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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시의 나라 고조선, 중국과 요동의 패권을 다투다
가.연표
  • B.C. 2333 단군왕검, 아사달(왕검성)에 도읍하여 고조선이라 함
  • B.C. 1122 기자의 입조
  • B.C. 500 공자, 고조선에 가서 살기를 원함
  • B.C. 300 연, 고조선 침공
  • B.C. 194 위만, 고조선 침공
  • B.C. 128 한, 창해군 설치
  • B.C. 108 한의 침공으로 고조선 멸망
나.시대적 배경 한민족 최초의 고대 국가인 고조선은 단군신화에 따르면 웅녀로 대표되는 신석기문화인 집단과 환웅으로 상징되는 청동기문화인 집단의 결합에 의해 형성된 국가이다. 고조선은 건국 초기에 제사장이 정치적 군장을 겸임하는 제정일치의 국가였는데, 기록상 최초의 전쟁이라 할 기원전 300년경 연의 침공을 받을 무렵에는 이미 연맹왕국을 이루었다. 고조선인들이 인구가 증가하고 농업에 종사하면서 경제력을 축적함으로써 일정한 국력을 형성하였다. 특히 선진문물을 유입하여 철제무기와 같은 우수한 무기로 전력을 강화한 고조선은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 무렵, 중국 전국시대에 7개 강한 나라중의 하나였던 연은 만주 일대를 겨냥한 강력한 동진정책을 추진하였다. 중국의 동북지역의 패권국이 된 연은 영토확장에 자신감을 가지면서 국경지역에 인접한 이민족들을 압박하였다. 그들은 당시 60만명에 이르는 보병 중심의 전투력과 살상력이 우수한 무기체계를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북방 유목민족의 기마전술을 도입, 기병과 보병의 혼용작전을 전개하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고조선과 연이 접경한 지역은 대릉하와 요하에 이르는 요서와 요동지역 일대였다. 이 지역은 천연의 장애물인 대릉하와 의무려산 그리고 요하가 위치한 곳으로 전략적으로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고조선에게는 중국 세력을 견제할 수 있는 교두보였고, 연 역시 그들의 측후방을 위협하는 고조선을 공략하면서 요동지역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었다.
중국의 통일기에 들어와서 연이 약화되고 기원전 206년 진이 멸망한 후 한나라가 패권국으로 들어섰을 때 장기적인 흉노정벌을 단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고조선은 한나라와 선린관계를 유지했으나, 결국에 한나라는 고조선이 흉노와 군사적으로 연계할 것을 우려하여 입조를 요구하면서 침공의 빌미를 만들어냈다. 그로 인하여 점차 고조선과 한나라간의 결전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다.
다.전개 과정

연의 침공

기원전 300년경 연은 동호를 침공하여 승리한 후 대릉하와 요하를 넘어 고조선으로 쳐들어왔다. 동진정책을 전개한 연의 고조선 침공은 일단 군사적 교두보인 대릉하 일대가 접적지역이었다. 고조선은 상대적인 군사력의 열세를 천연장애물로 만회하면서 연의 예봉을 잠재우려고 했지만, 오히려 요하 유역을 상실한 채 요동반도의 주맥인 천산산맥까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조선은 내부의 안정을 도모하면서 수도가 침략세력의 영향권에 근접했으므로 안전한 후방지역인 평양으로 이전하였다. 고조선은 수세적인 방어전략으로 전환하고 요동지역을 완충지역(buffer zone)으로 삼아 양국간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철기문화를 본격적으로 흡수하면서 다시 영토의 일부를 회복하였다.
연나라가 기원전 226년 진에 의해서 패망하고, 다시 4년후에 국왕이 생포되면서 멸망하였다. 그리고 최초의 통일제국인 진에 이어서 중국대륙에 한나라가 들어서면서 흉노정벌에 대한 강경과 온건정책을 오가면서 고조선과의 관계도 미묘한 영향을 받았다.
고조선은 위만의 손자인 우거와 시대에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고조선의 판도는 서북쪽으로 요동지방의 패수(혼하)를 경계로 하여 한나라와 접경했으며, 북으로 예 지방을 압박하여 남만주지역까지 진출하였다. 또한 남쪽으로는 한강 유역의 진국과 접경했고, 동으로는 임둔을 장악하여 동해에 이르는 대국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은 흉노정벌의 연장선상에서 고조선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섭하를 시켜 우거왕에게 복속을 요구해왔다. 이에 고조선은 입조를 중지하고 주변국들이 한과 교류하는 것을 봉쇄하는 조치를 내렸다. 그러는 와중에 다시 동부도위가 살해된 사건이 일어나면서 한 무제의 고조선 침공이 현실로 다가왔다.
한군의 고조선 침공은 기원전 110년에서 기원전 109년 가을에 단행되었다. 한의 침공군은 순체가 지휘하는 육군 5만명과 누선장군 양복이 지휘하는 수로군 7천명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패수에서 도하작전을 전개하다가 고조선의 기습공격을 받고, 순체의 선발대는 궤멸되고 도하부대 역시 타격을 입어 한군의 선발부대는 주력부대의 후속작전을 견인하지 못한 채 패퇴하였다.
그후 한나라는 고조선과 일시적인 화의에 들어갔으나, 한군의 지휘권이 화전양론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순체의 주전론이 우세를 점하면서 한군은 재차 왕검성을 공격하였다. 우거왕이 총지휘하에 고조선은 용감히 투쟁하면서 한군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전선은 장기화되었고 전투는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고조선군에 지휘권이 양분되면서 조선군의 결사적인 저항도 왕검성의 함락으로 막을 내렸다.
라.관련자료

