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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머리말 - 망명 인사의 역사저술과 고구려ㆍ발해인식
  - 고구려ㆍ발해인식의 특징 - 맺음말
 
일제하 만주로 망명한 인사 가운데 이상룡은 만주 인식의 모순상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망국을 당하자 선재(先齋)에 은거하며 만주 지도를 펴놓고 고심하였으며, 망명 직전인 1910년 겨울 『국사』를 초(抄)하였다. 그가 망국 직후 만주를 중심으로 한 민족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망명이라는 현실적 문제와 직결된 것이었다. 황망한 망명길에서도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와 『만주지지』(滿洲地誌)등의 서적을 구입하고, 도중의 임시 거처에서 민족사의 연구를 진행한 것 또한 역사연구에 대한 열정이라기보다는 망명이라는 절박한 현실에서 생존의 방안을 모색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상룡이 만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 것은 만주는 단성(檀聖)의 구강(舊彊)으로 비록 옷차림이나 언어가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조상은 동일 종족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예로부터 뜻을 지닌 사람이 뜻을 이루지 못하면 온 가족이 은둔(隱遁)하는 것이 또한 하나의 길이다. 하물며 만주는 우리 단성(橋聖)의 구강(舊疆)이며 항도천(恒道川)은 고구려의 국내성이며, 근지(近地)인 요동은 또 기씨(箕氏)의 봉지(封地)로서 사군이부의 역사가 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비록 옷차림이 같지 않고 언어가 서로 다르지만 그 선조는 같은 종족이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로 왕래하고 거리낌이 없었으니 어찌 남의 땅으로 보는 것이 옳겠는가. 이에 이곳으로 옮기기로 결의한 것이다.”


또한 「경학사취지서』(耕學社趣旨書)에서도 만주는 부여의 구강이기 때문에 이역이 아니며, 고구려의 유족이 발해로 모인 것이기 때문에 당시의 만주인은 동포라고 주장하였다. 즉, 만주는 과거는 물론 현재도 우리 민족사에서 계속성과 동질성을 지니는 곳이란 점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처럼 그가 국치 전후부터 만주와 고대 민족사를 주목한 것은 한민족의 주체적 역사를 찾아 광복운동의 정신적 바탕을 세우려는 의식의 발로였다. 만주를 부여이래 우리나라의 근본이자 복심으로 인식한 이상룡이 만주 중심으로 민족사를 체계화하고 강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단씨(檀氏)의 혈통은 단군-부여-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한말의 사가들에게 정형화되었던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삼한-사군이부-신라의 체계를 부정한 계통론이었다. 고구려 중심의 인식을 지닌 그는 고구려의 영토를 축소하여 서술하고 신라를 지나치게 부각시킨 기존의 역사서술을 비판 하였다. 그는 고구려의 강역을 대동강 유역으로 비정함으로써 7백년 문화대국을 일소선괴(一小仙怪)의 굴택(窟宅)으로 전락시킨 것을 개탄하였다. 또한 신라는 22대 지증왕 때부터 국호를 정하고 칭왕을 하였기 때문에 삼국의 서차(序次)는 고구려-백제-신라 순이 되어야 타당하다고 하며 『삼국사기』의 편년을 부정하였다.

이상룡은 발해가 고구려의 정적(正嫡)임에도 불구하고, 사가들이 신라만 알고 발해를 몰라서 사승(史乘)에 전혀 전해지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였다. 그는 발해의 문물제도가 찬연하고, 전세(傳世)가 2백년이나 되며, 영토가 광대한 동방 최대국이라고 하며 우리 민족사의 정통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는 분명히 만주 중심의 역사인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신라·백제·가락이 삼한을 계서(系緖)한다고 하여 남방의 역사도 인정하였다. 즉, 우리의 고대사를 북방사와 남방사의 이원적 체계로 계통화 하면서도 북방사 증심의 인식을 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가들이 단지 신라만 알고 발해를 몰라 드디어 삼천년 조국 후신(後身)을 역외(域外)의 만추(蠻酋)처럼 내팽개쳐버려 필경은 내국(內國) 사승(史乘)에 한 자도 전해지지 않으니 이 어찌 공의(公義)의 믿을 수 있는 기록이라 하겠는가? 어리석은 생각으로 홀로 고구려의 왕통은 마땅히 발해로써 정적(正嫡)을 삼고 신라와 백제와 가락은 삼한의 통서(統緖)를 이어 스스로 일파를 형성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연후에야 동국의 역사는 올바르게 귀결될 것이다.”
이는 신채호가 「독사신론」에서 제기한 계통론과 유사한 인식체계이다. 그러나 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자신의 주장이 선구적이라고 하였으며, 자신이 홀로 고구려의 왕통은 발해로 정적을 삼는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는 이미 신채호가 수립한 계통론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견해가 독창적인 것으로 판단하고 이같은 계통론을 제시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가 역사체계와 구조상 유사성을 지니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망국의 상황에서 만주를 보는 현실적 사안(史眼)이 일치하였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이같은 이상룡의 만주인식은 신채호나 박은식의 고토 수복론 인식과는 차이를 보인다. 즉, 그는 망명지에서의 경제문제와 귀화권, 교육권 획득 문제 등 중국과의 당면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현실적 접근을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상룡은 중국과 우리나라가 동족I임을 강조하는 등 지나친 중한일체(中韓一體) 인식을 보이기도 한다. 이는 그가 지닌 민족주의 역사인식과는 모순되는 것으로 지적되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화이관은 그의 본의와는 다른 대중국 교섭용의 외교적인 언사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한편 그의 중한일체론과 숙신과 왜국을 구이(九夷)에 포함시킨 논리가 일제의 일선동조론과 만선사관에 영합될 성질의 것으로써 그의 역사인식의 한계로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같은 그의 역사인식은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이론적 기반을 확립하는 수단으로서, 당시 그가 처해있던 상황을 전제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외형상 인식 구조의 유사성만 가지고 식민사학 논리와의 연관성을 속단하는 것은 유의하여야 할 것이다. 이같은 사유는 당시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인사들의 경우에서도 확인된다. 즉, 우리 민족은 단군대황조5천여년의 유구한 역사와 고급문화를 지녀왔다고 자부하고, 중국 동북지방이 우리와 가깝고 문물과 인정이 매우 흡사함을 들어 지리적 근친성과 역사적 유사성을 강조하면서도, 우리 민족사와 직결시켜 서술하지 못한 경우가 그런 예이다. 오히려 중국과 과거 수천년간 순치의 선린과 휴척관계는 일제에 대한 공동투쟁의 당위성으로 강조될 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따라서 ‘중국 동포’라고 지칭하면서도 신라이래 임진왜란까지 한중이 연합하여 왜구를 무찌른 사실을 상기시키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즉, 중국 땅에서 그들의 지원을 구하여야 하는 간절한 입장에서 민족사를 논급하는 한계를 감안하여 이해하여야 할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