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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여진을 정벌하다(외세를 물리친 고려)
가.연표
  • 1080 문정, 여진족 토벌
  • 1104 여진족 완옌부(完顔部), 국경지역까지 진출
  • 윤관의 건의로 별무반 창설
  • 1107 윤관, 여진 정벌
  • 1108 윤관, 동북 9성 축성
  • 1109 동북 9성을 허물고 여진족에게 반환
  • 1115 완옌부의 아구다(阿骨打), 금 건국
  • 1125 금, 요나라를 멸망시킴
  • 1126 이자겸의 난
  • 1127 금, 송나라을 멸망시킴, 남송 시작
  • 1234 몽고, 금나라를 멸망시킴
나.시대적 배경고려는 세 차례에 걸쳐 거란과 전쟁을 치른 뒤 주로 동북 방향으로 북진 정책을 전개하였다. 동북 방면에는 여진족이 살았는데, 여진족은 발해의 일부를 이루던 말갈의 일족으로 하나로 발해 멸망 이후에는 통일된 정치집단을 이루지 못한 채 부족이나 지역 단위로 함경도나 두만강 일대를 비롯하여 흑룡강, 송화강 유역 등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또 이들은 문화수준이 낮아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겼으며, 고려에 공물을 바치기도 하고, 때로는 변경을 침략하기도 하였다. 고려는 이런 여진에 대하여 식량과 철제 농기구 등을 주는 회유책과 무력으로 응징하는 강경책을 적절히 활용하는 정책을 펴왔다.
고려 초부터 여진은 토산물인 말과 활, 화살 등을 바쳤고, 고려에서는 여진에게 장군, 대장군의 관작을 주었으며, 식량과 철제 농기구를 내려 주었다. 문종 때는 고려인으로 편입하고자 하는 여진인이 많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천리장성 밖의 지역에 사는 여진 촌락들은 스스로 신하라 하며 고려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해주기를 요청하는 사례도 흔하였다.
하지만 12세기 들어 거란이 쇠퇴하자 완옌부가 여진족을 통일하며 점차 강성해지기 시작하였으며 심지어 고려를 넘보기조차 하였다.
다.전개 과정

별무반의 조직과 여진 정벌

여진족 완옌부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동북지역의 여진족들 중에서는 점차 완옌부와 내통하여 그에 붙고자 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고려에서는 그 사실을 알고 사람을 시켜 완옌부와 내통하는 여진족을 막으려 하였다.
1104년, 완옌부 군대가 국경지역인 천리장성 부근까지 내려와 정주성 관문 밖에 기병을 주둔시켰다. 이에 고려에서는 온건정책을 버리고 무력에 의한 강경 정책을 취하여 임간 등을 파견하였으나 석적환의 여진군에게 패하였다. 고려는 다시 윤관을 파견하여 여진을 물리치려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철수하였다.
윤관은 패전에 관한 원인을 “적은 기병인데, 우리는 보병이라 대적할 수 없다”고 하고, 숙종에게 기병의 양성을 건의하였다. 윤관의 건의에 따라 편성된 특수부대가 별무반이었다. 별무반은 국민 각계층, 즉 양반, 승려, 서리, 상인, 노비 등을 동원하여 신보군, 신기군, 항마군 3개의 부대로 편성하였다. 그야말로 별무반은 기병, 보병, 그리고 승병으로 이루어진 특별군이었다.
1107년 드디어 윤관을 원수로 17만명의 대군을 일으켜 여진정벌이 진행되었다. 예종도 친히 서경에까지 나가 대군의 출정을 격려하였다. 12월 1일 윤관의 정벌군은 서경을 출발하여 정주에 도착하여 수륙양면으로 여진의 소굴인 갈라진(함흥평야)으로 진격하였다. 윤관의 기습작전은 주효하여 고려군은 연전연승을 거두어 적 촌락 135개소 파괴, 참살 5천명, 포로 5천명이라는 승전을 거두었다.

동북 9성 설치

윤관의 영정 여진 촌락을 소탕한 윤관은 동북지역의 경계를 새롭게 확정하는 한편, 점령지의 중요 지역에 성을 축조하였다. 동북 9성의 축조가 그것이다. 동북 9성에는 국경을 표시하는 비가 세워졌고, 또한 큰 절을 세워 남쪽 지방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하지만 여진은 그 땅을 되찾기 위해 빈번히 동북 9성을 공격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신을 보내 이를 돌려 줄 것을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생활의 근거지를 빼앗긴 여진족은 수 차례에 걸친 공격을 가하는 한편, 1109년에는 우야소가 사신을 보내어 반환을 애원해왔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개경파와 유학파가 주축이 된 북진 반대파들이 윤관의 북진정책을 비판하였다. 이들은 “굳이 북진에 나서기보다는 서경 이남의 영토를 잘 다스리면 된다”는 현실안주론을 펼치고 있었다. 여진의 끈질긴 저항으로 막대한 물자와 인적 피해가 속출하고, 조정 내의 반대 여론에 밀려 결국 고려는 ‘동북 9성이 거리가 멀고 비용이 많이 든다’하여 여진족의 요구대로 반환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109년 9성이 반환되고, 윤관은 패장으로 간주되었다. 윤관은 이후에도 다른 신하들의 시기를 받아 ‘명분없는 전쟁으로 국가에 손해를 끼쳤다’고 하여 관직과 공신 칭호를 박탈당하기도 하였으나 얼마 뒤에 복직되었다.
여진에게 반환되었던 9성은 그후 세종대왕 때에 와서 김종서 장군이 6진을 개척함으로써 비로소 수복되었다.
9성을 돌려받은 여진족 완옌부의 아구타는 1115년 황제를 자칭하며 금나라를 세우고 강력한 통일 국가로 성장하여 거란을 공격하였다. 거란은 고려에 원군을 요청하지만 고려는 여진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거절하고 오히려 거란이 차지하고 있던 보주를 획득하였다.
라.관련자료

여진족

여진족은 동부 만주에 살던 퉁그스 계통의 민족으로 여직이라고도 한다. 여진족의 명칭은 시대에 따라 달라 춘추전국시대에는 숙신, 한나라 때에는 읍루, 남북조 시대에는 물길, 수당 시대에는 말갈로 불렸다. 10세기 초 송나라 때 처음으로 여진이라 하여 명나라에서도 그대로 따랐으나, 청나라 때는 만주족이라 불렸다.
여진족은 부여, 고구려, 발해, 고려가 이어지는 동안 우리 나라의 지배와 영향을 받다가 12세기에 이르러 아구다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금을 세워 한때 만주와 북중국을 지배했다. 금이 몽고에게 멸망한 뒤 다시 부족단위로 반농경·반유목 생활로 돌아갔다가 16세기말 급속한 발전을 이루어 1616년 누루하치의 주도로 후금을 세웠다.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꾼 뒤 중국의 신해혁명 때까지 중국의 지배자로 군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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