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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머리말 - 망명 인사의 역사저술과 고구려ㆍ발해인식
  - 고구려ㆍ발해인식의 특징 - 맺음말
 
계봉우는 1920년대 전반기에 3·1운동 전후의 민족주의사학을 상징하는 저술을 하였고, 이후 유물사관에 의해 민족사를 체계화한 인물이다. 이같은 그의 저술은 러시아지역 한인사회를 상징하는 ‘국학’으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그를 해외에서 한국사와 한국학을 개척한 인물로 평가하며, 그의 사학을 후기 문화사학으로 분류하되, 그가 저술한 통사인 『조선역사』에 대한 분석이 완료되기 전까지는 성격 규정을 유보하는 견해도 있다.

그는 북간도에서 교육에 종사하던 1912년 중등학교용으로 『조선역사』를 등사판으로 처음 간행한 이래, 이만 시(市)에서 1923년에 등사판으로 간행한 『신찬주신사』, 강제 이주당한 중앙아시아에서 1937년 원고로 정리한 『조선역사』(권1·2), 그리고 1953년 이를 재정리하고 ‘반일투쟁사’를 추가한 『조선역사』(권3) 등 일련의 역사저술을 남겼다.

이같은 그의 역사인식을 사학사에서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추후의 과제이다. 그런데 그의 『조선문학사』(1950)는 안확의 『조선문학사』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또한 그는 『조선역사』에서 일부 국내 사가들의 논문을 인용하거나 직접 그들의 사론을 따른다고 밝힌 바 있으나, 백남운 등 유물론 사가의 저술은 인지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이전의 사가들을 군주와 지배계층을 찬양한 충복이라고 하며, 인민의 존재를 알지 못한 것을 비난하였다. 따라서 단군을 수출(首出)의 군(君)으로 설명한 기존의 견해도 반박하며, 단군 이전의 인류사회의 발전과정을 고고학과 지질학의 방법을 통해 기록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역사는 인류사회의 발전 곧 경리(經理)의 변천을 기록한 것’이라는 신념으로 이른바 인민사관과 유물사관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따라서 그
 
는 단군을 신성한 민족의 시조라기보다는 토지와 인민, 무장한 충복을 거느린 소수 무사의 권력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단군이 삼천 여의 무장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왕국을 형성할만한 무력과 마술이 특별히 있던 존재임을 강조하였다.

계봉우의 시기구분은 종족과 영토의 변천을 기준으로 하였던 여타의 사가들과는 다르다. 그는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전설시대(단군)-부여시대-사국 및 남북조시대-왕씨 고려시대-이씨 조선시대 (대한) -일제통치시대로 시기구분을 하고, 각 시대별로 공구, 경제구조, 사회형태, 계급적 성분 등의 사항을 정리하였다. 이는 백남운 등 유물론 사가들의 시기구분과도 다른 형태이다. 그는 다른 민족주의 사가들처럼 의도적으로 단군을 정점에 두고 만주까지 포괄하는 민족사의 외연에 강박 되거나 계통론에 구애될 필요가 없었다. 더구나 그는 시대의 경리상 변천을 강조하였던 만큼 종족과 강역보다 북방으로부터 한반도로 민족이 이동한 경로를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같은 그의 시기구분은 유물사관에 입각한 그만의 독특한 형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숙신족은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시기별로 명칭이 다르나, 결국은 우리 말의 주신=조선이라고 주장하였다. 곧 ‘조선’이라는 이름은 ‘숙신’과 동일한 것이며 근대에 생긴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그는 북방의 조선과 남방의 진이 분열하여 사국을 형성한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는 부여가 정통 문제로 내홍이 발생하여 북부여, 동부여, 졸본부여로 나뉘었고, 진국 또한 위권(位權) 문제로 투쟁이 발생하여 마한, 진한, 변한으로 나뉘었다고 하였다. 이후 북방의 졸본천상에서 고구려가 건국하였고, 남방에서 신라, 백제, 가락이 건국하여 사국시대가 되었다는 것이다. 대개의 사가가 삼국시대로 구분한 것과 달리 그는 사국시대라는 개념을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는 가락이 제외된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때문이며, 이를 추종한 이전 사가들의 견해도 정당하지 못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는 사국시대의 성격을 ‘전국시대’ 또는 ‘노예소유시대’라고 규정하였다.

