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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머리말 - 망명 인사의 역사저술과 고구려ㆍ발해인식
  - 고구려ㆍ발해인식의 특징 - 맺음말
 
신채호는 일찍이 만주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명하였다. 이는 「독사신론」(讀史新論)을 통해 학술적으로 정리하기도 하였으나, 『대한매일신보』의 논설을 통해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의 만주관은 ‘한국 사천년 역사상 절부(切膚)의 관계를 유(有)한 만주이며 금일 열강 경쟁의 중심점이 된 만주’ 라는 양면성을 지닌다. 그는 자신의 만주에 대한 논의의 주지가 ‘객관적 만주에 재(在)함이 아니라 주시적 한국에 재하니라’ 고 밝혔다. 즉, 만주에 대해 단순히 과거의 역사적 규명을 위한 접근이 아니라, ‘피보호의 지옥에 타(墮)하여 신(身)은 형극에 좌(坐)하며 안(眼)은 누우(淚雨)로 엄(掩)한 한국동포’를 위한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이었다. 백암 등 여타 민족주의 사가들의 만주관이 역사의 규명에 비중을 두었고, 설령 현실적인 관점에서 논의하였다 하더라도 소극적이거나 우회적이었던 반면, 단재는 적극적이고 직설적으로 만주를 접근한 것이라 하겠다. 특히 그의 만주관은 열강의 동세에 대한 예리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 국제적 인식이 전제되고 정치성이 개재되어 있음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그의 만주에 대한 인식은 고대사 연구의 출발점이었으나, 결연한 고토 수복의 의지를 보인다. 그는 우리의 역사에서 단군부터 삼국시대까지는 북방에서 시작하여 남방으로 발전하는 시대이나, 고려 이후는 남방에서 시작하여 북방으로 발전하는 시대라 하였다. 그러면서 한민족의 장래가 ‘장차 보보(步步)히 전진하여 고구려 구강(舊疆)을 색환하며 단군유사(檀君遺史)를 중광할 시대가 우유(又有)할듯하다’고 전망하였다. 또한 그는 한민족이 만주를 차지해야 할 당위성을 민족의 생존 차원에서 논급하였다.
“ … 한국과 만주의 관계밀절(密切)이 과연 여하한가. 한민족이 만주를 득(得)하면 한민족이 강성하며, 타민족이 만주를 득하면 한민족이 열퇴(劣退)하고, 우(又)는 타민족 중에도 북방민족이 만주를 득하면 한국이 북방민족 세력권내에 입(入)하며, 동방민족이 만주를 득하면 한국이 동방민족의 세력권내에 입하니 오호라. 차(此)는 4천년 철안불역(鐵案不易)의 정례(定例)로다.

신채호의 만주에 대한 관심과 인식이 고토 회복에 있었던 만큼 고구려와 발해사의 인식은 매우 주체적이고 적극적이었다. 그는 「독사신론」에서 단군이래 발해까지의 민족사에 대한 골격을 제시하였는데, 이는 근대민족주의 역사학의 성립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동국 민족을 선비족·부여족·지나족·말갈족·여진족·토족의 6종으로 나누고, 이 중 형질상 정신상으로 다른 5종을 정복 흡수하여 동국민족 세위에 거한 자는 실로 부여족 일족에 불과하니 사천년 동국역사는 부여족 성쇠소장(盛衰消長)의 역사라 하였다. 이는 비록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근대민족국가 수립을 위한 현실의 당위적 요청에 연역된 목적의식이 뚜렷한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 사학이라 할수 있으나, 근대적 면모를 보이는 인식체계였다.

그는 단군의 정통을 이은 것은 부여이고, 이후 삼국 초기에는 이른바 부여족 대발달시대를 열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부여-고구려 주족설을 제기하면서도 ①시조설화, ②지명, ③관제의 유사함을 들어 신라와 가락도 같은 부여족으로 파악하였다.

삼국의 서술에 있어서는 한말의 사가들이 추종했던 『삼국사기』의 삼국 건국 연대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고구려가 신라보다 건국연대가 앞섰음을 논증하였다. 그리고 신라가 고구려나 백제보다 건국이 뒤짐을 부끄러이 생각한 나머지 의도적으로 연대를 삭감한 김부식과 협루(狹陋)한 필법으로 강역을 할기(割棄)하고 역사를 무독(誣瀆)한 신라사가들의 죄를 따졌다.
그는 고구려를 단군의 적통으로 파악하였다. 그는 고구려가 부여족의 주인옹(主人翁)이라고 서술하였고 특히 고구려의 대외관계사를 중시하였다. 단군과 고구려의 관계는 ‘혈통직조’ (血統直祖)라고 서술하였다. 또한 역대 성철(聖哲) 중에서도 단군의 옛 땅을 되찾고 부여족의 기초를 닦은 동명성왕의 공덕이 으뜸이라고 평가하였다.

