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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머리말 - 망명 인사의 역사저술과 고구려ㆍ발해인식
  - 고구려ㆍ발해인식의 특징 - 맺음말
 
대부분의 망명인사들은 망국의 현실론에 입각하여 고구려·발해의 구강인 만주에 대한 인식론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만주인식론은 망국, 망명, 이주, 정착에 따른 정치성을 지니고 있다. 그들에게 만주는 역사의 땅으로서 논의하는 것도 중요하나, 생존의 터전이란 절박한 현실 문제의 해결이 급선무였다. 이상룡과 유인식이 발해가 있던 만주가 망국민인 우리들이 돌아가야 할 땅이라고 여기고 망명을 결심한 배경이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국내에 거주하던 인사 가운데에도 만주를 현실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1920년대 국내의 잡지류에는 만주 거주 한인들의 생활이 주목되었는데, 농업과 농민문제에 대한 글이 주종을 이루었다. 특히 만보산 사건 이후 『동광』(東光)과 『비판』(批判) 등은 잇달아 재만 동포 문제를 다루었는데, 한용운이 만주보다 시베리아로의 집단 이주를 제안했던 것도 현실적 상황을 감안한 것으로 생각된다. 만주는 1940년대 전반기까지 동족 거주지라는 현실적 관점에서 계속적으로 주목되었다.
그러나 역시 만주를 절박한 심정에서 현실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망명, 이주자들이었다. 신채호는 망국 이전부터 만주를 정치적으로 주목하였다. 즉, 그는 만주를 객관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주시적’(主視的)으로 접근하였다. 또한 그는 만주 역사의 추세를 살피며, 만주가 장래 세계사상에 대세력을 점유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면서도 피보호의 상태로 전락한 우리가 기왕의 만주의 득실을 말하는 것은 죽은 아이의 나이를 세는 것과 같이 가통가치(可痛可恥)한 일이나, 만주로 이주한 자들은 애국 애동포의 사상을 고상케 하고, 특별히 국수보전(國粹保全)에 온 힘을 쏟을 것이며, 금수의 생활을 하지말고 정치능력을 양성할 것을 ‘삼대권계’(三大勸戒)로 강조한 것이었다.

그런데 망명지 현실조건을 반영한 만주인식론을 잘 보여주는 것은 이상룡이었다. 그가 만주를 계속성과 동질성을 지닌 대상으로 인식한 것은 여타 민족주의사가들과 별다른 차이는 없다. 반면 망명지에서 정착를 위한 경제문제, 귀화권 문제, 교육문제 등의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섭의 필요상 스스로 인식을 굴절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관내에서 중국의 직접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무장투쟁 세력들의 격정적인 필봉이 만주 부분의 서술에서 무뎌졌던 것도 같은 연유라 할 수 있다.
이같은 망명인사들의 만주인식이 국내 거주자들과 차이를 보이는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망명의 처지가 같았다고 하더라도 만주에 정착한 이상룡 등의 인사와, 박은식·신채호·계봉우처럼 곧 만주를 떠난 경우나, 망명 후 곧 귀국한 유인식·이원태의 경우는 각각 현실조건의 체감도에 따라 만주인식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망명인사들의 고구려·발해인식은 분명히 반식민사학적 성격을 지닌다. 일제 관학자들은 특히 발해에 관한 역사적 진실에 대한 이해와는 별개로 이를 역사서술로 처리하는 데에 상당한 고민을 하였다. 이마니시 류(今西龍)은 발해의 멸망 후 고려로 내부(來附)한 발해인들이 단순히 인구의 증가를 초래하는데 그친 것인지, 아니면 특종의 기예를 전한 것인지, 혹은 일종의 ‘척(尺)’이 되어 기예를 세습한 민(民)이 되었는지 불명하다고 하였다. 따라서 발해와 신라를 적대적 관계로만 설명함으로써 민족사적 동질성을 부정하고자 하였다.

 
이같은 그들의 발해에 관한 인식은 조선사의 편수과정에서도 분명히 보인다. 19233년 1월 개최된 조선사편찬위원회에서 이능화(李能和)가 시기구분에 문제를 제기하며 발해의 서술 부분에 관해 질의하자, 이나바 이와기찌(稻葉岩吉)은 신라를 서술하는 곳에서 발해와 관련된 기사도 함께 수록할 것이라고 답한 바 있다. 이후 1930년 8월 개최된 조선사편수회 제4차 위원회에서 편수범위에 대한 최남선(崔南善)과 이마니시 류의 논쟁은 발해 인식의 편차를 극명히 보여준다. 즉, 최남선은 그간 우리 민족사에서 제외되었으나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던 구체적인 예로 숙신족을 들며, 숙신족이 한민족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지적하고, 발해 또한 한민족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편수범위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이마니시 류는 고대사 편찬은 민족과 영토를 기준으로 하는 방법이 있으나, 민족을 기준으로 할 것이기 때문에 고구려의 경우 비록 영토가 한반도 밖에까지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룰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숙신은 역사학에서 취급할 것이 아니라, 인류학이나 민속학의 연구 범위에 속하며, 발해는 조선사에 관계가 없는 한 생략할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이에 최남선이 고대사 편찬의 방법은 민족과 영토 외에 문화를 본위로 하는 방법도 있다고 지적하며, 우리 민족이 인종학 상으로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니 만큼 우리의 민족과 문화를 분명히 맞히기 위해서는 동방의 여러 민족의 관계사료를 포괄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금서룡은 사료와 사설은 다르다고 하며 거절하였다.