그런데 그는 삼국의 건국연대를 『삼국사기』의 편년에 준거하여 설명하였다. 이는 백남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백남운은 신라가 정치사적으로는 건국 기년이 가장 빠르나, 사회경제적으로는 고구려, 백제에 비하여 후진국이라는 인식을 지니고 있였다. 이는 역사해석에서 사회경제적 관점을 중시하는 유물론 사가들이 굳이 정치사적 의미 부여에 구애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백남운이 우리의 역사를 대단군 조선의 후계자로 인식하는 것은 유물사관의 관점에서 볼 때 일고의 가치도 없는 것이라 비판한 것도 이같은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같은 관점에서 그는 건국연대 인식과는 달리 삼국을 고구려-백제-신라의 순으로 서술하였다. 특히 그는 고구려가 다물(多勿)을 건국의 방략으로 기치를 세우고 옛 이름을 사용하여 건국하였음을 수차 강조하였다. 그는 고구려의 ‘심복(心腹)의 환(患)’인 선비족, 한족(漢族)과의 투쟁은 단군의 구강을 다물하는 유일한 득책이라 설명하며 대외항쟁을 상술하였다. 그러면서도 민족주의사가들이 칭송한 연개소문은 비판적으로 서술하였다. 이는 민족주의사가들의 역사인식과의 차이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고구려 멸망의 원인을 농민반란의 결과로 해석한 것도 여타의 사가들과 다르다. 그는 고구려 멸망원인을 남생(南生)·남건(南建)의 대립 등 집권층의 내분이나,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해석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며, 보장왕 4년 이래의 27년까지 걸친 여당전쟁(麗唐戰爭)의 결과 파산을 당한 농민 반란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고구려의 멸망에 대해 특별히 민족주의적 사론을 붙이지 않았다. 이는 백남운이 고구려멸망의 원인을 특권계급과의 모순, 노예노동의 문제 등 사회경제적 요소에서 구하고, 멸망당한 고구려의 민 호가 신라의 새로운 생산동력이 되었다고 파악한 논리와 유사한 것이다.

한편 그는 남북국 개념에 따라 발해와 통일신라를 서술하였다.
“남국은 … 신라를 가르친 것이요. 북국은 고구려가 망한 지 35년 공력(公曆) 699년에 대조영의 광복군이 오루하(奧婁河)를 거하여 써 새로 건설한 발해를 가르친 것이다. 지리상으로 보아 신라는 남방에 있는 까닭에 남국이라 하고 발해는 북방에 있는 까닭에 북국이라 하였다.”
그는 발해의 건국을 고구려 구강의 광복이라고 인식하였다. 특히 발해 건국의 주체를 ‘대조영의 광복군’이라고 표현한 것은 주목된다. 이는 일제 치하라는 현실인식이 투영된 용어의 선택이라고 여겨진다. 그런데 이같은 표현은 민족주의 사가들처럼 적극적 서술은 아니지만, 여타의 유물론 사가들과는 구별되는 것으로 보인다. 백남운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사회발전사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전환의 계기가 된 것으로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발해에 대하여는 남북국(조)시대라는 개념 설정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흥 발해국’ 정도의 서술이 고작이다 오히려 발해 멸망 후에 고려로 집단 내부한 발해인들이 신흥 고려왕조에 대단히 유리한 영향을 주었다고 하였다. 영토의 축소나 민족사의 위축에 대한 일체의 논급이 없이 사회발전이란 관점의 서술로만 그치고 만 것이다. 앞서 계봉우가 멸망 이후 고구려 民戶가 신라의 새로운 생산동력이 되었다고 해석 한 것과 동일한 논리인 것이다.

일제하 맑스주의자들의 역사인식은 공통의 법칙적 이해로부터 출발하더라도 실천적 과제와 연결될 때에는 자국사의 주체적 인식이 핵심적 과제였다. 백남운은 남다른 민족관과 민족의 주체성을 강조한 맑스주의자로 평가된다. 그러나 계봉우는 발해의 서술 등 백남운 보다 더욱 민족적 양상을 보인다. 그는 민족주의 사가들과 같이 발해의 정치 제도와 문명, 대외관계에 대하여 주목하였고, 특히 영토의 광대함과 국력의 강대함을 강조하였다. 여기에는 분명히 여타의 유물론 사가와는 구별되는 민족주의적 요소가 보다 강하게 보인다. 그러나 선왕 때 고구려의 치욕을 씻고 해동성국을 이룬 것이 가능했던 요인은 ‘효용(驍勇)과 수만의 승병(勝兵)으로써만 설명되지 않는다’고 하며 13개의 경제적 조건을 강조함으로써, 역시 그의 사학은 유물론 사학에 기초하고 있음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