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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란을 막아내다(양난을 극복한 조선)
가.연표
  • 1575 동서분당
  • 1583 이이, 10만 양병설 건의
  • 1590 도요토미 히데요시, 일본 통일
  • 조선, 통신사 파견
  • 1592 일본군 20여만 명, 조선 침략(임진왜란)
  • 한산도대첩
  • 진주대첩
  • 1593 행주대첩
  • 2차 진주성 싸움
  • 1596 명과 일본, 휴전 협상 결렬
  • 1597 일본군, 다시 조선 침략(정유재란)
  • 명량해전
  • 1598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일본군 철수
  • 노량해전
  • 1609 기유약조, 부산포에 왜관 설치
  • 1616 여진족, 후금 건국
나.시대적 배경조선 건국 이후 비교적 안정되었던 일본과의 관계는 16세기에 이르러 크게 악화되기 시작했다. 일본의 무역 요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조선 정부의 통제는 강화되었고, 이에 일본군들이 조선의 해안 지방을 습격하여 약탈하는 일이 빈번해졌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은 각 지방의 영주들이 독립된 세력으로 서로 경쟁하던 전국시대였는데, 1590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 전역을 통일하게 된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취약한 과도적인 연합정권을 극복하고 다이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대규모의 해외원정사업을 계획하기에 이른다.
조선 정부는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고 일본에 사신을 보내 정세를 살피기도 했다.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돌아온 정사 황윤길은 “일본이 병선 등의 전쟁 준비가 한창이므로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부사 김성일은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보고하여 동인과 서인 사이에 논쟁이 격화되었다. 조선 정부는 결국 김성일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각 도에 성을 쌓는 등 서둘러 왜적의 침입에 방비하던 것조차 중지시켰다.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군대와 식량을 충분히 준비하자는 주장에 비해 전쟁 준비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줄여야 한다는 신료들의 의견이 더 거셌기 때문이다.
다.전개 과정

20만 일본군의 조선 침략

동래부순절도 일본은 침략에 앞서 조선에 정탐꾼을 파견하여 조선의 지리와 정세 등의 정보를 치밀하게 수집했다. 내부적으로는 서양의 총포술을 도입하여 개량한 조총으로 군사들을 무장시켰다. 마침내 일본은 ‘명을 치러 가는 데 길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기에 이른다. 조선이 거부하자 이를 조선 침략의 구실로 삼아 1592년 20여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조선을 침략했다(임진왜란).
전쟁에 미처 대비하지는 못했지만 조선은 일본군에 맞서 부산진과 동래성에서 치열하게 대항했다. 동래성에서 일본군은 성을 포위하고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라”는 글을 써서 성문밖에 붙였다. 동래 부사 송상헌은 “싸워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는 글을 써서 던지고 목숨을 걸고 싸웠다. 그러나 일본군의 상륙을 막아내지는 못했다. 결국 부산을 점령한 일본군은 세 길로 나누어 서울을 향해 올라가 부산에 상륙한 지 불과 18일만에 한양을 점령했다.

의병과 수군의 활약

일본 육군이 북상하는 동안 일본 수군은 남해와 황해를 돌아 물자를 조달하고자 했다. 그러나 육지에서의 패배와 달리 해상에서의 전투는 그 양상이 달랐다. 비록 전쟁 초기 경상도 해상에서 원균이 패하여 많은 함선을 잃기도 했으나,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 평상시부터 정비해 두었던 전선과 거북선을 이끌고 일본의 수군을 닥치는 대로 격파하며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의 수군은 옥포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둔 이후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었으며 특히 한산도대첩으로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지키고, 일본군의 통로와 보급로를 차단시킬 수 있었다. 의병승장비 일본군을 맞아 조선 수군이 연전연승할 수 있었던 데에는 판옥선이나 거북선이 일본 전함에 비하여 견고하면서도 기동력이 뛰어나고, 천자총통이나 지자총통 등 무기의 화력이 우세한 데 있었다. 또한 조선 수군은 실전이 벌어지는 서남 해안의 다양한 굴곡과 조수 등을 잘 알고 있어 교묘히 활용할 수 있었으며, 특히 이순신을 비롯한 해군의 탁월한 능력과 적절한 전략 및 전술 등을 통해 단호히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왜란이 일어났으나 관군의 무능으로 국토가 짓밟히고 무고한 백성들이 희생을 당하자, 스스로 가족과 고향을 지키고 나라를 구하겠다는 의지로 각 지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계층이 의병에 참여했으며, 스님들도 승군으로 참여했다. 의병은 향토 지리에 밝은 이점을 이용하여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에 관군의 전투 능력도 강화되어 전쟁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작했다. 의병들의 활동은 수군의 승리와 더불어 불리했던 전세를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인 활력소가 되었다

