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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머리말 - 망명 인사의 역사저술과 고구려ㆍ발해인식
  - 고구려ㆍ발해인식의 특징 - 맺음말
 
김정규는 척사유림으로서 1908년 관북의진의 참모장으로 구국운동에 참여하였고, 이듬해에 망명하여 유인석이 주도한 십삼도의진의 장의군종사(壯義軍從事)로 활동하였으며, 이후 연길에서 유학진흥과 의원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17권 18책에 달하는 장편의 『야사』(野史)는 그의 구국활동을 실증하는 시정기(時政記)로서 가치가 있으며, 여기에 수록된 『대한사』(大韓史)는 그의 역사인식을 알려준다. 그는 허사로서 자기를 꾸민 여러 기록들은 취하여 믿을 바가 아니나, 동시대인의 기록은 꾸밀 수가 없는 것이기에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며, 자신이 정리한 『야사』의 시정기적 성격과 기록의 진실성을 주장하였다.

그가 역사저술을 시작한 것은 망국 이전인 1910년 3월경이었고,『대한사』를 본격적으로 서술한 것은 1911년 5월 3일부터이다. 그는 『대한사』를 집필하기 직전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를 건네 받아 읽었다. 이 때 그는 마치 월남은 우리나라이고, 프랑스는 일본인 것처럼 느껴져 눈물을 흘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가 『대한사』를 집필한 것은 기존 사서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즉, 그는 상고시대의 세계년기(世系年紀)와 정치제도는 틀림없이 찬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사첩(史牒)이 전해지지 않아 고거(考據)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였고, 중국사서는 오류가 많고,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궐략(闕略)이 심하며 일연의 삼국유사는 승려의 저작이기 때문에 황탄궤이(荒誕詭異)한 내용이 많아 믿기 어렵다고 하였나. 결국 그는 망국을 전후한 시기에 민족사에 대한 위기의식과 기존사서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민족사의 저술에 착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역사저술의 구체적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 … 원래 우리 한인(韓人)은 남의 나라 역사를 말하기를 좋아하는 나쁜 버릇이 있어서 본국의 사승은 내버려두고 보지 않으니 이 어찌 존군애국의 뜻이라 하겠는가? 근래 회사인(會社人)이 간혹 찬술한 것이 있으나 각기 내용이 단장(斷章)되고 취지와 문의(文義)가 서로 떨어지고 끊어지니 가히 한탄하고 또 한탄할 일이다. 이에 거칠고 고루하나 널리 견문을 모아 기록함으로써 후대에 참정(參訂)하도록 하고자 한다.”
즉, 그는 기존 사서에대한 비판 위에서 자국사를 통해 존군애국의 정신을 기르기 위해 역사를 저술하였던 것이다. 한편 그는 이른바 신학과 계몽운동을 ‘배한부왜’(背韓付倭) 행위라고 질타하였다. 자국사를 통한 존군애국 정신의 강조와 계몽운동에 대한 부정적 관점은 척사유림으로서의 인식을 드러낸 것으로서, 그의 사학이 한말 사학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그는 위정척사론적 사고의 틀 속에서만 고정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각국의 종교기를 참고하여 불교, 도교, 회교, 희랍교, 야소교, 천도교, 화요교, 배화교, 파라문교 등 세계의 종교를 설명하였다. 또한 『만국사』를 참고하여 세계 주요도시의 음식과 주거, 풍속에 대하여도 매우 상세하게 기술하였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박은식 등이 그러 했던 것처럼 그도 사상전회의 양상을 보이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는 우리의 고기와 중국의 사서를 인용하여 조선이라는 국호가 언제부터 비롯되었고 어떤 의미를 지니는 가부터
 
서술하였다. 그리고 단군이 우리나라의 ‘수출지군’(首出之君)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가장 오래된 기록인 『위서』(魏書)가 『동사고기』(東史古記)나『삼국유사』에 수록된 내용과 상부하기 때문에 의심할 바 없다며 단군의 실존을 확신하였고, 단군의 이름, 수(壽), 강역의 고증에 주력하였다. 그는 단군과 기자를 설명하며 중국과 우리나라의 많은 사서를 인용하였고, 자신의 의견을 별도의 ‘안’으로 설명하였다. 이 부분에서 그는 전통시대의 사서는 물론, 한백겸·이익·정약용 등 실학자들의 견해를 수용하였고, 장지연과 현채의 견해를 많이 채용하였다. 특히 그는 현채 사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학이 한말 사학의 경향을 보이는 것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그는 마한정통론에 입각하여 민족사의 정통이 단군-기자-마한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위만은 ‘절거’(?據)라 하여 정통에서 제외시켰다. 그리고 사군이부도 설명하였으나, 후에 고구려로 흡수되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한말 사서에 보이는 역사서술의 전형적 형태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건국연대는 『삼국사기』를 따라 신라-고구려-백제 순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신라사에 비중을 두고 서술하였다. 마한정통론에 입각한 그의 사안에서는 당연한 체재였을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에 대하여는부여족의 갈래인 졸본부여에서 파생하여 건국한 것이라 하여 여타의 사가들과 같은 인식 체계를 보인다. 그러나 고구려의 멸망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하여는 ‘통합 삼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는 발해를 삼국에 앞서 서술하였다. 이는 체재의 미숙함을 보여주는 것이나, 숙신에 대한 설명에 이어 서술함으로써 연계성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문헌통고』(文獻通考)를 인용하여 숙신이 시기에 따라 읍루-물길-말갈로 호칭되었다고 하며, 본래 발해의 용친부는 숙신의 고지라고 하였다. 또한 고구려가 처음 일어난 졸본은 곧 발해의 솔빈부라고 하였고, 고구려의 판도는 후에 발해가 점유함으로써 회복된 것이라 서술하였다. 이는 발해가 숙신과 고구려의 구지에서 건국되었고, 고구려의 영토를 점유함으로써 민족사의 판도를 회복시켰다는 사실을 통해 발해가 고구려의 계승자로 인식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전술한 망명인사들의 인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따라서 발해의 건국 주체는 ‘고구려 구장’이었고, 속말말갈을 언급하기는 하였으나 결국 고구려로 귀부한 것으로 서술하였던 것이다. 또한 발해의 멸망 후에 다수의 발해인이 고려로 내부(來附)하였다고 하여 민족사의 주류로 편속됨을 서술하였다. 이 또한 전술한 인사들의 견해와 같은 것이다. 특히 그는 당서를 인용하면서도 발해의 영역을 중점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영토의 광대함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남북국 개념은 없었고, 발해의 역사를 설명하며 신라의 왕년을 기준으로 서술함으로써 신라중심적 사관을 보이고 있다.
결국 김정규는 한말 사학의 한계를 극복하지는 못하였으나, 망국 직후 척사 유림의 고구려·발해인식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