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
  • 전체목록 >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다(외세를 물리친 고려)
  1. 거란의 침략을 물리치다(외세를 물리친 고려)
가.연표
  • 916 야율아보기, 거란 건국
  • 926 거란, 발해를 멸망시킴
  • 946 거란, 국호를 요로 바꿈
  • 960 송 건국
  • 983 요, 국호를 거란으로 다시 바꿈
  • 986 정안국 멸망
  • 993 거란의 제1차 침입-소손녕
  • 서희의 담판과 화약 체결
  • 994 서희, 여진족 축출과 강동 6주 설치
  • 1009 강조의 정변
  • 1010 거란의 제2차 침입-성종
  • 1018 거란의 3차 침입-소배압
  • 1019 강감찬의 귀주대첩
  • 1029 개경의 나성 축조
  • 1033 천리장성 축조
나.시대적 배경중국은 당나라 멸망 후 50여 년 간에 걸친 5대 10국의 분열 시대가 이어지다가 조광윤에 의해 통일되어 960년 송이 건국된다. 5대 10국의 혼란기와 송나라가 건국되는 과정에서 거란족은 만리장성의 이북에 많은 땅을 차지하게 되었으며, 급속도로 성장하여 요나라를 건국하고 송나라와 대립하게 된다.
거란은 송나라를 침공하여 중국을 모두 거란의 영토로 만들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송나라와의전쟁에서 가장 크게 걸림돌이 되는 나라가 고려였다. 거란이 송나라와 전쟁을 할 경우 배후에서 고려가 송나라를 도와 양쪽에 협공을 받을 수 있는 상황에 대하여 매우 불안해하였다. 이에 거란은 송나라와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고려와 친선관계를 이루고자 하였다.
하지만 고려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려는 거란이 보낸 사신을 유배 보내기도 하고, 선물로 가져온 낙타를 다리 밑에 묶어두고 굶겨 죽이는 등 적대감을 보였다. 이에 거란은 고구려가 송나라와의 전쟁때에 송나라를 배후에서 지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정안국과 고려를 여러 차례 침략하였다.
정안국은 발해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로, 송나라와 국교를 여는 등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때는 거란을 반격하기 위해 송나라와 단합하기도 하여 거란에게는 걸림돌이 되었다. 이에 거란은 정안국을 1차 침공하였고(983~984년), 2차 침입(985~986년)으로 결국 정안국을 패망시켰다.
다.전개 과정

거란의 1차 침입과 강동6주 획득

서희의 담판 정안국을 멸망시킨 후, 993년에 거란의 소손녕이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하였다(거란의 제1차 침입). 거란의 침략에 충분한 대비를 하지 못하였던 고려는 청천강에서 거란의 침략을 저지하는 가운데 일부 신하들은 거란군의 엄청난 숫자와 기세에 눌려 “서경 이북의 땅을 내어주고 화해를 하자”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서희는 거란의 침입이 배후세력을 안정시키기 위함임을 파악하고 왕과 대신들을 설득하여 ‘자신이 직접 소손녕을 만나 협상하겠다’고 하였다.
서희가 외교담판에 나서자 소손녕은 고려를 침입의 이유로 ‘첫째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자기네의 소유인데 고려가 침략했으며, 둘째 자기 나라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긴다’는 점을 들었다. 이에 대해 서희는 “첫째 고려는 고구려를 옛 터전으로 하였으므로 고려라 이름 짓고 평양에 도읍했으며, 둘째 고려가 거란과 국교를 맺지 못한 것은 압록강 안팎에 거주하며 간사한 짓을 하는 여진족 때문이니 이들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는다면 거란과 국교를 맺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담판 끝에 서희는 거란과 교류를 약속하고 소손녕의 군사를 돌려보냈으며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리의 땅을 확보하는 데 동의하는 글을 받아냈다. 이에 고려는 강동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강동 6주를 설치하는 실리를 얻었다.

거란의 2차 침입

거란이 물러간 이후에 고려는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과 교류한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계속 송나라와 친선관계를 유지하였다. 더구나 거란은 자기들이 내어준 강동 6주의 땅이 전략적 요충지임을 깨닫고 돌려주기를 요구하였지만 이에 고려가 응하지 않자 다시 한번 고려를 침략할 준비를 하였다.
이 때 고려에서는 1009년 서경 유수로 있던 강조가 개경으로 공격해 들어가 목종을 내몰고 현종을 왕으로 추대하는 하는 일이 벌어졌다(강조의 정변). 그러자 거란의 성종은 ‘신하가 임금을 죽인 죄를 묻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스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1010년에 고려를 침략해 왔다(거란의 제2차 침입). 이에 강조는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통주로 나가 거란군과 싸워 여러 차례 승리하였다. 그러나 이후 적을 지나치게 경시하여 대비에 소홀한 나머지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다. 이때 거란 성종은 강조를 달래 자기의 신하가 될 것을 권유했으나, 강조는 끝까지 “고려 사람으로서 어찌 또 너의 신하가 되겠느냐.”라며 완강히 거절하여 마침내 죽임을 당하였다.
강조가 죽고난 후 거란군은 바로 개경을 공격하여 점령하였고, 고려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을 갔다. 그러나 거란은 아직 항복하지 않은 서북쪽의 군사력을 두려워하여 서둘러 고려와 강화협정을 체결하려고 하였다. 결국 ‘거란이 철수하면 고려 국왕이 항복한다’는 약속을 받고 거란의 성종은 군대를 퇴각시켰다. 이때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은 강화를 맺고 돌아가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크게 격파하고 포로로 끌려가던 사람들을 구하였으나, 양규는 거란과의 전투 중에 전사하였다.