한편 일제 식민사학의 한국사 연구를 대표하는 『조선사대계』는 발해의 건국 주체를 말갈계로 강변하면서도 「조선역대왕가계보」에서 ‘참고’라는 단서를 달아 ‘조선반도 내에서 건국된 것은 아니나 관계가 깊기 때문에 적어둔다’고 하며 발해의 왕계(王系)를 설명하였다. 또한 본서는 신라의 통일 다음에 ‘부절’(附節)이라고 하여 발해를 설명하였다. 발해를 ‘참고’ 또는 ‘부절’로 처리한 것은 역사의 진실상 서술하지 않을 수 없으나, 한민족사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의도이다.
곧 일제 관학의 발해 인식과 서술은 역사적 진실에 대한 인식과, 식민지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역사서술의 괴리를 반영하는 것이다. 즉, 그들은 식민지 통치 방책상 발해에 대한 역사적 진실과 서술을 교묘히 배합한 것으로써, 식민사학의 단면을 보여준다.

이같은 일제 식민사학의 민족사 말살에 정면으로 대응하여 망명인사들은 고구려와 발해사의 복원에 노력하였다. 한말의 역사학은 대부분 삼한정통론에 매몰되어 있었거나, 신라 중심의 서술에 치중하였다. 설령 발해를 언급한다고 하더라도 남북조인식에까지 이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대부분의 망명인사들이 다소 과도하리만큼 고구려-발해 정통론에 집착한 것은 민족사 말살에 대한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특히 유인식이 발해와 신라간 사신의 왕래를 강조한 것은 민족의 동질성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신규식은 망국의 원인을 역사가 없음에서 구하였고, 박은식이 이같은 위기의식에서 『한국통사』를 저술하였다. 또한 박은식·신채호·이상룡 등 대부분의 망명인사들이 발해의 멸망 후 발해사를 저슬하지 않은 고려의 사가들을 책망한 것도 결국은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를 잃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김정규가 사첩이 전해지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며 시정기의 형태로 일기를 정리하고 민족사를 저술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이같은 망명인사들의 위기의식과 반식민사학의 목적지향성 역사서술은 때로는 지나친 확대와 과장으로 민족사를 신비화하여 보편적 가치를 상실하게 한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민족사의 수호는 순수 학술연구 이전에 독립운동의 실행을 위한 자기정리 과정이란 사실을 전제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망명인사들의 고구려-발해 정통론은 곧 만주에 대한 수복론과 다물주의적 인식으로 귀결되었다. 가장 강렬한 수복론의 관점에서 만주를 응시한 것은 신채호였다. 그는 한민족이 한 걸음씩 전진하여 결국은 고구려 구강을 색환하고, 단군유사를 중광할 때가 또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였다. 따라서 그는 단군 이후에 아직 실현되지 않은 전체적 통일은 만주를 수복하여야만 가능하다고 여긴 것이었다. 이는 김교헌이 단군시대만 통일국으로 보고 그 이하는 남북강국으로 서술한 인식 체계와 동일한 것이다. 계봉우는 유물론 사가로서는 특이하게 다물주의를 강조하였다. 그는 고구려의 대외항쟁을 주목하며 이를 단군 구강을 다물하는 유일한 득책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고구려 건국의 방략이 다물주의에 기초하였음도 강조하였다. 따라서 발해의 건국은 고구려 구강의 광복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는 사회발전의 법칙성을 역사해석의 기준으로 삼는 유물론사학을 신봉하고 있었으나, 일제 강점이란 현실에서 민족주의적 요소와 유물론적 요소를 융합하여 고구려-발해 인식론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는 당시 국내에 있던 유물론 사가와는 명백히 구별되는 부분이다. 고구려-발해사를 서술하며 망국의 현실을 반영하는 역사용어를 사용한 것은 민족사의 연구가 곧 독립을 위한 수단이었으며, 그 인식은 수복론과 다물주의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건국을 조국의 광복과 국토의 회복으로 서술한 박은식, 발해 건국의 주체인 대조영을 광복군이라 하며 발해의 건국을 고구려 구강의 광복으로 서술한 계봉우 등은 망국의 현실적 과제인 광복과 독립이란 용어를 고구려-발해사의 경우에 적용하며 수복론과 다물주의의 현재적 과제가 일제를 극복하고 광복과 독립을 쟁취함에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일제 강점기 망명인사의 대부분은 종족과 강역의 비정을 민족사 서술을 시발로 삼았고, 큰 비중을 두고 논의하였다. 박은식의 대동민족·만한일국·만한동족론, 신채호의 단군 구강과 부여민족론, 이상룡의 중한일체론, 김교헌과 이원태의 단군족(배달족)과 남북강국를, 유인식의 배달족과 남북조론, 계봉우의 숙신=주신=조선론 등은 그러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를 통칭하여 대단군민족주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단군족(배달족) 인식은 고구려-발해를 단군의 혈통직조(血統直祖)로 이해하였고, 부여-고구려 주족설과 고구려-발해 정적설(正嫡說)로 구체화되었다. 특히 신채호는 발해는 단군 때부터 있던 이름이며, 발해의 혈통과 통어(統禦)한 인민, 거유(據有)한 영토는 고구려와 동일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비록 고구려가 멸망하였으나 멸망한 것은 단지 왕통뿐이며 백성과 영토는 무양(無恙)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왕조나 왕실의 멸망은 인정하더라도 이는 곧 동일 종족에 의한 교체이기 때문에 민족사의 멸망이 아니라는 논리인 것이다.