일본군의 침략 격퇴

해상에서의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수군의 활약, 육지에서의 전국적인 의병 봉기, 전력을 회복한 조선 관군의 반격 등으로 전세가 어렵게 되자 일본군은 군수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호남지역으로 들어가는 관문인 진주성에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이에 김시민이 이끄는 관군과 의병 3천여 명은 진주성 백성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왜적 3만여 명과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끝에 이들을 무찔렀다. 이 진주성 전투는 임진왜란 기간 중 육지에서 최초로 거둔 대승이었으며, 이순신의 한산 대첩, 권율의 행주 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히고 있다.
명나라가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세는 크게 바뀌었다.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되찾고 남진했으며, 권율은 남쪽으로 내려오는 명나라의 원군과 합세하여 한양을 되찾기 위해 행주산성에 진지를 구축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가 벽제관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후 개성으로 후퇴하자, 일본군은 대병력을 동원하여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물밀듯이 쳐들어 오는 왜적을 맞아 각종 총통과 비격진천뢰, 신기전 화차 등을 동원하여 왜적을 격퇴했고, 끝내는 화약과 화살이 부족해 위기에 처하자 부녀자들이 행주 치마에 돌을 날라 싸우는 치열한 전투 끝에 적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두었다. <행주대첩 행주산성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때 명나라 군대는 심유경을 내세워 일본군과 휴전 협상을 시작했고, 일본군은 경상도 해안으로 밀려났다. 남으로 밀려난 일본군들은 지난날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진주성을 대대적으로 공격했고, 진주성이 함락되어 수만 명의 주민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하기도 했다.
명나라와 일본은 3년여에 걸쳐 휴전 협상을 진행했으나 일본군의 무리한 요구로 결렬되었다. 1597년 15만 명의 대병력을 이끌고 일본군은 다시 조선을 침략해 왔다(정유재란). 일본군은 한때 충청도 지역까지 북진해 왔으나 조·명 연합군이 이들을 각지에서 격퇴했다.
한편 일본군의 거짓 정보와 일부 서인의 모함에 의해 이순신은 ‘정부의 출동 명령을 집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파직당하고, 대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원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여러 차례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함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원균도 전사하게 된다.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한 이순신은 불과 12척의 함선을 이끌고, 서해로 향하는 300여 척의 일본 점함을 명량에서 대파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다. 조선군은 명나라군과 함께 육상에서 일본군을 추격했으나, 명나라군의 장수가 왜장으로부터 뇌물을 받고 군대를 철수시킴으로써 일본군을 섬멸하지 못했다.
한편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 조선 수군은 명나라 수군과 함께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고자 노량에서 일본 군함 300여 척에 맞서 전투를 벌였다. 이순신은 일본의 함선을 200여 척이나 격침시키는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으나 결국 전사하고 만다. 이 노량해전을 마지막으로 일본과의 7년에 걸친 전쟁은 끝나게 된다.
7년 간의 왜란은 조선, 명, 일본의 3국 모두에게 막대한 영향을 주었는데, 특히 싸움터였던 조선의 피해가 가장 컸다.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거나 포로로 잡혀갔고, 국토가 황폐화되었으며, 인구가 크게 줄어들고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졌다. 문화적으로는 오랜 전란으로 경복궁과 불국사 등이 불타고 서적과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들이 소실되었다.
명나라는 조선에 대군을 파병함으로써 국력이 소모되고, 국가 재정까지 어려움에 빠졌다. 이 틈에 만주에 있던 여진족은 세력을 성장시켜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를 무너뜨린 후 청나라를 세움으로써 동양의 국제 정세는 크게 전환되었다.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문화재 등을 약탈해 가고, 우수한 학자나 인쇄공,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감으로써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 등을 발달시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라.관련자료

