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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머리말 - 망명 인사의 역사저술과 고구려ㆍ발해인식
  - 고구려ㆍ발해인식의 특징 - 맺음말
 
유인식은 혁신 유림으로서 을미의병 참여를 시발로 구국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사상을 전회하여 계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그는 1911년 안동 유림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다가 이듬해인 1912년에 귀국하였다.

유인식은 망국을 당하여 협동학교의 유지책을 상의하기 위해 임원회의를 연 결과, 자유정신의 교육을 위해서는 발해의 옛 땅이 우리들이 돌아갈 곳이라고 판단하고 만주로 망명할 것을 결심하였다. 이같은 사유는 만주로 망명을 결심하였던 이상룡 등 다른 민족운동가들이 지녔던 만주관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귀국한 직후부터 구국운동과 만주 망명의 경험을 바탕으로 통사인 『대동사』의 저술에 착수하여 1920년경에 완료하였다. 본서는 의병과 계몽운동, 망명과 사회운동 등을 두루 경험한 인물이 저술한 사서로서 1910년대 민족주의 사학의 추이를 알려주는 사서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비록 기왕의 여러 권의 사서가 있으나, 내용이 제각기 다르고 체재가
 
갖춰지지 못하였다고 지적하며, 역사관념이 박약해지는 젊은이들에게 조국정신을 심어주고 국수(國粹)를 발휘하게 하기 위하여 본서를 저술한 것이라고 밝혔다.

『대동사』는 3권 11책으로 구성되었는데, 권수(卷首)에 있는 「대동연혁지총도」(大東沿革地總圖)·「대동연혁국차도」(大東沿革國次圖)·「대동족총도」(大東族總圖)·「대동역대일람도」(大東歷代一覽圖) 등은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그의 역사인식을 도(圖)로써 정리한 것이다. 이는 신채호의 대조선주의와, 대종교 역사인식의 특징인 범동북아세아 중심 사관과 일백 상통한다. 또한 「범례」 17조는 『대동사』의 서술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본서의 성격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유인식은 단군을 국조로 하고 배달족을 종족으로 하는 단일 민족사를 체계화하고자 하였다. 그는 우리 민족이 단군의 자손이라는 점을 수차 강조하였으며, 단군혈통에 큰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먼저 그는 배달족을 조선족·북부여족·예맥족·옥저족·숙신족 등 5개의 지파로 나누고, 다시 이들 지파가 분파한 것으로 보았는데, 처음 분파된 조선족이 고려와 조선족으로 연계되는 도식으로 설명하였다. 이 도식에서는 선비·거란·요·금·여진·후금·말갈은 물론 일본 북해도까지를 배달족의 범주에서 논의하고 있다. 이같은 유인식의 「대동족통도」는 김교헌의 「족통원류」와 매우 흡사하며, 「단군조선기」의 단군 세기에 대한 서술 또한 김교헌의 저술과 거의 같다. 이는 유인식이 1913년경 대종교에 가입하였고, 김교헌 사학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이해가 된다. 또한 일본을 민족의 범위로 포함한 것은 이상룡의 인식 체계와 유사성을 보인다.

한편 유인식은 「대동연혁국차도」에서 북조 부여와 남조 기씨 아래에 통일 왕조인 고려로 이어지기까지 존재했던 정치 세력과 집단을 족통의 전개와 남·북의 방위에 따라 구분한 이른바 남북조사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단군 이후를 남북조로 나누되, 북조(부여)는 기씨-위씨-사군이부-고구려-발해로, 남조(기씨)는 마한-백제, 가락, 신라로 나뉘었다가 남북조가 합류하여 고려와 조선으로 통서(統緖)가 이어지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이같은 유인식의 남북조 사관은 국가사 중심의 국가사가 아니라 민족사 중심의 국가사를 서술하여 민족사의 진폭을 넓히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같은 유인식의 남북조 사관은 김교헌의 「남북강통일국계표」와 유사하다. 물론 김교헌의 남북강 사관은 열국시대란 구분과 고려와 조선까지를 남북강으로 설정한 점에서 유인식의 남북조 사관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족통의 전개를 기준으로 구분하였다는 점에서는 일치된다. 결국 그의 남북조사관은 대종교 역사인식의 영향을 받은 것은 틀림없으나, 이를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사관에 따라 변형한 독특한 구분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삼국시대를 간지·단기·신라·고구려·백제의 왕년 순으로 서술하였다. 이는 김택영(金澤榮)의 편사 체재와 같은 것으로, 서술은 『삼국사기』의 편년에 준거하였다. 이는 그가 혁신적이기는 하지만 김정규처럼 유림으로서 보수적 체질을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한편 유인식이 망명시 “우리가 돌아갈 땅은 발해 뿐”이라고 한 것은 이상룡과 같은 심경이었음을 알려준다. 그는 발해왕의 죽음을 ‘훙’(薨)이라 하여 신라와 동격으로 서술하였을 뿐만 아니라, 기년의 표기에서도 발해의 자주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신라와 발해를 남북조라 명명한 김택영의 사론을 소개하였다. 즉, 자신이 설정한 통사의 남북조개념과는 달랐지만 발해와 신라의 병립시기도 남북조시대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김창강(金滄江)의 집략(輯略)에 이르러 발해의 역사를 기록해 두고 적대시 한 것이 아니라 대우하였다. 대개 우리의 선유(先儒)들은 영토가 축소된 이래 압록의 이서를 남의 나라처럼 간주하여 우리 강토로 보지 않고 포기하였다. 대씨는 고구려의 구신으로 그 강토를 회복하고 만한양계(滿韓兩界)를 걸쳐 차지하고 또 당으로부터 수작(受爵)도 하지 않았고 … 무강하고 제도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또한 가히 동방의 성국이라 하였다. 또한 고구려는 단군의 계통을 이어 삼국시대에 종국(宗國)이라 할 수 있는데 고구려를 계승하여 흥(興)한 것이 발해인즉 폄출(貶黜)하는 것은 부당하다. … 따라서 신라와 병렬(幷列) 시기를 남북조로 나눈다고 하였다.”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고구려가 단군의 적통으로서 삼국시대에도 종국(宗國)의 위치에 있었으며,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이므로 민족사로 수용하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밖에도 그는 발해에 대한 많은 사론을 통해 발해의 강대함과 문화 발전상 등을 강조하였다. 발해의 서술에 있어서 유인식이 특히 중점을 준 것은 발해와 신라 사이에 사신이 왕래하였던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었다. 이는 발해와 신라의 민족적 일체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여겨진다. 발해의 멸망을 다룬 사론에서도 신라와 발해가 상접(相接)하고 백성들이 교고(交股)하였음에도 신라의 역사 기록에 발해와 서로 왕래한 사실이 없음에 의혹을 제기하고, 발해의 사료가 전해지지 못하고, 선유(先儒)들이 발해를 외국으로 간주하여 연구고거(硏究考據) 하지 않아 결국 인멸(湮滅)되고 만 것을 애석해하였다.

이로써 볼 때 유인식은 비록『삼국사기』의 편년에 준거하여 신라를 수위에 두고 서술하였으나, 고구려를 종국으로 인식하였고, 고구려를 발해가 계승하였다는 고구려-발해 계통론에 입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