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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월남 이상재 선생 관련 자료기증식 및 자료공개 행사

< 자 료 기 증 식 개 요 >

o 일 시 : 2019. 8. 8. (목) 10시 30분~12시
o 장 소 : 독립기념관 도서열람실(자료부 내)
o 내 용 : 월남 이상재 선생 친필 문서류 및 사진류, 1927년 사회장 관련 문서류?사진류, 해방이후 주요 독립운동가 추도사류, 1957년 묘소 이장 관련 사진류, 한산 이씨 고문서류, 동상건립 관련 문서 및 사진류, 도서류 등 600여 점


독립기념관(관장 이준식)은 8월 8일(목)에 월남 이상재 선생 관련 자료기증식과 함께 자료공개 행사를 갖는다. 이 자료들은 월남의 후손(기증자 이상구)께서 소장하고 계시다 독립기념관에 일괄 기증하신 것으로, 친필 자료가 다수 확인되었다.

▣ 공개 예정 주요 자료


◎ 이상재 선생의 친필 문서류 및 사진류
시무서, 상소문(액자), 사직서, 다수의 논설·취지서·만사·한시·간찰 등 90여점
◎ 미국공사왕복수록(美國公私往復隨錄)의 초안 1점
◎ 황성기독교청년학교 진급증서(會立皇城基督敎靑年學校進級證書, 1906년) 1점
◎ 1927년 사회장 관련 문서·명함류·사진류 등 250여점
◎ 독립운동가 추도사
김구(金九, 1949), 명제세(明濟世, 1949), 조소앙(趙素昻, 1949), 김병로(金炳魯, 1957), 함태영(咸台永, 1957) 등


▣ 주요 자료 설명

‘영원한 청년’, ‘한국의 거인’으로 상징되는 이상재[李商在(1851~1927), 자 계호(季皓), 호 월남(月南)]는 대한제국기 개혁관료, 개화사상가, 교육자, 청년·시민운동가, 언론인 등으로 일제강점기 국내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이번에 기증된 이상재의 친필과 관련된 문서류는 전문가들의 자문을 통해 다수의 논설 초고, 시문원고, 간찰 등 다양한 필적이 모두 선생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리고 한문?국한문?순한글 등으로 기술된 논설문 초고와 문서 등은 매우 주목되는 자료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호구단자·명문·소지와 같은 집안 고문서류와 1927년 사회장 및 1957년 묘소 이전 등과 관련된 자료가 함께 기증되어 이상재 가문의 변화양상을 잘 파악할 수 있고, 독립운동가로서의 삶을 복원하는데도 큰 가치를 지닌다고 보았다.


이번 기증식에서는 선생이 사행보고서로 저술한 미국공사왕복수록(美國公私往復隨錄)의 초안으로 작성했던 것으로 보이는 문서 1점이 공개된다. 이 자료에는 고국으로 돌아오기로 예정되었던 시기로 보이는 4일간의 활동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공사인 죽천성사(竹泉星使)가 서기관 이하영(李夏榮)과 미국공사 알렌(安連)을 대동하여 미국 대통령(總統)을 알현하고 고별한 내용과 귀국을 앞두고 미국 외부와 각국 공사관 등에 명함(名帖)을 돌리며 작별인사를 하게 한 내용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상재는 서재필·윤치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연설가로서 활약하였고, 만민공동회의 유명한 사회자로 이름을 날렸다. 선생은 1898년 7월 고종에게 올바른 시무의 방안을 건의하며 사직서[사내각총무국장소(辭內閣總務局長疏)]를 제출하였으나 반려되었다. 또한 10월에는 입헌군주제 실시를 핵심으로 하는 국정개혁안인「헌의6조(獻議六條)」를 제출하여 황제의 동의를 얻기도 하였지만, 독립협회가 군주제를 철폐하고 공화제를 수립하려 한다는 보수 관료들의 모함으로 11월 4일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러한 월남의 당시 사회에 대한 인식과 개혁에 대한 의지는 「시무서(時務書)」, 「상정부서(上政府書)」,「독립문건설소(獨立門建設疏)」 등의 기증자료를 통해 그의 강렬한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다.
1899년 1월 30일 의정부 총무국장 자리에서 물러난 이상재는 독립협회에서 주장한 교육과 실업을 통한 국권수호운동을 계속하였다. 하지만 1902년 이른바 ‘개혁당 사건’으로 체포된 월남은 아들 승인을 석방시킨다는 조건으로 15년 형을 받고 한성감옥소에 수감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고 감옥에서 이승만 등과 함께 감옥학교를 운영하며 새롭게 기독교를 수용하였다.
이후 선생은 황성기독청년회(YMCA), 국민교육회, 조선교육협회 등의 단체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강연을 통한 계몽운동과 교육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기증된 자료 가운데 1910년 회립 황성기독교청년학교 1학년 과정을 마친 이선직(李宣稷)에게 조부이자 교장인 이상재 명의로 발급된 진급증서(進級證書)가 있다. 이 진급증서(1학년 수료 진급 제7호)에는 진급자(이선직)의 주소 및 생년월일(한성 북서 양덕방 계동), 수료 교과목명[대한역사(大韓歷史), 대한지지(大韓地誌), 산술(算術)], 교사명[이교승(李敎承)], 발급일자(광무 10년 6월 9일) 등의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이외에도 월남이 여러 시기에 걸쳐 직접 작성한 친필 문서류가 공개될 예정이다. 먼저 전국순회강연회나 노동야학을 실시하며 교육의 중요성을 몸소 실천한 월남의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수안군군립진명학교서(遂安郡郡立眞明學校序)’, ‘○○학교서(○○學校序)’, ‘기산학교취지서(麒山學校趣旨序)’ 등의 문서가 있다.
또한 월남이 청년들의 활동과 역할에 대해 매우 강조하며 그 중요성을 역설하기 위해 작성한 주요 논설인 ‘청년이여(靑年이여)’, ‘권고청년(勸告靑年)’, ‘문명의 해석(文明의 解釋)’, ‘청년의 자기(靑年의 自期)’, ‘축신년(祝新年)’, ‘정정단취지서(正正團 趣旨書)’ 등의 친필 문서와 ‘조선청년과 교회(朝鮮靑年과 敎會)’, 순한글로 어린이 교육 및 보이스카웃을 격려하는 문서 등도 볼 수 있다.