개(盖) 시시(是時)에 해부루(解夫婁)·해모수(解慕漱)·온조(溫祚)·혁거세(赫居世)·제성철(諸聖哲)이 기수(其誰)가 아동국(我東國) 만세기업(萬世基業)을 계(啓)한 자가 아니리오마는 단 기중(其中)에 풍공성덕(?功盛德)이 최굉굉(最轟轟) 최열렬 (最烈烈)한 자는 기유(其惟) 동명성왕 고주몽인져. … 어시호(於是乎) 단군 구강이 다물(多勿)의 영(榮)을 정(呈)하며 부여민족이 불발(不拔)의 기(基)를 정(定)한지라. …

그는 삼국시대를 서술하며 고구려를 수위에 놓고 가장 많은 비중을 두어 긍정적으로 서술하였다. 실제 그의 고대사 저술은 모두 고구려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고구려의 인물들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같은 그의 고대사 인식 체계는 일제 식민사학을 배격하는 것인 동시에 중국에 대한 정치 문화적 사대주의를 극복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신라의 삼국통일은 단지 ‘반변적(半邊的)통일’에 불과한 것이라 폄하하며, ‘전체적 통일’은 단군 이후에는 다시없는 일이라고 단정하였다. 즉, 고구려가 망하여 발해가 되고 백제가 망하여 신라에 합병되었으니, 이는 삼국시대에서 양국시대로 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곧 그는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조)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동북 양국시대라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신채호는 「독사신론」에서 발해에 대한 해석의 기준을 제시하였다. 이는 이후 대부분의 민족주의사가들의 역사서술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발해는 이미 단군 때부터 있던 이름이라고 하며, 고구려가 비록 망하였으나, 대조영이 선기(旋起)하여 구강(舊疆)을 진복(盡復)하였으니 망한 것은 왕통(王統) 뿐이며 인민과 토지는 무양(無恙)한 것이라고 하였다. 곧 혈통·통어(統禦)한 인민·거유(據有)한 강토를 근거로 고구려-발해 정통론을 수립하였던 것이다.

“ … 발해 대씨의 혈통을 추(推)하면 즉 아단군의 자손이며, 기(其) 통어(統禦)한 인민을 문(問)하면 즉 아부여 종족이요, 기(其) 거유(據有)한 강토는 즉 고구려 구물(舊物)이니 대씨를 아국사에 부저(不著)하면 당하인(當何人)을 저(著)하며, 대씨를 아국사에 부저(不著)하면 당하국사(當何國史)에 저(著)하리오. … 명명(明明)한 아 단군 후예의 일영물(一英物)을 피배(彼輩) 만족중(蠻族中) 영웅(英雄)으로 병소(幷笑)하니 석재(惜哉)로다. … 당당한 고구려의 유민으로 자립한 발해국을 아동사(我東史)에 부저(不著)하고 압록 이서의 천지는 하인(何人)이 점유하든지 아가 불문한 고로 누백년래 동국인의 심중 목중(目中)에 자가강토(自家疆土)도 유차(惟此) 압록 이동 강토가 시(是)라 하며, 자가민족(自家民族)도 유차 압록 이동 민족이 시라 하며, 자가역사(自家歷史)도 유차 압록 이동 역사가 시라 하며 …”
그는 김부식이 우리 역사에서 발해를 배척하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부여 강토를 차지한 왕조를 정통으로 간주하면 고려가 윤통(閏統)이 되기 때문에, 고려에 정통을 부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삭제한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또한 그는 발해 역사가 전해지지 않은 결과 우리 국민의 영웅 숭배심이 감살(減殺)되고, 조종상전(祖宗相傳)의 강토를 망각함으로써 대국이 소국이 되고 대국민이 소국민이 되었다고 개탄하며, 이런 역사도 역사인가라고 반문하였다.
신채호는 근대 역사연구 방법으로 고구려-발해 정통론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안(史眼)은 단지 과거의 역사에만 고착된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과거사 규명과 함께 국제정세의 정치적 관점에서 고토의 수복을 민족의 생존 차원에서 모색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편찬한 관찬 사서로서 민주공화정 시기 최초의 사서로 평가되는 『한일관계사료집』도 발해를 민족사로 수용하여 서술하였다. 본서는 한일관계사를 정리하며 무왕 때 일본과의 사신왕래와, 건황왕 때 역을 전수해 준 사실을 기록함으로써 발해사를 민족사로 서술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와 관련된 인사나, 임시정부자체의 고구려·발해인식의 일단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