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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다(외세를 물리친 고려)
가.연표
  • 1351 공민왕 즉위
  • 1359 홍건적의 1차 침입
  • 1360 안우·이방실의 홍건적 격퇴
  • 1361 홍건적의 2차 침입
  • 1362 정세운·이성계의 홍건적 격퇴
  • 1368 명 건국
  • 1376 홍산 대첩(최영의 왜구 격퇴)
  • 1377 화통도감 설치
  • 1380 진포 대첩(나세·최무선의 왜구 격퇴)
  • 황산 대첩(이성계의 왜구 격퇴)
  • 1383 관음포 대첩(정지의 왜구 격퇴)
  • 1389 박위, 쓰시마 섬 정벌
  • 1392 조선 건국
나.시대적 배경14세기 말 동북아시아의 정세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유럽까지 진출하여 대제국을 건설한 원나라가 점차 쇠퇴하면서, 이 틈에 중국 내부에서 그 동안 원나라 몽고족에 억눌려 있던 한족들이 반기를 들고 일어났는데, 홍건적이 그들이었다. 홍건적들이 무서운 기세로 성장하자 원나라는 이들을 토벌하는 데 온힘을 기울였다. 원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홍건적은 주변 고려의 지원을 받으려 계속 사신을 보내어 교류하고자 하였으나,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홍건적의 무리 가운데 일부가 원나라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자 고려 영토까지 침입해 약탈과 살상을 저질러 고려에 피해를 입혔다.
한편, 이 무렵 일본에서는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무로마치 막부가 등장하여 남북으로 대립하는 전국시대가 전개되었다. 일본의 남북조 시대는 왕권이 약하고 각 지방 영주들의 세력이 강하여 지방까지 중앙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이를 틈타 바다에서는 주로 쓰시마 섬을 근거로 하여 해적들이 활개를 쳤다. 왜구라고 불리는 이들 해적들은 배후에 영주들의 후원을 받으면서 우리 나라와 중국 해안 지방까지 쳐들어와 약탈을 일삼았다.
당시 고려에서는 공민왕이 여러 가지 강력한 개혁을 통해 원나라에 대항하며 자주성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북쪽의 홍건적과 남쪽의 왜구가 여러 차례 침략해오자 개혁의 추진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다.전개 과정

홍건적 격퇴

홍건적은 원나라 몽고족의 압박에 대항하면서 일어난 한족의 농민 반란군으로 머리에 붉은 두건을 둘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들은 혼란한 정세를 틈타 하북성 영평에서 일어나서 비밀 종교결사인 백련교를 업고 삽시간에 큰 세력으로 성장하여 1355년에는 국호를 송이라 하였다.
홍건적은 각 지방을 점령하면서 무서운 기세로 중국 전역을 휩쓸었으나 그 지역 백성들을 괴롭히거나 물자를 약탈하지 않고 원나라에 대항하였다. 이런 까닭으로 원나라에 억눌려 있던 한족 백성들은 홍건적에 대해 큰 지지와 환호를 보냈다. 그러나 홍건족이 요동지역을 점령한 원나라의 반격에 쫓기다가 그들 중 일부가 고려로 침입해 약탈과 살상을 자행하면서 고려에 큰 피해를 입혔다.
1359년 12월 홍건적의 장수 모거경이 4만의 군사를 이끌고 의주로 쳐들어 왔다(1차 침입). 파죽지세로 의주를 함락한 홍건적은 정주와 안주까지 잇달아 함락시켜 압록강 일대를 모두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후 홍건적이 서경까지 침입하리라 예상한 고려군은 일부러 서경에서 나와 황주에 진을 쳤다. 홍건적의 군사들은 대부분 중국의 남쪽 따뜻한 지역 출신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추위에 약할 것을 파악한 고려군이 일부러 서경에서 후퇴한 것이었다. 아무 저항도 받지 않고 그대로 서경에 도착한 홍건적들은 추위에 떨다가 고려군의 총공세를 겪어야 했다. 이후 고려는 함종에서는 안우와 이방실이, 선천에서는 최영이 전투에서 이겨 홍건적을 압록강 이북으로 모두 몰아내었다. 이 때 돌아간 홍건적 병사가 겨우 300여 명 정도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그 뒤 홍건적은 수군을 동원하여 황해도와 평안도 일대의 해안 지방을 노략질하다가 1361년 10월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다시 침략하였다(2차 침입). 홍건적의 기세가 대단하여 공민왕은 하는 수없이 복주(안동)까지 피난을 가고 개경은 홍건적에게 점령당하였다. 이듬해 공민왕은 개경을 탈환하기 위해서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삼고 작전을 구상하였다. 정세운은 신하들을 설득하고 규합하여 안우, 이방실, 최영, 이성계 등 여러 장수들과 20만 군사를 이끌고 홍건적에 반격하였다. 이 때 이성계는 적장의 목을 베는 등 큰 공을 세웠으며, 홍건적은 고려의 맹공격에 10만 군사가 몰살당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고 압록강 너머로 모두 퇴각하였다.
홍건적은 고려를 침략함으로써 오히려 그 세력을 잃고 쇠퇴하게 되었으며, 고려 또한 침입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성계 같은 새로운 세력이 성장하여 기울어가는 고려를 대신하여 새 왕조를 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태조이성계의 어진