한산도 대첩

한산도 이충무공 유적 한산도는 한산도대첩으로 유명한 곳이다. 임진왜란 중인 1592년 7월, 한산섬 앞바다에서 전라 좌수사 이순신, 전라 우수사 이억기, 경상 우수사 원균이 거느린 조선 수군이 일본군의 주력부대를 무찌른 최대의 전승지이다.
한산도대첩은 임진왜란 초기 수세에 몰려 있던 전세를 크게 역전시킨 중요한 전투였다. 일본군은 육지에서는 계속 승리하던 것과 달리 바다에서는 옥포와 강포, 당항포, 율포 등에서 연달아 패하자 이를 만회하고 일거에 전세를 뒤엎을 욕심으로 7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공격해 왔다. 조선 수군은 이들을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한 후 학익진을 써서 적을 에워싸고 거북선을 앞세워 공격했다. 여러 장수와 군사들이 화포를 쏘며 용감히 싸운 결과 적선 47척을 불태우고 12척을 나포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한산도대첩에서 조선 수군이 크게 승리하여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바다와 육지로 나누어 진격하려던 일본군의 계획은 좌절되고 만다. 그때까지 육지에서의 연속된 패전으로 사기가 저하되었던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으며, 곡창지대인 호남지역을 보호할 수 있었다.

진주 대첩

진주대첩 진주성은 임진왜란 중 진주대첩이 벌어진 곳이다. 1592년(선조25년)에 전라도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3만여 명의 일본군이 공격해 오자, 진주목사 김시민 장군은 군사 3천8백 여 명을 이끌고 성민과 혼연일체가 되어 6일간 싸운 끝에 대승을 거둔다.
전국 각 지역에서 들고 일어난 의병들의 맹활약으로 기세가 꺾인 일본군은 병력을 집중하여 전라도 침입의 요충지인 진주성을 공격했다. 3만의 군사를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 공격하는 일본군에 맞서 목사 김시민을 비롯한 3천 8백여 명의 병력과 백성들은 결전 태세를 갖추었고, 성밖에서는 각지에서 몰려온 의병들이 일본군을 배후에서 견제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군이 주위의 민가를 모조리 불지르고 총탄과 화살을 마구 쏘아대며 공격을 시작하자 성 안의 군사들은 현자총통을 비롯한 총포와 화살로, 백성들은 돌과 뜨거운 물로 대항했다. 의병 2천여 명은 성 밖에서 진주성을 지원하여 일본군의 치열한 공격을 막아내고 진주성을 사수했다. 이 진주성 싸움은 한산대첩, 행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호남으로 진출하려던 일본군의 계획을 좌절시킨, 전략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승리였다.
다음해 일본군은 1차 진주성 싸움에서의 패배를 설욕하고 당시 진행 중이던 휴전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목적으로9만의 대군을 이끌고 다시 진주성을 공격했다. 김천일이 이끄는 3천 5백여 명의 병사와 6-7만 명의 백성들이 총통, 화살을 쏘고 돌과 쇠붙이, 끓는 물을 부으며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일본군과 맞서 싸웠으나 끝내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진주성의 군민들은 맨손으로 끝까지 항전하다 장렬한 최후를 마쳤고, 6만여 명의 백성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했다. 이때 논개는 의암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으로 뛰어들어 순절함으로써 만고에 빛날 충절을 남겼다.

행주대첩

행주대첩 행주산성은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흙을 이용하여 쌓은 토축산성이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의 산성 형식과 같다.
권율은 임진왜란 초 광주 목사로 있으면서 이치싸움에서 크게 승리하여 전라도로 향하는 일본군을 막아낸 공로로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가 되었다. 권율 장군은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평양을 수복하고 남쪽으로 진격하자 한양을 탈환하고자 경기, 충청, 전라 지역의 병사와 승병들을 데리고 북상하여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는 벽제관에서 일본군의 기습 공격에 패배하자 개성으로 후퇴했다.

권율장군

이때 한양에는 평안도와 황해도로부터 후퇴한 일본군 3만여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벽제관에서 명나라 군대와 싸워 승리한 직후라 사기가 충천해 있었다. 행주산성에 조선군대가 주둔하고 있음을 안 일본군 3만여 명은 행주산성을 겹겹이 포위하고 9차례에 걸쳐 맹공을 가해왔다.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권율과 휘하 병사들은 화포와 신기전을 동원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였으며,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 짧게 만들어 돌을 날라서 석전(石戰- 돌을 무기로 이용한 전투)을 벌일 수 있게 함으로써 적에게 큰 피해를 주기도 했다. 여기에서 행주치마라는 말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행주산성의 전투는 임진왜란의 3대 대첩 가운데 하나이며, 권율은 이 공로로 도원수가 되었다.