대단군민족주의에 의한 인식체계에서는 만주에서 흥망한 북방족의 역사를 민족사의 주류로 여기고 있다. 박은식은 ‘능칭만한’(能稱滿韓)이라 하며 여진족까지 동족으로 간주하였다. 그가 설정한 대동(大東)은 곧 만한(滿韓)의 개념이었다. 그의 『대동고대사론』(大東古代史論)·『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등의 저서와 ‘역사가’(歷史歌)에는 이러한 인식이 잘 나타나 있다. 이는 신채호가 부여족을 주족으로, 만주족을 객족으로 파악한 것과는 약간 다르나,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는 아닌 것으로 파악된다. 배달족의 범위를 가장 광범하게 설정한 것은 김교헌이었다. 그는 단국(檀國) 등 14개 왕조를 배달족으로 설정하였는데, 요와 금이 포함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교헌은 ‘국대(國代)를 한(限)치 않고 민족을 표준으로 한다’고 하여 국가사가 아니라 민족사를 기준으로 역사를 서술하였는데, 그의 사학의 영향을 받은 유인식과 이원태 또한 이에 입각한 민족사의 서술을 하였다. 따라서 김교헌과 유인식은 발해와 신라의 남북조를 거란까지 포함하는 남북 삼조로 설명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유인식은 북해도까지 강역을 외연 하였다.

이러한 인식구도에서 발해의 건국주체인 대조영을 속말말갈로 서술한 것도 당연히 ‘민족적’인 것이었다. 박은식이 대조영을 속말부 사람이라 하면서도 발해사를 고구려 말기부터 서술한 것은 대단군주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김교헌은 대조영을 고구려 속말 말갈인이라 하였고, 이원태 또한 발해는 본래 속말 말갈부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동족임을 강조하였다. 김교헌이 청조의 멸망을 배달족의 멸망이라고 하며, 이를 국명군호(國名君號)가 남북강에서 모두 끊어지는 단군 이후 초유의 대변이라고 안타까워 한 것도 이런 인식의 발로였다.

그러나 대단군민족주의에서 북방족의 역사를 민족사의 주류로서 강조하였지만, 남방족의 역사를 제외시키지는 않았다. 신채호는 부여-고구려 주족설을 내세우면서도 신라와 가락도 부여족으로 파악하였다. 이상룡 또한 북방 중심의 인식을 지녔으나, 신라·백제·가락이 삼한을 계서(系緖)하였다고 하여 남방의 역사도 인정하였다. 즉, 남·북방족의 이원적 체계로 파악하면서도 북방 중심의 인식체계를 지녔던 것이었다. 이는 곧 대동민족론·남북강(조)론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한편 망명인사들은 만주족과 조선족을 모두 배달족으로 범주화하였지만, 발해의 멸망 이후 발해인의 고려로의 귀부를 별도로 강조하였다. 물론 배달족의 체계에서 발해가 만주족으로 분화하던, 조선족으로 합류하던 굳이 변별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교현과 김정규는 발해가 멸망한 이후 대광현이 수만 호를 이끌고 고려로 합류한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는 발해가 우리 민족사의 주류에서 이탈하지 않았음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현재적 관점에서의 민족사 서술을 지향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최근 중국 학계가 이른바 동북공정의 구도 속에서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 고대 소수민족이 세운 변방사의 일부로 해석하며, 그 중요한 근거의 하나로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들의 상당수가 한족(漢族)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있음과 비교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비록 고구려가 멸망한 후 일부가 말갈로 진입하였다가 발해로 유입된 경우도 있으나, 이들은 발해 멸망 이후 다시 한족으로 융합되었기 때문에 고구려 유민으로서 한국사에 편입된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주장까지 제기하고 있다.

양론이 각기 이데올로기와 정치적 목적 지향에 경도된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문헌고증을 내세우는 일제 식민사학에서 조차 완전히 삭제해 버리지 못한 고구려와 발해사를 오늘날의 중국이 허약하고 난폭하기 짝이 없는 논리로 왜곡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가 수많은 발해 유민을 수용하고 우대한 역사적 사실은 민족적 동질성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