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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얼 한국의 빛, 독립기념관

역사와 문화, 자연이 하나되어 배우고 즐길 수 있는곳!
여기는 독립기념관 입니다.

학술

관람시간 - 매일 09:30~18:00(동절기 17:00) 월요일휴관(월요일이 공휴일 경우 정상 운영)

국내사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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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위건 집터
게시글 [학생운동] 혜화동 광주학생운동 제1차 서울학생항일시위지
운동분류 사회주의 독립운동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지동 5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주요 활동가이자 이론가였던 한위건이 1928년 전후에 살던 곳이다.
한위건(韓偉健, 1896-1937)은 함남 홍원 출신으로 서울 오성학교를 거쳐 1917년 경성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3·1운동 추진과정에 경성의전 대표로 참여해 학생단의 독립운동을 주도한 뒤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약하다 1919년 10월 신채호를 주필로 해서 창간한『신대한』의 편집에 관계하면서 임시정부와 거리를 두었다.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대학 정치경제과에 재학하며 도쿄[東京] 조선유학생학우회 평의원과 조선YMCA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24년 귀국 후『시대일보』에 잠시 관계하다가 이듬해 3월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해 1928년 3월까지 근무하였다. 1926년 제3차 조선공산당(ML당)에 참여하였고, 신간회 결성에도 관여하였다.
1928년 7월에는 제4차 조선공산당 12회 중앙집행위원회에 참석한 뒤, 일제의 검거를 피해 다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상해를 근거로 당재건운동을 지도하다가 1930년 북경으로 무대를 옮겨 이듬해 4월 중국공산당에 입당했다.
이후 이철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조선혁명의 일환으로 중국혁명에 참가하였다. 1934년에 들어서는 중국공산당 중앙의 좌경노선에 맞서 이른바‘철부노선’을 제기, 대중적 항일구국투쟁의 전개와 혁명역량의 보존을 주장하였다. 이 일로 그는 당조직과의 관계를 단절 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그 뒤 복권되어 1937년 연안에서 열린 당대표대회에 백색구역 대표로 참석하였으나, 폐결핵에 장티푸스가 겹쳐 연안 교아구 휴양소에서 41년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사진

한위건 집터 한위건 집터 한위건 관련 기사(『동아일보』, 1933년 6월 20일) 한위건 관련 기사(『동아일보』, 1933년 6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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