신립의 충주전투

탄금대 탄금대는 충청북도 충주시의 대표적인 명승지로서 남한강과 달천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데, 가야 출신 우륵이 이곳에서 가야금을 연주했다고 해서 탄금대라 부른다. 이곳 탄금대는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이 북상하는 일본군들에 맞서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곳이기도 하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 1만 5천여 명이 상주를 거처 충주 남쪽에 도착하자, 삼도순변사로 한양에서 병력을 이끌고 내려온 신립은 8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치고 적과 맞섰다. 그러나 병력과 무기가 크게 열세였던 조선군은 사방에서 포위 공격해 오는 일본군을 막아내지 못하고 크게 패했으며, 신립은 마지막 순간이 닥치자 남한강으로 투신하여 자결하고 말았다. 탄금대의 아래쪽으로 절벽을 이루며 솟아 있는 바위들은 열두대라고 부른다. 열두대는 활의 명수인 신립 장군이 파도처럼 밀려오는 적군을 향하여 무수히 활을 쏘다 보니 활이 열기가 심해 제 구실을 못하자 12번이나 절벽을 오르내리며 활에 물을 적셔 열을 식힌 곳이라고 전한다.
탄금대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이날 저녁 충주성에 무혈입성한 후,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해 진격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왕이 한양을 버리고 평양으로의 피난길에 오른다.

조헌과 칠백의총

칠백의총 충청남도 금산에는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장렬히 순절한 의병장 조헌과 영규대사를 비롯한 칠백의사를 함께 모신 칠백의총이 있다.
임진왜란 중 승병장 영규가 거느린 승군과 합세해 청주성을 회복한 조헌의 의병은 금산을 점령하고 이어 호남지방을 침범하려는 일본군을 무찌르기 위해 금산으로 향했다. 이보다 앞서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이 금산의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패하고 전사하는 등 조선군은 금산을 회복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패했다. 이에 많은 사람들이 조헌을 만류했으나, 조헌은 “국왕이 당하는 판에 어찌 신하가 목숨을 아끼랴.” 하면서 공격에 나섰다.
한편, 금산에 있던 일본군들은 조헌이 이끄는 군대가 소규모이며 후속 지원부대가 없는 것을 정탐하고는 복병을 내어 퇴로를 막은 다음 대규모로 공격해 왔다. 조헌은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의에 부끄럼이 없게 하라.”고 명령하며 힘껏 싸워 일본군의 세 차례 공격을 모두 물리쳤다. 그러나 온종일의 싸움에 화살이 다 떨어져 더 싸울 수가 없었다.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의병들은 육박전을 벌여 한 명의 도망자도 없이 끝내는 모두 순절했고, 영규의 승군도 모두 전사했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 역시 사망자가 많아 3일간이나 그 시체를 거두어 불태운 뒤 무주와 옥천에 있던 일본군들과 합류하여 퇴각했다. 이로써 호남지방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게 되었다. 일본군들이 물러간 후 조헌의 제자들은 의병들의 시체를 거두어 한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총이라 했다.

일본 교토의 귀무덤

귀무덤 일본 교토시 히가시쿠에는 귀와 코만 묻힌 무덤이 있다. 무덤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넋을 기리는 풍국신사 바로 정면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무덤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인들이 베어간 조선인들의 귀와 코가 묻혀 있어 귀무덤이라 부른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들은 전과를 보고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목을 잘라 일본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 수가 너무 많아 번거로워지자 일본군들은 코와 귀를 잘라 소금에 절여 일본에 보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헌상했으며, 도요토미는 이를 전리품처럼 마차에 싣고 각 지역을 순회하게 한 다음 귀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귀무덤을 만들었다고 설명하지만, 그 이면에는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를 찬양하고 전공을 후세에 남기려는 의도가 내포돼 있다.

일본 사가현 아리타의 도조 이삼평비

이삼평비 일본 규슈의 사가현 아리타의 도산(陶山)신사는 조선 출신의 도자기 기술자 이삼평을 신으로 모시고 그를 추앙하고 있다. 신사 뒤편의 산 정상에는 ‘도조 이삼평비’라고 새겨진 큰 기념비가 있다. 아리타 사람들은 이 석비 뒷면에 ‘이삼평은 아리따의 도자기 시조이자 일본 도자기계의 대은인으로 그 은혜를 기려 비를 세우고 제를 지낸다’고 적고 있다. 임진왜란 중 일본에 끌려간 이삼평은 1616년 아리타의 이즈미산에서 자기를 굽기에 알맞은 백자토를 발견하여 부근에 가마를 짓고 자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로써 일본에 백자 굽는 기술이 보급되게 된다. 일본은 임진왜란 중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감으로써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출병한 무장들은 계획적으로 조선의 도공들을 일본으로 끌고 갔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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