방곡리와 피현군 성동리에 걸쳐 있는 용골산에 내성과 외성 두 겹으로 된 용골산성이 있다. 백마산성과 마찬가지로 험한 지형에 요새 형태로 쌓은 고구려의 성을 바탕으로 조선에 와서 다시 덧붙여 성을 쌓았다.
밑부분에 고구려식 성 쌓기가 남아 있는 내성은 둘레가 약 670m로, 성벽의 높이는 4m이며 길쭉한 사각형의 돌을 짜맞춰서 견고하게 쌓았다. 외성은 조선 숙종 때인 1692년에 쌓았는데, 내성의 남쪽 벽에 이어서 남쪽 방향으로 둘레 약 2,500m로 쌓았다. 조선후기의 지리지인 『대동지지』에는 성 안에 3개의 샘과 군사를 지휘했던 장대, 봉화불을 피워 올렸던 봉수대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1627년에 일어난 정묘호란 때 이곳에서 정봉수가 4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어 이미 주력군이 남쪽으로 내려간 후금군의 배후를 끊고 항전했다. 원래 조정에서는 난리를 피해 용골산성에 모여 있던 피난민들에게 더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라고 일렀지만, 정봉수가 의병을 모집하여 이 성을 근거로 싸우겠다고 하자, 그에게 군사 지휘권을 주었다. 정봉수는 용골산성이 험하여 후금의 군사들이 말을 타고 공격하기가 어려운 점을 이용하여, 매복 등 다양한 공격 전술을 사용하여 여러 차례 공격해 온 후금군을 물리쳤다. 이러한 정봉수 의병의 승리는 의주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립의 활약과 더불어, 남쪽으로 진격하여 한양을 위협하던 후금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강홍립과 최명길이 주도한 후금과의 화약이 빨리 이루어질 수 있도록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백마산성

백마산은 천마산 줄기와 이어져서 평안북도 의주군과 피현군의 경계에 있는 해발 410m의 산이다. 거기에 내성과 외성 두 겹으로 이루어진 백마산성이 있다. 원래 고구려 때 쌓은 우마성이 있었는데, 고려에 와서 우마성을 기초로 하여 다시 석성(石城-돌로 쌓은 성)을 덧붙여 쌓았다. 우마성은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에 쌓은 성으로 짐작되며, 백제나 신라의 산성들이 주로 퇴미식(산봉우리를 둘러쌓은 형태)인데 비하여 포곡식(골짜기까지 포함하여 산을 둘러쌓은 형태)으로 쌓은 성이다. 그 일부가 지금도 산꼭대기 부근에 남아 있다.
백마산성의 내성은 고려 현종 때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강감찬 장군이 쌓았으며, 둘레가 약 2,600m에 이른다. 조선에 와서 이괄의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의주부윤 임경업이 후금(청)의 침입에 대비하여 1632년에 다시 내성을 보강하여 쌓았다. 임경업은 이 성을 근거로 청이 침입을 막고자 했으나, 청군은 이곳을 피하여 그대로 남쪽으로 진격하여 남한산성을 포위했다. 임경업은 청의 배후를 끊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자 했지만, 병력의 부족과 예상보다 빠른 조선의 항복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내성의 사방에는 홍예(무지개 모양의 문)가 나 있으며, 그 안에 우물과 창고 터들이 남아 있고, 장대(군사를 지휘했던 누각 건물) 터도 남아 있다. 또한 강감찬, 임경업 등 18명의 장군들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도 있다. 외성은 영조 때인 1753년에 내성의 남벽을 그대로 이용하여 쌓았으며 둘레가 약 2,430m에 이른다.

강화도

강화도는 선사시대부터 시작해서 많은 유적과 유물이 있는 곳이며, 고려와 조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벌어졌던 장소이다. 특히 북방민족이 쳐들어 오면 고려시대 몽고가 쳐들어 왔을 때처럼 피난처로 이용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1627년 정묘호란 때 후금군이 황해도 평산까지 쳐들어 오자, 인조는 김상용에게 한양을 방어하도록 하고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신시켰다. 인조 자신은 이곳 강화도로 피신하여 항전했다. 다행히 두 달만에 후금과 화해가 이루어졌지만, 1636년의 병자호란 때는 청군이 너무 빨리 한양까지 다가오는 바람에 세자빈과 몇몇 대신들만 미리 강화도로 피신할 수 있었다. 이때 강화도 수비를 맡은 김경징과 강화유수 장신은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 청군의 공격에 대비하는 방어 태세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1637년 1월 21일에 청군이 강화도를 본격적으로 공격하려고 몰려오자, 김경징과 장신은 부랴부랴 각 장군과 대신들에게 지역별로 방어하는 책임을 맡기고 항전했다. 그러나 군사들의 사기는 이미 땅에 떨어져 있었고 서로 손발도 맞지 않는 상태인지라 제대로 전투 한 번 치르지 못하고 청군의 상륙을 허용했다. 김경징과 장신은 나룻배를 타고 도망가고, 강화성 안에 남아 있던 세자빈은 급하게 원손(세자의 맏아들)만 당진으로 피신시켰다. 그러나 세자빈과 왕자들, 대신들은 거의 청군의 포로가 되었다. 강화도를 점령한 청군은 관청과 민가에 불을 지르고 약탈과 학살을 자행한 뒤 다시 남한산성으로 가서 인조 임금의 항복을 요구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이 청군에게 죽임을 당하고 포로가 되었으며, 정묘호란 때 한양을 방어했던 원로대신 김상용이 자결했고, 나중에 소론의 지도자가 된 윤증의 어머니 등 상당 수 양반과 부녀자들이 청군에게 포로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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