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 전체목록 > 몽고와 당당히 맞서다(외세를 물리친 고려)
  1. 몽고와 당당히 맞서다(외세를 물리친 고려)
가.연표
  • 1206 테무친, 몽고 통일과 칭기즈 칸 즉위
  • 1216 요나라 잔당, 고려 침입
  • 1218 몽고와 함께 거란군 격퇴(강동성전투)
  • 1219 몽고와 고려의 첫 접촉
  • 최충헌 사망, 최우 집권
  • 1225 몽고 사신 제구유의 피살
  • 1231 몽고의 1차 침입-살리타이
  • 박서의 귀주성 전투
  • 1232 강화도로 천도
  • 몽고의 2차 침입
  • 처인성 전투, 살리타이 사살
  • 1234 금나라 멸망
  • 1253 몽고의 5차 침입-에구(야굴)
  • 김윤후의 충주성 전투
  • 1270 개경 환도
  • 배중손의 삼별초, 대몽항쟁
  • 1271 몽고, 국호를 원으로 바꿈
나.시대적 배경 몽고의 초원지대 13세기에 들어서 동북아시아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1206년에 칭기즈칸이 분열된 몽고족을 통일하고 비약적으로 성장하였다. 이후 몽고는 세계 역사상 가장 빠른 시간에 가장 넓은 영토를 점령하며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당시 중국 대륙의 남부에는 남송이 자리 잡고, 북부인 만주 지방은 금나라가 지배하고 있었으며, 몽고의 서쪽에는 탕구트족의 서하가 있었다. 칭기즈칸은 먼저 서하를 굴복시킨 후, 금나라를 정벌하기 시작하였고, 금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던 거란을 공격하였다.
몽고족은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세력은 잔인하게 짓밟고 초토화시키며, 순종하는 세력에게는 관대하게 하는 이중적 전술을 통해 주변 민족들을 포섭해나갔다.
당시 고려는 정치적인 혼란기였다. 차별적인 대우를 받던 무인들이 1170년 정변을 일으켜 문벌 귀족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이후 약 100여년 동안 무인들끼리 정권을 놓고 다투는 형세가 이어졌다. 무인간의 정권 쟁탈전이 혼란스럽게 이어지다가 1196년 최충헌이 집권하면서 향후 60여년 동안 최씨들이 권력을 계속 잡았다.
다.전개 과정

몽고의 고려 압박

칭기즈칸 파죽지세로 몽고는 여러 민족들을 제압해 나갔다. 그러던 중에 금나라에 복속되어 있던 거란족의 일부가 혼란을 틈타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고, 이 무리가 몽고에 쫓겨 1216년 고려로 침입하게 되자 고려는 몽고와 연합하여 거란족의 무리를 강동성에서 무찌르게 되었다. 몽고는 이를 이용하여 고려의 지원을 받아 금나라를 제압하려는 속셈으로 고려와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이후 몽고는 고려에 사신 교환과 무리한 물자를 요구하였는데, 고려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몽고의 물자 요구에 대한 고려의 반응이 시큰둥하자 몽고는 사신 저고여(著古與)를 고려에 파견하였는데 1225년 압록강 근처에서 저여고가 암살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몽고는 고려와 국교를 단절하고, 이를 고려 침략의 구실로 삼았다. 이때 몽고는 서역원정을 마치고 그 눈길을 동쪽에 두고 있을 때였다.