고조선의 상무정신과 국중대회

우리 민족의 상무정신은 고래로 소급되어 삼국지의『위서』 동이전(東夷傳)에 나오는 부여인으로 귀속되는데, 부여에서는 모든 성년 남자가 평화시에도 항상 유사시를 대비하여 무장하면서 활동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부여는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로 고조선인의 기상이나 고조선의 군사제도를 이어받은 나라였다. 그리고 부여가 고구려와 백제를 낳은 모국이었고, 신라 역시 고조선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였다는 점에서 결국 고조선의 기상과 제도는 면면히 민족사에 맥을 이루었던 것이다.
고조선은 단군신화에 의하면, 천제의 아들 환웅이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내려와 세운 신시에 기원을 두고 있다. 신시의 건설에는 3천명의 무리와 함께 풍백, 우사, 운사와 같은 지도자가 참여했으니, 이들은 곧 정예의 군사엘리트들이었다. 아사달에 수도를 정한 고조선은 무려 2천년 동안 존속한 것으로 긴 조명을 가진 군장사회였다. 단군영정 고조선은 사회전반에 상무정신의 기풍이 넘쳤고, 우리 민족의 군신숭배의 원류로서 치우(蚩尤)를 숭앙하는 전통이 있었다. 고조선의 역사가 남긴 상무정신의 기풍은 국중대회라는 국가적인 행사에서 잘 드러난다. 이 대회는 일종의 전국체전이었지만 군사적으로 무술대회와 같은 것이었다.
국중대회는 제천행사가 끝난 뒤에 거행되었는데, 군악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시작되는 경기종목은 매우 다양했다. 오늘날에도 그 일부가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으니, 한맹(寒盟) 수박(手搏) 검술(劍術) 궁시(弓矢) 격구(擊球) 금환(金丸) 주마(走馬) 회렵(會獵) 등 여덟가지다. 한맹은 추운 한겨울에 얼음을 깨고 물속에 뛰어들어 동군과 서군이 서로 얼음과 돌을 던져 승부를 가리는 경기로 오늘날의 수구와 같은 경기였다고 여겨진다.
수박은 맨손으로 서로 치고받는 태권도와 같았고, 검술 역시 부여의 무사나 고구려의 샌님들에 의해 이어져 내려왔다. 고구려의 샌님들이 몸에 다섯 개의 칼을 지니고 다녔다고 하는데 연개소문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궁술이나 격구는 익히 알려진 경기이고, 오늘날의 포환던지기와 같은 것이 금환이었고, 승마경기에 가까운 것이 주마였다.
이렇듯 고조선 국중대회의 경기종목은 국민들의 상무적인 기풍과 전통적인 생활양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리 민족문화를 통해서 면면히 이어져왔던 것이다. 이외에 줄다리기, 그네뛰기, 널뛰기, 자치기 등도 마찬가지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무술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고조선의 군신사상과 제천의식

단군신화에는 문화인류학적으로 풍부한 정보와 역사적인 함의가 농축되어 있다. 환웅이 태백산 아래에 신시를 세우면서 나라는 치우, 고시, 신지, 주인 등 여러 인물에 의해 군사, 농사, 문자, 혼인 등의 제도와 문물이 갖추어져갔다.
군사를 맡은 치우는 창, 칼, 활, 도끼 등의 무기를 만들어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인들에게 치우는 무서운 악마로 생각되었으며, 치우의 활동은 중국의 혼란기에 황하 이북의 땅을 차지하고 황하 이남으로 진력하여 회수에 다다랐다. 치우에 관한 기록은 『사기』와『한서』지리지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 민족에게 치우는 군신으로 숭앙하는 전통으로 마을마다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의 민속으로 계승되었다. 와당에 새겨진 치우상인 천하대장군도 마을에 침입하는 악귀를 막아준다고 믿었으나, 그 유래는 치우장군의 업적을 숭앙하는 오랜 유습에 기원을 둔 것이었다.
고조선의 유습은 태백산에서 천제를 올리고 모든 백성이 하늘에 제사를 드린 제천의식으로도 이어졌다. 환인과 환웅을 조상신으로 모시는 제단이 전국 방방곡곡에 마련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강화도 마니산에 있는 참성단이다. 그리고 단군조선의 신앙은 삼신교가 되어 우리 민족신앙으로 정착되었다. 황해도 구월산에는 삼성사가 있다. 강화도 마니산의 참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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