제3차 침입과 귀주대첩

귀주대첩 기록화 2차 침입 때 강화의 조건이었던 ‘현종이 거란에 들어와 거란 왕을 뵙기로 한 약속’을 고려가 지키지 않고, 예전부터 요구하였던 강동 6주의 반환을 거부하자 마침내 거란 장수 소배압은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을 하였다(거란의 제3차 침입). 이에 고려에서는 강감찬을 상원수로, 대장군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거란군을 맞아 싸웠다.
강감찬은 압록강 근처 홍화진에서 쇠가죽으로 강물을 막아 적을 혼란케 하여 크게 무찔렀다. 그 후에도 거란군은 개경을 차지하기 위해 계속 공격하였으나 지형을 잘 이용한 고려군에 번번히 패하였다. 강민첨은 고려군을 이끌고 평안도 자주의 내구산에서 소배압의 거란군을 격파하였는데, 소배압은 고집스럽게 계속 진군하여 개경 백리 밖까지 다다랐다. 이때 개경에서는 김종현이 1만 명의 군대로 굳게 지키고 있었다. 백성들을 모두 성안으로 피신시키고, 곡식이나 우물 등 적군의 식량이 될 만 한 것들은 하나도 남기지 않는 전술로 거란군이 스스로 굶주림과 피로에 지치기를 기다렸다. 이처럼 고려군의 대비가 강화되자 소배압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군사를 돌려 철군을 시작하였다.
철군하는 거란군이 귀주를 빠져 나가려 할 때 강감찬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이를 공격하였다. 때마침 개경에서부터 추격해오던 고려군이 가세하고, 또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몰아와 이를 이용한 고려군은 대승을 거두었다(귀주대첩). 이 전투에서 거란군의 시체는 들을 덮었으며, 말과 무기 등 노획한 물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처음 10만이라고 칭하던 거란군 중 살아 돌아간 자는 수천인에 불과하였다. 고려는 거란과 여러 차례의 전쟁을 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강감찬 영정 거듭되는 전쟁으로 거란은 세력이 약화되어 고려와 화의를 맺고 전쟁을 중단하였다. 이때 고려의 기세에 눌린 여진 역시 말을 바치며 화친을 제의하였다. 이후 고려는 북방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개경 주위에 나성을 축조하고,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국경지방에 천리장성을 쌓아 국경 수비를 강화하였다.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격퇴한 결과 고려는 송나라와 거란 사이에서 자주적인 입장에서 국제 외교를 전개할 수 있게 되었고, 압록강 유역의 강동6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
라.관련자료

강동 6주

강동6주는 평북 해안지방에 설치한 흥화진(지금의 의주), 용주(용천), 통주(선천), 철주(철산), 귀주(귀성), 곽주(곽산) 등의 6주를 말한다. 본래 고구려의 영토로서 이후 발해의 영역에 포함되었으나 거란에 의해 발해가 멸망하고 여진족이 거주하면서 고려의 북방진출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또한 고려와 거란 사이에 영토분쟁이 일어난 지역이기도 하다. 거란의 1차 침입 때 서희가 소손녕과의 외교 담판을 통해 고려가 이 지역을 지배한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여기에 거주하던 여진족을 소탕하고 강동 6주를 설치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영역이 다시 압록강 연안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후 강동6주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달은 거란이 여러 차례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고려가 이를 끝내 거부하였다. 그러자 거란이 다시금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하였다. 이때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대가 거란군을 여러 차례 격퇴하였는데, 특히 귀주대첩은 거란의 침입을 격퇴한 가장 큰 승리였다. 이후 거란이 강동6주의 반환 요구를 철회함으로써 고려의 영토로 남게 되었다.

천리장성

고려는 건국 초부터 북쪽의 거란과 여진에 대비하여 북방의 각 요충지에 성을 쌓고 방어했으나 거란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막아내지 못하였다.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막아낸 후, 현종 때 이르러 고려는 각 지역에 있던 성들을 연결하고 새로 축조하거나 보강하여 장성을 축조하고자 하였다. 이 장성은 압록강 어귀로부터 시작하여 함경남도 동해안의 도련포까지 그 길이가 약 1000여 리에 이르며 공사를 시작한지 12년 만에 완성되었다.
천리장성에 대한 고려의 인식은 국경선의 의미 외에, 여진족 및 거란족에 대해 고려는 문화적으로 우수하여 이들과 섞여서는 안된다는 문화적 구분선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었다.

낙성대 (강감찬 사적지)

낙성대 낙성대는 귀주대첩에서 거란에 크게 승리한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집터로,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서울대 후문쪽에 위치해 있다. 장군이 태어나던 날 마침 중국 사신이 이 곳을 지나다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부하에게 별이 떨어진 곳을 찾아보라고 명령하였는데, 그 곳이 바로 현재 낙성대 터로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졌다 하여 ‘별이 떨어진 터(낙성대)’라고 이름 지었다고 한다.
강감찬은 거란의 침략을 막아내는데 큰 공을 세우고 관리로서 백성들을 다스리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훗날 마을 사람들이 강감찬이 태어난 옛터를 기념하는 의미에서 그의 생가가 있던 곳에 ‘낙성대’라는 글자를 새긴 기념비와 사리탑식의 삼층탑을 세워 놓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석탑의 대석을 비틀어 어기고, 탑의 정기를 없애기 위하여 탑의 위층을 빼어 한 층을 낮추었으며, 탑 안에 있던 보물도 모두 훔쳐갔다고 한다. 또 탑의 동쪽 구릉을 파내어 땅의 혈맥을 끊고, 탑 주위에 있던 병풍바위와 선돌바위까지도 부수어 놓았다고 한다. 근래에 탑을 보수하고 낙성대 공원을 조성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으며, 강감찬을 기리는 사당인 안국사를 세워 사당 안에 장군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인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