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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전시관 겨레의시련

National Crisis by Japanese Imperialism

변화 속에서 시련을 만나다

이 전시관은 1860년대부터 1940년대, 즉 개항기에서 일제강점기까지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변화의 물결이 들이닥쳤던 개항기와 근대적인 자주독립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개혁기를 지나 우리 민족의 긴역사가 일제의 침략으로 단절되고 국권을 상실한 일제강점기 당시의 시련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주변국의 역사 왜곡의 현장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1876 - 강화도 조약
1905 - 을사늑약
1907 - 대한제국 군대 강대 해산
1910 - 경술국치
1912 - 토지조사령 공포
1920 - 산미증식계획 시행
1925 - 치안유지법 시행
1931 - 만주 침략
1937 - 중일전쟁
1938 - 국가총동원법 시행
1941 - 태평양 전쟁

평면도
내부사진1
내부사진2
내부사진3
존 I - 새로움의 시대 개항기

19세기 중엽 이후 내·외부적으로 위기의식이 높아지는 가운데,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실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은 내정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정책을 추진했다. 한편 서구 열강의 침투에는 강력한 쇄국정책으로써 대응하였다. 1860년 전후 외세의 통상요구 압력이 가해지자 유생들은 ‘위정척사사상’이 등장하였고, 북학파의 중상주의사상을 토대로 서구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사회개혁을 꾀하려는 개화사상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조선은 1876년 외국과의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의 체결을 시작으로 문화를 개방하였다. 이후 조선은 ‘종주권’을 앞세우는 청국과 ‘보호국화’를 노리는 일본의 각축장이 되었다. 아관파천 이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러시아 등 열강들의 침탈이 본격화되었다.

  • 조일수호조규 朝日修好條規(강화도조약 / 1876. 2. 26)
    조선이 일본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수호조약이자 불평등조약.
    전체 12개 항목으로 이루어졌으며 치외법권과 한국의 3개 항구 개항 및 연안 측량권을 허락하고 통상장정 제정을 통한 경제 침략을 용인하는 등 일본의 이익을 보장하는 불평등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규장각 제공>
  • 육영공원 育英公院 교재
    1886년 최초의 근대적 관립 학교인 육영공원에서 사용한 영어교재.
    <정낙평 기증>
  • 갑신일록(甲申日錄)
    1884년 갑신개혁을 주도한 김옥균金玉均(1851~1894)의 일기.
    개화파의 개혁이념과 행동방략 등이 기록되었다.
    <규장각 제공>
존 II - 변화의 시대 개혁기

문화개방 이후에도 봉건적 수탈과 외세의 경제침탈에 맞서 농민들은 전국적으로 항쟁을 시작하였다. 반봉건·반외세를 기치로 내세우며 일어난 1894년 동학농민전쟁은 농민항쟁의 결정판이었다. 이 시기 정부는 갑오개혁을 단행하여 중국에 대한 사대외교를 청산하고 신분제 폐지 등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의 봉건질서를 파타하려는 근대적 변혁을 추진하였다.
삼국간섭 뒤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는 일시 세력균형을 이루었다. 이 기회를 이용해 대한제국 수립을 선언한 광무황제는 자주적 근대국민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한편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간행하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대중계몽운동을 전개하며 자주독립과 근대개혁에 앞장섰다. 독립협회는 정치적으로는 입헌군주제를 추구하고 의회를 개설하고자 하는 정치개혁을 추구했으며, 서구의 근대기술을 받아들여 상공업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전환하여 자주독립군가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 전봉준 피체 첩보
    동학농민군 지도자인 전봉준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알리는 첩보 문서.
    <고려대학교도서관 제공>
  • 독립신문 獨立新聞 창간호 (1896. 4. 7)
    독립협회가 발행한 한국 최초의 민간발행 한글신문.
    1896년(건양 원년) 4월 창간한 독립신문은 1면부터 3면까지는 한글판, 4면은 영문판으로 발간했다. 국민의 자주독립ㆍ자강개혁사상 발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재필기념재단 기증>
  • 광무황제 조서(1897. 9. 18)
    대한제국을 수립하고 연호를 광무光武로 한다는 내용.
    <김항석 기증>
존 III - 잊지 못할 시간

삼국간섭 이후 조선이 배일친러정책을 취하여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이를 우려한 일본은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대한제국 황제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일제는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고, 미국의 협력을 얻어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을 막고, ‘동양평화’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1904년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대한제국에 을사늑약을 강제하여 외교권을 박탈했으며 1906년에는 한국통감부를 설치하고 통감을 비롯한 일본인 관리들을 대거 고문으로 파견하여 내정을 간섭하였다. 또한 러·일전쟁 후에도 병력을 그대로 주둔시켜 한국민들의 국권회복운동을 탄압하였다. 이완용을 수반으로 한 친일내각을 구성하여 국권을 농단하던 일제는 극렬한 반일항쟁을 누르고 1910년 8월 마침내 한국을 병탄해 식민지로 만들었다. 일제의 강제병합은 민족의 주자번영을 가로막은 시련의 시작이었다.

