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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머리말 - 망명 인사의 역사저술과 고구려ㆍ발해인식
  - 고구려ㆍ발해인식의 특징 - 맺음말
 
이원테는 안동의 혁신유림으로 1910년대 중반 대종교에 가입하였고, 평생을 대종교도로 일관한 인물이다. 그는 1916년 만주로 망명하여 김교헌을 종사하며 역사에 관심을 지니게 되었다. 1918년 귀국한 그는 『배달족강역형세도』(倍達族疆域形勢圖, 44圖)와, 이와 유사한 「채색강역형세도」(彩色疆域形勢圖, 11圖)를 저술하여 1923년에 완성하였다. 본서는 신흥무관학교의 교재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배달족강역형세도』는 우리 민족과 강역의 변천을 부려 44도나 되는 방대한 강역형세도로 그려 낸 것으로서, 한국 근대사학사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다.
 
그는 만주에 망명했던 시기에 대종교에 심취해 있었고, 특히 김교헌의 역사학에 크게 감화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가 귀국 후 강역형세도를 작성할 때에도 김교헌과 서신 연락을 통하여 조언과 감수를 구하였다. 또한 『배달족강역형세도』의 표제에도 이원태가 짓고 김교헌이 감수하였다고 되어 있다(◎坮作 茂袁籤). 따라서 그의 강역형세도에 나타난 역사인식은 김교헌의 영향을 받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배달족강역형세도』의 각 도는 1쪽의 도판과, 이를 고증한 1쪽의 비고로 구성되었다. 즉, 단순히 판도만 사생한 것이 아니라, 철저한 문헌고증을 병행한 것이었다. 각 도에는 도명과 해당하는 연기를 병기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의 연기는 단군기년을 중심으로 하되, 중국과 한국의 왕년을 표기하고 간지까지 혼용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는 김교헌의 서술방식과 동일한 형태이다. 특히 우리나라와 중국(만주)의 왕년을 병기하고 있는 것은 한반도와 만주를 민족사의 범주로 설정하고, 국가의 변천이 아니라 민족의 소장(消長)을 역사서슬의 기준으로 삼아 정리한 김교헌의 『신단민사』의 역사인식과 합치된다. 또한 전술한 유인식의 인식과 같은 것으로 대종교적 역사 인식의 특징을 보인다.

이원태는 『후한서』(後漢書)와 『해동역사』(海東繹史) 등 12권의 중국과 우리나라의 사서를 인용하여 동이구족의 범위와, 그들의 임금이 단군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사실과, 단군의 교화와 신화에 대해 설명하였다. 그리고 많은 사서를 인용하여 단군은 동명천제라고 하며 배달과 조선에 대한 어의와 단군의 후손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이는 김교헌의 『신단실기』의 「족통원류」와 『신단민사』「민족계」의 설명과 일치한다. 그는 이 부분에서 『수산집』(修山集)과 『동사』(東史)를 인용하여 단군의 후예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데 이 역시 김교헌의 영향으로 이해된다.

『배달족강역형세도』의 기본 개념은 만주와 한반도에 존재했던 모든 국가들을 배달족의 국가로 인식한 것이다. 김교헌은 이를 ‘남북강국’(南北疆國)이라 하였고, 박은식은 ‘대동민족’, ‘만한일국’, ‘만한동족’ 인식에 바탕하여 ‘대동사관’과 ‘만한사관’으로 정립하였으며, 유인식 역시 ‘대동민족’의 인식하에 ‘남북조사관’이란 독특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민족사를 구성하였던 것이다. 즉, 기씨조선·위씨조선·부여·고구려·발해·요·금·청을 북강(북조)으로, 마한·백제·가락·신라·고려·조선을 남강(남조)으로 인식한 것이다. 본서는 『신단민사』의 「남북강통일국계표」처럼 남북강 국가를 확연히 구분하지는 않았으나, 남북강국 인식을 기본으로 작성되었다. 제32도를 「신라통일남강도」라 이름한 것은 그 단적인 예이다.

그의 발해에 대한 인식은 제34도 「발해전성강역도」(渤海全盛疆域圖)의 비고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서에 이르기를 발해는 본래 말갈속말부(靺鞨粟末部)의 백성들이 고구려로 들어가 대씨로 성을 정하고 이들 대씨의 추장이 세운 나라이다. … 이 때에 고구려의 유민들이 도망하여 발해로 들어오는 자도 많았다. 최치원의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壯)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이 모여 북쪽 태백산 아래에 나라를 세우고 발해라 이름하였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속지리고(續地理考)에 이르기를 발해는 말갈의 종족이다. … ”
그는 당서와 최치원의 글을 인용하여 발해를 고구려 후손이 세운국가라 하면서도, 다시 해동역사를 인용하여 말갈의 종족이라고 상위한 설명을 부연하였다. 이는 김교헌의 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만주와 한반도를 모두 민족사로 보는 관점에서 굳이 고구려와 말갈에 대한 종족의 구분이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원태의 『배달족강역형세도』를 단순히 『신단민사』의 논조에 맞추어 작성한 지리부도 정도라고 평가하는 견해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원태가 김교헌의 조언을 받은 것은 사실이나, 복잡한 종족의 계통과 강역의 변천을 44도로 세분하여 사생해 낼 수 있는 것은 그 나름의 역사에 대한 이해와 사고가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그가 비고에서 우리나라와 중국측 사서에 정통하여 105종의 참고문헌을 270여회 제시하며 해당 강역도를 입증한데에서도 확인되며, 전술한 김교헌의 서간을 통하여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이원태가 작성한 또 하나의 「채색강역형세도」11도는 김교헌의 『신단민사』의 서술 체계와 거의 일치된다. 즉, 배달족은 상고시대를 제외하고는 분열된 상태이며, 그 외에는 모두 열국 또는 남북조로 간주한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신라의 삼국통일과 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역사는 단지 남강(남조) 왕조의 변천에 불과한 것이었다. 오히려 그는 실지인 북강(북조) 만주를 수복하는 것이 진정한 민족사의 통일로 인식하였다.

여기에서는 열국시대를 2개의 도로 제시하였다. 열국시대 제1은 선비·한예·북부여·동부여·읍루·북옥저·고구려·백제·신라를, 열국시대 제2는 거란·말갈·고구려·백제·신라가 병존했던 시기를 말한다. 그리고 남북조시대는 거란·발해·신라 등 삼국의 병존 시기를 그렸다. 이는 김교헌의 남북조 삼국론과 같은 논리이다. 그런데 김교헌이 『신단민사』에서 ‘조청시대’까지 서술하였으나, 이 강역도에서는 ‘명조시 조만강역’을 하한으로 하여 청을 제외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알 수 없다.

결국 이원태는 김교헌 사학의 영향을 받은 것은 틀림없으나, 이를 자신의 역사적 사고와 인식에 용해시켜 강역형세도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민족사를 사생하고 서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