왜구 격퇴

신라 문무왕이 “내가 죽으면 용이 되어 왜적을 막겠으니 바다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하였다는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왜적의 침입은 삼국시대부터 있었으나 그 수가 적었고 피해도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려 후기부터 그 수가 크게 늘어나 극성을 부리기 시작하였다.
고려 때 왜구가 처음 침입한 것은 1223년이었다. 당시 고려는 내정이 어지러웠고, 홍건적의 침략을 막아야 했으며 중국은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는 시기로 대외관계가 복잡해 그들의 침입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였다. 왜구의 침입은 1350년부터 본격화 되기 시작하여 특히 우왕 때에 이르면 14년간 378회나 침입할 정도로 절정에 달하였다. 무엇보다도 해안가에서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하여 심지어 강화도가 약탈당하고 개경까지 위협을 받을 정도였다. 왜구는 단순한 해적 정도의 수준이 아니라, 배후에 유력한 영주가 있어 그들에 의해 움직였다. 그 대표적인 영주가 쓰시마 섬의 영주였다.
왜구들이 약탈하려고 한 가장 큰 대상은 쌀이었다. 그래서 고려의 조운선들이 왜구의 습격을 많이 받았으며, 이에 따라 세금으로 거두어드린 쌀의 해상 운송이 어려워 재정이 궁핍해졌고, 노략질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도 극심하였다. 또한 왜구들은 여러 재물뿐만 아니라 고려의 백성들을 잡아가 노예로 팔기도 하였으며, 문화재를 약탈하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고려도 사신을 보내어 왜구의 출몰을 감시해 줄 것을 일본 조정에 요구하였으나, 진전이 없자 강경하게 대처하였다. 1376년 충남 연산 개태사까지 왜구가 출몰하자 최영이 출정하여 홍산(부여 부근)에서 왜구를 물리쳤다(홍산 대첩). 이 때 최영이 솔선수범하여 먼저 적진으로 뛰어들어 싸우자 많은 병사들의 사기가 올라 크게 싸워 이겼다고 한다.
최무선은 격심해진 왜구의 침입을 막고, 왜구를 무찌르는 데에는 화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중국인 기술자에게 화기제조법을 배웠다. 그리고 조정에 건의하여 1377년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화기를 제조하여 1380년 진포에서 크게 왜구를 무찔렀다(진포 대첩). 이 싸움에서 화포를 맞은 왜선은 모두 불에 타 연기가 하늘을 덮었으며, 죽은 왜구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한다. 이 진포대첩은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화포를 만들어 왜구를 무찌른 전쟁이었고, 이후에 왜구의 세력이 한층 약화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진포에서 크게 패하고 살아남은 몇 안되는 왜구들은 내륙으로 들어가서 이미 상륙한 왜구들과 합류하였다. 이들은 내륙에서 크게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지리산 일대의 황산에서 또 한번 백성들을 노략질하고 침략하였다. 그러나 이 때 출정한 이성계를 비롯한 많은 장수들에 의해 왜구가 대파되었으며, 이 때 살아남은 왜적은 겨우 70여 명에 이를 뿐이라고 한다(황산 대첩). 이후 관음포 대첩(1383) 등을 통해 왜구는 크게 쇠퇴하였으며, 1389년에는 박위가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였다. 이러한 노력들에 힘입어 왜구의 세력은 점차 소멸되었다.
라.관련자료

최영의 홍산대첩

최영장군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홍산대첩은 오늘날 충청남도 연산에서 최영이 왜구를 크게 격퇴한 싸움이다. 고려 때 왜구의 침략이 날로 거세지면서 해안뿐만 아니라 내륙까지 그 피해가 미쳤다. 1376년에는 왜구들이 금강을 거슬러 올라와 부여에 침입하였다가 공주까지 함락시키고 연산의 개태사를 약탈하는 등 그 피해가 아주 컸다.
이 소식을 들은 최영이 출정하기를 거듭 요청해 병력을 이끌고 홍산에 이르니 왜적이 먼저 험하고 좁은 곳에 웅거하고 있었다. 모든 장수가 두려워하여 전진하지 못하자 최영이 앞장서서 돌격해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 때 침입한 왜구의 수가 얼마인지는 전해지지 않으나, 공주와 개태사가 약탈당한 것으로 봐서 대규모의 집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 뒤 왜구들은 늘 “우리가 두려워하는 자는 백발의 최만호뿐이다.”라고 할 정도로 최영을 두려워하였다. 이후 왜구의 기세가 점점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홍산대첩은 최무선의 진포싸움,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더불어 고려시대 왜구토벌의 3대대첩으로 알려져 있으며 해마다 홍산에서는 홍산대첩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홍산대첩제가 열리고 있다.