이와함께 우리나라 최초로 거행되었던 월남 이상재의 사회장과 관련된 다량의 문서류 및 사진류도 선보인다. 이 자료들은 당시 사회장을 총괄했던 ‘월남사회장의위원회(月南社會葬儀委員會)’에서 작성한 각종 문건과 각계·각층에서 보내온 만사·애사·조사 등의 원본, 사회장의 진행과정이 담겨져 있는 사진류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통해 전국민적인 관심과 참여로 이루어졌던 월남 선생의 사회장에 대한 역사적인 모습을 재구성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해방이후 거행되었던 추모행사에 보내진 주요 독립운동가들의 추도사·추념사 원본과 1957년 묘소 이장과 관련된 다수의 사진 자료도 이번 기증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이상재 선생의 자료는 다른 기관에 소장되어 있기도 하지만, 이번에 독립기념관에 일괄 기증된 친필 문서류 및 다수의 원본 자료들은 앞으로 그 가치를 발하게 될 것으로 전망된다. 월남의 독립에 대한 희망과 의지, 정신이 깃들어 있는 이 자료들은 앞으로 분석과 보존처리 과정 등을 거쳐 전시·교육에 활용될 예정이다. 이를 통해 격변의 시기를 온 몸으로 부딪히며 독립운동가이자 시민사회운동가로서 시대의 사표가 되었던 월남 이상재 선생의 위대하고 진정한 삶의 모습이 제대로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 이상재 연보

1850년 충남 서천군 한산면 종지리에서 부친 이희택과 모친 밀양 박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출생
1867년 과거시험에 낙방, 친지의 권유로 박정양의 문객이 됨
1881년 신사유람단 수행원으로 일본의 상황을 조사?시찰
1884년 우정총국 개설, 홍영식의 추천으로 인천 우정분국장에 임용, 갑신정변 이후 관직을 자진 사퇴하고 낙향
1887년 박정양이 초대 주미공사로 부임할 때 서기관으로 임명, 1888년까지 약 1년동안 미국에서 활동
1892년~1905년 전환국 위원, 학부아문 참의, 학부 참서관 및 법무 참서관, 관립외국어학교장, 내각 총서 및 중추원 1등 의관, 의정부 참찬 등을 역임
1896년 서재필·윤치호 등과 독립협회 조직
1897년 정부시책을 비판하는 상소문 제출
1898년 만민공동회를 개최, ‘헌의6조’를 기안하여 정부에 제출, 이 사건으로 체포 후 석방, 사직 상소 제출
1902년 반역 음모 혐의로 아들 승인과 함께 구속, 한성감옥에서 2년간 옥고, 기독교 입교
1904년 석방, 연동교회 출석, 황성기독교청년회에서 활동
1908년 YMCA 종교부 및 교육부 총무 취임
1913년 YMCA 총무 취임
1916년 윤치호 총무 부임, 명예 총무 취임
1919년 3·1운동으로 구속, 조사
1920년 조선교육협회 창설에 참여, 회장 취임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
1924년 소년척후단 초대 총재로 추대
1924년 조선일보 사장 취임
1925년 제1차 조선기자대회 개최
1925년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 초대 회장 역임
1927년 신간회 회장으로 추대
1927년 3월 29일 78세의 일기로 재동 자택에서 별세, 4월 7일 우리나라 최초 사회장으로 장례 거행
1957년 묘소를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로 이장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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