  • 을사늑약 乙巳勒約 전문 (1905. 11. 17)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대한제국 내각에 강요해 늑결한 국권피탈 조약의 전문.
    이 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했다. 일본에서는 ‘제2차 일한협약’이라 칭한다.
    <규장각 제공>
존 IV - 시련과 고통의 시간

1910년 8월 29일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헌병경찰제에 의한 무단통치를 실시하여 한국인을 ‘천황의 충량한 신민’으로 양성하고자 하는 동화정책을 수행했다. 조선총독부는 인간의 기본권인 언론·집회·출판·결사의 자유를 박탈하고 독립운동가와 민족지도자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여 탄압했다. 또한 한구그이 경제체제를 자본주의 침탈에 알맞게 재편하여 한국을 이본의 원료공급지와 상품판매시장, 값싼 노동력의 공급지로 만들어갔다.
3·1운동으로 무단통치에 한계를 느낀 조선총독부는 한국민에게 이른바 ‘문화통치’할 것을 약속하고 악명 높은 헌병경찰제를 보통경찰제로 바꾸었다. 하지만 친일적인 지방 유력자를 회유·지원하고 친일단체를 조직하는 등 그 본질은 한국인을 분열시키려는 기만적인 민족분열통치였다.
1930년대 들어 대륙침략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한국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재편하고 인적·물적·수탈을 강화했다. 그들은 신사참배·일본어 상용·창씨개명· 등 폭압적인 황민화정책을 실시하여 한국인의 일상생활은 물론 정신생활까지 지배·통제했다. 또한 침략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공출이라는 명목으로 수탈했고 부족한 병력과 노동력을 보충하여 한국인을 징용·징병·일본군‘위안부’등으로 강제 동원했다.

  • 일본군 38식 소총
    러· 일전쟁 후인 1905년 개발되어 1906년부터 일본 육군에서 사용한 소총.
    ‘38식’이라는 명칭은 1905년이 일본 연호 메이지明治 38년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육군박물관 소장>
  • 공출미 供出米 강요 전단
    조선총독부 농상국에서 제작 배포한 미곡 공출을 선동하는 포스터.
    “한 알의 쌀이라도 더 많이 나라에 바쳐서 ‘귀축미영鬼畜米英’을 때려 부셔 버리자!”라고 선동하고 있다.
    <김현철 제공>
  • 내선일체 內鮮一體 비석
    일제가 ‘천황제’ 이데올로기 강요를 위해 내세운 기만적인 슬로건인 ‘내선일체’의 글씨를 새긴 비석.
    <보길초등학교 기증>
  • 징용출두명령서 (徵用出頭命令書 / 1945. 1. 10)
    「국민징용령」에 의거하여 정학상(창씨명:延天鶴相)에게 지정한 장소로 출두할 것을 명한 명령서.
    <정필완 기증>
존 V - 끝나지 않은 역사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우리 민족은 엄청난 고통과 희생을 강요당했다. 강제징용과 징병, 일본군‘위안부’로 끌려간 이름 없는 수많은 이들과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했던 독립투사들의 희생은 우리 역사의 아픈 단면이다.
일본은 ‘식민사관’에 의거하여 한국의 역사를 왜곡시키고 식민통치를 정당화하고 있으며 독도영유권을 주장하여 영토분쟁을 야기하고 있다. 한편 중국은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동북변경지방의 우리 역사 일부를 중국역사라고 주장하는 역사왜곡을 진행하고 있다. 왜곡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는 것은 가시밭길 독립운동의 길을 간 애국선열들의 희생을 값지게 승화시키는 일인 동시에 우리가 나가야 할 올바른 길을 찾는 것이다. 역사는 과거로부터 미래를 비추는 빛이며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 왜곡된 우리 역사를 바로잡고 이를 올바로 계승하는 일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의 몫이다.

  • 간도협약 間島協約 전문 (1909. 9)
    일본과 청나라 간에 맺은 간도에 관한 협약.
    일제는 만주에서 철도·광산 등 각종 이권을 보장받은 대신 두만강을 한국과 청나라의 국경으로 정하여 한국의 영토였던 간도를 중국의 영토로 인정했다. 1712년(숙종 38년)에 세워진 백두산정계비에는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으로 조선과 청나라 간의 국경을 나눈다고 새겨져 있는데, 일본이 송화강 상류의 지류인 토문강이 두만강이라고주장하는 청나라의 주장을 인정하고 간도협약을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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