최무선의 진포 대첩

최무선 고려 말기에 한창 기승을 부리던 왜구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최무선은 화포를 만들기로 결심하였다. 최무선은 화약을 만드는 세 가지 재료, 즉 초석·유황·분탄 중에서 유황과 분탄은 쉽게 구할 수 있으나 초석을 만드는 것이 가장 어렵고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래서 이미 화약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중국에서 배우기로 하고, 중국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무역항 벽란도에 가서 중국으로부터 오는 상객들 중에서 초석(염초)의 제조방법을 알고 있는 사람을 찾았다. 그러던 중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온 이원이라는 화약 제조 기술자를 만나 후하게 대접하며 화약 제조 기술을 배우고자 하였다. 최무선의 지극한 정성과, 화약을 만들어 국가를 살리겠다는 집념이 이원을 감동시켜 초석을 흙에서 추출하는 방법을 배우고 화약을 만드는 데 성공하였다.
화약을 이용한 무기 제작에 성공한 그는 여러 차례 정부에 건의하여 화통도감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화통도감에서 각종 화약을 이용한 무기를 연구하여 20여 종의 화기가 제조되었다. 이 때 제조한 화기로는 대장군, 이장군, 삼장군, 육화석포, 화포, 신포, 화통, 화전, 철령전, 피령전, 질려포, 철탄자, 천산오룡전, 유화, 주화, 촉천화 등이었다. 고려 정부는 화포를 더욱 증강하여 해전에 대비하였다.
1380년 왜구가 500여 척의 선박을 이끌고 금강 하구의 진포로 쳐들어와 약탈을 하자 최무선은 나세와 함께 각종 화기로 무장한 전함을 이끌고 나아가 크게 격파하였으니 이를 진포대첩이라 한다. 이 싸움에서 화포를 맞은 왜선은 모두 불에 타 연기가 하늘을 덮었으며, 이 때 죽은 왜구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한다. 이렇게 화포를 이용해 고려가 크게 승리하자 왜구는 바다 쪽으로 도망가지 못하고 내륙으로 깊숙히 들어가서 노략질 하였다. 이에 따라 정부는 이성계를 파견하여 황산에서 크게 왜구를 무찔렀다.

이성계의 황산 대첩

황산대첩비 1380년 왜구들이 500여 척의 배를 타고 금강 어귀에 있는 진포에 상륙했다. 이 때 최무선이 화약을 사용하여 적의 함선을 모두 불태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왜구들은 배를 잃어버려 바다로 나갈 수 없게 되자 경상도 상주·구미, 충청도 옥천 등 내륙지방으로 들어가 더욱 잔인한 약탈과 살상을 저질렀다. 이에 고려정부는 이성계를 최고 지휘관으로 삼아 왜구를 쳐부수도록 했다. 이성계는 운봉을 넘어 황산 서북쪽의 정산봉으로 나아가 이지란과 더불어 치열한 전투를 치른 결과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왜구의 말 1,600여 필을 노획했는데, 이를 황산대첩이라고 한다.
이때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조선 시대 남원시 운봉면 화수리에 황산대첩비를 세웠다. 그러나 이 비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파괴하여 원상이 훼손되어버렸고, 해방 이후에 남아 있던 귀부와 이수를 이용하여 다시 세웠다. 이 비문에는 황산대첩에 관한 사실과 비문을 세우게 된 목적·사정을 담고 있다.

박위의 쓰시마 정벌

쓰시마 섬은 원래 토지가 좁고 땅이 척박해 식량을 외부에서 구해야 했기 때문에 고려에 조공을 바치고 미곡을 받아갔다. 그러나 가뭄과 기근이 들면 쓰시마섬의 백성들은 해적으로 나타나 해안을 약탈하였으므로 그 피해가 아주 컸다. 이에 고려 말 조선 초 여러 차례에 걸쳐 쓰시마 섬에 대한 토벌이 있었다. 고려 창왕 1년(1389년)에는 경상도 원수 박위가 병선 백여 척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공격해 적선 300여 척과 해안의 시설을 파괴해 왜구의 근거지를 소탕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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