계속 되는 몽고의 침략

처인성싸움 드디어 1231년 몽고는 살리타이(撤禮塔)를 선봉장으로 하여 고려를 침략하였다(제1차 침입). 의주를 함락시키고, 이어 철주성을 함락시킨 몽고군은 계속 남으로 밀고 내려와 귀주성을 공략하였다. 귀주성에서 병마사 박서의 지휘하에 주민들까지 하나가 되어 몽고군에 대항하였다. 몽고군은 귀주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4차례나 되는 맹공격을 퍼부었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러자 몽고군은 귀주성을 포기하고 바로 서경, 개경으로 향하여 고려 정부로부터 화친을 받아낸 후 돌아갔다.
1232년 다시 몽고가 침략할 기미가 엿보이자 고려는 장기전에 대비하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기로 하였다. 강화도는 ‘해전에 약한 몽고군의 약점을 이용하여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고, 개경과 가까이 있으며, 여러 지방들과도 바다로 연결할 수 있는 요지’로써 임시 서울로는 안성마춤이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몽고군은 그해 12월 다시 쳐들어왔다(제2차 침입). 몽고군은 한강을 건너 수원과 용인까지 내려와 처인성에 이르렀다. 승려 김윤후는 처인성 백성들과 함께 몽고군에 대항하였으며, 이때 몽고 장수 살리타이는 화살에 맞아 죽었다. 우두머리를 잃은 몽고군은 놀란 나머지 더 이상 공격하지 못하고 철수하였다. 처인성 전투의 승리는 관군의 지원을 받지 않은 백성들이 스스로 일구어낸 성과였다.
김윤후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몽고군과 맞서 싸우며 공을 세웠다. 특히 20여 년 후인 1253년 몽고군이 다섯 번째로 침입해 왔을 때에는 충주성에서 많은 노비들과 병사들을 이끌고 몽고군의 강력한 공격을 격퇴하였다. 이 때 그는 “온 힘을 다해 싸우는 자는 벼슬을 주겠다”고 얘기함으로써 노비들과 병사들을 독려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충주성 몽고가 처음 침입한 1231년부터 몽고와 고려가 강화조약을 맺은 1259년까지 28년 동안 고려는 7회에 걸쳐 몽고의 침략을 받았다. 이렇게 몽고군의 침입에 시달리고 공격을 막아내면서 고려는 대장경판과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한편 당시 실권을 쥐고 있었던 최우 정권은 민심을 하나로 모으고 불심을 빌어 난관을 헤쳐나가기 위해 팔만대장경을 조판하였다.

백성들의 항쟁

용장산성 맹렬하게 침공해오는 몽고군에 대항하여 나라를 지키려는 노력은 일반백성들 속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간 지배층들은 백성들을 돌보고 몽고에 대항하기는커녕 그 곳에서 전과 다름없이 안일한 생활에 빠져 살았다. 그러므로 몽고에 대항하는 전투들은 대부분 일반 백성들이 감당해야 했다. 백성들은 산중이나 섬 등지로 들어가 관군의 도움도 없이 독자적으로 몽고에 맞서야만 했다. 그러나 백성들이 아무런 도움 없이 몽고의 기마부대를 맞아 싸운 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전쟁으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은 이루다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이에 백성을 돌보지 않는 정부에 대해 민심이 점점 떠났으며, 최씨 정권을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날로 커져갔다. 결국 1258년 최우의 죽음으로 최씨 정권은 무너지고, 고려 왕실은 1259년 몽고군과 강화를 맺었다. 그리고 1270년에는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삼별초의 항쟁

그러나 최씨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자 사병집단인 삼별초는 끝까지 몽고군과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장군 배중손의 지휘 하에 삼별초는 강화도의 물자와 인원을 천여 척의 배에 나누어 싣고 진도로 이동하였다. 진도에 용장산성을 거점으로 방어시설, 관아 등을 마련하며 몽고에 대항하였다. 이 때 주변의 전라도 뿐아니라 경상도의 많은 군현들도 삼별초의 항전에 동참하였다. 하지만 고려 왕실은 삼별초와 함께 하는 세력이 점점 커지자 위기 의식을 느꼈고, 국가 재정에도 많은 타격을 입자, 몽고와 연합하여 삼별초를 강력히 진압하였다.
삼별초는 진도를 빠져 나와 김통정의 지휘 하에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끝까지 몽고군에 저항하였다. 하지만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다. 삼별초의 항쟁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이들의 저항은 침략자인 몽고군 앞에 무릎을 꿇지 않고 최후까지 민족의 자주성을 지켜 민족정기와 주체의식을 고양시킨 저항정신의 표상이었다.
라.관련자료

박서의 귀주성 전투

귀주성은 고구려의 영토로서 발해의 멸망 이후 거란족이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거란이 처음 침입하였을 때, 서희가 외교 담판으로서 되찾게 되었다. 그 때 되찾은 지역이 귀주성 외에 5곳이 더 있는데, 이를 강동 6주라고 한다. 강동 6주에는 귀주성 외에 홍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성이 포함된다. 이 곳은 압록강과 가까운 국경지대라서 이후에도 여러 이민족들의 침입을 많이 받았던 곳이며, 그 때마다 꿋꿋이 막아내었던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이다.
몽고의 1차 침입 때에는 박서가 귀주성에서 몽고군을 크게 무찔렀다. 당시 몽고군은 귀주성을 함락하기 위해 무려 네차례나 쉴새 없이 무차별 공격하였으나, 박서가 지휘하는 귀주성의 주민들은 이에 잘 대응하며 막아내었다고 한다. <고려사>의 박서 열전에 이르면, ‘박서는 성을 무너뜨리고 주민들을 혼란에 빠지게 하려는 몽고군의 계략에 빠지지 않고 훌륭한 지략으로 이를 막아내어 몽고군이 30일간 성을 포위하였으나, 끝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몽고군도 이러한 박서의 지략과 잘 지휘된 주민들을 보고 감탄하였다고 전한다.

김윤후의 처인성·충주성 전투

처인성 몽고와의 항쟁에서 크게 활약한 김윤후는 원래 무인이 아니었으며 처인성 전투에 참여할 때의 신분은 승려였다. 처인은 일반 양민들이 거주하던 군현이 아니라 ‘부곡’이라는 특수 지역이었다. 고려 시대의 향, 소, 부곡 같은 특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일반인들에 비해 많은 차별을 받고 있었다.
처인성은 일찍부터 교통이 발달해 역사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성 전체의 모습은 실제로 보면 낮고 허름한 토성일 뿐이다. 그래서 몽고의 군사들이 처음 이 성을 보고는 고려를 얕잡아 보고 한 순간에 점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인성의 부곡민들과 승장 김윤후는 죽을 힘을 다해 몽고에 대항하였고 그 결과 몽고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김윤후가 적장 살리타이를 사살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나라에서는 몽고군을 물리친 공로로 그를 상장군으로 임명하려고 했으나 그렇게 큰 직책을 받을 수 없다며 끝내 사양하면서 섭랑장 이라는 낮은 관직을 스스로 청하였다.
김윤후는 처인성 전투를 계기로 승려에서 무인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몽고의 5차 침입 때에는 충주성 전투에서 빛나는 공을 세웠다. 충주성이 몽고군에게 70여 일 동안 포위되어 군량이 거의 떨어지고, 사기가 저하되자 김윤후는 성안에 있던 관노 등을 모두 모아 놓고 “만일 모두 힘을 내어 이번 싸움에서 이긴다면 귀하고 천한 신분을 막론하고 모두에게 관직을 주겠노라” 하고는 믿음을 보이기 위해 노비문서를 그들이 보는 앞에서 불살라 버렸다. 그리고 적에게서 빼앗은 소와 말을 나누어주고 싸움에 대한 의지를 돋우니 관노들이 감격하여 힘을 내어 끝내 몽고군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김윤후는 그 공으로 상장군이 되었다.

삼별초

삼별초는 최우가 치안유지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별초란 ‘용사들로 조직된 선발군’이라는 뜻이다. 즉, 결사대 선봉대 혹은 별동대와 같은 부대로 필요시 군대를 선발하여 만든 임시로 조직된 부대로 볼 수 있다. 그 뒤 야별초에 소속된 군대가 증가하자 이를 좌별초와 우별초로 나누고, 몽고군과 싸우다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병사들로 신의군을 조직하여 삼별초가 만들어졌다.
삼별초는 날쌔고 용감한 군대로 알려져있었으며 전투와 경찰의 임무를 담당하며 죄인을 잡아서 가두기도 하고 죄를 심문하기도 했는데, 도둑뿐만 아니라 반역죄인까지도 관할하였다. 삼별초의 역할은 점점 확대되어 도성의 수비와 친위대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고,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끝까지 맞서 싸웠다.
그러나1270년 5월 왕이 강화도에서 나오면서 30년 대몽항쟁의 주역을 담당하던 삼별초군에게도 해산 명령이 내려졌다. 이때 삼별초군은 조정의 해산 명령을 거부하고 반몽고 항쟁에 돌입하였다. 배중손, 노영희, 김통정 등의 삼별초 지도자들은 왕족인 승화후 왕온을 국왕으로 세워 새 정부의 수립을 선언하기도 했다. 그들의 항쟁은 남해 연안의 진도를 비롯한 섬과 해안 그리고 제주도 항쟁까지 무려 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1273년 1만명에 달하는 여몽연합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은 삼별초는 최후의 1,300명이 끝까지 저항하다 포로가 된 극소수의 부상자를 제외하고는 전원이 목숨을 잃었다. 제주항몽유적지 향파두리

인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